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대로’ 이권 카르텔과의 전쟁 막전막후

입맛 따라 눈엣가시만 제거?

[일요시사 정치팀] 차철우 기자 = 잘못된 부분은 분명 바로잡아야 한다. 일부의 잘못을 전체로 확대해 몰아가는 행위는 잘못됐다. 윤석열정부가 ‘카르텔 타파’를 국정운영의 방향으로 잡으면서 많은 조직 전체가 점점 카르텔이 돼가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과거 몸담았던 조직만은 나쁜 집단에서 빠졌다. 이러다가 후폭풍마저 불어닥칠 태세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무회의서 “이권 카르텔, 부패 카르텔에 관한 보조금을 전부 폐지하고, 그 재원으로 수해 복구와 피해 보전에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해당 발언을 두고 일각에선 수해 복구를 정치와 엮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야권은 물론 여권 내부서도 우려 목소리가 나왔다. 

누굴 위한 
집단 몰이?

윤 대통령이 지목한 이권 카르텔은 비리와 불법이 드러난 노동계, 민간단체, 문재인정부서 추진된 태양광 관련 사업 등을 일컫는 것으로 여겨진다. 통상 카르텔이라는 용어는 동일 업종 기업이 경쟁 제한 혹은 완화를 목적으로 가격, 생산량, 판로 등에 대해 협정을 맺고 형성하는 독점 형태를 뜻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불법적인 행태를 일삼는 집단끼리의 결탁으로 여겨져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2년 전, 윤 대통령은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소수 이권 카르텔을 타파하겠다고 공언했다. 당시 윤 대통령이 발언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금방이라도 이들과 전쟁마저 불사할 태세였다. 정권과 이해관계로 얽힌 소수 이권 카르텔이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고, 책임의식, 윤리의식이 마비된 먹이사슬을 구축하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같은 해 11월 국민의힘 대선후보 수락 연설서도 카르텔 언급은 다시 등장했다. 이들을 혁파하고, 정권교체를 이뤄내겠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이권 카르텔을 뿌리뽑기 위해 대선에 나섰다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다만 이권 카르텔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윤정부가 언급한 카르텔 세력은 윤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 자주 표적이 돼왔다. 지난해 2월, 대선 전국 유세 현장서도 자주 등장했다.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자, 발언 수위는 한껏 더 올라갔다. 충북 청주시 성안길 유세길서 그는 “카르텔 기득권 세력을 박살내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카르텔이라는 단어는 끊임없이 언급됐다. 지난해 9월에도 문정부의 태양광 비리가 적발되자 다시 카르텔을 띄웠다. 

같은 해 12월부터는 노조와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이들을 카르텔로 규정해버렸다. 민노총 화물연대의 집단 운송거부 사태서 강경 대응한 뒤 화물연대가 백기를 들고서다. 

수해 복구 정치적으로 엮어버려
어떻게 하겠다는 이유 빠져있어

화물연대에 이어 건설노조도 카르텔로 내몰렸다. 물론 일각에선 노동계의 악질적인 행태는 처벌이 필요한 측면이 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를 악의 축으로 매도하는 행위는 잘못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건설노조는 건폭(건설 폭력배)으로 몰렸으며, 결국 한 건설 노동자는 분신까지 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 6월 말, 경찰은 200일이 넘는 기간 동안 건폭 특별단속서 총 1484명을 검찰에 송치했고, 이 중 132명은 구속했다. 최다 단속 사례는 전임비와 월례비 등 금품갈취 혐의였다. 문제는 대법원 판례상 월례비는 불법이 아니라는 점이다. 

월례비, 전임비에 이어 윤정부는 회계장부까지 들여다보고 있다. 노조의 비리나 횡령 문제는 비단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닌 이야기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부가 개입하는 순간 문제가 커질 수도 있다. 


윤정부의 카르텔은 문정부의 적폐와 비슷한 의미로 통용되는 듯하다. 당시의 적폐 세력은 검찰이었는데, 정치권서도 무리한 적폐 퇴치로 다른 현안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왔던 바 있다. 

윤 대통령의 3대 개혁 중 언급된 이권 카르텔은 세트 격이다. 정치에 참여한 지 2년이 흐른 현재에도 이들 세력과 전면전을 벌이겠다며 줄곧 강조해오고 있는 사안이다. 현재까지 윤정부서 카르텔로 못 박은 곳은 노동계, 민간단체, 사교육계, 태양광 사업, 5대 은행, 3개 이동통신사 등이다.

점점 다양한 계층 및 기업들이 카르텔 집단으로 낙인찍혀가고 있다. 지난달 말에는 새로 인선된 차관들과의 자리서 현 정부는 반 카르텔 정부라며 맞서 싸우라고도 주문했다. 이번 수해 피해 복구 지원대책으로도 윤 대통령은 이권 카르텔의 보조금을 주겠다며 정치와 엮기도 했다.

이런 탓에 여의도에까지 옮겨가 정치적인 이슈로까지 번진 상황이다. 앞서 윤정부는 노조에 이어 민간단체에 지급된 국고보조금 1조1000억원 중 314억원이 부정 사용된 것을 확인했다며 부정행위가 적발된 단체를 형사고발 혹은 수사 의뢰했다.

정부는 민간단체 보조금 예산은 5000억원 이상 줄이겠다는 방침이다. 

전 정권
발라내기?

결국 정치 이슈로까지 불거지는 모양새다. 더불어민주당은 “국가 예산은 쌈짓돈이 아니다”라며 윤 대통령을 공격했다. 특히 정청래 최고위원은 “백번 양보해 부패·이권 카르텔을 털어 나온 돈이 있다고 해도 수재민은 하루가 급하다. 어느 세월에 피해 복구를 한단 말이냐?”며 윤 대통령의 발언이 부적절했다는 취지로 말했다. 

실제로 수재민 예산은 즉시 지급돼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조금 회수는 즉시 이뤄지기가 어렵다. 사실상 결정이 정확히 난 시점부터 환수할 수 있다. 

국민의힘 내부서도 하나 둘 우려 목소리가 나왔다. 유승민 전 의원은 “염치가 있다면 수많은 생명을 잃은 참사에 카르텔을 들먹이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지적했다. 

노동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류기섭 한국노총 사무총장은 “한노총이 보조금을 받는 부분은 이미 대부분 탈락했다”며 읍소했다. 보조금 선정에 탈락된 재원은 노동 상담 제공 서비스 부문이다. 

역대 정부들도 노조에 강경한 자세를 취했지만, 윤정부는 이전 정부보다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모습을 자주 보인다. 노조를 때릴수록 윤정부의 지지율은 오르는 현상을 보이는데, 적어도 정치적인 이익이 있다는 뜻이다. 

이뿐만 아니다. 사교육계 역시 수능 킬러 문항과 관련돼 또 다른 카르텔로 규정됐다. 현재 대형 입시학원 등이 세무조사 대상이 됐고, 사정기관은 사교육계를 전방위 압박에 나섰다. 단순 킬러 문항부터 시작해 교육 카르텔로 확전되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논리가 허술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문제의 시작은 지난 6월 전국 수능 모의평가였다. 당시 윤 대통령은 이주호 교육부 장관에게 학교 수업서 배우지 않은 내용은 수능 출제 문제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 같은 발언은 수능을 5개월 남긴 시기에  말 그대로 교육계를 혼란에 빠뜨려놓기 충분했다.

일단 지르고
보자는 식?

윤 대통령의 주문이 나오자마자 교육부 대입담당국장은 경질됐는데, 교육계에선 이 사태에 대해 이례적으로 보고 있다. 대통령실은 교육 당국과 사교육이 결탁해 카르텔을 형성했다는 주장을 펼친다. 교육 당국이 수능을 어렵게 낸 탓에 고액의 사교육이 횡행하게 됐다는 것이다. 교육 당국도 킬러 문항을 배제할 경우 사교육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는 논리를 내놨다.

문제는 최근 총리실서 보안자료인 수능 출제·검토위원 관련 자료까지 가져갔다는 점이다. 사교육과 카르텔 관련성을 확인하기 위해 수능 출제 인력풀 자료까지 입수한 것이다. 정부가 이들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해서다.

함께 지목된 것은 사교육 강사의 고수입이다. 본격적인 세무조사가 시작되면서 사실상 이들 강사가 카르텔의 한 축으로 지목된 셈이다. 

앞선 일련의 사태들을 살펴보면 윤정부는 불법을 저지른 몇몇을 전체가 그렇다는 것처럼 확대해 매도하려는 경향이 짙어 보인다. 책임 역시 카르텔로 분류된 곳이 무한으로 짊어지도록 만든다. 정부가 나서 대화와 타협을 하기보다는 수사와 환수로 압박하는 식이다. 


이번 수해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적 책임을 즉시 시민단체로 돌렸다. 오송 터널 참사가 발생했을 때 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있었다. 대통령실서 나온 메시지는 “대통령이 서울로 뛰어간다고 해도 집중호우 상황을 크게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같은 말이라도 정치적인 수사를 내놔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 대통령실의 입장과 발언은 대통령의 공식 창구로 늘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공감, 위로, 책임 대신 하고 싶은 말만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자리에 없던 와중에 이슈를 돌릴 대상이 필요했던 모양새다. 

노조, 교육계 등 전체 매도  
이후에 후폭풍 올까 우려돼

이권 카르텔 발언 이후 여전히 규모, 방식 등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논의할 것인지도 모호하다. 노조, 민간단체에 지원하던 보조금은 추계되지도 않고 법적 근거도 없는 돈이다. 대통령실이 내놓는 메시지들은 여전히 단편적일 뿐이다. 

윤재옥 원내대표는 “올해 예산 중 아낄 수 있는 부분을 아껴 재해 복구와 지원에 사용하자는 것”이라며 또다시 해명에 진땀을 빼야 했다. 윤 원내대표는 “내년·내후년 예산을 확정할 때 방만하게 집행됐던 정치 보조금을 폐지해 복구와 재난 안전 시스템 업그레이드에 쓰겠다는 뜻”이라면서도 “오히려 민주당이 수해로 정쟁을 부추기고 있다. 새롭게 편성되는 예산을 감안한 원론적 발언”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이 같은 국민의힘의 해명이 시원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시민단체 등에 지원되던 정부보조금과 이번 수해와 무슨 상관이 있냐는 지적이다. 또 카르텔 중 법조 카르텔은 빠져 있다는 비판도 나오는 가운데, 선택적 카르텔 몰이를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법조 카르텔은 윤정부서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는 키워드다. 현재 검찰 수사에 따르면 대장동 수사가 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향하고 있지만, 고위 판·검사, 변호사 출신도 다수 연루돼있다. 이들 명단은 일찌감치 공개됐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수사는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박영수 전 특검의 압수수색은 뒤늦게 이뤄졌고, 구속영장이 청구됐지만 기각됐다. 최근 불거졌던 로톡 이용 변호사 징계 사태도 마찬가지다. 

앞서 로톡은 헌법재판소서 승소했고, 공정거래위원회도 로톡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변호사협회는 달랐다.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이들 변호사를 징계 처리했다. 

법조계 패스
이러다 역풍

윤 대통령은 여전히 법조 카르텔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있다. 전관예우, 특정 기업을 수사하던 검사가 퇴직한 뒤 해당 기업을 변호하는 로펌, 법률 고문으로 이동하는 사례가 논란이 됐던 바 있다.

정치권서 제기하는 카르텔을 빙자한 자기 조직 지키기라는 비난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한 정치권 관계자는 “전체를 매도해버리면 반드시 역풍을 맞을 것”이라며 “이러다가 국민 전체를 카르텔로 몰아갈 판”이라고 말했다. 

<ckcjfdo@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정부 연구개발 예산도 줄인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권 카르텔 타파’를 카드를 꺼내들자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25개 정부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이 내년 정부 출연금 중 주요 사업 예산의 20% 삭감안이 제출된 상태다. 

뒤이어 각 정부 부처와 한국연구재단 등의 공공 R&D 과제 예산도 감축되는 분위기다.

앞서 윤 대통령은 “나눠 먹기, 갈라 먹기 R&D는 제로 베이스(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며 강하게 말했다. 현재 연구 현장에서는 불만의 목소리자 점점 커지고 있다. 

과학기술계가 이권 카르텔이 있다고 하는 게 R&D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는 입장을 내놨다. 업계에서도 연구자 간 양극화가 심화된다는 등의 우려가 나온다. <차>

<기사 속 기사> ‘쏙 빠진’ 금융권 회전문 인사

윤석열 대통령이 이권 카르텔을 언급하자 시선이 금융권에게도 쏠린다.

이와 관련해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2023년 반부패 청렴 워크숍서 카르텔을 언급한 바 있다. 

이 원장은 “이권 카르텔이 문제가 되는 만큼 복무 자세를 더욱 가다듬어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감독과 검사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정작 금융 관료와 감독당국의 회전문 인사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현재 관료 출신 인사들은 금융권에서 자리만 바꿔가며 직을 이어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상황이다.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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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