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TV> CIA 비밀요원이자 성공한 기업가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의 아버지 유기연은 사업으로 자수성가 한 인물로, 일찍이 서구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로 망해가는 고국의 현실에 안타까워하던 유기연은 자식들이 장차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근처 강대국에 자식들을 유학 보내기로 한다. 장남이었던 유일한은 1904년, 당시 9세의 나이로 홀로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더 심해지며, 유기연의 사업도 큰 타격을 받는다.

결국 유일한이 미국에 간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상황서, 집에서도 유학 생활에 금전적 지원을 해줄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그 때문에 어린 나이임에 불구하도 구두 닦기, 신문 배달 등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고된 생활에도 학업을 소홀히 하지 않으며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본가로부터 ’귀국하라‘는 소식이 도착했다.


‘집안 형편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으니,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해서 함께 가족을 부양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학 진학까지 1년이 채 남지 않았던 시기였다.

고민이 깊어진 유일한은 은사를 찾아가 상담하기로 한다.

평소 유일한의 총명함과 성실함에 그를 기특히 여기던 은사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지금 당장 가족에게 필요한 돈은 내가 보증 서줄 테니 은행서 대출을 받고, 대학 입학은 1년 정도 미루고 지금은 필요한 자금을 벌어라.”

유일한은 그렇게 빌린 돈 전부를 가족에게 보낸다.

덕분에 그의 가족은 고비를 넘길 수 있었고, 유일한은 이후 1년간 디트로이트의 발전소서 일을 하며 빚을 갚아 나갔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유일한은 모든 빚을 청산하고 미시간 대학에 진학했다.

부족한 학비는 대학교 근처 철도건설에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중국 관련 물품을 팔아서 충당했으며, 학업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1919년, 그해 미시간 대학은 유일한을 가장 우수한 학생으로 선정했다.

졸업 후 사업 시작

중국 관련 물품을 팔 때 꽤 좋은 이익을 남겼던 유일한은 사업에 흥미를 느꼈다.

그가 살던 동네에는 중국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즐겨 먹는 중국 음식에 숙주가 많이 사용된다는 걸 알게 된다.

특성상 숙주는 보관 및 유통이 어려워 상인들에게는 골칫거리였다.

이에 유일한은 상대적으로 시장이 넓지만 경쟁자가 적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당시에 상하기 쉬운 포장 방법을 바꿔 유리병에 숙주를 담아 파는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를 홍보할 적절한 수단이 없었던 만큼 주문량은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일한에게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번화가 한복판서 일부러 숙주나물이 담긴 트럭을 전복시키기로 한 것이다.

트럭이 쓰러지며 숙주를 담고 있던 유리병이 깨져 사방으로 흩어졌고, 숙주나물은 도로를 뒤덮었다.


해당 사고는 뉴스에 보도됐고, 덕분에 일한의 숙주나물 사업은 미국 전역에 알려졌다.

아마 한국인 최초의 노이즈마케팅이 아니었을까?

그 일로 숙주나물 주문량은 폭증하며 사업의 규모가 커졌다.

더불어 유리병서 통조림 용기로 개선하는 데 성공한다.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주문량을 소화해내기 위해서 대량생산이 필요했고, 이는 공장을 지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자금이 부족했던 유일한은 식료품 장사를 하던 대학 동기 ‘윌레스 스미스’를 찾아가 동업을 제안한다.

1922년, 그렇게 ‘La Choy 라초이’ 식품회사가 설립된다.

스미스는 사장을 유일한은 부사장을 맡았다.

(초이: 청경채를 뜻하는 불어 겸 중국 음식을 가리키는 은어)

라초이는 훗날 숙주나물 외에도 콩나물, 간장 등 아시아 식품을 통조림으로 가공해 팔며 400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사로 성장한다.

고국 방문

1925년, 미국서 성공한 사업가가 된 유일한은 숙주나물에 사용될 좋은 녹두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고국 방문으로 들떴던 마음도 잠시, 당시 일제의 지배를 받던 한국의 암울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기생충은 들끓었고 사람들은 피부병으로 고통받고 있었으며 심지어 감기 같은 가벼운 질병에도 마땅한 약이 없어 고생하는 사람이 즐비했다.

이를 지켜본 유일한은 이내 곧 마음이 무거워졌다.

고국서의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유일한은 대학생 시절부터 알고 지낸 중국계 미국인이자 소아과 의사인 호미리 여사와 결혼식을 올렸다.

단란한 신혼 생활과 성공적인 사업확장으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삶이었지만, 그의 머릿속 한편에서는 비참한 고국의 현실이 떠나지 않았다.

그때 때마침 한국의 세브란스 병원을 설립한 에비슨 박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유일한은 지금의 연세대학교인 연희전문학교의 상과(경제학과) 교수로, 아내 호미리 여사는 세브란스병원의 소아과 과장으로 일해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운명이라 생각하면서도 고민에 잠겼다.

그리곤 떠올렸다.

한국서 많은 사람이 간단한 치료조차 받지 못했던 것을.

“그래, 한국으로 돌아가 의약품 사업을 하겠어.”

그렇게 아내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이고, 자신은 사업가의 길을 이어가겠다고 결심한다.

유한양행의 설립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위해, 유일한은 식품회사 라초이의 지분을 동업자, 스미스에게 넘긴다. 그렇게 받은 돈 25만달러. (1920년 당시 1달러는 지금의 한화 약 10만원으로 25만달러는 250억원으로 추정)

그는 25만달러로 당시 한국인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구충제, 결핵 치료제, 피부 연고 등 미국의 질 좋은 의약품을 구입한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서재필을 찾아간다.

서재필은 그에게 ‘뜨거운 여름날 사람들이 햇빛을 피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이 돼라’는 의미로 버드나무 그림을 선물했는데, 이것이 바로 유한양행의 상표가 된 버드나무 그림의 시초다.

1926년, 한국에 들어온 유일한은 종로로 향했고 그곳에서 의약품 유통회사를 설립한다.

이게 바로 유한양행이다. (유일한의 이름을 딴 ‘유한’과, 대양을 건넌다는 뜻의 ‘양행’)

그렇게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한 유일한.

그에게 첫 번째 과제가 있었다.

바로 ‘인식의 개선’이었다.

당시 국내서 사용된 의약품은 일본제품들이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게다가 제대로 된 설명조차 없어 마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팔기 일쑤였다.

유일한은 한국인들과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의원을 공략했다.

사장인 유일한이 직접 운전해가며 찾아가 서울 세브란스, 평양 기을병원, 전주 예수병원, 순천 미동병원 등을 거래처로 확보했다.

거래처를 뚫었으니, 이번엔 제품을 알릴 차례였다.

만병통치약인 양 파는 과대광고가 아닌 약의 효능과 인체 영양 작용 컬러 포스터를 게시하며 ‘믿을 수 있는 의약품 기업’의 이미지를 제고했다.

점차 유한양행의 제품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더불어 그는 미국 의약품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 의약품 개발에도 힘을 썼다.

가장 대표적인 의약품으로는 ‘안티푸라민’이 있다.

‘안티푸라민’을 개발한 이유를 살펴보면 당시 국내엔 상처와 통증을 관리하는 소염 진통 의약품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일제의 지배로 고통받고 상처 입는 국민은 점점 늘어났지만, 아픔을 달래줄 마땅한 치료제가 없었다.

그래서 유일한은 아내 호미리 여사와 함께 안티푸라민을 개발했고 국민 상비약으로 자리 잡았다.

안티푸라민은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고, 현재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유일한이 나라를 위해 기업가로서만 활동한 것은 아니다.

비밀 요원 A

1942년부터 유일한은 비밀 요원으로서 활약하기 시작한다.

1945년에는 5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상대로 한 OSS의 비밀첩보작전에 1조 조장으로 참여해 강도 높은 훈련을 모두 소화했다.

일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거점을 확보해 일본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극비로 진행된 이 작전의 이름은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였다.

이 작전은 유일한이 별세한 지 20년이 지나 기밀문서가 비밀 해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1995년에 그간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됐다.
 

과거 한 때 국내 기업들은 정부에 정치자금을 바쳐야 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한양행은 정치자금의 거부하고 오히려 그 돈으로 의약품 개발에 몰두했습니다.

이를 아니꼽게 본 정치인들은 유한양행을 상대로 보복성 감사를 진행했습니다.

감사관들은 쓰레기통의 영수증 한 장까지 철저하게 조사했습니다.

하지만 티끌만한 의혹 한 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품의 성분함량 검사에서는 제조 시 날아갈 분량을 생각해 표기보다 더 많이 첨가해 생산하고 있었는데요.

이를 두고 당시 감찰관 김만태는 “뭐 이런 기업이 다 있나?”라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네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산 유일한 회장, 그런 그가 창립한 유한양행은 20년 연속으로 한국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산업 부문 1위에 선정되며, 현재도 ‘유일한 회장의 유지’를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기획&구성&촬영 : 김미나
편집 : 김미나/임동균
일러스트 : 정두희


<emn202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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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까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 초,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가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