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공대 이상한 사직 거부 내막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2.14 06:00:00
  • 호수 14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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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월 동안 허공에 뜬 ‘사표’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금오공과대학교에서 연구직으로 근무하던 A씨는 지난해 10월19일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직서에는 ‘팀장과 과장은 나에게 주말 근무 및 연장근로를 강요했고, 연차 유급 휴가 사용에 대한 비난과 절차적 방해, 퇴사 강요, 교육 참석 방해, 업무와 관련 없는 폭언 등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고 적혀 있다. A씨가 제출한 사직서는 4개월째 수리가 거부된 상황이다.

2021년 11월19일에 개정된 근로기준법 제76조의 3에는 ‘누구든지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사실을 알게 된 경우 그 사실을 사용자에게 신고할 수 있다’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사실이 확인된 때에는 지체 없이 행위자에 대해 징계, 근무 장소의 변경 등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이 경우 사용자는 징계 등의 조치를 하기 전, 그 조치에 대해 피해근로자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등이 명시돼있다.

괴롭힘
시작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으로 부르는 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됐지만 고용노동부에 신고된 직장 내 괴롭힘 사건 10건 중 8건은 반려되거나 신고자가 신고를 취하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 11월6일 직장갑질119는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을 통해 고용노동부서 받은 직장 내 괴롭힘 신고 사건 처리 현황을 공개했다.

2019년 7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될 때부터 지난해 8월 말까지 노동부에 신고된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은 총 2만424건이다. 이 중 검찰에 송치한 사건은 344건이었고, 신고자가 취하한 사건은 7924건이었다. 

5명 미만 사업장이거나 특수고용 노동자, 프리랜서라 개정 근로기준법을 적용할 수 없거나 괴롭힘이 아니라고 판단해 ‘기타’로 분류한 경우는 9226건이 차지했다.


직장 내 괴롭힘 사실을 확인해 사업장에 공문을 보내 개선지도 처분을 한 사건은 2624건이었고, 처리 중인 사건은 306건이었다.

직장갑질119는 “노동부에 신고된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의 84%는 취하되거나 반려됐다. 노동청에 괴롭힘을 신고한 10명 중 8명 이상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해 정부가 직장 내 괴롭힘을 방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국립 금오공과대학교에도 이 같은 일이 발생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인 A씨와 B씨는 지난해 국립 금오공과대학교에 3년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A씨는 지난해 3월, B씨는 지난해 6월에 입사했다.

이 둘의 채용 직위는 연구원이다. 연구원은 박사학위 소지자 또는 수료자, 채용 예정 직무 분야와 관련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2년 이상 해당 분야의 경력이 있는 사람이 지원할 수 있었다. A씨와 B씨는 과학 교육학 전공 박사 수료자로 교육 과정과 교육 품질 연구 분야를 지원했다.

초과 근무 강요, 연가 사용 반려 등
입사 7개월 괴롭힘 끝에 퇴사했는데…

직장 내 괴롭힘은 사소한 소통 문제로 시작됐다. A씨가 입사한 지 한 달이 지나고 나서, 같은 부서로 A씨의 상사가 입사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A씨 상사는 A씨에게 업무를 지시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본부장이 A씨의 상사에게 업무를 지시하면, 상사가 그 업무를 다시 A씨에게 지시하는 시스템이다.  

A씨는 “본부장과 같이 진행되는 회의에 들어가 나에게 왜 업무를 지시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상사가 중간에서 나에게 업무지시를 하지 않은 것이다. 상사가 계속 업무지시를 하지 않아서, 결국 나중에는 본부장한테 직접 업무지시를 받았다. 그때부터 상사와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A씨의 설명과 자료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은 ▲초과 근무 강요 ▲연가 사용 반려 ▲연가 사용 늦게 승인 ▲일일 업무보고 강요(연구원 업무 시스템 고려하지 않음) ▲같은 팀원끼리 업무보고 ▲다른 부서로 이동 권유 ▲이메일 보고 무시 ▲교내 교육 참석 막음 ▲화장실 못 가게 함 ▲업무보고를 타 부서 사람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함 ▲갑작스러운 회의 시간 변경 ▲폭언 등이 있었다.

A씨의 상사는 공개 장소서 A씨에게 “기본적으로 물리교육이나 과학교육은 교육학이 아니다. 교육학 분야와는 다르게 판단한다. 내 태도에 불만이 있다고 하면 같이 일하기 힘든 문제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업무지시를 부탁하는 A, B씨에게 ‘업무지시가 구체적이지 않다’고 말하셨는데, 대강 이 정도 주제를 던져주면 스스로 할 일을 만들어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 두 분 다 박사 수료까지 했는데, 내가 두 분을 과대평가했던 것 같다. 일을 하나하나 적어줘야 하는 거냐”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내가 고용주라면 지금 상황이 ‘고용을 제대로 한 건가’라고 고민할 상황이다. 충분한 해고 사유가 된다고 생각한다…침묵을 한다는 것은 동의한다는 이야기 목적으로 들린다” 등의 말을 이어갔다.

6월에 입사한 B씨는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분위기가 안 좋았다. 서류 하나로도 계속 지적했고, 화장실을 가는 것도 못 가게 했다. 또 연구직은 업무 특성상 일일 업무보고를 하는 곳이 거의 없는데 비슷하게 입사한 사람에게 업무보고를 하도록 시켰다”며 “업무보고가 아니라 감시를 받는 것처럼 느꼈다. 특히 공개적인 자리서 ‘학부생 수준처럼 일을 못 한다’며 늘 입에 달고 살았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사소한
문제로…

결국 A씨와 B씨는 적응장애, 공황장애 등 정신과 질환을 얻었다. 진단서에는 ‘상기 환자는 직장 내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 불안, 불면, 공황장애 및 예기불안 등의 증상으로 상기 초진일 이후 상기병 진단하에 약물 및 면담 치료 중이다. 현재까지 상기 증상의 뚜렷한 호전은 없는 상태로, 향후 증상 악화 방지를 위해 4주간의 안정 가료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적혀 있다.

이 시기에 B씨는 임신을 했다. 그의 당초 계획은 금오공과대학교 업무에 적응하면 미뤄뒀던 박사 논문을 쓸 예정이었고, 임신을 하더라도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임신한 상황에서 공황장애 약을 복용할 수 없으니 육아휴직을 할 수밖에 없었다.

A씨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유급휴가를 신청했다. 그런데 유급휴가를 신청한 서류를 A, B씨 외 현 팀원 4명과 타 팀원 2명이 열어봤다.

근로기준법 제76조의 3에는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사실을 조사한 사람, 조사 내용을 보고받은 사람 및 그 밖에 조사 과정에 참여한 사람은 해당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을 피해 근로자의 의사에 반해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면 안 된다’고 적시하고 있다.

위 법을 근거로, A씨와 B씨는 ‘유급휴가 신청’을 타 부서 사람이 본 것 자체로 직장 내 괴롭힘 2차 가해라고 주장한다.

이 문제에 대해 노동 전문가, 변호사, 노무사 등 150여명의 민간 공익단체인 직장갑질119는 “직장 내 괴롭힘에 관한 조사에 참여한 사람이 조사 과정에서 작성된 문서를 다른 팀에 공람한 것이라면, 이는 명백한 2차 가해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근로기준법 위반 행위로 과태료 처분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근로기준법에는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면 안 된다’고 규정해, 이를 위반한 자는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정하고 있다. 따라서,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조사 참여자에 의해 관련 문서가 공개된 것이라면 노동청에 신고해 대응해야 한다”고 자문했다.

퇴사했는데…
“출근 안 해?”

결국 A씨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A씨는 사직서에 ‘고용노동부를 통해 지난해 8월9일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했지만, 학교는 불공정한 심의위원 선정과 갑작스러운 통보 및 의뢰인을 포함한 피해자들에게 근무지 이동을 명하는 등 절차의 정당성과 형평성 없이 가해자에게 유리하도록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신고 이후에도 나의 업무 결재자는 여전히 가해자였다. 최소한 신고자와 가해자를 분리조치를 해야 하는데도, 학교는 직장 내 괴롭힘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 근무환경을 제공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학교는 내 병가 기간을 부당하게 단축했고, 복직 시 가해자와 밀접하게 근무할 수밖에 없는 근무환경을 유지했다. 특히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휴직을 신청했으나 휴직 사유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에 불가피하게 사직하고자 한다”고 적었다.

해당 사직서는 당일 결제가 완료됐다.


금오공과대학교는 직원이 퇴직일자를 명시한 사직서를 제출하고 수리됐을 경우, 그날을 퇴사일로 결정한다. A씨는 당일 사직서 결재가 완료됐기 때문에 그날부터 출근을 하지 않았다.

퇴사했으니 이제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상사를 만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당한 일이 생겼다. A씨의 사직서가 일주일 만에 반려된 것이다. 그때부터 A씨는 학교서 오는 독촉 문자, 등기를 받아야 했다. 

학교는 A씨에게 “귀하는 현재 학교 측의 정당한 출근 명령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사유 없이 지난해 10월19일부터 지속해 결근하고 있다. 이에, 금오공과대학교와 맺은 근로계약서에 따라 즉시 출근해 근무에 임해줄 것을 요구한다”며 “만약 11월25일까지 출근을 하지 않으면, 부득이하게 징계 절차를 진행할 수밖에 없음을 안내를 드린다”고 보냈다.

학교의 요청에도 A씨가 출근을 하지 않자 일주일에 한 번씩은 문자가 계속 날아들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학교는 A씨에게 ‘보험료 개인부담금(2022년 11월, 12월분) 납부를 다음과 같이 요청하니 기한 내에 입금해주기 바란다’며 밀린 4대보험을 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학교 측은 ▲2022. 11월분 건강보험 12만7830원 ▲국민연금 14만5710원 ▲고용보험 2만9320원으로 합계 30만2860원 ▲2022. 12월분 건강보험 12만7830원 ▲국민연금 14만5710원 ▲고용보험 2만9320원으로 합계 30만2860원 및 ▲전체 합계 60만5720원 ▲결근으로 인한 2022년 11월, 12월 급여는 지급하지 않았으나, 가입 상태(재직)로 인한 제 보험료 본인 부담금 발생해 입금 기한은 지난해 12월14일까지로 통보했다. 

제출 바로 수리…일주일 만에 반려 소식
4대보험 납입, 상여금 반납, 근무 요구

이런 식의 문자가 2월까지 왔다. 같은 내용의 등기우편이 금오공과대학교 총장 이름으로 4~5일 간격으로 발송됐다. 이 기간 동안 금오공과대학교는 A씨에게 명절상여금을 지급했다. 지난해 A씨가 근무했던 부서의 전담 직원, 연구원, 비전임 교원을 대상으로 명절상여금을 지급한 것이었다.

학교는 A씨에게 ‘평가를 위한 근무성적 평정서 및 자기 성과 기술서를 기한 내 제출하라’고 공문을 보냈고, A씨는 제출하지 않았다. 하지만 학교는 A씨에게 4대보험과 세금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명절상여금으로 지급했다.

A씨는 “지난해 8월 초에 고용노동부에 첫 진정을 넣고 벌써 6개월도 더 지났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상사들은 저희에게 사과조차 한 적이 없다. 내가 원하는 건 진정성 있는 사과였다”며 “하지만 상사들은 되레 지위를 이용해 또 다른 방법인 행정적 보복을 통해 2차 가해를 해왔다”고 주장했다.

이어 “특히 사직서를 반려하는 등의 행동은 협박에 가까운 행정적 보복이라 생각한다.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며 신체적·정신적으로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다”며 “학교는 상사들의 이런 행동을 방관하며 어떠한 제지조차 하지 않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지금 상황은 마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는 느낌이라고 생각되며 조속히 문제가 해결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학교는 A씨의 사직서를 반려한 이유에 대해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처음 연락했을 때는 “담당자가 아니다” “해당 부서 사람들이 출장 갔다” 등의 이유로 기자의 전화를 피했다.

추후 연락이 온 학교 관계자는 “해당 사건을 파악했지만, 학교에서는 대답할 수 없다. 법리적인 사항을 파악하고 있다”며 답변을 피할 뿐이었다. 

전현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법무법인 중앙법률원 공인노무사는 A씨의 사건을 두고 처음 접해보는 사례라고 했다.

전 공인노무사는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지는 더 살펴봐야 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직서를 반려시키는 건 처음 겪는 일”이라며 “사직서는 근로자 사인으로 제출됐으면 끝이다. A씨는 이미 10월에 사직서를 냈으니, 12월에는 의사표시의 효력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즉 제출한 사직서에 법적 효력이 생긴 시기니, 법적으로 퇴사한 것이 맞다”며 “다만 A씨가 제출한 사직서 마지막에 ‘휴직 신청을 반려해서 퇴사한다’는 걸로 이해해, 사직서를 ‘비진의 의사표시’로 해석한 것 같다”며 “그런데 이 경우는 보통 회사가 근로자에게 강압적으로 퇴사를 시킨 경우에 해당한다. 실제로 강압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하더라도 협박이 들어간 녹취가 없으면 해당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제는
인권침해

그는 “근로자가 아닌 회사가 이런 식으로 근로자를 붙잡고 있는 건 처음 겪는 일로 A씨가 받는 스트레스가 클 것이다. 상식적으로 지난해 12월부터는 A씨에게 회사가 요구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며 “어딘가에서 잘못된 자문을 받은 게 아닌지 염려될 정도다. 상식적으로 회사는 ‘직장 내 괴롭힘은 노동청에 진정을 넣었고 기다리는 상황’이라고 답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A씨는 학교에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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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