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투자인 대상’ 수상에 비친 박현주(미래에셋그룹 회장)의 허와 실

금융계의 신화? 투자자 신뢰 떨어뜨린 최악의 인물?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첫 번째 금융투자인 대상을 차지했다. 특유의 공격적인 투자 방식을 높게 평가 받은 데 따른 것이다. 당초 이번 수상에는 이견이 없을 것으로 보였다. 박 회장은 금융계의 ‘신화’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예상을 뒤엎고 일각에서는 ‘박 회장이 첫 번째 금융투자인 대상에 적합한가’라는 의문이 들려온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맥을 못 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값 못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금융계의 아이콘 박현주의 허와 실을 짚어봤다.

제1회 금융투자인상 시상식서 대상 수상 영광 차지
성공 스토리 하버드대 사례연구 주제로 선정되기도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제1회 금융투자인상 대상을 수상했다. 한국금융투자협회는 지난 7일 협회 창립 2주년을 맞아 금융투자인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금융투자인상을 제정하고 첫 수상자로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을 선정, 이날 시상했다고 밝혔다.

대학생 때부터
주식 실전 경험

박 회장은 적립식·간접 투자개념을 새롭게 정립시켜 개인들의 안정적인 자산 형성에 기여한 점과 적극적인 해외시장 진출과 펀드상품 수출 등을 통해 자산운용업을 금융투자 산업의 탄탄한 축으로 성장시킨 공로를 높게 평가받았다.

금투협 관계자는 “미래에 대한 통찰력과 글로벌 마인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도전하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기업가 정신으로 자본시장 종사자들에게 희망과 도전정신을 고양시킨 공적이 높이 평가돼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설명했다.

박 회장은 1958년생으로 광주에서 태어났다. 중농의 집안에서 자라나 전라도의 명문 광주일고를 거쳐 1978년 고려대에 입학했다. 그가 주식시장과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생 때의 일이다. 집에서 부쳐준 생활비를 밑천으로 명동 증권가를 누비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대학원생이던 1984년에는 작은 사설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했다. 증권 투자로 번 돈으로 서울 회현동 코리아헤럴드 빌딩 18층에 20평 남짓한 사무실을 얻었다. 직원도 한 명 뒀다.

2년 뒤인 1986년, 박 회장은 투자자문회사를 접고 증권회사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투자자문회사 설립에 법적 근거가 없고 아직 개인사업자가 독자적 브랜드로 자본시장에 뛰어들 분위기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박 회장은 동원증권 영업부에 지원했다. 당시 증권가 최고스타였던 이승배 동원증권 상무(현 한셋투자자문 사장)의 영업스타일과 브로커로서의 자세를 배우고 싶었던 박 회장은 수차례 문전박대를 이겨내고 입사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불과 45일 뒤 대리로 승진했다.

그러던 1989년, 동원증권 중앙지점장으로 발탁되면서 박 회장은 본격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당시 나이 33세, 최연소 지점장이었다. 2년만에 중앙지점을 전국 1등으로 올려놨다. 압구정 지점장으로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같은 전력을 바탕으로 1995년에는 이사로 승진했다. 이 역시 최연소 임원 승진 기록이었다. 하지만 1997년 6월 박 회장은 당시 구재상 압구정지점장, 최현만 서초지점장 등 8명의 ‘박현주 사단’과 함께 잘 나가던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미래에셋캐피탈(옛 미래창업투자) 창업을 위해서였다.

박 회장은 1998년 초 시중 금리가 연 30%를 향해 치닫고 있을 때 증시 폭락과 금리 인하, 채권 가격 급등을 예상하고 미래에셋 운용자금 200억원을 채권에 풀베팅했다. 대성공이었다. 예상대로 시중 금리가 20%대로 급락하면서 채권 값이 급등해 50억원의 차익을 남겼다. 1999년에는 24억원을 투자했던 포털업체 다음의 주가가 6개월만에 폭등하며 1000억원에 가까운 매매차익을 가뿐히 거둬들였다.

1998년에는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설립한 뒤 자신의 이름을 붙인 뮤추얼펀드를 내놨다. 500억원 규모로 출범한 ‘박현주 1호’는 2시간30분만에 판매가 마감됐고, 박 회장의 주식운용 능력에다 증시 활황까지 겹쳐 100%가 넘는 수익률을 올렸다. 부록으로 ‘미다스의 손’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뮤추얼펀드가 성공하자 다른 자산운용사들도 유사 상품을 앞다퉈 내놓는 등 뮤추얼펀드 붐을 일으켰다. 적립식펀드의 대중화를 이끌며 은행 예금 위주의 저축문화를 2004년 이후에는 적립식펀드 위주의 투자문화로 바꾸는 데도 기여했다. 연이은 성공에 힘입어 2005년에는 생명보험사를 인수해 증권과 자산운용, 보험으로 짜인 투자전문그룹으로 도약했다.

손대는 일마다 승승장구하는 박 회장에 증권가의 이목이 집중됐다. ‘박현주가 샀다’는 소문만 나도 주가가 뛸 정도였다. ‘미래에셋의 글로벌 성장 스토리’와 ‘박현주 회장의 기업가정신’은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의 케이스스터디 주제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 CEO가 기업가정신 사례로 선정된 것은 박 회장이 처음이다.

인사이트펀드 한때 반토막 나면서 투자자에 치명상
투자자들 속 타들어가는데 거액의 펀드 수수료 챙겨

그러던 2007년 말, 박 회장은 일대의 위기에 직면했다. 그해 10월 말 시중 자금을 싹쓸이하며 펀드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던 ‘인사이트 펀드’가 대규모 손실을 기록한 것.

인사이트 펀드는 한 달만에 4조원어치가 팔렸지만, 6개월 후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수익률이 곤두박질쳤다. 펀드는 지난 2008년 11월19일 현재 설정액 4조6000억원에 순 자산액이 1조9700억원 정도로 평가됐다. 2조5000억원을 날리고 만 것이다. 이는 투자액의 60%정도에 해당한다.

전문가들은 인사이트 펀드의 몰락이 ▲분산투자라는 원칙 무시 ▲펀드 운용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 ▲투자자들의 ‘묻지 마’ 식 투자 등 여러 요인이 빚어낸 합작품이라고 분석했다. 인사이트 펀드는 ‘효율적인 분산투자로 시장 위험에 대처한다’는 미래에셋 홍보와 달리 대부분 운용 자금을 중국을 비롯한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국가에 투자해 손실을 키웠다. 결국 박현주라는 브랜드를 믿고 묻지 마 투자에 나섰던 개인들은 원금이 반토막나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했다. 명성만큼 큰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쪽박을 찬 투자자들의 가슴은 시커멓게 타들어감에도 미래에셋이 거액의 펀드 수수료를 챙긴 사실이 드러나면서 온갖 악평이 난무했다. 고객들은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면서 수수료는 수수료대로 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미래에셋은 연 최고 3.49%의 높은 수수료를 적용, 판매한 지 3개월만에 150억원이 넘는 이익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액 60%
2조5000억 날려

여론이 들끓자 박 회장은  배당금 반납 카드를 들고 나왔다. 자신에게 배당될 200억원대 배당금을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비난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수조원을 날려놓고 200억원대, 그것도 개인 재산이 아닌 배당금 포기로 감당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박 회장이 사재를 털어 사회헌납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다. 연속적인 대박 덕에 금융투자업계에서 ‘전설적인 존재’로 군림했던 박 회장에게 인사이트 펀드는 재앙이었다.

인사이트 펀드의 악몽이 지속되자 박 회장은 결국 공식석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국내 언론과 가진 공식 인터뷰는 2007년 11월이 마지막이다. 지난해 4월 오랜 침묵을 깨고 뉴욕에서 특파원들과 간담회를 했지만 일방적으로 뉴욕시장 진출 계획을 밝힌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비난의 여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잠잠해질 만 하다가도 배당 소식만 나오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아직 손실을 벗어나지 못한 투자자들이 적지 않은 데다 미래에셋의 펀드 운용 성과가 저조한 데도 불구, 수백억대의 배당금을 챙겨가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박 회장은  154억원의 두둑한 배당금을 받았다. 당시 미래에셋의 전체 국내 주식형펀드(설정액 10억원 이상, 중소형주펀드, 인덱스펀드, 테마형펀드 등 제외) 1년 평균 수익률은 20.91%로 전체 44개 운용사 가운데 29위인 중·하위권을 맴돌고 있는 상황이었다. 같은 기준으로 2년 평균 수익률은 -4.51%로 39개 회사 중 22위에 그치는 등 2008년 금융위기 후 힘을 못 쓰고 있다.

물론 박 회장도 이 같은 상황을 지켜만 본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돌파구로 박 회장은 부동산 사업에 눈을 돌렸다. 부동산 정보업체인 ‘부동산114’를 인수하고, 그룹 내 부동산 계열사인 미래에셋컨설팅에서 KRIA를 분리시키는 등 사업 역량 강화에 나섰다.

이 결과 박 회장은 쏠쏠한 재미를 봤다. 2008년 말 ‘미래에셋 기흥연수원’을 한국토지주택공사에 450억원에 매각해 두 배 가까이 매각 차익을 거둔 데 이어 국내외 유수 빌딩을 사들이며 부동산계의 ‘큰손’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부동산 투자가 마냥 박 회장의 뜻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무리한 투자로 낭패를 본 경우도 적지 않다.

미래에셋증권은 서울 여의도 지상 53층 규모의 파크원 오피스 타워를 8047억원에 매입키로 결정, 일부 자금을 투입했다. 하지만 지난해 말 개발 사업이 ‘지상권 문제’로 부지 소유자 통일교재단과 시행사 스카이랜드 간 법정공방이 가시화되면서 사업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만일 갈등이 장기화되거나 사업 자체가 무산될 경우 사실상 미래에셋은 손실이 불가피하다.

1인 중심 지배구조
누구도 거역 못해


또 지난 2009년 미래에셋맵스의 대표 부동산 공모펀드인 ‘미래에셋맵스아시아퍼시픽부동산 공모1호’ 펀드도 구설에 휘말렸다. 이 펀드는 금융 한파로 4000억원 규모에 달하는 미국 씨티그룹센터 계약을 철회한 데 이어 홍콩 벨에어 아파트 투자에서도 손실을 입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서울 세종로 옛 금강제화빌딩 일대(세종로1지구 재개발사업)에 건립키로 계획한 그룹 신사옥도 전 시행사 디비스코리아 측과 ‘시행권’을 차지하기 위한 법정다툼으로 아직까지 답보 상태다.

현재 박 회장은 펀드 시장에서 투자자의 신뢰를 떨어뜨린 최악의 인물이라는 세간의 비판을 받고 있다. 반면, 과감한 도전정신만은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금융투자협회의 제1회 금융투자인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될 수 있던 것도 이 점을 높이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회장의 지나치게 공격적인 운용은 자칫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강세장에선 ‘대박’을 터뜨릴 수 있지만 하락장을 만나면 ‘쪽박’ 차기 십상이란 얘기다.
그럼에도 박 회장의 결정에 대해 미래에셋 내부에선 아무도 “노”라는 의견을 내지 못한다. 미래에셋 지배구조가 박 회장 1인 중심으
로 돼 있기 때문이다. 현재 박 회장은 미래에셋자산운용과 미래에셋맵스자산운용의 최대 주주다. 또 미래에셋캐피탈은 미래에셋증권과 미래에셋생명의 대주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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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국방부, 내란 문건 ‘대청소 프로젝트’

[단독] 국방부, 내란 문건 ‘대청소 프로젝트’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와 관련된 국방부 문건이 대규모로 파쇄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 조치는 오영대 전 인사기획관의 지시로 이뤄졌다. 오 전 기획관은 검찰 특수본과 재판서 정보사와 수사2단 인사안의 문제점을 증언했던 인물이다. 자신이 비상계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수사에 협조한 것으로 의심되는 대목이다. “올해 초 신년맞이 대청소라면서 문서를 대량으로 파쇄했다.” <일요시사>와 접촉한 국방부 직원들의 말이다. 파쇄된 문건들은 12·3 내란 사태와 관련된 자료라고 한다. 지시자는 오영대 전 국방부 인사기획관이다. 검찰 수사에 협조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는 게 군 내부자들의 주장이다. 뭘 숨기나 안규백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말 취임하면서 시작한 첫 번째 군 개혁은 인사다. 신임 인사기획관에 일반 공무원 출신인 이인구 군사시설기획관을 임용한 건 안 장관이 강조해 왔던 ‘군 문민통제’와도 맞닿아 있다. 인사기획관은 본래 예비역 장성이 맡아왔다. 이 신임 기획관의 전임자였던 오 전 기획관도 예비역 준장 출신이다. 군 내부에서는 국방부에 여전히 12·3 내란 사태에 협조한 군인들이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핵심으로 인사기획관실의 총괄과이자 인사기획관의 일정, 예산 등을 모두 관리하는 인사기획관리과가 언급된다. 다수의 국방부 관계자들은 “오 전 기획관은 물러났지만 책임져야 할 다수의 인물이 아직 자리를 보전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부서의 간부들은 전부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과장 김모 대령은 오 전 기획관이 대령이었을 때 소령으로 근무했고, 총괄 이모 중령은 오 전 기획관이 특전사 여단장을 역임했던 1공수여단서 중대장과 707중대장을 거쳤다. 장군인사팀장 김모 대령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수도방위사령관으로 근무했던 시절 비서실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 전 장관과 가깝거나 육사 출신인 이들이 국방부 인사의 핵심부서인 인사기획관리과에 포진하면서 계엄 실행을 위한 보직 이동이 이뤄진 셈이다. 김 전 장관은 실제 대통령경호처장일 때부터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과 군 인사에 대해 논의했다. 직무에서 배제되지 않은 인사기획관리과 간부들은 ‘장관이 모든 책임을 오 전 기획관에게 묻는 형식으로 퇴직을 시켰으니 우리는 지시를 받아 어쩔 수 없이 한 것처럼 조용히 지내면서 정부초기 개혁의 소나기만 피하면 진급 가능’이라며 서로서로 쉬쉬하고 있다고 한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인사기획관리과 간부들은 내란 이후인 지난해 12월 중순 오 전 기획관의 지시에 따라 문건 파쇄를 계획했다. 김 전 장관이 물러난 이후 인사기획관리과장 김 대령 및 총괄인 이 중령 외에는 계획되지 않은 대면보고는 금지했고 내부 보안에 심혈을 기울였다. 인사과 간부들 계엄 실패 후 12월 계획···1월 파쇄 “지시자는 검찰 수사 응했던 오영대 전 인사기획관” 한 달여 뒤 이 중령은 모든 과에 ‘신년맞이 대청소’를 하라고 전파했다. TF 자리 배치와 오래된 문건을 정리한다며 유독 인사기획관리과만 복도로 책상을 빼고, 대량 세절이 가능한 세절실을 예약해 엄청난 양의 문서들을 파쇄했다. 여기엔 내란 핵심 파일도 포함된 것으로 파악됐다. 안 장관은 이와 관련해 국회에서 오 전 기획관에게 여러 차례 질문한 바 있다. 당시 오 전 기획관이 당황해하며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퍼지기도 했다. 이 중령은 동영상을 보며 웃는 직원들의 명단과 안 장관에게 제보한 인물을 색출하기 위해 탐문 활동을 벌여 오 전 기획관에게 추정해 보고했다. 이들은 모두 오 전 기획관으로부터 승진추천, 성과상여금, 각종 포상 등 인사상 불이익을 본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이 문건을 파쇄한 이유는 내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내란 당일 오후 10시가 넘은 시각임에도 퇴근하지 않고 사무실에 있던 오 전 기획관의 지시를 받은 이 중령은 각 과의 총괄 담당자들을 소집해 ‘계엄 선포가 됐는데 선제적으로 인사 관련 조치를 왜 안 하냐’ ‘합참에는 계엄사령부가, 지작사령부에는 지역계엄사령부가 곧 창설될 텐데 각 군 본부 및 지작사와 인사 지침을 협의해 계엄령 취지에 맞게 배포하라’고 강조했다. 특히 오 전 기획관은 계엄 해제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 테이블을 통과했음에도 합동참모본부 전투통제실에서 이 중령에게 “(계엄이) 해제되긴 했는데 다시 시행될 수도 있으니 빨리 계엄사 창설 지원을 위한 인사 조치를 완성하고 지작사 병력에 대한 휴가 지침 및 통제 등 건의 사항을 받아보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 전 기획관은 내란 직전까지 김 전 장관의 의중에 따라 군 인사를 반영했다. 최근 내란 특검팀이 군 장성급 인사 자료 확보에 나선 것도 이에 관해 들여다보기 위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검팀은 최근 국방부 장군인사팀과 육군본부 장군인사실 등을 압수수색해 해당 부서 내 인사 관련 파일 등을 확보했다. 정치권에선 지난 2023년 11월과 지난해 4월 이례적인 인사가 이뤄졌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진급에 절박한 군 인사들을 계엄 실행 세력으로 활용했단 의혹이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윤석열정부 장군 인사는 특이하고, 이례적인 경우가 유독 많았다”며 “인사를 통해 군을 장악하고, 내란을 준비했다는 의혹 관련 특검의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3차 계엄 대비 문건 없애” 증거 인멸 국회서 해제 불구 지작사와 인사 논의?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은 지난 2023년 11월 인사에서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했다. 박안수 전 계엄사령관은 ‘75주년 국군의 날 행사기획단장 겸 제병지휘관’ 등 한직에서 2023년 10월 육군참모총장에 발탁됐다. 지난해 4월엔 지휘부에 이어 작전본부 인사가 이어졌다. 원천희 당시 육군 소장이 4차 진급으로 합참 정보본부장으로 승진했고, 이승오 소장은 군단장을 거치지 않고 합참 작전본부장으로 진급했다. 안찬명 당시 육군22사단장은 임명 5개월 만에 합참 작전부장으로 보직을 옮겼다. 통상 사단장은 1년 반~2년가량 보직을 맡는다. 군 안팎에서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왔던 이유다. 경질 위기이던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은 유임됐다. 그는 지난해 6월 정보사 군무원의 블랙요원 명단 국외 유출 사건 및 박민우 전 정보사 100여단장과의 갈등 등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신원식 전 안보실장은 지난해 8월 국회에서 “후속 조치를 강하게 할 생각”이라고 언급했지만, 다음 달 본인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는 군 관계자에게서 “노 전 사령관과 김 전 장관이 장군들 인사에 대해 논의했고 오 전 기획관에게 전달됐다”는 진술을 확보한 바 있다. 위기감을 느낀 오 전 기획관은 특수본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오 전 기획관의 특수본 진술조서를 보면 그는 “신원식 (전 국방부) 장관이 저와 원천희 국방부 정보본부장에게 문 전 사령관에 대한 보직해임·정보사령관 교체 검토를 지시했으나 지난해 9월6일, 김 전 장관이 취임하면서 문 전 사령관에 대한 ‘현 보직 유지’를 지시했다”며 “납득하기 어려운, 이해하기 어려운 인사였다”고 했다. 앞뒤 달랐다 오 전 기획관은 “(문 전 사령관이 박 준장으로부터 고소당한 혐의가) 어느 정도 사실로 확인됐지만 문 전 사령관에 대한 인사 조치는 없었다”며 “공론화된 문제고 어느 정도 사실로 확인됐는데도 이렇게 유야무야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hounder@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