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기로 남은 이재명의 앞날

눈앞에 놓인 세 갈래의 길

[일요시사 정치팀] 정인균 기자 = ‘세상은 1등만 기억한다’는 문구가 한국사회를 뒤덮은 적이 있다. 2등과 3등도 노력해 이룬 성적이지만, 세상은 항상 1등만을 기억한다는 아쉬움이 섞인 소리다. 그러나 적어도 2022년 대선에는 이 문구가 먹혀들지 않아 보인다. 정계는 대선에서 2등을 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상임고문을 아직 잊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  인사는 그가 정계에 조기 복귀해야 한다고 아우성이다.

사람은 살면서 여러 선택의 순간과 마주한다. 청소년기엔 무엇을 공부해 어떤 학교를 갈지 선택하고, 청년기엔 어떤 일을 하며 장래를 그려 나갈지, 또 누구와 만나 어떤 가정을 꾸려나갈지를 선택한다. 그때그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다.

역할인가
책임인가

정치인들의 정치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중요한 순간에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정치인은 대통령까지 클 수도 있고, 조기 은퇴 수순을 밟을 수도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 합당을 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네 번째 대권 도전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대통령이 되지 못하고 정치 인생을 조기에 마감했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상임 고문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대선에서 패배하며 낙담하고 있을 그에게 민주당은 당내에서 리더십을 발휘해 지방선거를 이끌어야 한다는 ‘역할론’을, 그리고 대선 패배를 책임지고 당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말라는 ‘책임론’을 내놨다. 역할론을 제시한 쪽은 이재명 선거대책위원회에서 주요 보직을 맡았던 ‘친이(친 이재명)계’ 의원들이고 책임론을 제시한 쪽은 이낙연 전 대표를 비대위원장으로 모시자는 쪽의 ‘친문(친 문재인)계’ 의원들이다.

민주당 내부 목소리에 의하면, 대선 패배 후 선대위를 해체하기 직전 이 고문은 몇몇 친한 민주당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 전 대표의 비대위원장 위촉에 반대할 뜻을 내비쳤다고 한다.

패배 후 당내 이권싸움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고문은 공식 대통령선거 기간인 지난 4일 선거유세 중에 “정치를 끝내기에는 아직 젊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그가 대선 패배를 가정하고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 패배로 정계를 은퇴한다거나 대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뜻을 해석할 수 있다. 자신의 말처럼 이 고문은 정계 은퇴를 하기에는 너무 어리다.

올해 59세(만 57세)인 그는 정치인으로서 이미 약 10년의 커리어를 쌓은 베테랑이다.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경력을 두루 갖춘 이 고문이 동년배 정치인 중에서 국정 경험은 압도적으로 깊다는 데 정치 평론가 모두가 동의한다.

이번 대선을 거치며 ‘비주류’ 정치인이었던 이 고문은 일약 ‘주류’ 정치인으로 탈바꿈했다. 경선부터 본선까지 대중의 압도적인 지지율을 바탕으로 선거를 치러온 이 고문은 그간 패배한 민주당 대권주자들과는 다르게 정치적으로 많은 것을 얻으며 대선 레이스를 마쳤다.

그중 하나가 ‘차기 대권 가능성 확인’이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 일컬었던 이번 선거에서 보통 정치인이었으면 하나만 터졌어도 곤란했을 논란이 서너 가지가 연이어 터졌다.

여배우 스캔들부터 형수 욕설 논란, 아들의 도박 논란, 배우자의 갑질 논란, 그리고 대장동 비리 관여 의혹까지 굵직 굵직한 네거티브 뉴스가 매스컴을 장식할 때마다 이 고문의 입지는 좁아져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재빠른 사과와 진실 규명을 적절히 섞어가며 난관들을 헤쳐나갔다.

기지를 발휘한 이 고문의 대처 덕분에 지지율에는 큰 영향이 없었고, 오히려 대선 레이스 막판에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격차를 좁혀가는 양상을 그려내며 분전했다.

정계 조기 복귀해 당내 역할?
지방선거 다시 출마 가능성은?

일각에서는 ‘김대중 이후에 논란을 가장 잘 대처한 진보진영의 정치인’이란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본인 리스크나 도덕성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대중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내는 ‘정치’를 잘했다는 평가다.

선대위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어떨 때 사과를 해야 하는지, 어떨 때 맞서 싸워야 하는지 이 고문에게는 본능적인 감각이 있다”고 전했다.

리더의 소양이 충분하다는 평가와 함께 나온 것이 이 고문의 ‘책임론’이다. 이처럼 능력 있고 힘 있는 리더가 지금 민주당 비대위에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현재 민주당은 윤호중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비대위가 구성돼있다.

민주당 선대위는 N번방 추적단 불꽃 활동가 박지현씨 등 참신한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쇄신 분위기에 힘쓰고 있다. 민주당은 대선에서 많은 지지를 보내준 ‘이대녀’(20대 여자)'를 중심으로 선거 분위기를 개편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윤 비대위원장은 선대위에서 활동했던 ‘책임’져야 하는 인사다. 지도부가 모두 사퇴한 시점에 비대위를 꾸리기에 부적절한 인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고, 비대위를 이끌 만큼의 여력도 충분하지 못하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현재 윤 비대위원장은 일부 민주당 지지자에게 문자 폭탄을 받는 등 ‘정치적 테러’를 겪고 있다. 다른 선대위 인사들처럼 선거 패배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는 게 문자의 주 내용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고문에게 역할론이 제시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책임을 져야 하는 후보긴 하지만, 동시에 국민으로부터 지지율로 인정받은 후보이기에 지금 시점에 비대위원장을 맡을 능력이 있는 후보는 그뿐이라는 것이다.

당초 민주당 지도부는 이 전 대표에게 비대위원장을 맡기려 했으나 당내 분위기와 이 전 대표의 의지에 따라 무산됐다. 리더십 있고, 무게감 있는 인사가 부재한 탓에 돌고 돌아 이 고문에게까지 역할 제안이 가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 고문 또한 정치적 재기를 노리고 있는 만큼, 이 제안이 성사될 가능성이도 있다. 대선에서 패배한 후보가 후에 차기 당 대표로 선출된 사례는 과거에도 많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랬고, 문재인 대통령도 그랬다. 

바로 복귀?
경기 또지사?

다만 이 고문은 여의도 정치 경력이 전무하다는 점이 약점으로 꼽힌다. 일찌감치 이번 대선은 ‘0’선 의원 간의 대결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이 고문은 그간 민주당 대통령들과는 달리 국회에서 국회의원들과 함께 일해 본 경험이 없다. 지방 행정 이력만 갖추고 있는 이 고문의 세력은 결집도도 매우 약한 집단으로 평가된다.

비록 이번 대선에서 ‘주류’로 탈바꿈한 모양새지만, 당권이 약한 그에게 당 대표를 맡겨도 되는지 의구심을 품는 이가 많다. 아무래도 ‘친문파’ 의원이 대다수인 민주당 내에서 세력을 통합하기가 쉽지 않지 않겠냐는 걱정이다. 이 고문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캐릭터다.


워낙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언변으로 논란이 많이 된 탓에 같은 당에 있더라도 그에게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다고 내부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실제로 이번 경선이 끝난 후 민주당 지도부는 원팀을 표방했지만, 몇몇 중진 의원과 그의 지지자들은 이 고문의 당선을 진심으로 돕지 않았다.

심지어 이낙연 경선 선거 캠프에 있던 한 인사는 윤 당선인의 캠프에 합류해 활약하는 등 분열을 우회적으로 내비치기도 했다.

리더로서의 재목으로서 당에 역량을 보여준 적 없는 이 고문은 이제 시험대 위에 섰다. 다수 의견을 무릅쓴 채 당권을 잡으려면 지난 대선 본선에서 보여준 능력을 이번 지방선거에서 보여줘야만 한다.

‘친문’과 ‘친이’의 대립이 극심한 민주당을 하나로 통합해 낼 수 있을지에도 정계 전문가들은 주목하고 있다. 사실 대선후보가 대선에서 패배하자마자 바로 당내로 복귀한 사례는 아직 없다. 모두 몇 개월에서 몇 년간 야인 생활을 거친 후에 정계로 돌아왔다.

역대 가장 많은 표차로 대선에서 진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2007년 대선 패배 이후, 제18대 총선이 있을 때까지 약 1년간 야인 생활을 했다. 후에 당의 요청으로 서울 동작구에 출마했으나 당시 한나라당 정몽준 후보에게 패하여 낙선한 뒤, 2009년에 무소속으로 전북 전주시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2010년 2월 민주당에 복당하며 대선 낙선 후 3년 후에나 본격적인 정치 재계를 시작할 수 있었다.

문 대통령 또한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패한 후 의원직만 유지하고 평당원으로 잠행을 이어오다 2015년에나 당 대표로 선출되며 다시 대권에 도전하게 된다.

200명에 전화
과연 의미는?

평균으로 치면 최근 민주당 후보들은 대권 패배 후 약 3년이 지나서야 세력을 갖추고 당내 실세로 복귀했다. 이 고문은 3주도 채 지나기 전에 당내 복귀설이 나왔기 때문에, 이는 너무 이례적인 데 많은 이가 공감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배경에서 이 고문이 야인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예측을 하는 이도 많다. 그간 대선에서 패배한 후보들이 그랬듯, 패배 후보는 시간을 갖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의견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대통령선거는 가장 중차대한 선거다. 선거 승패는 당의 운명을 판가름할 만큼 무게감이 있기에 역대 대선에서 패배한 세력들은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 것을 관례처럼 여겼다.

이 고문이 정 전 장관, 문 대통령과 다른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대선 경선과 본선 과정에서 제기된 수많은 의혹들이 그를 휘감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고문에게는 사법 처벌의 위험마저 도사리고 있다. 이 고문은 지난달 선거유세 과정에서 “저 지면은 감옥 갈 것 같다. 없는 죄도 만들어서 뒤집어 쓸 것 같다”며 상대 후보인 윤 당선인을 공격하는 동시에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듯한 발언을 해 눈길을 끈 바 있다.

대선 기간 지금 이 고문에게 걸린 검찰 수사는 배우자 김혜경씨 공무원 사적 동원 의혹, 허위 해명 혐의, 신천지 압수수색 거부에 대한 허위사실 공표 혐의, 김씨 법인카드 유용과 경기주택공사 합숙소 비선캠프 의속, TV토론에서 정영학 녹취록 왜곡 공개 혐의, 검사 사칭 전과 기록 허위 소명 의혹 등 6개다.

6건과 별개로 대장동 수사도 진척되고 있어 이 후보의 걱정은 날로 깊어지는 중이다. 최근 녹취록 공개와 관련자들의 증언이 하나둘 나오고 있는 분위기에서 이 고문은 자신을 위한 선택을 단행할 것으로 보인다.

당권을 잡는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이 고문은 지방선거에 직접 뛰어들 수도 있다. 야인인 채로 검찰과 수사를 받게 된다면 진영 차원의 방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이 고문은 역대 대선 패배 후보들보다 빠르고 적극적인 정치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야인으로 지내다 다음 대선에?
당장 수사 받는 입장…선택은?

선거 패배 후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 이 고문은 민주당 모든 국회의원과 자신을 도운 인사 약 200명에게 직접 안부 인사를 하며 정계 복귀 신호탄을 날렸다.

이 고문이 실제로 노리고 있는 것이 당권인지, 지방선거 출마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이 고문 스스로가 야인으로 생활하고 싶지는 않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파악된다.

민주당 입장에서도 차기 대권후보 한 명을 잃는 것은 뼈아픈 손해이기에 그의 정계 복귀를 서둘러 지원할 수 있다. 검찰수사가 진행되고 사법 처벌을 받는 등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는다면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이 얻었던 모든 것을 다시 빼앗기는 셈이기 때문이다.

현재 이 후보이 지방선거에서 공천받을 만한, 유력하게 점쳐지는 자리는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그리고 경기도지사까지 세 자리다.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모두 민주당 인사들의 실책으로 국민의힘에 내준 자리다.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은 큰 표 차이로 국민의힘에 패배했다.

박원순 전 시장과 오거돈 전 시장은 모두 성추문 사태에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난 바 있다. 정치 평론가들은 민주당이 이 자리를 탈환하기 위해서는 대선주자급의 무게감 있는 후보가 출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범한 후보로 민심을 돌리기에는 역부족할 것이란 판단이다.

지금 거론되고 있는 서울시장 후보는 임종석 전 비서실장, 우상호 의원,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정도인데, 이들을 모두 제치고 이 고문이 나갈 가능성도 적지 않다.

서울시장뿐 아니라 경기도지사도 가능성이 높다. 이 고문은 지난 민주당 경선이 끝난 후 최종 후보에 당선됐음에도, 끝까지 경기도지사직 사퇴를 미뤄온 바 있다. 국정감사를 도지사 자격으로 참여해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였다.

이 고문이 경기도지사직에 애착이 남달랐다는 건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는 지난달 선거유세 과정에서 자신의 도지사 시절 업적을 언급하며 “경기도지사 시절 도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며 “시민들은 제가 도지사일 때 가장 도지사다웠다고 말해주셨다”고 언급했다.

경기도지사 민주당 후보로는 현재 안민석 의원 등이 거론되고 있다. 경기도지사에는 민주당의 귀책 사유가 없기 때문에, 대선 직전까지 도지사로 일했던 이 고문이 복귀한다면 당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자리다.

당선 가능성과 무게감으로 본다면 이 고문이 경기도지사에 출마하는 게 가장 적절하다고 민주당 고위 인사들은 전한다.

사법 처벌
큰 타격

민주당은 또 다른 승부를 목전에 두고 있다. 패배는 이미 지나갔고, 돌이킬 수 없다. 지금 민주당이 해야 할 것은 패배에 대한 성찰과 대선 과정에서 드러난 상대의 약점 분석, 그리고 당의 쇄신이다. 명분과 사익에 집착하지 말고 승리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만을 연구해야 한다. 이 고문이 어떤 역할을 할 때 당의 승리 가능성이 가장 높아지는지 지금 민주당 비대위는 필사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ingyun@ilyosisa.co.kr>

 

<기사 속의 기사> 민주당은 문자 폭탄 전쟁 중?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는 대선 경선이 끝나자마자 미국행을 암시한 바 있다. 그는 1년 정도 미국에 머무르며 남북 관계와 국제 정치 등을 대해 공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대선 뒤로 연기됐다. 지방선거까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상임고문의 대선 지원 요청 때문이었다.

이 전 대표는 당의 선대위 수장직까지 맡아가며 총력 지원하는 이례적 행보를 보였다. 이 정도로 도와줬어도 이 고문의 지지자들에게는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요즘 민주당 인사들에게 이 고문 지지자들이 문자 폭탄을 돌리는 중이다. 국민의힘과는 달리 당에서 이 고문을 총력 지원 안 했다는 의심에서다.

실제로 원팀 구성과 당의 전폭적인 지지는 약 한 달 남짓 남았을 때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경선 때의 앙금을 씻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언론들은 ‘친문’ ‘친문’ 사이에 있던 감정의 골이 대선 패배를 계기로 수면 위로 드러나는 중이라고 평가한다.

윤호중 비대위원장에는 ‘친문’ 지지자들이, 이낙연 측 인사들에게는 ‘친이’ 지지자들이 문자 폭탄을 보내며 다투고 있다.

당을 쇄신해야 하는 민주당은 지금 서로 물어뜯기 바쁘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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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고객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쿠팡의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현재까지 대응만 봐서는 국민은 물론, 정부와도 전면전을 벌일 기세다. 새어나간 정보의 범위와 규모가 ‘역대급’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최악의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쿠팡의 고개는 꺾일 줄 모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뭘 믿고 저러나’ 소리가 나오는 중이다. 쿠팡의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건, 이른바 쿠팡 사태가 점입가경이다. 사태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수습은커녕 국민의 화만 돋우고 있다. 쿠팡의 대응 태도가 미지근한 수준을 넘어 뻔뻔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 김범석 의장은 모습을 비추지 않고 보상안은 꼼수로 가득하다. 국민을 조롱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 달 만에 고개 숙여 지난해 11월 말 3370만명에 이르는 쿠팡 고객의 개인정보가 ‘탈탈’ 털렸다. 앞서 쿠팡은 4500여건의 고객 정보가 유출됐다고 정부 당국에 신고했지만 2주 만에 그 수치는 7500배까지 늘어났다. 전 국민의 65% 수준이며 지난해 4월 SKT 개인정보 유출 사태 범위(2300만명)를 훌쩍 넘는 사태였다. 쿠팡은 이커머스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다. 대형마트 등이 규제에 막혀 뒷걸음질 칠 때 쿠팡은 로켓배송으로 시장을 싹쓸이했다. 전날 저녁에 주문해도 새벽이면 물건이 문 앞에 와 있는 총알 배송에 소비자는 쿠팡으로 몰렸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을 받던 물류센터는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아이러니하게도 쿠팡이 국민의 실생활에 얼마나 스며들어있는지를 바로 보여줬다. 쿠팡 사태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은 “쿠팡이 경쟁자가 없는 시장 지위를 누리고 있고 한국 고객이 데이터 유출에 덜 민감해 보인다”며 “잠재적 고객의 이탈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그래서일까? 쿠팡은 역대 최악의 정보 유출 사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이 언급하고 정부 차원의 TF가 꾸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힘겨루기’를 하는 태도를 보이는 중이다. 최근에는 정부의 반박에도 자체 조사 결과를 고집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쿠팡은 지난달 25일 ‘정보 유출자는 3300만개 계정에 접근했으나 실제 저장한 정보는 3000여개에 불과하며 제3자 유출 정황은 없는 등 피해가 미미하다’는 내용의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유출자는)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언론 보도를 접한 이후 저장했던 정보를 모두 삭제하고 범죄에 사용한 노트북을 파손해 하천에 던졌다”고 주장했다. 쿠팡은 “잠수부들이 벽돌에 담긴 쿠팡 가방에 든 노트북을 하천에서 회수했고 유출자가 클라우드 계정에 등록한 일련번호와 해당 노트북의 일련번호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범행에 사용된 PC 와 노트북 등 모든 장치를 회수해 안전하게 확보했고 글로벌 보안업체들의 조사 결과도 진술 내용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매출 90% 나오는데 정보 유출 태도·대응 낙제점 쿠팡이 발표한 대로라면 고객 정보 유출 피해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또 유출자와 접촉해 장치를 확보했으니 추가 피해는 없다. 전체적으로 사건이 축소되는 것이다. 쿠팡의 발표에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쿠팡의 조사 내용은 사전에 정부와 어떤 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됐다는 설명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는 “정보 유출 종류와 규모, 경위 등은 민관합동조사단이 조사 중인 사안”이라며 “쿠팡이 발표한 내용은 조사단에 의해 확인된 바 없다”고 밝혔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과도 “쿠팡 측이 제출한 진술서와 노트북 등 증거물을 분석 중”이라며 “사실관계를 면밀하게 확인하겠다”고 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쿠팡은 정부의 지시를 받아 조사를 진행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경찰은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사실관계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쿠팡은 지난달 26일 내놓은 입장문에서 “정부의 지시에 따라 수주간 진행한 조사였다”고 선을 그었다. 같은 달 9일 정부가 쿠팡 측에 유출자와 접촉할 것을 제안했고 14일 쿠팡은 유출자를 처음 만난 뒤 해당 사실을 정부에 보고했으며 16일에는 정부 지시에 따라 유출자의 데스크톱과 하드드라이브를 정부에 제공했다는 게 쿠팡 측 주장이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도 “쿠팡의 입장문 형식의 보도자료에서 정부와 협력했다는 내용 중 일부 국정원으로 추정되는 부분도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반박했다. 쿠팡이 자체 조사와 관련해 정부와 사실 공방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김범석 쿠팡 의장이 사건 발생 한 달여 만에 사과했다. 그동안 박대준 전 대표가 청문회 등에서 뭇매를 맞고 있는 동안에도 김 의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정부의 압박이 거세지자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5만원 상당 속사정은? 김 의장은 지난달 28일 “쿠팡의 창업자이자 이사회 의장으로서, 쿠팡 전체 임직원을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저희의 책임으로 발생한 이번 데이터 유출로 인해 많은 분께서 자신의 개인정보가 안전하지 않다는 두려움과 불안을 느꼈고 사고 초기부터 명확하게 직접적으로 소통하지 못한 점으로 인해 큰 좌절감과 실망을 안겨 드렸다”며 “사고 직후 미흡했던 초기 대응과 소통 부족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한 달 만에야 입을 연 부분에 대해 “무엇보다 제 사과가 늦었다”면서 “모든 사실이 확인된 이후에 공개적으로 소통하고 사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돌이켜보면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비판과 질책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도 했다. 하지만 자체 조사 논란에 대해서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김 의장은 “쿠팡은 조사 초기부터 정부에 전면적으로 협력해 왔다”며 “일련의 과정에서 많은 오정보가 확산하는 상황에서도 정부의 ‘기밀 유지’ 요청을 엄격히 준수했다”고 주장했다. 김 의장의 사과는 국회 6개 상임위원회가 참여하는 대규모 연석 청문회를 이틀 앞두고 나왔다. 정부가 범부처 TF를 과기부 총리 산하로 확대하고 다각도로 압수수색과 조사를 진행하는 등 대응 수위를 높이는 상황에 압박을 느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그러나 사과와는 별개로 김 의장은 청문회에 불출석하겠다고 밝혔다. 김 의장뿐만 아니라 동생인 김유석 쿠팡 부사장, 강한승 전 쿠팡 대표 등이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하면서 쿠팡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여기에 쿠팡이 내놓은 보상안도 도마 위에 올랐다. 쿠팡은 지난달 29일 고객 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해 총 1조6850억원 규모의 보상안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전체적으로 보면 1인당 5만원 상당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쿠팡의 ‘꼼수’가 보인다. 청문회는 나 몰라라 보상안은 ▲쿠팡 전 상품 구매 이용권 5000원 ▲쿠팡이츠 5000원 ▲쿠팡트래블 2만원 ▲명품 플랫폼 알럭스 2만원 등으로 구성됐다. 소비자들은 보상금의 상당 부분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 등 평소 이용 빈도가 낮은 서비스 이용권 위주로 구성된 점을 지적했다. 실제 이번 보상안을 통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를 처음 알게 됐다는 소비자도 있다. 시민단체도 쿠팡의 보상안에 반발했다. 참여연대는 “1인당 5만원 보상이라고 했지만 현금이 아닌 구매 이용권으로 사실상 강제 소비를 유도하는 방식”이라며 “보상이 아니라 매출 확대를 위한 마케팅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논평을 발표했다. 쿠팡의 행보는 사사건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을 조롱하고 정부를 기만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쿠팡이 미국 시장에 상장한 기업이지만 매출 대부분을 우리나라에서 벌어들이는 상황인데도 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회원 탈퇴, 보상안 거부, 집단소송 참여 움직임이 거세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이재명 대통령도 쿠팡 사태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쿠팡 사태가 일어나고 사흘 뒤인 지난달 2일 “쿠팡 때문에 국민의 걱정이 많다”면서 “사고 원인을 규명하고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관계부처는 해외 사례를 참고해 과징금을 강화하고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도 현실화하는 등 실질적인 실효적 대책에 나서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뒤늦은 사과·꼼수 보상안 도마 위에 이래서 정치권 인사 영입했나? 의혹 12일에도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반복되는 것에 대해 “경제 제재가 너무 약해서 규정 위반을 밥 먹듯이 한다”며 “앞으로는 규정을 위반해 국민에게 피해를 주면 엄청난 경제 제재를 당해서 ‘회사가 망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규정을 위반하면 난리가 나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런데 위반해도 태도를 보면 ‘그래서 어쩔 건데’ 이런 느낌이 든다”고 지적했다. 정부도 쿠팡에 강력하게 경고하며 전방위 대응을 예고했다. 실제로 같은 달 29일,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부 장관 주재로 ‘쿠팡 사태 범정부TF’ 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과기부와 경찰청, 개인정보위원회, 금융위원회 등은 역할을 분담해 신속한 조사를 진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배 부총리는 “쿠팡이 국내 고객 정보 3000만건 이상을 유출한 것은 명백한 국내법 위반 사항으로 정부는 쿠팡이 관련 법령을 위반한 사실이 확인될 경우, 다른 기업과 동일하게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영업정지 여부도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압박에도 쿠팡이 연달아 이상한 행보를 보이자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 정도로 쿠팡의 현재 대응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쿠팡이 미국 기업인 것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증시가 쿠팡의 모든 결정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는 것이다. 실제 쿠팡이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한 다음 날 미국 뉴욕 증시에서 쿠팡의 주가는 6% 급등했다. 국내에서는 쿠팡의 ‘셀프 조사’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데 미국 시장에는 호재로 작용한 것이다. 쿠팡이 정치·국회 인사를 대거 영입한 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정치권 인사를 영입해 쿠팡 관련 각종 논란을 틀어막고 있다는 의혹이다. 해당 의혹은 ‘강력 경고’ ‘전방위적 대응’ 등의 수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 조사는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오는 배경으로도 꼽힌다. 변죽 울리다 무사통과? 실제 최근 원내대표직에서 사퇴한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국정감사를 한 달여 앞둔 시점에 박대준 전 쿠팡 대표 및 대관 총괄과 오찬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쿠팡이 일용직 퇴직금 미지급 사건에서 검찰 외압 의혹, 물류센터·배송 기사의 과로 및 산재 사망 문제가 제기된 상황이었던 만큼 적절성 논란이 불거졌다. 김 의원은 그달 16일 자신의 SNS에 “공개 일정이고 적어도 5명이 (함께) 식사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만남보다 대화의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니냐? 참고로 지난해 7월16일 쿠팡 물류센터도 방문했었다”고 적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