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들의 ‘고무줄 나이’ 왜?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19.06.24 10:53:36
  • 호수 12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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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임’ 다가오니 ‘생년’ 슬쩍~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주머니 털어도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했던가. 청렴결백해야 할 공무원들이 꼼수를 부리고 있다. 편법으로 정년퇴임 시기를 늦추는 공무원에 대해 <일요시사>가 알아봤다. 
 

▲ 본 기사는 특정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월급쟁이들에게 정년은 유효기한을 의미한다. 정년이란 공무원이나 회사의 직원이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퇴직하도록 정해진 연령을 뜻한다. 현재 공무원 정년퇴직 나이는 국가공무원 법령 제74조에 의해 60세로 정해져 있다. 

꼼수

최근 공무원들이 정년퇴임을 늦추기 위해 나이를 변경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공무원 A씨는 “안정적인 조직 관리를 위해 정년에 가까운 나이를 배려해 승진자를 결정한다. 나이로 배려를 받은 승진자가 승진하고 나면, 나이를 1~2살 줄여 승진 인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며 위례시민연대에 제보했다. 

이에 위례시민연대는 올해 5월15일부터 6월15일까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중앙부처 국가공무원, 지방자치단체 지방공무원, 교육 자치단체 지방공무원 등 공무원 나이 변경 실태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승진한 공무원들이 정년퇴임을 늦추기 위해 나이를 줄이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의혹이 제기됐다. 


이번 조사에 따르면 2015년 1월부터 2019년 5월까지 152명의 공무원이 나이를 변경했다. 이 중 146명(96%)이 나이를 평균 12.6개월로 줄였다. 2년 이상 줄인 공무원은 총 20명(중앙부처 4명, 지방자치단체 16명)이었다.

해당 기간에 나이를 줄인 146명 중 60%를 차지하는 87명(중앙부처 4명, 지방자치단체 82명, 교육자치단체 1명은 승진하고 나서 나이를 줄였다. 가장 많이 줄인 경우는 서울 동작구 공무원이 2016년 10월에 원래 나이보다 무려 43개월을 줄였다. 

실제로 2015년 1월 5급으로 승진한 구로구청 공무원 B씨는 그해 9월 자신의 출생연월일을 1956년 11월서 1958년 1월로 바꿨다. 정년을 1년 3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나이는 59세서 57세가 됐고, 정년은 2016년 12월서 2018년 6월로 1년6개월 늦춰졌다. B씨는 원래 정년인 2016년 12월에 퇴직했다.

그러나 늘어난 정년보다 앞서 퇴직하는 형식이 되면서 일반 퇴직이 아니라 명예퇴직이 됐다. 일반 퇴직자들이 못 받는 퇴직금까지 챙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해당 직급서 1년 이상 근무한 명예 퇴직자는 한 직급 올린다는 규정에 따라 5급이 아니라 4급으로 공직을 마쳤다.

5년간 96% 편법으로 ‘어리게’
무려 43개월이나 줄여 적발도

위례시민연대는 공무원 연령 변경 신청에 대해 엄격하게 허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가정법원에 연령정정신청을 해 나이를 변경할 수 있다. 

호적상 출생연월을 수정하는 절차는 간단하다. 변경을 원할 경우, 관할 가정법원에 가족관계등록부정정허가 신청서를 제출하면 된다. 단, 호적상 날짜와 실제 태어난 날짜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서류가 필요하다. 족보나 출생증명서, 백일 사진 등 출생연월일을 소명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면 된다. 


위례시민연대 관계자는 “우리사회는 한국전쟁 이후 늦장 출생신고로 인해 실제 나이보다 1~3세 적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공무원 사회에서는 오히려 실제 나이보다 많은 경우가 많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며 의구심을 나타냈다. 

이어 “설령 실제 나이가 많아 줄였다 할지라도 오랜 세월 공신력을 갖고 행사했던 나이를 왜 굳이 이제 와서 공무원 말년에 바꾸려고 하는지 진정성이 의심스럽다. 특이한 점은 정년이 62세인 교원(교육공무원)이 나이를 변경한 사례는 없다. 정년퇴직을 늘리기 위해 나이를 낮추는 얌체 공무원들의 행태는 성실한 후배 공무원들의 승진 기회를 박탈하고 조직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공무원들이 정년퇴임을 앞두고 나이를 낮추는 데는 과거의 판결사례가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2년 전 호적변경으로 나이가 한 살 어려졌다면, 정년 역시 그에 맞춰 1년 연장돼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는 “정년제란 근로자가 일정 연령에 도달할 것을 이유로 해당 근로자의 근로계속 의사나 능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근로관계를 종료시키는 제도나 관행을 말한다”며 “근로계약서 정년을 정할 경우 정년퇴직일은 생물학적 연령을 토대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규범적 기준으로 판단돼야 할 근로계약 요소”라고 판결했다. 

5년 전에도 유사한 판결이 나왔다. 가족관계등록부상 생년원월이 변경됐다면 바뀐 나이 기준으로 정년 퇴직일을 정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판결은?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2부(부장판사 마용주)는 서울메트로 직원 B씨가 “정정된 생년월일 기준으로 정년 퇴직일을 정해야 한다”며 회사 상대로 내 정년확인 청구소송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2014년 9월 밝혔다. 이수정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서 “실제 나이를 증명해 줄 서류가 충분하다면 보통 2~3개월이면 허가가 나온다”고 말했다. 
 

<9do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정년 연장’ 외국은?

정년연장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외국의 사례에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저출산·고령화를 경험한 일본은 ‘70세 정년’을 계획을 세웠으며 독일도 정년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미국과 영국은 정년을 폐지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달 15일 아베 신조 총리 주재로 열린 미래 투자 회의에서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70세까지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고령자고용안정법’ 개정안을 확정하고, 내년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개정 법률이 발효되면 기업들은 현행 65세인 정년의 연장·폐지 또는 퇴사 후 재고용, 다른 회사 재취업 및 창업 지원을 위한 노력 등을 해야 한다. 


독일도 현재 65세인 정년을 2029년까지 67세로 연장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연금 등 국가 재정 부담을 완화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부족해진 숙련공의 기술 노하우를 더 활용하자는 취지도 반영됐다. 

미국은 1986년 정년제를 없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퇴직시키는 것은 또 하나의 차별’이라는 여론을 반영했다. 영국도 2011년 같은 이유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년을 폐지했다.

다만 이들 영미권 국가는 고용상황이 한국이나 일본과는 상이하다. 미국은 기업이 근로자에게 사전통지 없이 고용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임의고용 원칙이 통용되는 국가다.

영국 역시 1980년대 성과주의 임금제도가 자리 잡아 기업의 고령자 고용이 큰 부담이 되지 않는 환경이다. 

사상 최고 수준의 청년실업률, 국민연금 조기 고갈 우려 등을 참작할 때 이들의 사례를 바로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지금의 연공서열 체계에선 기업이 정년 연장을 꺼릴 수밖에 없다. 정년을 연장하더라도 기업은 청년층 채용을 줄이는 식으로 대응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3년 60세 정년연장을 추진할 때 임금피크제를 놓고 노사 갈등이 격화된 바 있다.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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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