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법적 족쇄’ 풀린 이완구 전 국무총리의 5년의 기록

망자는 말이 없다 검찰도 말이 없다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 기자 =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사실상 정치인으로서 막을 내리게 됐다. 그는 2015년 ‘성완종 게이트’로 불법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2017년 대법원서 무죄를 최종 선고받았다. <일요시사>는 유력한 ‘충청도 잠룡’으로 꼽혔던 그의 지난 5년 간의 몰락과 기사회생을 조명해봤다.
 

▲ 이완구 전 국무총리 ⓒ나경식 기자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가 대법원서 무죄가 확정된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형사보상금 600여만원을 받게 됐다. 지난 5일 서울고법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무죄를 최종 선고받은 이 전 총리에게 형사보상금 619만원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1심 유죄
대법 무죄

형사보상제도란 무죄 판결이 확정된 경우에 형사재판 당사자가 쓴 재판 비용을 국가가 보상해주는 제도다. 이 전 총리는 2013년 4월4일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출마 당시 충남 부여읍에 있는 자신의 사무소서 성 전 회장으로부터 3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2015년에 재판에 넘겨진 바 있다.

이번 대법원의 무죄 확정으로 5년에 걸친 이 전 총리의 재판 대장정은 매듭을 짓게 됐다.

2015년 4월15일 <경향신문>은 성 전 회장과의 생전 마지막 전화 인터뷰 전문을 전격 보도했다. 성 전 회장이 전·현직 청와대 비서실장 등 현 정부 실세들에게 금품을 제공했다는 충격적인 보도였다. 해당 인터뷰서 성 전 회장은 “이완구도 지난번에 보궐선거 했잖습니까. 선거사무소에 가서 내가 한나절 정도 있으면서 한 3000만원 주고”라고 발언해 정치권에 논란이 크게 일었다.


성 전 회장은 당시 자원외교 비리 혐의로 검찰수사를 받던 중이었지만 인터뷰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망 후 성 전 회장 상의 주머니에는 ‘허태열 7억, 홍문종 2억, 홍준표 1억, 유정복 3억, 부산시장 서병수 2억, 김기춘 10만달러 2006년 9월26일, 이병기, 이완구’라는 내용이 적힌 메모가 발견됐다. 거물급 정치인 8명의 이름이 적힌 메모가 발견되자, 검찰은 ‘성완종 리스트 특별수사팀’을 꾸려 수사에 나서게 된다.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이 전 총리는 정치자금 수수 의혹과 관련해 “성 전 회장과 친밀한 관계가 아니다. 성 전 회장으로부터 3000만원을 받았다는 의혹과 관련해 증거가 나오면 목숨을 내놓겠다”며 완강히 결백을 주장했다.

2015년 ‘성완종 리스트’ 정자법 위반 혐의
총리직 64일 만에 사임…역대 최단 불명예

하지만 2013년 성 전 회장과 이 전 총리의 부여 선거사무실 독대 정황을 뒷받침하는 증언이 나오고, 이 전 총리가 성 전 회장과 수백차례에 걸쳐 통화한 기록이 공개되면서 비난 여론은 더 거세졌다. 이 전 총리의 잦은 말 바꾸기와 거짓말 의혹이 더해지면서 그의 정치적 도덕성에는 크게 흠집이 났다.

논란이 계속되자 이 전 총리는 공식 취임 후 64일 만에 국무총리 사임의 뜻을 전격 발표하기에 이른다. 당시 이임식서 이 전 총리는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는 당시 “짧은 기간 최선을 다했으나 주어진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떠나게 돼 무척 아쉽게 생각하며, 해야 할 일들을 여러분께 남겨두고 가게 되어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이로써 그는 역대 최단명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이후 검찰은 이 전 총리의 혐의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확인됐다며 같은 해 7월 이 전 총리를 불구속 기소했다.

2016년 1월, 1심서 이 전 총리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서울중앙지법은 “성완종이 피고인에게 3000만원을 건넸다는 인터뷰 내용과 정황 증거, 관련자 진술이 부합한다”며 이 전 총리의 혐의를 유죄로 보고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3000만원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성 전 회장이 사망해 법정서 직접 진술하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전화 인터뷰 내용을 형사소송법에 따라 증거로 인정할 수 있다고 간주했다. 성 전 회장의 진술 내용을 녹취하는 과정에 허위 개입의 여지가 거의 없고 진술 내용의 신빙성을 담보할 구체적 외부 정황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막 내린
충청 잠룡

재판부는 “성완종이 피고인에 대한 배신과 분노의 감정으로 모함하고자 허위 진술을 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게 하기도 하지만, 기자로부터 정권 창출 과정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설명해달라는 질문을 받고 금품 공여 사례를 거론한 문답 경위가 자연스럽다”고 판단했다.

또 검찰이 지목한 금품 공여 시점에 관해 성 전 회장 비서진들의 진술이 모두 일치하고 평소 재무본부장이 성 전 회장의 지시를 받아 금품을 포장한 방식, 사건 당일 오전 비서진이 성 전 회장 지시로 재무본부장에게 쇼핑백을 받아 차에 실었다는 진술 등이 모두 성 전 회장 진술과 딱 들어맞는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들이 진실이 드러나면 위증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서 부담감을 이겨내고 허위진술을 할 가능성은 생각하기 어렵다”며 “비서진들의 진술을 믿지 않을 수 없다”고 최종 결론지었다.

이 전 총리는 1심 재판이 끝난 뒤에도 무죄를 주장했다. 그는 “항소심서 다투겠다. 재판부가 검찰 주장을 토씨 하나 안 빠뜨리고 다 받아들였지만 나는 결백하다”며 “이 모든 수사 상황을 백서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1심서 유죄를 선고 받은 이 전 총리는 같은 해 2월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그는 2015년 12월, 항소심을 준비하며 과거에 앓았던 혈액암이 재발하게 된다. 앞서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판정을 받아 출마를 포기한 뒤 투병생활을 했던 바 있다. 이후 지속적으로 정기검사를 받던 도중 검사에서 암세포가 발견되면서 항소심 재판 기일이 연기되기도 했다.

같은 해 9월에 선고된 항소심은 1심을 뒤집고 이 전 총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심은 1심과 달리 성 전 회장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 녹음 파일과 메모 등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서울고법은 성 전 회장의 대화내용 녹음파일 사본 및 녹취서, 성 전 회장이 작성한 메모 사본 등에 대해 “이 전 총리가 이를 증거로 동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래 진술자인 성 전 회장도 숨져 진정 성립 여부를 진술할 수도 없으므로, 유죄의 증거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특신 상태’가 증명돼야 한다”며 증거 능력을 인정할 수 없는 이유를 밝혔다.

쪽지 메모
증거능력 없다

특신 상태는 ‘특별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를 이르는 말로, 진술해야 하는 당사자가 사망했거나 질병·외국 거주·소재불명 등 이유로 진술이 불가능할 때는 특신 상태가 인정된 진술·문건 등에 한해서만 증거 능력이 인정된다.

재판부는 “성 전 회장의 대화내용 녹음파일 등에서 나온 진술 중 이 전 총리와 관련된 진술 부분은 허위 개입의 여지가 없거나 진술 내용의 신빙성·임의성을 담보할 구체적이고 외부적인 정황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를 배제할 정도에 입증됐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또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적힌 다른 사람들의 경우 이름과 함께 금액이 기재돼있고, 날짜 등이 적혀있기도 하지만, 이 전 총리에 대해서는 오로지 이름만이 적혀 있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 아울러 경남기업 수사를 받고 있던 성 전 회장이 당시 이 전 총리에 대한 분노와 원망의 감정을 갖고 있었던 만큼 이 전 총리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판결 직후 이 전 총리는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친 점 마음이 많이 무겁고 송구스럽다는 말씀드린다. 재판부 결정에 경의의 말씀드리고 진실을 밝히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직 3심이 남았으니 최선을 다해서 준비를 하겠다”고 언급했다.

2017년 12월, 대법원은 이 전 총리에게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이 전 총리가 성 전 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혐의가 인정될 정도로 증명되지 않았다며, 무죄로 판단한 원심을 그대로 인정했다.

당시 재판부는 “형사재판서 범죄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확신을 갖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엄격한 증거에 의해야 한다”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합리적 의심 없이 공소사실이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고 본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고 밝혔다.

성 전 회장의 인터뷰 진술과 성 전 회장이 작성한 메모는 성 전 회장이 사망 전에 진술하거나 작성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서 이뤄졌음이 증명된 때에 한해서 증거로 삼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1심 후 혈액암 재발
'정치 야인’의 길로


대법원의 무죄 판결로 기사회생하면서 명예 회복 차원서 정치를 재개할 것으로 예상됐다. 21대 총선서 대전, 세종, 충남 지역구 중 가장 파급력이 강한 곳에 출마할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받았다.

하지만 일각의 예상을 깨고 이 전 총리는 지난 1월 입장문을 통해 불출마 및 정치 일선서 물러날 것임을 발표했다. 그는 “오는 4월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 정치일선서 물러나 세대교체와 함께 인재충원의 기회를 활짝 열어주는 데 미력이나마 기여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 전 총리는 “20대 초반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출발한 공직은 3선 국회의원, 민선 도지사, 원내대표, 국무총리에 이르기까지 45여년의 긴 세월이었다”고 지나온 길을 되짚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은 상생과 협치의 가치구현을 통해 국민통합에 매진해주고, 야권도 타협과 똘레랑스 가치를 되살려야 한다”며 상생과 통합을 호소했다.
 

이 전 총리는 입장문을 통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석방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는 “3년여 동안 고통 속에서 지내는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이 서둘러 이뤄지길 고대한다”며 “모쪼록 자유우파가 대통합을 통해 분구필합의 진면목을 보여주길 염원한다”고 보수대통합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 총리는 1974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행정과 치안서 두루 공직경험을 쌓았다. 제15대 국회에 입성해 16대 재선에도 성공했다. 이 총리는 3선에 나서지 않고 2006년 당시 한나라당 소속으로 충남지사에 당선됐다.

하지만 이명박정부가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한 데 반발해 지사직을 전격 사퇴한다. 이후 이 총리는 2013년 4·24 재보선서 정계 복귀에 성공하며 미래통합당의 전신인 새누리당 원내대표에 올랐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 얼어붙은 여야 대치정국서 ‘세월호 특별법’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기사회생
정치 재개?

정치인으로서 탄탄대로를 걸었던 그는 보수 진영 내의 충청도 ‘정치 거물’로 충청 대망론에 불을 지필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성완종 게이트’ 이후 엄청난 후폭풍을 겪으며 정치 야인의 길을 걷게 됐고, 21대 총선 불출마로 정치인으로서 막을 내리게 됐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