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세태> 범죄 온상 ‘비대면 앱’ 뭐길래…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6.12 15:24:23
  • 호수 14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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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불을 켜고…나쁜 놈들 드글드글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비대면 앱은 한정적인 인간관계를 넘어 온라인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현재는 장점이 단점으로 변했다. 살인·성폭력 범죄자가 피해자를 물색하게 위한 방법으로 비대면 앱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래 20대 여성을 살해한 후 시신을 유기한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 정유정은 지난달 26일 오후 5시40분 부산 금정구에 있는 피해자 집에서 흉기로 피해자를 살해했다. 지난 6일 부산경찰청과 금정경찰서에 따르면 가해자 정유정은 지난달 27일 새벽 긴급 체포된 이후 계속 범행을 부인했다. 

정유정
사건은?

이후 5일간 거짓 진술을 하다가 경찰의 증거 제시와 가족의 설득 등으로 5일 만에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정유정이 범행 대상을 찾으려고 사용한 것은 과외 앱이다. 과외 앱은 학생이나 학부모 거주지 근처에 살고 있는 과외 선생님을 찾아 연계해준다. 학생들은 특정 부분 학습 보충을 원할 때 과외 앱을 활용한다.

과외 앱은 과외 선생님의 전공과 자격증, 이전 경력 등을 고려해 학생에게 선생님을 제공한다. 학생은 출신 학교와 성별, 과외 가격 등 여러 사항을 고려해 과외 선생님을 선택할 수 있으며, 원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할 수도 있다.

또 학생은 과외 선생님의 수시 합격 사례, 생활기록부, 자기소개서 검색과 열람이 자유롭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과외 앱을 사용하는 과외 선생님은 모두 본인 인증 과정을 거치게 되지만, 학생이나 학부모는 신원 확인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결국 선생님은 개인 정보가 노출돼 범죄에 노출된다. 


여기서 정유정은 피해자로 명문대생을 지목했다. 전문가들은 정유정이 201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5년간 별다른 직업이 없었으며, 평소 사회적 유대관계가 없었던 것을 지목해, 그가 피해자의 신분과 정체성을 훔치려 했다고 분석했다. 

피해자는 혼자 사는 여자였고, 정유정은 피해자 물건인 휴대전화, 주민등록증을 챙겼다. 이런 점을 볼 때 정유정이 검거되지 않았으면 피해자 행세를 하며 살았을 것이란 추측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과외 앱을 삭제했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누리꾼들은 “과외는 집에서 하는 게 대부분인데, 신원도 알 수 없고, 거짓 신원으로 등록할 수 있지 않냐” “원래는 과외 앱을 편하게 사용했는데, 이제는 해당 앱으로 과외 못 시키겠다” “원한이 있어서 살인한 것도 아니고, 세상이 너무 흉흉하다” 등의 반응이 나온다.

살인·성폭행·사기…먹잇감 물색
‘무서워서’ 서둘러 지우는 사용자

비단 과외 앱만의 문제는 아니다. 모든 비대면 만남 앱에서 사건·사고가 발생한다. 피해자는 나이·신분을 망라하고, 이는 가해자도 마찬가지다.

데이팅 앱은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매매의 온상지다. 20대 남성은 2020년 7월 채팅 앱을 통해 10대 여성에게 접근했다. 20대 남성은 당시 자신의 나이를 19세라고 속였다.


이후 10대 여성에게 같이 게임 방송을 보자며 자신의 집으로 불러 여러 차례 성폭행했다. 이 남성은 다른 10대 피해자를 상대로도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 아동·청소년 성폭행 피해자가 가해자를 알게 된 것은 주로 인터넷을 통해서다.

가해자들은 랜덤채팅 앱과 같은 ▲채팅 앱 44.7% ▲메신저 21.0% ▲SNS 18.9% ▲온라인 게임 8.2% 등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접근했다.

이는 2021년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질러 유죄판결이 확정돼 신상정보 등록 처분을 받은 범죄자 2671명(피해자 3503명)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다.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가해자의 75.6%는 성인이었다. 범죄 유형별로는 강제추행(35.5%)이 가장 많았고, 강간(21.1%), 성착취물 범죄(제작·유포·판매·소지·시청 등 15.9%) 순이었다.

채팅 앱을 통해 알게 된 중학생을 자신의 차량으로 유인해 성폭행하려 한 남성이 전과 5범이었던 것으로 드러난 적도 있다. 경기 평택경찰서는 최근 강간미수 혐의로 40대 남성 A씨를 긴급 체포했다.

A씨는 지난 1월3일 오후 9시쯤 평택시 동삭동 한 노상에 주차된 자신의 차량서 중학생 B양을 성폭행하려 했다. B양이 채팅 앱에 “담배를 사달라”는 글을 올리자, A씨가 “담배를 대신 사주겠다”며 B양에게 접근한 것이다.

이후 A씨는 자신의 차량으로 B양을 유인해 목을 조르는 등 위협을 가해 성폭행하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 B양은 A씨에게 도망친 뒤 직접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인근 CCTV를 분석해 A씨 차량번호를 특정했고, 다음 날 오전 1시40분 서울 강동구 A씨의 집 인근서 그를 긴급 체포했다.

위험천만
랜덤채팅

체포 당시 A씨는 전자발찌를 착용하고 있지 않았지만, 미성년자 의제강간 등 전과 5범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역 육군 장교가 채팅 앱을 통해 청소년 100여명을 성착취한 경우도 있었다. 지난해 12월1일 강원경찰청 군인범죄전담수사대에 따르면 강원지역 육군 모 사단 중위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미성년자의제강간 등 혐의로 구속됐다.

중위는 2019년부터 지난해 초까지 채팅 앱을 통해 접근한 청소년 100여명을 상대로 신체 노출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했고, 이를 전송받는 방식으로 성 착취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는다. 수법은 계획적이었다. 채팅 앱을 통해 만난 피해자들과 심리적 유대관계를 형성했고, 성적으로 착취하는 수법을 이용했다. 

또 피해자들이 사진을 보내주면 그 대가로 돈을 주고, 점점 노출 수위가 높은 사진과 영상을 요구해 협박했다. 심지어 일부 피해자와는 실제로 만남을 가졌고, 성폭행까지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해당 사건은 피해자의 신고로 알려졌다. 이후 군사경찰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은 군인범죄전담수사대는 수사 결과, 피해자가 100여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점점 좁혀오는 수사망에 중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개인용 클라우드 계정을 삭제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압수된 중위의 휴대전화와 컴퓨터 외장하드 등에서 2시간 분량의 성 착취 동영상 1000여개를 발견했다.

비대면 앱으로 사기를 당하는 일도 허다하다. 이런 경우는 가짜 프로필을 내걸고 채팅 앱에서 사기를 친다. 

지난달 31일 경기 수원남부경찰서는 사기 혐의로 C씨를 구속 송치했다. 채팅 앱에서 30대 여성을 속여 약 2억원을 뜯어낸 혐의다. C씨는 지난해 4월7일부터 18일까지 만남 채팅 앱을 통해 알게 된 30대 여성에게 53차례에 걸쳐 1억9900만원가량을 갈취한 혐의를 받는다. 

남의 사진을
가짜 프로필

당시 C씨는 인터넷에 떠도는 남의 사진을 가져와 자신인 것처럼 ‘가짜 프로필’을 등록해 여성에게 접근했다. 환심을 산 C씨는 “운영 중인 업체 직원이 보이스피싱 피해를 당해 돈을 탕진했다” “병원비가 필요한데 나중에 모두 갚겠다” 등의 핑계를 대며 돈을 요구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힘든 상황에 처해 있던 여성은 자신의 사정에 공감해준 C씨에게 호감을 느꼈고 결국 12일간 대출을 받거나 주변에 돈을 빌려 C씨가 안내한 계좌로 돈을 보냈다. 


C씨의 범행은 여성의 가족이 경찰에 신고하며 드러났다. 돈이 부족해진 여성이 가족에게 돈을 빌리려 하자 범죄임을 의심해 경찰서에 신고한 것이다. 경찰은 C씨 신원을 지난해 특정했으나 소재 파악에 어려움을 겪던 중 올해 그의 병원 치료 내역을 확인하고 지난달 8일 인천 지역의 한 병원서 검거했다.

조사 결과 C씨는 앱 프로필과는 다르게 무직이었고 재산도 없었다. 또 과거 동종 범죄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C씨는 여성에게 받은 돈 모두를 도박 자금으로 탕진했다고 진술했다. 

이런 사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광주 모텔 청테이프 살인 사건’ 뒤엔 일면식 없는 불특정 다수와 만남을 알선하는 SNS 채팅 앱이 발단이 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은 2018년 12월4일 광주의 한 모텔서 50대 여성이 청테이프로 양손이 결박당한 채 숨진 것이 발견되면서 드러났다.

광주 북부경찰서에 따르면 전날 오후 9시10분 광주 북구 유동의 한 모텔서 50대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발견 당시 50대 여성의 시신은 손과 얼굴 등이 청테이프로 감싸져 있었고, 옷가지가 벗겨진 상태였다. 50대 여성의 가족은 여성과 연락이 닿지 않자 실종 신고를 했고 경찰이 수색 끝에 발견했다.

심리적 유대관계 형성
착한 척 접근해 범행

50대 여성은 앞서 동생에게 일을 하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광주로 향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전날 오전 6시50분에 해당 모텔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50대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 객실을 빌린 남성을 유력 용의자로 봤다.

해당 사건의 이면에는 SNS 채팅 앱이 있었다. 당시 50대 여성이 묵을 모텔 객실을 빌린 남성은 SNS 채팅으로 만난 사이였다. 가해자는 지난 3일 오전 6시 SNS 채팅을 통해 출장 마사지사인 피해자 50대 여성과 연락이 닿았다. 가해자는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전남 장성에 있던 피해자에게 “15만원을 줄 테니 마사지를 해달라”며 광주로 올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가해자의 목적은 마사지가 아니었다. 자신의 성 욕구를 풀어줄 대상을 찾고 있었던 것. 이 같은 사실을 몰랐던 50대 여성은 가해자를 만나기 위해 그가 묵고 있었던 모텔을 찾아갔다.

가해자의 범행 진술은 귀를 의심할 만큼 황당했다. ‘나를 무시한다’는 이유로 50대 여성을 죽였다는 것이었다. 수법도 잔인했다. 가해자는 50대 여성의 목을 졸라 질식시킨 뒤 얼굴과 손을 청테이프로 감아 2차로 질식시켰다. 모습은 흡사 미라를 떠올리게 했다.

이들은 모텔서 만나기 전 서로의 이름과 나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 채팅 앱 특성상 자신의 인적사항을 기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결국 생전 본적도 없는 사람끼리 만나서 살인이란 결과를 남긴 것이다.

비대면 앱의 익명성을 빌어서 학교폭력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해당 비대면 앱은 회원 혹은 익명의 사용자로부터 질문을 받고 답변을 공유하는 Q&A 중심의 SNS다. 이용자 절반 정도는 18세 미만 청소년으로, 학교폭력 등 다양한 청소년 문제가 사이트상에서 벌어지고 있다.

해당 앱의 피해자인 중학교 학생 D는 “지난해 3월 중학교에 입학했고, 이틀 만에 왕따를 당했다. 온갖 폭언과 욕설, 그리고 어깨빵을 당했다. 학교서 말려도 계속됐다. 그리고 비대면 앱에 익명으로 욕을 했다. 내가 너무 화가 나서 화를 내면, 선생님이 그걸 읽고 화내지 말라며 소리를 질렀다”고 말했다.

왕따도
앱으로

이어 “당시 선생님은 나한테도 잘못이 있다고 말을 했다. 결국 학폭위원회가 열렸고, 학폭은 끝났다. 그러나 아직도 비대면 앱으로 욕을 보낸다. 의사 선생님은 이 정도 학폭이면 죽을 수도 있다고, 살아 있는 게 대단하다고 했다. 심리검사 결과도 심각하게 나왔다. 비대면 앱으로는 익명으로 ‘죽어라’는 연락이 온다. 결국 내가 죽어야 끝이 나는 것일까. 그게 답일까”라고 푸념했다.

경찰 관계자는 “개인 대 개인의 선의에 입각한 솔직한 정보교환은 필요하다. 그러나 중간서 중재하는 업체들이 양쪽의 정보가 옳은지 아닌지를 검증하고 확인해주는 단계가 있다면 보다 안전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라며 “또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범죄 사범에 대해 무관용 원칙에 따라 철저히 수사해 엄단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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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