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대선주자 7인 현미경 검증 ②정치입문

하늘이 점지한 나랏님은 누구?

[일요시사=서형숙 기자] 오는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의 대선 주자들이 치열한 대권 레이스를 벌이고 있다. 상대를 이겨야 웃을 수 있는 치열한 레이스에서 최후에 웃게 될 자는 누가 될 것인지에 벌써부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일요시사>는 여(박근혜?김문수?정몽준)와 야(문재인?김두관?손학규) 6인과 비정치권 주자로 안철수 원장을 유력 대선주자로 선정해 검증하기로 했다. 앞서 출생과 성장과정을 살펴본데 이어 두 번째로 정치입문 과정과 배경을 들여다봤다.

흔히 ‘나랏님은 하늘이 점지한다’고 했다. 이는 대통령을 ‘하고 싶다고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져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민심이 곧 천심’임을 감안하면 대통령이 되기 위해 능력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마음을 얻는 것 역시 중요하다. 때문에 잠룡들은 민심 속으로 파고들며 국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특히 자신이 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인생스토리는 민심을 동할 수 있는 좋은 소재이기도 하다. 갖가지 다른 인생역정을 걸으며 대망을 향해 나아가는 잠룡들. 이들은 과연 어떤 연유로 정계에 첫발을 내딛게 됐을까.

<모락모락> 이회창과 비밀회동 후 달라진 박근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대행했던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은 처음부터 정계에 발을 담갔던 것은 아니다. 박 전 위원장은 지난 1979년 10월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되자 청와대를 떠나 재단운영에 전념했다. 그는 1980년 영남학원?1982년 육영재단?1994년에 정수장학회 등을 위임받아 운영한 것. 당시 박 전 위원장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정치적 발언은 삼가며 은둔생활을 했다.

하지만 각 재단마다 운영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영남대학은 전형적 사학비리가 터졌고, 육영재단은 운영권을 두고 혈육 간의 암투가 벌어졌다. 논란이 불거지자 박 전 위원장은 재단에서 전면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재단의 비리전력은 후일 박 전 위원장의 아킬레스건으로 계속해서 따라붙게 됐다.


그러던 중 지난 1997년 대한민국의 초유의 사태인 IMF시대를 맞이했다. 이에 박 전 위원장은 “아버지가 일으켜 세운 나라가 IMF 사태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본격 정치권에 참여 의사를 밝혔다. 이러한 정계 입문배경을 두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것이 중론이다.

15대 대선 당시 TK(대구?경북)의 표심을 흔들 적임자로 박 전 위원장이 지목됐다. 이에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가 박 전 위원장을 포섭하기에 이른다. 1997년 12월2일 박 전 위원장과 이 후보는 비밀회동을 가졌다.

회동내용은 비밀에 부쳐졌지만 이듬해 2월 박 전 위원장이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달서군에 공천을 받으며 그 내용을 짐작케 했다. 그해 4월 박 전 위원장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며 본격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한나라당은 탄핵 역풍와 더불어 차떼기 사건이 불거지며 지지율이 유례없는 급락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박 전 위원장이 당 대표로 추대되며 17대 총선을 진두지휘했다. 한나라당은 원내 1당 자리는 내주었지만 121석을 차지하여 예상외의 선전을 하였다. 이때부터 박 전 위원장은 ‘선거의 여왕’으로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고 잠재적 차기 대권주자로 급부상했다.

<무럭무럭> 2002월드컵 광풍 등에 업은 정몽준

‘7선 파워’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은 대학과 유학을 마치고 아버지가 창업한 기업에서 경영수업을 받으며 전형적인 재벌2세 코스를 밟았다. 그런 그가 정치권의 문을 두드린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아버지가 정 의원의 정치적 재능을 발견하고 권유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에 정 의원은 1984년 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무소속 출마를 결심했다. 하지만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무소속 출마를 용납하지 않으며 정 의원은 유학길에 올랐다. 세계정세를 체득한 후 한국으로 돌아온 정 의원은 13대 총선에서 울산 동구에 무소속으로 출사표를 던져  당선됐다. 그는 계속해서 울산에서 내리 5선에 성공했지만 정치인으로서의 뚜렷한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대한축구협회장과 피파(FIFA) 부회장으로 2002년 월드컵을 성공리에 마치면서 국민 여론조사에서 대선후보 1위로 치솟았다. 월드컵의 광풍을 업고 한순간 신드롬의 주역으로 떠오른 것. 정 의원은 내친김에 국민통합21을 창당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정 의원은 노무현 민주당 후보와 후보단일화에 합의했다.

여론조사에서 패한 정 의원은 노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왔지만 대선 바로 전날 밤 노 후보에 대한 지지를 갑작스레 철회했다. 이것은 그의 정치생명에서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오점으로 남은 상태다. 

<기세등등> YS 손잡고 제도권 안착한 김문수

서민의 아들로 잡초처럼 자란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가로 활약해왔다. 80년대 이후 독재정권이 서서히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정착하면서 재야에서 활동하던 운동가들이 자연스럽게 제도권 내로 진입할 때 김 지사도 정계에 발을 들였다.

1990년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과 함께 민중 중심의 좌파정당을 지향한 민중당을 만든 것. 여기서 김 지사는 민중당 구로갑지구당 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민중당 노동위원장으로 선임되고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그러던 중 김영삼 전 대통령의 눈에 띈 김 지사는 “혁명의 시대는 갔다”는 말을 남기고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이하 민자당)에 입당했다. 1994년 창당한 민자당은 이듬해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자 신한국당으로 개명한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선거패배로 당을 쇄신하기 위해 구 민정당, 공화당계 인사를 몰아내고 이재오·김문수 등 민중운동, 노동운동 출신 인사들과 홍준표·맹형규 등 당시 스타급 신인정치인들을 영입한다. 김 지사도 이때 함께 영입됐다. 

지사는 이 신한국당 공천으로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부천시 소사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됐다. 이후 당이 김영삼 체제에서 이회창 체제로 바뀌고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바꾼 뒤에도 계속 활동하였다.

<꿈틀꿈틀> 친노진영 대안론에서 대망론 꿰찬 문재인

‘노무현 그림자’ 문재인 민주통합당 의원은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며 변호사의 길을 걸어왔다. 문 고문은 사법시험 동기생인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소개로 당시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 법무법인 부산에 합류했다. 이때 맺은 인연을 계기로 문 고문은 노 전 대통령과 30년 가량 가장 가까이에서 친한 친구이자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앞서 노 전 대통령이 정계에 진입해 ‘청문회스타’가 된 뒤에도 문 고문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지난 2002년 6?13 부산시장 선거를 앞두고, 노 전 대통령이 몇 차례 부산시장 출마를 권유했음에도 자신을 참모용에 빗대며 한사코 출마를 고사했다.

참여정부가 들어서자 문 고문은 초대 민정수석을 지냈으나, 녹내장과 고혈압 등 건강악화로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이후 그는 네팔 산행 도중 영자신문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듣고 달려와 변호인단을 꾸렸으며,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을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냈다.


문 의원은 지난 2009년 노 전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서거하자 장례절차에 관련한 모든 일을 도맡으며 주목받았다. 특히 6?2 지방선거에서 유시민 전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가 낙선하자 친노진영에서는 유 전 대표의 ‘표의 확장성 한계’로 문 고문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의 저서 <문재인의 운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이어 ‘문사모’ ‘젠틀재인’ 등 팬카페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며 대망론까지 일었다. 한사코 정치를 거부하던 문 의원은 MB정권 심판과 정권교체를 위해 PK 공략을 진두지휘하겠다며 지난 4월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사표를 던졌다. 여기서 당선된 문 의원의 현실정치도 본격 시작됐다.

<차근차근> 이장?군수에서 장관?도지사 누빈 김두관

‘리틀 노무현’ 김두관 경남도지사는 민통련에 가입하고 간사 활동 중 개헌추진본부 충북지구 결성대회 주도 혐의로 구속됐다. 김 지사는 감옥에서 고향으로 돌아가 농민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실제로 그는 동아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낙향해 남해농민회를 조직하며 농민운동을 했다.

그는 고향 이어리에서 이장을 맡았고, 곧 <남해신문>을 창간해 직접 신문을 배달하며 마을 주민들과의 소통해 나갔다. 이 같은 행보는 이후 김 지사가 37세의 최연소로 남해군수 당선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는 1995년 초대 지방선거와 1998년 2대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남해군수에 당선된 것.

김 지사는 지난 2002년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권유로 고심 끝에 민주당에 입당해 경남도지사에 출마했다. 당초 무소속으로 도지사에 출마하려 했으나 노 후보의 끈질긴 설득 끝에 민주당에 입당했고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다. 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참여정부가 출범하며 이장 출신의 김 지사는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발탁되며 파격 인사로 관심을 끌었다.


이후 김 지사는 계속해서 PK지역에 출사표 내던졌지만 고배를 마셨다. 수차례 실패에도 결코 영남을 포기하지 않았던 노 전 대통령의 행보와 닮았다는 이유에서 사람들은 그를 '틀 노무현'로 부른다. 마침내 김 지사는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야권단일후보로 경남도지사에 출마해 당선됐다. PK경쟁력을 확보한 탓에 그는 여권의 강력한 경계를 받는 잠재적 대선후보로 분류되고 있다. 

<반짝반짝> 투사에서 교수까지…화려한 스펙 자랑 손학규

민주화 투사였던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1980년 ‘크리스천 에이드’라는 교회단체의 장학금을 받아서 영국 옥스퍼드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손 고문은 귀국한 뒤 인하대?서강대에서 정치학 교수를 역임했다.

재야의 대표적인 인사였던 손 고문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했다. 당시 손 고문은 정치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하며 민자당에 입당하며 본격적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지난 14대 총선 보궐선거를 통하여 경기도 광명에서 국회의원이 되었고, 제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의원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이후 YS 문민정부에서 최연소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됐다. 손 고문은 제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당선되어 3선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2002년에는 민선 3기 경기도지사가 되었다.

민주화 투사경험과 정치학 교수?3선 의원?장관?경기도지사까지 화려한 이력은 그를 차세대 지도자 반열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의 빅3로 꼽히던 손 고문은 전격적으로 탈당을 감행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탈당전력은 이후 손 고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며 오점으로 남은 상태다.

한나라당과 결별한 손 고문은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하는 데 역할을 하였으나 대선후보 경선에서 당시 정동영 후보에게 석패했다. 하지만 손 고문은 2008년 1월에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표로 선출된데 이어 지난 2010년 10월에도 민주당 대표로 선출되며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두근두근> 열렬한 국민적 지지로 떠오르는 안철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정치권 인사가 아니면서 정치권에서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인물이다. 난공불락 ‘박근혜 대세론’을 무너뜨린데 이어 박원순 서울시장의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하며 정치권에 메가톤급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서다.

안 원장은 그간 의사에서 프로그래머, 벤처사업가이자 대학교수로 활동하며 지속적인 변화와 끊임없는 노력을 거듭했다. 그는 1990년 최연소인 만27세에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학과장을 역임했다. 의사생활을 하면서도 대한민국 최초의 백신프로그램인 V1, V2와 V3를 만들어 무료로 제작·배포해 명성을 쌓았다. 안 원장은 의대 학과장을 그만두고 1995년 2월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하여 아예 백신사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스쿨에서 MBA를 취득한 뒤, KAIST 석좌교수로 임용됐다. 2011년에는 서울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차세대융합기술원장을 맡았다.

끊임없는 노력과 도전정신을 겸비한 안 원장은 그간 지속적인 강연 ‘청춘콘서트’를 통해 젊은이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희망을 심어주며 남다른 배려와 존중의 소통 방식으로 젊은 계층의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던 중 지난해 8월 윤여준 전 장관이 “안 원장이 서울시장 출마 가능성이 있다”고 언론에 알렸고 단숨에 지지율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안 원장은 2012년 대선 출마 여부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각종 여론조사에서 굳건한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식지 않는 국민적 열망에 그의 대선 출사표가 언제 던져질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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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 국민의힘과 봉건제 연결고리

무기력 국민의힘과 봉건제 연결고리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더불어민주당은 비판을 들을지언정 정국 대응에 일사불란하다. 이는 강성 지지층의 압박으로 형성된 중앙집권 형태의 정치 때문이다. 반면 국민의힘 의원들은 지역구에서 봉건 영주처럼 군림하는 봉건제 형태 정치를 유지하고 있다. 국민의힘의 무기력함은 이로부터 시작된다. 매년 국회 국정감사가 진행되면 ‘맹탕’이란 표현이 나온다. 올해도 어김없었다. 올해엔 ‘추태’란 표현도 나왔다. 미국 의회에선 상시 청문회 제도를 안착시켜 아주 촘촘한 청문회 제도를 운용한다. 이를 토대로 “정기 국정감사를 없애고, 상시 국정감사 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도 어김없이 나왔다. 변함 없는 맹탕 국감 국민의힘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김현지 대통령실 제1부속실장의 과거 이력과 함께 그와 이재명 대통령과의 인연을 집중적으로 추궁하려고 한다. 국민의힘은 김 실장의 국정감사 출석에 당력을 기울였다. 대통령실을 피감기관으로 두고 있는 운영위원회는 물론,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에서도 그를 증인으로 신청했지만, 범여권에선 방어막을 쳤다. 당력을 기울여 김 실장의 국정감사 출석을 막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태도는 김 실장에 대한 각종 의혹을 키운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김 실장이 국정감사에 출석하더라도 국민의힘이 그에 대한 각종 의혹을 명쾌하게 밝혀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달 14일엔 민주당 박지원 의원과 국민의힘 신동욱 의원이 반말 논란으로 설전을 벌였다. 박 의원은 법사위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와 정성호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쌍방울 불법 대북 송금 사건 질의를 이어갔다. 박 의원이 발언 시간 초과로 마이크 전원이 나간 이후에도 계속 질의를 이어가자, 국민의힘 의원들은 이를 제지하려 들었다. 박 의원이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자, 신 의원은 “왜 반말을 하느냐”고 반발했고 다시 박 의원이 “난 옛날부터 너한테 말 내렸다” 등 언쟁을 벌였다. 한술 더 뜨는 논쟁은 같은 날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이하 과방위)에서 이어졌다. 민주당 김우영 의원은 박 의원으로부터 받은 문자메시지를 공개했다. 문자 중엔 박 의원이 김 의원에게 “에휴, 이 찌질한 X아”라는 욕설이 들어가 있었다. 이때 박 의원의 휴대전화 번호도 고스란히 노출됐다. 이에 항의하던 박 의원은 김 의원에게 “한심한 XX는 나가”라고 소리쳤다. 박 의원은 “지난달 2일 상임위에서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방통위 관련법을 통과시킨 것에 대해 항의했더니, 김 의원이 저를 지칭해 ‘저 인간만 없으면 과방위가 좋을 텐데’라고 말했다”며 “김 의원이 시끄럽게 전화 통화까지 하길래 항의했더니, 김 의원이 욕설을 퍼붓고 멱살을 잡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 의원은 제 가족 사진까지 화면에 띄우면서 저를 비판했다”며 “김 실장의 경기동부연합 연루 사실까지 폭로했더니 제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공개했다”고 강조했다. 친여 성향 무소속 최혁진 의원은 지난달 13일 조희대 대법원장을 상대로 진행된 법사위 국정감사에서 조 대법원장과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합성한 사진을 제시하면서 ‘조요토미 히데요시’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다음 날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도움되지 않았고, 조 대법원장을 국회에 불러 압박해 망신을 줬단 프레임에 갇혔다”며 “지나치게 과했다”고 지적했다. 강성 지지층 눈치에 몰아치는 민주당 특유의 봉건제…국감서도 의욕 상실 최 의원은 지난달 20일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배우자 김재호 춘천지방법원장을 상대로 “나 의원의 언니가 윤석열 전 대통령의 장모 최은순씨의 내연남 김충식씨의 새 내연녀를 소개했다”고 주장했다. 김 법원장은 “나 의원에겐 언니가 없다”고 반박하면서 최 의원에 대한 비판·조롱이 이어졌다. 최 의원은 이튿 날 진성철 대구고등법원장에게 재판소원 관련 질의를 하는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 옆에 있다가 바라보는 자세로 몸을 돌렸다. 이어 주 의원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기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을 맡은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국정감사 기간 중 국회 사랑재에서 딸 결혼식을 진행해 파문을 일으켰다. 최 의원이 배포한 모바일 청첩장엔 신용카드 결제 링크가 포함돼있었다. 지난달 초엔 청첩장을 과방위 소속 국회 사무처 직원들에게도 전달했다. 최 의원은 “양자역학을 공부하느라 딸 결혼식에 신경을 못 썼다”는 기이한 해명을 해 논란에 불을 지폈다. 그는 지난달 26일엔 국회 본회의장에 앉아 보좌진에게 “축의금을 피감기관들에 돌려주라”고 지시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장면이 포착돼 입길에 오르기도 했다. 결혼식 축의금 50만원을 냈다가 돌려받은 사람 중 1명은 다름 아닌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였다. 청탁금지법 시행령이 지정한 경조사비 한도는 5만원이다. 여야의 정쟁 때문에 국정감사가 중단되는 등 파행이 일어나는 사례는 연례행사 중 하나다. 국정감사엔 다수의 증인·참고인이 출석한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시간을 쪼개 출석 의무에 응했거나, 출석할 필요가 없는데도 출석한 것이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은 이들의 시간·일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모적인 정쟁을 거듭하면서 이들 증인의 시간도 잡아먹는다. 이는 국회의원 특유의 꼰대질로 해석될 가능성이 크다. 김 의원과 박 의원이 욕설을 주고받는 현장엔 사이버 레커들로부터 피해를 본 유튜버 쯔양이 참고인으로 출석해 있었다. 쯔양은 이들이 욕설을 주고받자 놀라는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은 고스란히 카메라에 잡혔다. 몰아치는 사법개혁 이날 여야는 박 의원이 보낸 문자메시지에 대한 공방을 밤 늦게까지 이어갔다. 양당은 국정감사가 이어진 지난달에도 자신들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김 의원이 박 의원의 전화번호를 공개한 후 박 의원은 이날 내내 민주당 지지자들이 보내는 문자폭탄에 시달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민주당은 정청래 대표를 필두로 헌법재판소의 헌법소원 대상에 법원의 재판을 포함하는 재판소원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14명인 대법관 수를 26명으로 늘리는 방안도 밀어붙이고 있다. 지난 2017년 추진되는 듯했다가 김명수 당시 대법원장의 반대로 사그라들었던 법원행정처 폐지도 다시 추진할 조짐을 보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지난 5월1일 이재명 대통령의 허위 사실 공표 혐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후 민주당은 일사불란하게 대법원을 겨냥하고 있다. 대법관 수 증원은 민주당 내 사법개혁 특별위원회가 지난달 20일 확정한 방안이다. 재판소원은 민주당 김기표 의원이 당 지도부와 협의해 당론 법안으로 별도 추진할 예정이다. 일각에선 민주당의 사법개혁 방안을 일컬어 “과도하다”고 비판한다. <조선일보>는 지난달 29일 사설에서 “대법원이 이 대통령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하기 전엔 법원의 각종 숙원사업을 들어주려고 했다”며 “판결 이후 개혁을 명분으로 사법부를 압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민주당이 추진하는 사법개혁은 아니면 말고 식으로 마구잡이로 던지는 것”이라며 “법원이 마음에 안 드는 결정을 할 때마다 단세포적으로 대응한단 느낌마저 든다”고 해석했다. 반대 진영의 날 선 지적에도 민주당은 특유의 몰아치기를 유지하고 있다. 검찰·법원 등 개혁은 민주당의 오랜 관념이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강성 지지층의 욕구는 몰아치기와 일부 의원들의 과도한 언행으로 이어진다. 민주당 소속이 아닌 최 의원도 대법원·국민의힘 공격 최전선에 서자,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 많은 후원금을 송금받았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반대로 예의 무기력함을 유지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나름대로 ▲김 실장 관련 의혹 제기 ▲정희철 단월면장 사망 등 김건희 특검의 과잉 수사 의혹 제기 ▲10·15 부동산 대책 비판 등 문제 제기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별다른 관심을 얻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국민의힘 특유의 무기력함이 국민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선 별다른 의욕도 느껴지지 않고, 국민이 관심가질 만한 내용도 발언으로 채우지 못했다. 이는 국민의힘에서 민주당으로 옮긴 김상욱 의원이 국민의힘 내 ‘언더 찐윤(진짜 친윤)’ 그룹의 존재를 주장한 이후 많은 사람에게 인식된 국민의힘 특유의 봉건제로부터 비롯된다. 토착 세력 주도 형태 김 의원이 주장하는 ‘언더 찐윤’은 대구·경북·강원 등 지지 기반을 지역구로 두고, 지역구 관리에만 몰두하는 국민의힘 일부 의원들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들은 지역구의 왕이자 소리 없이 국민의힘을 움직이는 핵심 그룹이다. 이들은 “당권을 지켜 공천만 계속 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역 기반을 완전히 움켜쥐고, 중앙 정치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토착 세력이 주도하는 정치 형태는 봉건제 정치 형태와 비슷하다. 국민의힘 내부의 봉건제는 전제 왕조 시절의 봉건제보다 후퇴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다. 언더 찐윤 의원들이 지역구를 스스로 개척해 국민의힘의 텃밭으로 만든 게 아니기 때문이다. 봉건제가 본격적으로 작동한 중국 주나라에선 왕이 제후들에게 국가의 힘이 미치지 않는 이민족 중심 미개척지를 봉토로 하사했다. 이는 “미개척지를 개척·장악하면, 봉토로 인정해주겠다”는 취지였다. 주나라는 봉건제를 토대로 중앙의 왕이 각지의 제후들을 통제하는 통치 형태를 완성했다. 초기엔 주로 종친들을 제후로 책봉했기 때문에 가부장적 질서가 유지됐지만, 세월이 흘러 혈연 의식과 왕실의 힘이 약해지자 춘추전국시대란 난세가 열렸다.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은 중앙 정치에선 적당히 치적으로써 지역에서 내세울 만한 ‘사진’만 얻으면 된다. 이런 성향이 핵심 지지 기반에 퍼져 굳어지자, 국민의힘에선 이준석 전 대표와 김용태 전 비상대책위원장 등이 추진했던 체질 개선이 번번이 무력화됐다. 그럴수록 당은 무기력해지고, 존재감을 잃는다. 반면 민주당에선 강성 지지자의 영향력이 매우 강하다. 그래서 의원들도 이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 그러면서 옳고 그름을 떠나 당론을 일사불란하게 밀어붙이는 중앙집권형 정치 형태가 만들어졌다. 이는 국민의힘 같은 무기력한 야당을 만나면 상대적인 장점으로 보일 소지가 강하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따질 시간과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에, 한번 어긋나면 결정적인 파국으로 연결될 위험이 있다. 이 대표는 국민의힘 대표였던 지난 2021년 12월 국민의힘 윤석열 당시 대선후보와 갈등하던 중 <조선일보>와 인터뷰하면서 이들을 ‘봉건 영주’라고 지칭했다. 당시 이 대표는 “윤 후보가 2022년 지방선거에 출마하고 싶어하는 봉건 영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선을 치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앙 정치는 ‘사진’만 얻으면 그만? 귀족이 왕권 능가했던 백제의 끝은? 이들이 바로 훗날 김 의원이 규정한 ‘언더 찐윤’이라고 볼 수 있다. 핵심 지역 기반에서 자리 잡은 국민의힘 의원들은 중앙당으로부터 지역구를 ‘분봉’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분봉받은 지역구의 공작 작위를 받아 공국을 구성했다고 볼 수도 있다. 봉건제 국가에서 외침이 발생하면 제후들이 각자 군을 이끌고 와서 연합군을 구성한 후 전쟁에 나선다. 따라서 왕이 제후와 사이가 안 좋으면, 제후가 방어에 협조하지 않아 국가에 큰 위기가 닥친다. 백제 개로왕은 왕권 강화를 시도하면서 강한 영향력을 가진 기존 귀족을 배제하고, 잦은 토목공사를 강행했다. 그러던 중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침략해 큰 위기를 맞았다. 고구려는 공격 7일 만에 수도 한성을 함락했고, 개로왕은 고구려군에 사로잡혀 죽었다. 귀족은 아무도 개로왕을 돕지 않았고, 당시 동맹이었던 신라만 구원군을 보내는 황당한 상황이 이어졌다. 이후 백제에선 문주왕·삼근왕·동성왕 등이 연이어 귀족에게 피살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은 즉위 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정적들을 추방하고, 아들 40명을 지금의 장관에 해당하는 좌평에 임명해 중앙 정계에 진출시켰다. 백제가 멸망하는 과정엔 귀족이 구원군을 제대로 보내지 않았던 영향이 있다는 설도 만만치 않게 제기된다. 실제로 영화 <황산벌>에선 이 설을 그대로 반영해 귀족이 의자왕에게 “당신이 아들 40명을 좌평에 임명했을 때, 우리의 조국은 진작 망했다”고 비웃는 장면이 묘사됐다.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도 미개척지가 많은 영토 특성 때문에 세습령병제가 시행됐다. 이는 신하가 병사를 대대로 소유하면서 마음대로 부리는 제도를 말한다. 이 때문에 오나라는 위나라·촉한의 침략은 성공적으로 막았지만, 두 나라를 상대로 한 영토 확장은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었다. 신하들의 이권도 함께 걸려 있던 남방 개척은 성공적이었던 것과 비교된다. 백제와 오나라의 상황은 핵심 지지 기반을 지역구로 둔 의원들이 지역구 관리엔 능숙하지만, 중앙 정치에선 기행을 거듭하는 등 불성실한 국민의힘의 특성과 맞물린다. 국민의힘은 김문수 전 대선후보 교체 시도 등 초유의 기행을 거듭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도 대선을 앞두고 급하게 옹립된 대선후보였다. 체계적인 계획 없이 그때그때 이익에 따라 큰 선거를 치르는 국민의힘의 특성과 맞물린다. 거칠게 요약하면, 역사는 봉건제를 중앙집권제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이 과정에선 많은 변혁이 필요하다.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끊임없이 체질 개선을 거부했다. 계획 없이 그때그때 장동혁 대표도 강경 보수 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당선됐다. 장 대표 취임 이후 국민의힘에선 혁신 담론이 아예 실종됐다. 장외투쟁에 대해선 보수 성향 신문도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에 웬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을 하느냐”고 비판했다. 이는 국민의힘 내부에 스며든 봉건제로부터 비롯된 일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국민의힘을 보면 봉건제가 보인다. 뒤집어 말하면, 봉건제를 알아야 국민의힘을 알 수 있다. 국민의힘은 정말 봉건 영주의 연합정당인 걸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