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지하차도 조성 사업 재검토 필요성 대두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의 일상화

[일요시사 취재2팀] 김해웅 기자 = 영동대로 복합개발 내 지하차도 설치, 동부간선도로 지하화, 경부간선도로 지하화 등 대규모 지하차도 조성 사업이 줄을 잇고 있는 가운데 도로의 지하화가 재난 대응 측면서 취약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지하차도는 교통 체증, 소음/분진, 지역 단절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침수, 화재 등 사고 발생 시 대형 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전향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집중호우로 인한 지하차도, 지하 주차장, 반지하주택 등 지하공간 내 인명사고가 연례 행사처럼 반복되면서 기존 방재 대책으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정부 및 지자체는 기후변화를 염두에 두고 지하차도 조성 사업 등과 관련해 설계 지침 및 방재 기준 등을 강화하고 있는 추세지만, 예측 범위를 크게 벗어난 기상 이변 탓에 현재의 재난관리 체계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지하차도 설치를 원점서 재검토하는 등 시민들의 우려를 근본적으로 불식시킬 수 있는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극한 호우’ 등 기후위기의 시대…재난사고로 사회적 불안감 확산 


기후 변화로 기존 장맛비와는 다른 기록적인 폭우 현상이 잦아지고 있다. 지난 7월 27일 기상청은 올해 장마가 '누적 강수량 역대 3위', 일평균 강수량 역대 1위 등 역대급 기록을 남긴 채 종료됐다고 밝혔다. 

장마 기간 중 강수 일수는 21.2일로 평년과 비슷했지만, 누적 강수량은 648.7mm로 1973년 관측 이래 역대 3위를 기록했고, 일평균 강수량으로 따지면 30.6mm로 역대 가장 많은 비가 내린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기상청은 올해 7월 서울 동작구에 내린 폭우에 대해 ‘극한 호우’ 긴급재난문자를 처음 발송했다. 지난해 중부지방에 내린 집중 호우를 계기로 ‘1시간당 50mm, 3시간당 90mm 이상’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할 경우, 기상청이 행정안전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재난문자를 발송할 수 있도록 관련 법규가 개정된 바 있다.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극한 호우 기준에 부합하는 비는 2013년 48건서 2021년 76건, 2022년 108건으로 연평균 8.5%씩 늘고 있다. 

집중호우 등 이상 기후 탓에 예측 범위를 벗어난 재난 사고 급증 추세 
전문 연구기관 등에서 미래 한반도 내 국지적/집중적 호우 증가 전망  

전문 연구기관 등은 국내서의 집중호우 현상이 갈수록 심화된다고 공통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기상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 50년간 시간당 50mm 이상 강수일수는 1973년부터 1982년까지 연평균 2.4일이었다가 2012년부터 2021년까지 6.0일로 늘었다. 

국립기상과학원이 발표한 ‘2022 남한상세 기후변화 전망보고서’는 현재 수준과 유사하게 온실가스 배출을 지속하는 시나리오인 고탄소 시나리오(SSP5-8.5)의 경우, 21세기 전반기(2020~2040년), 중반기(2041~2060년), 후반기(2081~2100년)의 1일 최대 강수량은 현재와 비교해 각각 14%, 28%, 36% 증가하고, 상위 1% 극한 강수일수도 각각 0.2일, 0.3일, 0.6일 증가하는 것으로 전망했다. 


반면, 온실가스를 현저히 감축해 2050년경 탄소중립에 이르는 시나리오는 저탄소 시나리오(SSP1-2.6)라고 부른다.

올해 3월 한국환경연구원이 발표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적응 및 감축 중장기 연구 방향’ 보고서는 더욱 구체적인 전망을 내놨다.

고탄소 시나리오(SSP5-8.5) 시, 연중 1일 최대 강수량이 근미래(2020~2049)에는 146.2mm로 평년(1979~2014년) 대비 8.5% 증가하고, 중미래(2050~2079)에는 165.9mm로 23.2% 증가, 원미래(2080~2099)에는 182.9mm로 36.1% 증가하는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서울 지역은 연중 1일 최대 강수량을 근미래 166mm, 중미래 184mm, 원미래 198mm 수준으로 예상했다. 

이 같은 전망 속에 침수로 인한 인명사고는 해마다 끊이지 않고 있다. 올해만해도 청주 궁평2지하차도서 14명이 숨졌으며, 지난해에는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포항 인덕동의 아파트 단지 지하 주차장서 주민 7명이 목숨을 잃었다. 

같은 해 8월엔 서울 신림동 다세대주택 반지하 세대서 일가족 3명이 쏟아져 들어오는 물살을 피하지 못하고 변을 당했다. 2020년에는 부산 초량동과 대전 판암동 지하차도가 침수돼 총 4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4년에는 부산 온천동 우장춘로에서 침수 참사가 발생해 2명이 생을 마감했다. 

특히 지하차도의 경우 교통체증을 완화하고 도시경관을 해지지 않는 등의 장점이 부각되며 교통량이 많은 대도시권에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하차도 침수 피해 역시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2019년 감사원의 ‘대도시권 지하차도 안전관리 실태 점검’ 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4건, 2015년 3건이었던 지하차도 침수사고 발생 건수가 2016년 8건, 2017년 24건, 2018년 10건(1~7월 기준)으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21년 국민권익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전국의 지하차도는 925개, 2022년 서울시 도로시설물 통계에 의하면 서울시 지하차도는 총 164개, 총 연장 54km, 총면적 88만 3411㎡에 달한다. 

예정된 지하차도 조성 사업 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높아져 

14명의 목숨을 앗아간 궁평2지하차도 참사를 계기로 영동대로 복합개발 내 지하차도, 동부간선도로 지하화, 경부간선도로 지하화 등 현재 계획된 대규모 지하차도 조성 사업의 안전 대책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시절에 기본 계획이 수립된 영동대로 지하공간 복합개발 사업은 영동대로 지하에 GTX 등 대중교통 복합환승센터와 상업시설 등을 조성하고, 지상을 녹지광장으로 변모시키는 사업이다. 


침수 등의 안전 이슈가 불거진 것은 지상광장을 만들기 위해 480m 길이의 대형 지하차도 설치가 예정돼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도심광장의 효용성, 도시경관 등을 고려한 최선의 계획임을 강조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재난 대응 측면서 도로의 지하화 등에 대한 부정적 의견 확산 중 
교통난 해소 등 장점 불구하고 침수, 화재 등 재난 사고 취약 구조

이곳은 최근 감사원도 강화된 설계기준으로 사전 침수 대책 등을 수립하도록 권고한 바있는 것처럼 주변보다 지대가 낮아 침수 위험성이 상존한 지역으로 꼽힌다. 

또한 지하차도가 완공되면, 시간당 최대 6000여대의 차량이 통과하고, 교통 이용객이 하루 6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돼 침수 등 재난 발생 시 대형 참사로 번질 위험이 매우 높다. 

2028년 개통을 목표로 올해 하반기 착공을 앞두고 있는 동부간선도로 지하화 사업도 주목받고 있다. 동부간선도로는 이번에 참사가 발생한 궁평2지하차도처럼 하천변인 중랑천 인근에 위치해 있다. 

중량천변은 대표적인 상습 침수 지역 중 하나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집중호우로 중량천 수위가 상승하자 동부간선도로 양방향 전 구간이 전면 통제되기도 했다. 


경부고속도로 지하화 사업 중 하나인 경부간선도로의 지하화도 추진 중이다. 양재~반포 구간(6.9km)에 중심도 지하도로를 설치하고 지상에 도로와 공원 등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경부고속도로는 국내 최대 통행량을 보이는 만큼 침수, 화재, 교통사고 등에 대한 철저한 방재 대책이 요구된다. 

이 밖에 경인고속도로, 경기도의 자유로, 서울의 테헤란로, 언주로, 도곡로 등도 연구용역을 진행하거나, 예비 타당성 조사를 시작하는 등 지하화 계획이 검토되고 있다. 

과거 데이터 기반 안전 대책 한계…지하차도 건설 등에 대해 전향적 접근 필요 

정부 및 지자체는 현재 추진 중인 지하차도 조성 사업 등은 철저한 타당성 조사, 설계기준 강화 등의 안전 대책을 마련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극단적인 기상 현상이 뉴노멀이 된 상황서 빈도 개념 등 과거 데이터에 기반한 홍수, 호우 등으로부터 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지역별로 설정, 공표한 강우량인 방재성능목표 및 설계기준 상향 등의 대책이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영동대로 지하공간 복합개발(시간당 120mm), 동부간선도로 지하화(시간당 114mm) 등은 ‘200년 설계빈도’가 적용됐다. 설계빈도란 일정 기간 동안 가장 많은 비가 내린 날의 강수량을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으로 말한다. 

100~110mm/h 강우 등 과거 데이터에 기반한 방재 대책 실효성 의문 
2022년 동작구 141.5mm/h, 강남구 116mm/h 등 폭우 사례 빈번
지하차도 조성 등 도시계획 시 ‘효율’보다 ‘안전’ 중시하는 전향적 접근 필요 

하지만 과거 기록상 200년 빈도에 해당하는 폭우도 근래에는 1년 빈도일 수 있다. 예외가 일상이 된 상황에서는 과거에 통용되던 기준 자체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2022년 8월 서울 동작구에는 기상관측 이래 최대의 폭우인 500년 빈도에 해당하는 시간당 141.5㎜의 비가 내렸고, 강남구에는 영동대로 지하공간 복합개발 사업의 200년 설계빈도에 육박하는 시간당 116㎜의 비가 내렸다. 

2022년 10년 만에 상향 조정된 서울시의 현재 방재성능 목표는 침수 취약 지역인 강남역 일대가 시간당 최대 110mm, 그 외 지역은 100mm 수준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지하차도 조성 사업에 대한 원점 재검토 등 전향적 접근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개발 욕구는 다양하고 공간은 부족한 과밀 상황서 지하차도 건설은 필연적으로 보이지만, 위험 요인을 간과한 무분별한 개발은 큰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지하차도 내 사고는 지상에 비해 큰 규모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고, 침수뿐 아니라 화재, 지진, 폭발사고, 테러 등 여러 재난 사고에 근본적으로 취약한 구조기 때문이다. 

교통 및 재난안전 분야의 한 전문가는 “침수 등으로 인한 재난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은 기후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지금까지 ‘효율’이라는 측면서 지하공간 활용을 검토해왔다면, 이제부터는 ‘안전’ 중시 관점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haewoo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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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