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머지? '감쪽같은' 머지 사태 수수께끼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1.08.23 16:46:03
  • 호수 1337호
  • 댓글 0개

팔아도 손해 보는 이상한 돈놀이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머지포인트 환불 사태가 터졌다. 일각에서는 예고된 수순이었다는 시선도 있다. 머지포인트의 경우 수익모델이 전무했다는 평가다.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머지포인트를 운영한 머지플러스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폰지사기란 고수익을 약속하며 돈을 끌어모은 뒤 처음 몇 달 동안은 약속한 대로 수익금을 주다가 잠적해버리는 사기 수법이다. 나중에 투자한 사람의 돈으로 먼저 투자한 사람에게 원금과 이자를 갚는 구조여서 더 많은 새로운 투자자가 생기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 또 투자자가 갑자기 대규모로 돈을 돌려달라고 하면 내줄 돈이 없어 불안정한 수익구조인 게 들통난다.

수익 약속
폰지 사건

이와 유사한 방식의 금융사건이 터졌다. 머지사태란 머지포인트 운영사인 머지플러스가 서비스를 축소하자 소비자들이 대거 환불을 요구한 사건이다. 환불처리 과정이 매끄럽지 못하자 폰지사기란 의혹도 나오고 있다. 

머지플러스는 지난 11일 공지를 통해 “서비스가 선불 전자지급 수단으로 볼 수 있다는 관련 당국 가이드를 수용해 적법한 서비스 형태인 음식점업 분류만 일원화해 당분간 축소 운영된다”며 “음식점업을 제외한 편의점, 마트 등 타 업종 브랜드를 함께 제공한 콘사(머지플러스와 제휴 브랜드·가맹점 사이를 중개하는 업체)는 법률 검토가 나올 때까지 당분간 서비스가 중단된다”고 밝혔다.

포인트를 지불할 수 있는 업체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자 불안하게 느낀 소비자들이 대거 환불을 요구했고 다음날인 12일부터 환불 절차가 진행됐다. 일부 고객은 결제액의 최대 90%에 이르는 금액을 환불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아직 입금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소비자들도 나타났다. 


네이버 카페 등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피해 규모와 환불 방법 등을 공유하는 내용이 수십건 올라왔다. 한 커뮤니티 이용자는 게시판에 글을 올려 “환불받았다는 사실을 제3자에게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한 뒤 일부 금액을 환불해줬다고 하는데, 서약서 내용을 보니 진짜 환불해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차후 법정에서 유리한 증거로 사용하기 위한 것 같다”고 토로했다.

머지포인트 피해자 단톡방에는 피해 인증 글도 올라오고 있다. 전자제품 매장에서 사용하기 위해 돈을 충전했다가 2300만원이 묶인 경우도 있었다. 머지플러스는 순차적으로 환불을 진행하고 있지만 처리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같은 시각에 접수해도 입금 여부가 엇갈리는가 하면 오프라인 환불과 온라인 환불 여부가 뒤섞이며 소비자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

머지플러스는 초창기부터 소비자의 관심을 끌었다. 사업 초기 업체별 적립 포인트와 쿠폰 등을 하나로 통합해주면서 젊은 소비층에 간편함으로 인기를 끌었다. 상품권 개념의 포인트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8년 말이다. 당시 1만원 포인트를 8500원으로 판매한다며 홍보했고 가맹점도 드롭탑, 설빙, 이디야 등 3개 업체에서만 결제가 가능했다. 

사업 초 다단계 형식으로 SNS 홍보
50만명 회원·1000억원 포인트 발행

머지플러스는 사업 초기 SNS 공유 이벤트를 활용해 머지포인트를 홍보했다. 일종의 다단계 방식의 홍보가 꽤 효과적이었다. 댓글로 상품 구매 인증을 하고 SNS에 공유할 시 1000포인트, 3장 이상 구매하고 SNS로 인증할 시 1만원 포인트를 증정하는 방식이었다.

2019년 1월 본격적인 서비스를 시작했다. 티몬을 중심으로 이커머스 업체들을 통한 ‘핫딜’이 자주 노출됐다. 포인트 판매금액은 1만원에서 5만원(3만9900원)으로 올라갔고 제휴업체도 기존 3곳에서 셀렉토커피 한 곳이 추가됐다. 

본격적으로 제휴 매장이 늘어난 시점은 2019년 8월경이다. 당시 편의점 GS25를 비롯해 유가네닭갈비, 탐앤탐스, 카페베네, 매드포갈릭 등 인지도가 있는 프랜차이츠로까지 제휴 매장이 늘어났다. 2019년 하반기부터 10만원 딜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주 판매처인 이커머스 업체에서는 딜이 올라오면 매진될 정도로 입소문을 탔다.


제휴 가맹점은 계속해서 늘어났고 2020년 3월 기준 제휴 매장은 2만개를 넘어섰다. 파리바게뜨와 뚜레쥬르도 가맹점에 포함되면서 신뢰를 쌓았고 ‘딜’이 뜨면 포인트를 쌓아두는 사람이 많아진 것도 그 무렵이다. 이용자가 늘면서 머지플러스는 할인율을 13%로 줄였다.

당시 소비자들 사이에선 “10% 할인으로 바뀔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때문에 딜이 뜨면 몇십만원에서 수백만원까지 포인트를 쌓아두는 소비자들도 생겼다. 

할인 폭은 다시 18%로 커졌고 2020년 10월부턴 20만원권 판매가 시작됐다. 한 달 뒤 50만원짜리 딜이 나왔다. 최근까지 머지플러스는 소액 딜보단 20만원, 30만원대의 높은 금액 위주의 딜을 판매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말기술
속았다

머지플러스라는 구독 서비스를 론칭한 것도 최근이다. 월 1만5000원을 내면 머지포인트를 20% 할인된 가격으로 자동 구매해서 대신 결제해주는 시스템이다. 1년에 약 18만원인 해당 서비스를 2~3년 장기 계약한 사람도 있었다. 연간 회원권 판매에는 하나멤버스, 페이코, 토스 등과 같은 금융사들과 제휴돼 소비자를 끌어들였다는 분석이 나왔다.

머지포인트 사용자 통계 결과, 월간 결제 이용객이 50만명이 넘었으며 1000억원대 규모의 포인트를 발행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폰지사기 등의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제휴 가맹점 수를 보면서 신뢰할만한 플랫폼이라고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업계에서 제휴사 할인을 하는 곳은 많았지만 머지포인트처럼 높은 활인율을 제공하는 쉽게 찾을 수 없다. 머지의 수익구조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일반적인 10만원 상품권이 유통된다고 가정하면 상품권업체가 가맹점으로 약 5% 할인된 가격(9만5000원)에 판다. 이후 소비자는 가맹점으로부터 9만8000원에 상품권을 구입한다. 소비자가 상품권으로 소비하면, 상품권 업체는 2~3개월간 현금을 보유한 뒤 여기에 약 2% 수수료를 제외하고 가맹점에게 상품권과 맞바꾼 대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머지포인트는 어떨까. 20%의 높은 할인율을 유지하기 위해선 회사가 적자를 감당해야 하는 수익구조다. 10만원 이상의 고액 전자상품권 판매로 인지세도 발생한다. 여기에 결제 수수료도 생긴다. 대형 프랜차이즈 가맹점이 결제대행업체를 통해 대금을 지급하는 것과 달리 머지포인트는 결제대행업체에도 대금 지급 수수료를 납부하고 있는 셈이다.  

머지포인트는 판매량이 늘어날수록 회사가 손해 보는 구조다. 가맹점을 유치하는 상품권 사업자를 중간에 낀 유통 구조로, 할인분 상당액을 머지플러스가 부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권남희 머지플러스 대표는 ‘계획된 적자’라고 밝힌 바 있다. 아마존, 쿠팡 등의 성장방식을 벤치마킹 해 적자를 감수하더라도 생태계를 키운 다음 돈을 벌 계획이었다. 

포인트 장난
서비스 축소

업계 관계자는 “해피머니 등 대부분 상품권업체는 인지세 문제로 10만원 이상 고액 상품권 발행은 하지 않는다”며 “머지포인트 자체로는 돈을 벌 길이 없고 투자자 발굴을 통해 새 수익처 확보를 노린 것으로 보이지만 구멍이 너무 많아 쉽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고 전했다.  


머지포인트 역시 회원 수와 거래 규모만 가지고는 뚜렷한 이익창출이 어려웠기 때문에 이 같은 방식으로 성공한 스타트업인 쿠팡, 아마존과 같은 행보를 꿈꿨다는 분석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금 30억원 뿐인 회사가 1000억원대 규모의 거래액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사업자 발행액은 지난 6월 기준 월 400억원, 현재 시중에 유통된 머지포인트 발행액은 최소 1000억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이에 따라 누적순손실 예상액 200억원에 직원 70여명의 인건비 등 사업 운영비만 연간 수십억원이 발생하고 있지만 수익을 창출한 비즈니스모델(BM)이나 신규 투자 유치는 드러난 게 없다.

업계에서는 회사 운영 자금이 대부분 고객 예치금에서 나온다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간편결제 전문가들은 막대한 포인트 혜택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손실 규모가 엄청나게 불어났지만 이를 해결할 수익모델이나 대안이 없어 자칫 불법 폰지 행위로 법적 문제가 커질 소지가 다분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전자금융사업자가 아닌 상황에서 회사 도산 등 자금 경색이 발생할 경우 제도적 지원을 받을 수 없다.

결국 이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의 몫이 될 거란 우려도 나온다.

또 머지플러스가 그동안 전자금융업자의 라이선스를 획득하지 않고 포인트를 발행하며 영업해온 것이 드러났다. 무려 3년간 전금업자로 등록하지 않은 채 사업을 이어왔다. 이에 대해 머지플러스는 ‘상품권 발행업’으로 영업활동을 해왔다고 해명했으며 자사가 제공하고 있는 포인트와 서비스를 ‘모바일상품권’이라고 설명했다.


아마존·쿠팡 등 벤치마킹 
신규 투자 알려진 게 없어

상품권법은 1999년 폐지돼 소비자를 위한 법적 안전장치가 없다. 게다가 기업들이 인지세만 낼 경우 무제한으로 발행할 수 있어 사실상 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현재 머지플러스 사용자와 가맹점주들이 환불울 요구하고 있으나 규정대로 환불을 받을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머지플러스 사업은 전자 금융업자에 해당된다. 전자금융거래법에 따르면, 전자 금융업자의 업무에는 선불전자 지급수단의 발행 및 관리가 포함된다. 선불전자지급수단은 이전 가능한 금전적 가치가 전자적 방법으로 저장돼 발행된 증표 또는 그 증표에 관한 정보로, 금감위 등록 대상이다. 

또 선불전자지급수단으로 구입할 수 있는 재화 또는 용역의 범위가 두 개 업종 이상이다. 머지플러스의 경우 ‘머지머니’라는 포인트가 선불전자지급수단에 해당되며, 포인트로 약 2만개 가맹점에서 물건이나 서비스 등을 구매할 수 있다.

그런데도 머지플러스는 왜 전자 금융업자로 등록하지 않은 것일까. 전자 금융업자는 사용자들의 예치금을 보유하는 만큼 금융당국의 엄격한 관리 감독을 받는다. 기본적으로 전자 금융업자는 금융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자본금, 재무 건전성, 사업계획 등의 등록 요건을 갖춰야 한다. 부채비율을 자기자본의 200%로 유지해야 하며, 선불전자지급수단 충전 한도는 200만원으로 제한된다. 충전하고 사용하지 않은 미상환 잔액 대비 자기자본 비율을 20% 이상 유지해야 한다.

이를 두고 금융당국의 감시망을 피해 상품권업으로 규제를 피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금융당국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자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지난 17일 검찰과 경찰에 머지포인트 사태를 통보했다”고 밝혔다. 이어 “머지플러스가 금융당국의 자료 요구에 응하지 않거나 거짓 자료를 내더라도 금감원이 이행을 강제할 수 없기에 수사기관에 통보했다”며 “수사기관 통보는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어 기다렸으나 이용자의 환불 요구가 쇄도해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본격적으로 머지플러스 대상으로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에 대해 내사에 착수했다. 내사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가 맡았다. 

계획된 적자?
환불 어떻게?

전자상거래 전문가인 권혁중 경제평론가는 “머지플러스는 수많은 고객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투자를 유치하는 게 최종 목표였던 것 같은데, 그 전에 판매중단 이슈가 터져버린 것”이라며 “지금까지 알려진 수익구조로는 환불 등 뒷감당이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이어 “일부 테크핀(IT기술을 금융에 접목) 업체들은 기술개발은 굉장히 빠른 반면, 금융법 제도에 대해선 무지하거나 등한시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