<일요시사TV> CIA 비밀요원이자 성공한 기업가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의 아버지 유기연은 사업으로 자수성가 한 인물로, 일찍이 서구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로 망해가는 고국의 현실에 안타까워하던 유기연은 자식들이 장차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근처 강대국에 자식들을 유학 보내기로 한다. 장남이었던 유일한은 1904년, 당시 9세의 나이로 홀로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더 심해지며, 유기연의 사업도 큰 타격을 받는다.

결국 유일한이 미국에 간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상황서, 집에서도 유학 생활에 금전적 지원을 해줄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그 때문에 어린 나이임에 불구하도 구두 닦기, 신문 배달 등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고된 생활에도 학업을 소홀히 하지 않으며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본가로부터 ’귀국하라‘는 소식이 도착했다.


‘집안 형편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으니,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해서 함께 가족을 부양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학 진학까지 1년이 채 남지 않았던 시기였다.

고민이 깊어진 유일한은 은사를 찾아가 상담하기로 한다.

평소 유일한의 총명함과 성실함에 그를 기특히 여기던 은사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지금 당장 가족에게 필요한 돈은 내가 보증 서줄 테니 은행서 대출을 받고, 대학 입학은 1년 정도 미루고 지금은 필요한 자금을 벌어라.”

유일한은 그렇게 빌린 돈 전부를 가족에게 보낸다.

덕분에 그의 가족은 고비를 넘길 수 있었고, 유일한은 이후 1년간 디트로이트의 발전소서 일을 하며 빚을 갚아 나갔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유일한은 모든 빚을 청산하고 미시간 대학에 진학했다.

부족한 학비는 대학교 근처 철도건설에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중국 관련 물품을 팔아서 충당했으며, 학업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1919년, 그해 미시간 대학은 유일한을 가장 우수한 학생으로 선정했다.

졸업 후 사업 시작

중국 관련 물품을 팔 때 꽤 좋은 이익을 남겼던 유일한은 사업에 흥미를 느꼈다.

그가 살던 동네에는 중국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즐겨 먹는 중국 음식에 숙주가 많이 사용된다는 걸 알게 된다.

특성상 숙주는 보관 및 유통이 어려워 상인들에게는 골칫거리였다.

이에 유일한은 상대적으로 시장이 넓지만 경쟁자가 적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당시에 상하기 쉬운 포장 방법을 바꿔 유리병에 숙주를 담아 파는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를 홍보할 적절한 수단이 없었던 만큼 주문량은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일한에게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번화가 한복판서 일부러 숙주나물이 담긴 트럭을 전복시키기로 한 것이다.

트럭이 쓰러지며 숙주를 담고 있던 유리병이 깨져 사방으로 흩어졌고, 숙주나물은 도로를 뒤덮었다.


해당 사고는 뉴스에 보도됐고, 덕분에 일한의 숙주나물 사업은 미국 전역에 알려졌다.

아마 한국인 최초의 노이즈마케팅이 아니었을까?

그 일로 숙주나물 주문량은 폭증하며 사업의 규모가 커졌다.

더불어 유리병서 통조림 용기로 개선하는 데 성공한다.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주문량을 소화해내기 위해서 대량생산이 필요했고, 이는 공장을 지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자금이 부족했던 유일한은 식료품 장사를 하던 대학 동기 ‘윌레스 스미스’를 찾아가 동업을 제안한다.

1922년, 그렇게 ‘La Choy 라초이’ 식품회사가 설립된다.

스미스는 사장을 유일한은 부사장을 맡았다.

(초이: 청경채를 뜻하는 불어 겸 중국 음식을 가리키는 은어)

라초이는 훗날 숙주나물 외에도 콩나물, 간장 등 아시아 식품을 통조림으로 가공해 팔며 400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사로 성장한다.

고국 방문

1925년, 미국서 성공한 사업가가 된 유일한은 숙주나물에 사용될 좋은 녹두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고국 방문으로 들떴던 마음도 잠시, 당시 일제의 지배를 받던 한국의 암울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기생충은 들끓었고 사람들은 피부병으로 고통받고 있었으며 심지어 감기 같은 가벼운 질병에도 마땅한 약이 없어 고생하는 사람이 즐비했다.

이를 지켜본 유일한은 이내 곧 마음이 무거워졌다.

고국서의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유일한은 대학생 시절부터 알고 지낸 중국계 미국인이자 소아과 의사인 호미리 여사와 결혼식을 올렸다.

단란한 신혼 생활과 성공적인 사업확장으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삶이었지만, 그의 머릿속 한편에서는 비참한 고국의 현실이 떠나지 않았다.

그때 때마침 한국의 세브란스 병원을 설립한 에비슨 박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유일한은 지금의 연세대학교인 연희전문학교의 상과(경제학과) 교수로, 아내 호미리 여사는 세브란스병원의 소아과 과장으로 일해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운명이라 생각하면서도 고민에 잠겼다.

그리곤 떠올렸다.

한국서 많은 사람이 간단한 치료조차 받지 못했던 것을.

“그래, 한국으로 돌아가 의약품 사업을 하겠어.”

그렇게 아내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이고, 자신은 사업가의 길을 이어가겠다고 결심한다.

유한양행의 설립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위해, 유일한은 식품회사 라초이의 지분을 동업자, 스미스에게 넘긴다. 그렇게 받은 돈 25만달러. (1920년 당시 1달러는 지금의 한화 약 10만원으로 25만달러는 250억원으로 추정)

그는 25만달러로 당시 한국인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구충제, 결핵 치료제, 피부 연고 등 미국의 질 좋은 의약품을 구입한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서재필을 찾아간다.

서재필은 그에게 ‘뜨거운 여름날 사람들이 햇빛을 피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이 돼라’는 의미로 버드나무 그림을 선물했는데, 이것이 바로 유한양행의 상표가 된 버드나무 그림의 시초다.

1926년, 한국에 들어온 유일한은 종로로 향했고 그곳에서 의약품 유통회사를 설립한다.

이게 바로 유한양행이다. (유일한의 이름을 딴 ‘유한’과, 대양을 건넌다는 뜻의 ‘양행’)

그렇게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한 유일한.

그에게 첫 번째 과제가 있었다.

바로 ‘인식의 개선’이었다.

당시 국내서 사용된 의약품은 일본제품들이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게다가 제대로 된 설명조차 없어 마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팔기 일쑤였다.

유일한은 한국인들과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의원을 공략했다.

사장인 유일한이 직접 운전해가며 찾아가 서울 세브란스, 평양 기을병원, 전주 예수병원, 순천 미동병원 등을 거래처로 확보했다.

거래처를 뚫었으니, 이번엔 제품을 알릴 차례였다.

만병통치약인 양 파는 과대광고가 아닌 약의 효능과 인체 영양 작용 컬러 포스터를 게시하며 ‘믿을 수 있는 의약품 기업’의 이미지를 제고했다.

점차 유한양행의 제품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더불어 그는 미국 의약품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 의약품 개발에도 힘을 썼다.

가장 대표적인 의약품으로는 ‘안티푸라민’이 있다.

‘안티푸라민’을 개발한 이유를 살펴보면 당시 국내엔 상처와 통증을 관리하는 소염 진통 의약품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일제의 지배로 고통받고 상처 입는 국민은 점점 늘어났지만, 아픔을 달래줄 마땅한 치료제가 없었다.

그래서 유일한은 아내 호미리 여사와 함께 안티푸라민을 개발했고 국민 상비약으로 자리 잡았다.

안티푸라민은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고, 현재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유일한이 나라를 위해 기업가로서만 활동한 것은 아니다.

비밀 요원 A

1942년부터 유일한은 비밀 요원으로서 활약하기 시작한다.

1945년에는 5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상대로 한 OSS의 비밀첩보작전에 1조 조장으로 참여해 강도 높은 훈련을 모두 소화했다.

일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거점을 확보해 일본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극비로 진행된 이 작전의 이름은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였다.

이 작전은 유일한이 별세한 지 20년이 지나 기밀문서가 비밀 해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1995년에 그간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됐다.
 

과거 한 때 국내 기업들은 정부에 정치자금을 바쳐야 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한양행은 정치자금의 거부하고 오히려 그 돈으로 의약품 개발에 몰두했습니다.

이를 아니꼽게 본 정치인들은 유한양행을 상대로 보복성 감사를 진행했습니다.

감사관들은 쓰레기통의 영수증 한 장까지 철저하게 조사했습니다.

하지만 티끌만한 의혹 한 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품의 성분함량 검사에서는 제조 시 날아갈 분량을 생각해 표기보다 더 많이 첨가해 생산하고 있었는데요.

이를 두고 당시 감찰관 김만태는 “뭐 이런 기업이 다 있나?”라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네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산 유일한 회장, 그런 그가 창립한 유한양행은 20년 연속으로 한국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산업 부문 1위에 선정되며, 현재도 ‘유일한 회장의 유지’를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기획&구성&촬영 : 김미나
편집 : 김미나/임동균
일러스트 : 정두희


<emn202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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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캄보디아를 향한 정부의 압박이 매섭다. 피해자이자 피의자인 한국인 수십명을 발 빠르게 송환한 데 이어 캄보디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옥죌 계획이다. 정보·수사기관은 제일 먼저 대학생 피살 사건 핵심 인물인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리광호는 이미 캄보디아를 떠나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파악됐다. “리광호는 지난주에 이미 떴어요.” 리광호에게 대포통장을 만들어준 보이스피싱 조직원 A씨가 <일요시사>와의 연락에서 한 말이다. 리광호는 캄보디아 대학생 박모씨 피살 사건 주범으로 지목된 인물이다. 이미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 밀입국했다. 정보·수사기관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이다. “지난주에 이미 떴다” 리광호의 신상은 이미 이달 중순부터 텔레그램과 SNS 등을 통해 공개됐다. 1991년생인 리광호는 중국 길림성 훈춘시 출신이다. 키는 160㎝로 단신이며 각진 턱과 짧은 머리가 특징이다.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소학교) 졸업인 것으로 알려졌다. 캄보디아 수사당국은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중국 국적 조직원 3명을 체포했다. 앞서 박씨는 지난 7월17일 “현지 박람회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캄보디아로 출국한 뒤 연락이 두절됐다가 3주 뒤 깜폿 보코산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캄보디아 캄폿지방검찰청은 지난 10일 박씨를 살해한 혐의 등으로 이들을 재판에 넘겼으나 핵심 인물은 따로 있다. 이들 조직원 3명은 박씨의 시신을 옮길 때 현장에 있었을 뿐이었다. A씨는 “캄보디아 경찰이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리광호를 잡기 위해 지난 8월 그의 은신처를 급습했었는데 리광호가 몇 시간 전에 미리 알고 도주했다”고 말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인터폴, 경찰, 국정원 등 정보·수사기관도 캄보디아와의 공조를 통해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그는 이달 초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라오스로 넘어갈 때 캄보디아 국경을 관리하는 공무원들에게 수천만원을 줬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넘어가기 직전에 대포 통장과 핸드폰을 급하게 만들어달라고 한 이후에 연락이 끊겼다. 지금은 미얀마로 넘어갈 준비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주장했다. 수사기관 관계자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인 건 맞다”며 “현지 경찰과도 공조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리광호는 5년 전 베트남 하노이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의 중간 관리자였다고 한다. 조직 내 수익을 빼돌리려는 계획이 탄로나자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지난해 7월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출국해 자신과 친분을 쌓은 이들을 모아 시아누크빌에 자리 잡았다. 리광호와 친분을 쌓은 인물 대부분은 조선족인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리광호는 조직에서 간부급은 아니었다. 납치 담당, 고문·협박 담당 등 맡는 일이 다 다른데 리광호는 가리지 않았다. 머리가 좋지 않아서 몸으로 하는 일을 주로 했다”고 설명했다. 라오스 북부 통해 미얀마 밀입국 준비 다른 주범 김, 강남 마약 음료 총책 이어 “조직 간부인 중국인들에게 무시당할 때마다 구금된 여자를 강간하거나 남자들에게 강제로 마약을 먹이고 폭행한다. 이건 리광호만 그런 게 아니다. 그러다가 구금된 이들이 죽으면 시신을 태운다”고 주장했다. 리광호는 현재 영등포경찰서와 인천지검의 수배 대상자다. 인터폴에서도 적색수배 상태로 확인됐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중국에서도 마약 밀수 혐의로 수배에 오른 인물이다. 중국에 다시는 못 들어간다. 들어갔다가 걸리면 사형”이라고 말했다. 국내 정보·수사기관은 리광호 외에 김모씨도 추적 중이다. 김씨는 리광호와 함께 박씨 사건 주범으로 의심되는 인물이다. 특히 리광호와 김씨는 2년 전 강남 대치동에서 발생했던 마약 음료 사건의 유통책으로 확인됐다. 마약 음료 사건은 지난 2023년 이모씨 등이 필로폰과 우유를 섞어 만든 음료를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서 미성년자에게 제공하고 마시게 했던 사건이다. 당시 이씨 일당은 마약 음료 수백병을 만든 뒤 2023년 4월 대치동 학원가에서 ‘집중력 강화 음료’ 시음 행사라며 미성년자 13명에게 제공하고 실제 9명이 마시게 했다. 이후 음료를 마신 학생의 부모에게 연락해 “당신 자녀가 마약 음료를 마셨으니,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해 금품을 뜯으려고 시도했다. 불특정 다수의 미성년자를 속여 급성 중독성 마약을 투약하고 부모까지 노린 신종 보이스피싱 범죄라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을 불렀다. 중국에 있던 주범 이씨는 사건 발생 50여일 만인 2023년 5월 중국 지린성 내 은신처에서 중국 공안에 검거돼 강제로 송환됐다. 대법원은 지난 4월 이씨에게 징역 2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마약 음료 제조자 길모씨는 징역 18년, 마약 공급책 박모씨는 징역 7년이 확정됐다. 진짜 두목 따로 있다 당시 필로폰을 공급한 중국 국적 총책은 검거돼 캄보디아 법원에서 26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리광호와 김씨는 수사를 통해 추적해 왔던 인물이다. 필로폰 4kg 이상을 밀반입하는 걸 주도했고 그걸 이씨와 박씨가 국내에 뿌렸던 사건으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리광호가 속한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웹사이트 중 일부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구축한다는 게 <일요시사>와 접촉한 이들의 설명이다. 또 다른 조직원 B씨는 “전부 다 북한 애들이 하진 않는다. 허술한 웹사이트는 북한 전문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한국인 범죄자들은 피싱으로 중국 조직에 1억원의 수익을 안겨주면 수수료로 7~10%의 수고비를 받는다. 북한과 조선족은 더욱 싸다. 3~5% 정도면 굉장히 열심히 한다”며 “중국 조직 입장에서는 한국인들보단 북한이나 조선족을 동원하는 경우를 선호한다”고 했다. 최근 정부는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을 단장으로 정부 합동 대응팀을 캄보디아에 파견했는데 여기에는 경찰청, 국정원 등이 참여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캄보디아 스캠 범죄를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국정원에 “발본색원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조직의 사활을 걸고 확실하게 해결해 국민 걱정을 덜어드려라”는 특별지시를 내렸을 정도로 정보기관 내부에서는 리광호와 김씨와 같은 조직원들 추적에 사활을 건 분위기다. 국정원은 캄보디아 스캠 범죄조직은 중국 등 다국적 범죄조직이 캄보디아로 침투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프놈펜, 시아누크빌을 비롯해 총 50여곳에 약 20만명의 조직원이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들 조직들의 범죄수익은 2023년 기준 125억 달러(약 18조원)로 캄보디아의 국내 총 GDP의 절반 수준에 달했다. 다국적 범죄조직 이들 조직은 과거 카지노 자금 세탁 등을 했던 조직으로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국경이 폐쇄되면서 캄보디아로 침투해 스캠 범죄로 범죄를 변경했다. 이들 조직은 자체적으로 무장경비원까지 배치하고 있다. 비정부 무장단체가 장악한 지역이나 경제특구 등 캄보디아의 다양한 지역에 분포돼있어서 캄보디아 정부도 단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정원은 한국인들의 현지 방문 인원과 스캠 단지(웬치) 인근 한식당 이용 현황 등을 통해 스캠 단지에 있는 한국인 범죄 가담자를 1000~2000명가량으로 추산했다. 국정원은 이들에 대해 “100%는 아니지만, 피해자라기보다는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자금을 관리하는 배후로는 프린스그룹과 후이원이라는 현지 기업이 언급된다. 이 두 기업은 웬치에서 감금, 사기 행각을 벌이거나 북한 해킹 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는 등 전방위 범죄를 저지르며 천문학적 수익을 벌어들였다. 프린스그룹은 캄보디아 최대 범죄 거점으로 지목된 ‘태자 단지’를 운영하는 등 조직적 인신매매와 불법 감금, 사기 등의 배후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도 불법 도박이나 성매매 등으로 범죄 자금을 벌어들였다. 베트남 국경 지역에 있는 진베이 단지는 중국 9개 성의 법원에서 심리된 83건의 형사사건에 연루된 상황이다. 천즈 프린스그룹 회장이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훈 센 전 총리 등 캄보디아 고위층과 긴밀한 유착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천즈는 수많은 논란에도 훈 센 전 총리 정권에 막대한 자금을 바치며 캄보디아의 최고위층 귀족 칭호인 ‘옥냐’를 캄보디아 국왕으로부터 수여받았다. 국내 은행사가 이들의 범죄 자금을 유통·세탁하는 데 이용됐을 우려도 나온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국민은행·전북은행·우리은행·신한은행·IM뱅크 등 국내 금융사의 캄보디아 현지 법인 5곳은 프린스그룹과 총 52건의 거래를 진행했다. 거래액은 1970억4500만원에 달한다. 아직 900억원이 넘는 자금이 여전히 현지에 남아 있다. 보이스피싱·스캠 조직 웹사이트 서버 북한이? 국정원·정보사 해외 파트·대북팀 동원해 추적 후이원은 범죄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며 회사의 규모를 키웠다. 후이원은 ‘캄보디아의 알리페이’라고 불리는 후이원페이를 가지고 있는 금융, 결제, 정보기술(IT) 서비스 복합 기업이다. 이들은 자사의 기술력을 활용해 국제 해킹 조직이 사이버 사기, 랜섬웨어 등으로 얻은 범죄수익을 세탁해 왔다. 후이원페이는 훈 센 전 총리의 조카인 훈 토가 주요 주주로 등록된 회사이기도 하다. 정보기관에 따르면 이 기업은 북한 정찰총국 산하 해킹 그룹 ‘라자루스’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후이원은 공개·비공개 텔레그램 등 채팅방을 이용해 사기 조직과 자금 세탁범을 연결하고 범죄수익을 해외로 유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2021년 이후 700억~890억 달러 규모의 가상화폐 거래를 중개했고 일부는 라자루스로 흘러 들어갔다. A씨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피싱·스캠 관련 웹사이트를 제작하기 시작한 건 4~5년 전부터”라며 “북한이 제작한 사이트의 경우 퀄리티가 상당하다. 그 대가로 후이원이 스테이블코인을 만들어 북한 쪽에 수익을 전달하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해외 파트인 해외정보국과 대북 업무 담당자 상당수는 이미 캄보디아를 포함한 동남아 곳곳에서 관련 첩보를 입수 중이다. 국정원은 1차장이 해외 파트, 2차장이 대북·대공 업무를 담당한다. 2차장은 특히 북한 정보수집·분석 등 국정원의 대북 분야 실무를 총괄하는 자리다. 이외에도 국군정보사령부 동남아팀 휴민트(HUMINT·인간정보)들도 현지서 국정원과 정보를 공유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정보사 출신 한 군 고위 관계자는 “캄보디아 수도권에 대남공작원들이 많긴 하지만 웬치에 북한 대사관 관계자나 공작원들이 있진 않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단지 대가를 받고 캄보디아 범죄조직 사이트를 만들어주거나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세탁해 주는 게 북한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배후? 북한 연루설 다른 정보기관 관계자도 “국정원을 비롯한 정보사가 이번 캄보디아 사건에서 할 수 있는 건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으로 인해 우리 국민이 피해를 본 금액이 얼마나 많은지와 북한에도 그 금액이 흘러 들어갔는지, 북한과 관련된 인물들이 얼마나 있는지 등이다. 캄보디아에서의 대남 관련자들은 절대로 개인적으로 특정 행위를 하지 않는다. 예시로 캄보디아 무역 또는 사업가, 식당을 운영하는 인물 등이 대남공작원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