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잡는 설날 사건·사고 백태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1.16 13:15:05
  • 호수 14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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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주변을 살핍시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사망, 폭력, 이혼. 명절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지만, 누군가는 명절이기 때문에 떠오르는 단어다. 학교나 회사 등에 가지 않고 집에만 머무르니 발생하는 사건·사고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명절에는 더욱 이웃을 살펴야 한다. 이때 발생하는 사건은 면밀히 지켜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렵다. 가정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기 때문이다.

민족 대명절인 설날이 도래했다. 가족과의 재회가 기쁨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설날이 추석과 함께 가장 기피하거나 두려워하는 날로 꼽힌다. 기본적으로 설날은 차례상에 올리는 음식만 해도 너무 많아서 주부의 스트레스 요인이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해 운전하는 것도 힘들다. 고향이 가깝거나, 거주지가 고향이어도 예외는 아니다.

명절증후군
남녀차별

주부가 아니더라도 명절 스트레스가 심한 건 마찬가지다. 미혼이나 취준생들 사이에선 ‘명절날 이런 말 듣기 싫어 BEST 3’가 정해져 있을 정도다. 듣기 싫은 말에는 “앞으로 계획이 뭐니?” “어느 학교, 어느 직장에 갈 거니?” “전부,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등이 있다.

명절에는 자신의 연봉이나 자녀의 학업 능력으로 비교를 당하기도 한다. 급기야는 과거에 묻어뒀던 이야기를 꺼내는 상황까지 생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명절이 다가올 때쯤이면 포털 연관 검색어에 ‘명절증후군’이 등장한다. 결국 명절이 주는 즐거움만큼이나 스트레스도 크다는 방증이다. 


이 같은 스트레스 수치는 과학적으로 검증됐다. 국내 연구진은 평상시 휴일이나 공휴일보다 명절 연휴 때 유독 심장마비 환자가 많고, 사망률도 높다는 빅데이터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메디플렉스 세종병원 심장내과 연구팀(전기현·권준명·오병희)은 2012~2016년 전국 응급실을 찾아 ‘병원 밖 심정지’ 13만9741건 중 극단적 선택을 제외하고, 내과적인 질환으로 심장마비가 발생한 9만5066명을 분석한 결과를 이런 연관성이 관찰됐다고 발표했다.

이 연구 결과는 대한심장학회가 발행하는 국제학술지(Korean Circulation Journal)에 발표됐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해당 기간 중 총 43일의 설·추석 연휴에 2587명의 심정지 환자가 발생했다. 명절 연휴에 하루당 60.2명이 심정지로 쓰러진 셈이다. 이는 같은 조사 기간 중 평일, 주말, 공휴일에 발생한 심정지 환자가 하루당 각각 51.2명, 53.3명, 52.1명인 것과 비교해 매우 높은 수치다.

명절 때 발생한 심정지 환자는 병원 도착 전 사망률뿐만 아니라 병원에 입원한 후에도 다른 그룹보다 사망률이 높았다. 특히 음력이어서 매년 날짜가 달라지는 설과 추석을 다른 해의 동일한 양력 날짜와 비교했을 때도 명절 연휴의 높은 심정지 발생 양상은 뚜렷했다.

명절에 발생하는 심정지는 낮과 저녁에 더 빈번했다. 시간대로는 오전 7~10시에 가장 큰 1차 피크가, 오후 5~7시 사이에 2차 피크가 나타나는 것으로 분석됐다.

스트레스로 심정지 환자 발생률↑
상승하는 사망·폭력·이혼 지수


이주미 을지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이 논문에 대한 별도의 평론에서 명절 연휴의 높은 심정지 발생률을 명절 연휴가 끝난 후의 높은 이혼율, 설날과 추석 연휴 기간의 높은 자살률, 긴 연휴에 급증하는 가정폭력 건수 등과 연관지어 설명했다.

이 교수는 “연휴 기간에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심리적 스트레스는 급성 심정지를 유발하는 큰 위험요소가 된다. 이는 미국에서 크리스마스와 새해 연휴에 심정지 사망률이 높은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진단했다.

연구 결과는 사회에 그대로 반영된다. 그리고 조금 더 처절하다. 지난해 추석에는 홀로 사는 노인의 고독사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의 독거노인 수가 매년 증가하면서 65세 이상의 고독사 비율도 함께 늘어난 것이다.

지난 추석 연휴를 앞두고 광주광역시에서 홀로 사는 60대 남성 A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광주 남부경찰서는 광주 남구 양림동의 한 주택에서 악취가 난다는 이웃의 신고를 받고 출동해 A씨의 시신을 발견했다. A씨는 숨진 지 1~2주 지난 것으로 추정됐다.

A씨는 20여년 전 아내와 헤어진 후 가족과 연락을 끊고 홀로 지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A씨가 지병으로 숨진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인을 조사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2년 고독사 실태조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2021년 고독사 사망자 수는 총 3378명으로 최근 5년간 증가하는 추세다. 매년 남성 고독사가 여성 고독사에 비해 4배 이상 많으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연령은 50~60대로 확인됐다.

고독사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장소는 주택, 아파트, 원룸 순이다. 주택에서 발생한 고독사가 매년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최초 발견자는 형제‧자매, 임대인, 이웃 주민 순으로 많았으며, 기타 직계 혈족, 택배기사, 친인척, 경비원, 직장동료 등에 의해 발견되거나 신고됐다.

명절에 신변을 비관한 극단적 선택도 있다. 설 명절을 앞두고 80대 독거노인이 자해를 시도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광주 북구에 위치한 한 아파트에 사는 82세 독거노인이 다쳐 쓰러진 것을 이웃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외로운 
노인들

신고 직후 소방당국이 출동해 노인은 광주의 한 대학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으며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노인은 목과 복부 등을 흉기로 찌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설 연휴에는 ‘혼자 술을 마시는 노인’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가족이 찾아오지 않아 아쉽고 헛헛한 마음을 술로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위험한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2020년 5월 전남 여수서 술에 취해 자택 마당에 넘어져 있던 70대 노인을 마을 주민이 발견해 응급 이송했다. 같은 해 6월, 인천에서 70대 노인이 만취해 도로 위에 쓰러져 누워 있다 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지난해 추석 연휴에는 부산의 한 빌라에서 이웃 모녀가 살해당한 경우도 있다. 모녀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50대 여성 B씨는 자신의 정신과 약을 탄 도라지차를 범행에 쓴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지난해 9월12일 부산 부산진구 한 빌라에서 이웃 주민이었던 모녀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 공소사실에 따르면 B씨는 일정한 수익이 없어 병원비나 카드 대금 등을 내지 못하는 생활고를 겪었고, 가족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으라는 독촉을 받는 상태였다.

검찰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B씨가 이웃의 시가 600만원 상당 귀금속을 노리고 범행에 나선 것으로 봤다. B씨는 수년 전부터 자신이 복용하던 정신과 약을 절구로 빻아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탔다. 이 약에는 수면제 성분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지난해 9월11일 밤 이 물을 들고 모녀를 찾아가 “몸에 좋은 도라지차”라고 건네 먹인 뒤 정신을 잃게 했다. 다음날 새벽 2시쯤 쓰러진 모녀가 의식을 회복하자, B씨는 모녀를 흉기로 찌르고 목을 졸라 살해했다. 

앞서 명절에 사망률이 올라갔듯, 올라가는 다른 수치가 있었는데 바로 폭력이다. 경찰은 설 연휴 가정·데이트 폭력이나 스토킹 범죄 신고 등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보고 예방활동을 강화하기로 했다. 

술이 웬수
끝없는 폭력


경찰은 지난 11일부터 오는 24일까지 2주 동안 설 명절 종합 치안 활동을 추진한다고 지난 9일 밝혔다. 연휴 기간 가정폭력 재발 우려 가정 및 수사 중인 아동학대 사건 전수 모니터링을 실시한다. 이를 통해 재발 원인과 보호‧지원 필요성 점검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최근 신고 이력, 보호조치 내역 등을 종합해 가정폭력·아동학대 고위험군 대상을 분류해, 지역 경찰뿐 아니라 유관기관과 공유해 보복 등 위험성 모니터링에도 나선다. 스토킹 등 반복 신고 사건은 살인 등 중대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만큼 과·팀장, 서장, 시·도청 등 3중으로 점검한다는 방침이다. 

이런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는 것은 실제 연휴 기간 가정폭력 신고 등이 증가 추세기 때문이다.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동안 설 연휴 기간 하루 평균 전체 신고는 4만877건으로, 평소 5만1377건보다 20.5% 줄었지만, 가정폭력 하루 평균 신고는 841건으로 평소 608건보다 38.3% 증가했다.

두 차례의 가정폭력 유죄 판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C씨는 아내에 대한 가정폭력을 이어갔다. 2020년 12월31일 오후 7시 C씨는 술에 취해 전북 전주시 자택으로 들어와 아내와 말다툼을 벌였다. 그러다 눈에 띈 65㎝ 길이의 목검을 들어 아내를 향해 휘둘렀다. 맞은 부위를 감싼 채 쓰러진 아내의 몸에는 멍이 새겨졌다.

C씨는 아내 일상을 사사건건 간섭했다. 아내가 일하던 주점에 찾아가 다짜고짜 업주에게 욕설하고 영업에 훼방을 놨다. 이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C씨는 결국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전주지법 제3형사부(고상교 부장판사)는 ‘과거 두 차례의 유죄 판결’ ‘집행유예 기간 중 범행’을 이유로 들었다. C씨가 아내를 폭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2018년 6월에는 자택서 가로 50㎝, 세로 11㎝, 높이 14㎝의 나무상자로 아내의 얼굴, 가슴, 팔, 다리를 사정없이 때렸다. 피부는 퍼렇게 멍들고 찢어져 전치 3주의 진단이 나왔다. 이때 C씨는 징역 1년2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2016년 3월에도 같은 일을 반복해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C씨는 매번 법정서 “반성한다”고 말했고, 아내는 그때마다 남편의 말을 믿고 합의서, 탄원서를 냈다. 이 같은 사례는 무수히 많다.

살인, 고독사, 극단적 선택까지
술 마시는 노인 사고 위험성 높아

2020년 추석 연휴에 50대 남성 D씨는 대전 서구 한 건물 외벽에 사다리를 대고 2층에 위치한 배우자 주거지로 침입, 배우자와 미성년 자녀를 “죽이겠다”고 겁을 줬다. 앞서 D씨는 과거 배우자에게 가정 내 폭력 행위를 저질러 접근금지 등 임시조처가 내려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명절이 지나면 자연스레 이혼율도 올라간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설 명절 직전 2월에는 이혼 건수가 약 1만5000여건이었으나, 명절 직후 3월엔 1만6800여건으로 1800건가량이 증가했다.

2021년 추석이 있던 9월은 이혼 건수가 1만3700여건이었고, 직후 10월은 1만5200건으로 전달에 대비해 1400건이나 늘었다.

회사원 남편과 10년간 결혼생활을 이어오던 가정주부 E씨는 오랫동안 쌓여온 명절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추석 명절이 지나고 남편과 이혼을 결심했다. 

E씨는 명절에 모든 가족이 있는 자리서 시댁 어른의 막말을 듣는 경우가 많았다. E씨의 시댁 어른은 E씨에게 “너무 뚱뚱하다” “남편이 여자로 보겠냐”는 등의 모욕을 줬다. 게다가 시댁 어른은 남편의 밥을 잘 챙겨야 한다고 항상 잔소리했다.

실제로 E씨는 항상 남편의 밥을 잘 차려줬기 때문에 더 억울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됐고 심리적으로 지칠 수밖에 없었다. E씨는 남편이 중재해주길 원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결국 남편에게 명절을 이유로 이혼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성균관 의례 정립 위원회(이하 성균관)는 지난해 9월5일 ‘반성문’격의 기자회견문을 공개한 바 있다. 성균관은 이날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회견문을 통해 “유교는 오랜 세월 동안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면서도 “현대화 과정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옛 영화만을 생각하며 선구자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 결과 유교에 대한 국민의 인식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명절만 되면 ‘명절 증후군’과 ‘남녀 차별’이라는 용어가 난무했다. 명절 끝에는 ‘이혼율 증가’로 나타나는 현상이 유교 때문이라는 죄를 뒤집어써야 했다”며 “명절에 차례를 지내는 것은 후손의 정성이 담긴 의식인데 고통받거나 가족 사이 불화가 초래된다면 바람직한 일은 아닌 것”이라고 돌아봤다.

불행한 연휴
이혼 늘어

한 이혼 전문 변호사는 “명절에 발생하는 갈등, 싸움, 스트레스는 직접적인 이혼 사유가 되기는 어렵지만 고부 갈등, 정서 갈등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거나 중간에 배우자가 처신한 행동, 이로 인해 발생한 폭언이나 폭력 등이 있다면 충분히 사유가 될 수 있는 만큼 법률적인 전문가의 조언과 도움을 받아 이혼을 준비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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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