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의 아이콘’ 황장엽 전 북한조선노동당 비서

왜 하필 북한 ‘세자 책봉식’ 날 떠났을까?


지난 10일 황장엽 전 북한 조선노동당 비서가 서울 논현동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그의 삶은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을 오롯이 담고 있다. 북한에서 탄탄대로를 달리던 황 전 비서. 어째서 그는 모든 영화를 뒤로한 채 남한땅으로 넘어와 북한 민주화를 목 놓아 울부짖었을까. <일요시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황 전 비서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불과 40세 나이에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발탁
김일성종합대서 김정일 주체사상 개인강사로

황장엽 전 북한 조선노동당 비서는 1923년 1월23일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광청리 삼청동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제에 강제징용 돼 강원도 삼척탄광에서 노역하던 그는 해방 이후 모교인 평양상업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리고 1946년 11월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교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당에 가입해야한다는 동료 교사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후 1948년, 6개월 과정의 중앙당학교 이론반에 들어가면서부터 사상적 발전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회고록을 통해 그는 “야간대학생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뒤떨어진 공부를 메우기 위해 잠도 안자고 매달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49년에는 러시아 유학길에 올랐다. 모스크바종합대학에서 마르크스-레닌 철학을 본격 공부한 그는 1953년 북한으로 돌아와 김일성종합대학 철학강좌장에 발탁됐다. 당시 그는 명석한 두뇌와 논리정연한 사고 등으로 당의 주목을 받았으며, 이 학교 출신인 김정일의 주체사상 개인강사를 맡기도 했다.

마르크스 공부해
주체사상 아버지

그는 특히 김일성이 1955년 12월 처음으로 ‘사상에서의 주체’를 표방했을 때 이를 이론적으로 보좌했다. 70년대 초반에는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완성하기까지 북한체제의 대표적 이론가로 통했다.

이후 황 전 비서는 1958년 과학원 사회과학부문 위원에 임명된 데 이어 이듬해 노동당 중앙위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임명되면서 당내 주요 인물로 급부상했다. 이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내각 참사관 등 굵직한 자리를 거쳤다. 1965년에는 불과 40세의 나이에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에 발탁됐을 정도로 탄탄대로를 달렸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북한의 대외적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75년 북한이 비동맹회원국이 된 이래 그는 최고인민회의·정부·당의 대표단장, 주체사상토론회 대표단장 등의 자격으로 20여 차례에 걸쳐 30여개국을 방문하며 주체사상연구회를 만드는 등 이른바 ‘인민외교’를 전개해 비동맹국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1990년에는 중국을 방문해 장쩌민 총서기와 면담하기도 했다. 1993년부터는 노동당 국제담당비서와 당 국제부장,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등을 맡아 인도·중국·쿠바·유럽 등을 방문했다.

황 전 비서는 김정일 우상화 작업에도 깊이 관여했다. 김정일이 백두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백두산 출생설’을 정론화하고 ‘친애하는 지도자’ 등의 호칭을 붙이게 한 것이 모두 그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그러다보니 그는 김 주석 부자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984년 김일성 주석의 비공식 중국방문 당시 단독 수행을 맡았을 정도다. 1996년 김일성 사망 2주기 중앙추모대회에서 주석단 서열 26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처럼 북한 내에서 승승장구하던 그가 탈북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과 90년대 중반 북한 내 대기근이었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나는 중국이 개방정책으로 전환하는 걸 본 사람이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북한의 권력에는 더 이상 기대를 걸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김일성 생전에도 중국식 개혁·개방의 길을 가는 것이 옳다는 식의 의견을 폈지만 김일성 부자는 남한과 수교하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도입한 중국을 못마땅해 했다. 김일성 사후에도 김정일이 중국식 개혁·개방 노선을 취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해지자 그는 결단을 내렸다.

공개 활동 제약에도
비판의식 잃지 않아

황 전 비서는 1997년 2월12일, 김덕홍 전 북한 여광무역 사장과 함께 베이징 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한 뒤 필리핀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는 베일에 싸여 있던 북한 정권의 비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일성 부자는 독일 제3제국(1934∼1945년) 시절의 아돌프 히틀러처럼 주민들을 완전히 복속시켰다” “김일성 주석 시대보다 김정일의 독재 정도가 10배는 더 강하다” “북한은 나를 반역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반역자는 국민을 굶어죽게 하고 있는 김정일”이라는 등 맹비난을 퍼부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황 전 비서는 그의 저서를 통해 김정일의 통치술과 전쟁관, 북한의 전쟁 준비 상황 등을 비판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의 공개 활동에 제약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그는 비판의식을 잃지 않았다. 그는 북한 사정을 가장 잘 알기에 남한에서 가장 무섭게 북한의 치부를 공격할 수 있는 인물로 통했다.

개혁·개방 노선을 취할 기미 보이지 않자 탈북
가장 무섭게 북한의 치부 공격할 수 있는 인물

반대로 북한의 입장에서 그는 조국을 버린 ‘배신자’였다. 북한은 그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며 당 간부들의 추가 탈북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황 전 비서의 귀순 직후 김정일은 연설을 통해 그를 “개보다 못한 짐승”으로 매도하며 “모든 일꾼들은 우리나라 주체의 사회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우리의 사회주의를 옹호고수하며 더욱 빛내 나가기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돈 착복, 여자문제 등이 원인이 돼 권력핵심부의 눈 밖에 나 탈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루머도 흘러나왔다.


황 전 비서는 김정일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됐다. 때문에 그는 북한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실제로 올 6월에는 황 전 비서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받고 위장 탈북한 2인조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된 바 있다. 이들은 북한 정찰총국으로부터 “황장엽이 당장 내일 죽더라도 자연사하게 놔둬서는 안된다”는 지령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화 운동에 여생을 바치겠다”던 황 전 비서는 자신이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던 당 창건일이자 남한 망명 후 그토록 각을 세웠던 북한 세습체제에서 김 국방위원장의 3남 김정은이 주석단에 공식 등장한 날에, 굴곡 많던 삶을 뒤로 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비록 황 위원장이 이날 안타깝게 세상을 등졌지만 그가 남긴 북한 민주화는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평가다.

황 전 북한노동당 비서의 장례식에는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고자 하는 각계각층의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지난 14일 오전에만 조현오 경찰청장, 한나라당 서상기 의원 등 180여명의 조문객들이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헌화, 분향을 하며 고인의 넋을 기렸다. 황 전 비서의 빈소가 마련된 이후 현재까지의 조문객은 2000명을 넘어선다.

정정길 전 대통령실장과 정운찬 전 총리는 내실까지 찾아 황 전 비서의 수양딸 김숙향(68)씨를 직접 위로했다. 또 이날 빈소에 있던 장례위원회 공동위원장 박관용 전 국회의장에게는 장례 절차에 각별히 신경 써 줄 것을 당부했다.

통일 전까지 현충원
결국 평양에 모실 것


특히, 황 전 비서가 ‘탈북자의 아버지’ ‘북한 민주화의 기여자’라고 평가 받았던 만큼 탈북자, 자유총연맹, 재향군인회 측 조문객이 빈소를 많이 찾았다.
이날 오전 황 전 비서의 대전 국립 현충원 안장이 결정되자, 유족과 탈북 단체 관계자들의 표정에는 안도감이 묻어났다. 현충원 안장 소식에 힘을 얻은 듯 유족과 탈북 단체 소속 자원봉사자들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밀려드는 조문객을 맞이했다.
장례위원인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선생님의 뜻대로 결국은 평양에 모셔질 것”이라며 “통일 전까지만 현충원에 잠시 모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장엽 프로필

1923년 1월23일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출생
1941년 평양공립상업학교 졸업, 일본 도쿄 주오대 야간 법과 입학
1945년 삼척탄광 징용 생활 중 해방 맞아 평양공립상업학교 교사로 복귀
1946년 조선노동당 입당
1949년 김일성종합대 재학 중 모스크바대 유학,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 공부해 박사학위 취득
1954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1959년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1965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확립, 김정일의 주체사상 개인교사
1970년 당 중앙위원 선출
1972년 최고인민회의 의장
1979년 당 과학교육담당 비서
1980년 노동당 비서
1984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당 국제담당 비서
1987년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위원장
1993년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중국으로부터 개혁·개방 제안 받고 김정일에게 방중 건의했다 거절 당함
1995년 세계 인민들과의 연대성 조선위원회 위원장
1997년 2월12일 주체사상 강연 위해 일본 방문 후 베이징에서 한국대사관에 망명 신청
1998년 국정원 통일정책연구소 이사장
1999년 탈북자동지회 고문
2003년 전주대 석좌교수
2008년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상임고문,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2010년 10월10일 자택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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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검 정국과 검사들 동향

특검 정국과 검사들 동향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전 정부를 겨냥한 3대 특검이 출범을 앞두고 있다. 윤석열정부에서 계속 거부되던 특검법이 이재명정부 첫 법안이 됐다. 사상 최대 규모의 특검 3개가 동시에 출범하면서 검찰 내부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특검이 검찰에게 독이 될지, 정부에 독이 될지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승인한 1호 법안이 3대 특검이 됐다. 헌정사상 최대 규모의 특검 수사팀이 구성될 가운데 검찰 내부에서는 오히려 특검을 반긴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검찰의 수사력을 보여줄 기회이자 최근 검찰 출신을 반기지 않는 로펌으로의 이직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직이냐 영전이냐 이재명정부 출범 이틀 만에 전임 윤석열정부를 겨냥한 사정 수사에 발동이 걸렸다. 국회는 지난 5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주도로 윤석열 전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를 정조준한 3개 특별검사법안을 통과시켰다. 국회는 이날 오후 본회의를 열고 ‘윤석열 내란·외환행위 진상규명 특검(내란 특검)’ ‘김건희 국정 농단 및 불법 선거개입 특검(김건희 특검)’ ‘순직 해병 수사방해 특검(순직 해병 특검)’ 등 3개 법안을 각각 찬성 194표, 반대 3표, 기권 1표로 가결했다. 국민의힘은 ‘부결’ 당론을 정하고 집단 퇴장했지만 안철수·배현진 의원 등 5~6명이 각각 이탈해 찬성표를 던졌다. 이후 지난 10일 대통령실은 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내란 특검법’ ‘김건희 여사 특검법’ ‘채해병 특검법’ 등 3개 특검법을 의결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작년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 전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 등에 대한 특검이 출범한다. 윤정부에서 제기된 각종 의혹에 대해 특검 3개가 동시에 수사에 나서게 됐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가 끝난 뒤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윤 전 대통령의 12·3 계엄 사태 관련 전반을 수사하게 될 ‘내란 특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명품백 수수·불법 선거 개입 의혹 등을 다룰 ‘김건희 특검’, 그리고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및 은폐 의혹을 규명할 ‘순직해병 특검’이 출범하게 된다”며 “세 건의 특검법은 모두 윤정부가 거부권을 반복 행사하며 지연됐던 것으로, 멈춰있던 나라를 정상화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수순”이라는 글을 작성했다. 이어 “내각 구성원들과 충분히 의견을 나누고 조율해 심의와 의결을 마쳤다”며 “이재명정부 1호 법안인 ‘3대 특검법’은 내란 심판과 헌정 질서 회복을 열망하는 국민의 뜻을 받들기 위한 결정”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거부권에 막혀 제대로 행사되지 못했던 국회의 입법 권한을 이제 다시 국민 여러분께 돌려드리고자 한다”며 “이번 특검을 계기로 국민 여러분께서 바라시는 진실이 민주주의 원칙 아래 투명하고 소상하게 밝혀지길 기대한다”고 적었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이날 회의에선 3개 특검법을 포함한 법률안 공포 4건, 대통령령 3건, 일반 안건 1건이 심의 및 의결됐다”고 말했다. 특검 규모에 대해서는 “내란 특검법 최대 267명, 김건희 특검법 최대 205명, 순직해병특검법 최대 105명의 수사 인력이 배치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당선 후 1호 법안으로 의결 검사만 120명·총 수사팀 577명 이어 “순직해병특검법은 최장 140일, 나머지 두 특검법은 최장 170일까지 수사가 가능하다”고 부연했다. 강 대변인은 “이재명정부가 1호 법안으로 특검법 3개를 심의·의결한 것은 대선으로 확인된 내란 심판과 헌정 질서 회복을 원하는 국민의 뜻에 부응하는 조치”라고 언급했다. 이번 3대 특검에서는 전례없는 규모의 특검이 가동될 예정이다. 파견 검사의 수만 해도 120명으로 전체 검사 인력의 6%에 달한다. 내란 특검의 경우 60명, 김건희 특검 40명, 해병대원 특검은 20명에 달하는 검사가 파견될 예정이다. 이는 역대 최대 규모였던 ‘최순실 국정 농단 특검’ 파견 검사(20명)의 6배 수준이다. 전체 수사 인력은 577명에 이른다. 구체적으로 내란 특검은 특검 1명, 특검보 6명, 파견 검사 60명 등 총 267명으로 구성된다. 김건희 특검은 특검보 4명, 검사 40명을 포함해 총 205명, 채상병 특검은 특검보 4명, 검사 20명 등 총 105명 규모다. 특검별 수사 기간은 준비 기간 20일을 포함해 내란 특검과 김건희 특검이 최대 170일, 채상병 특검은 최대 140일로 규정돼있다. 늦어도 오는 7월 중순에는 각 특검 사무실이 출범해 연말까지 수사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은 특검법 공포 전부터 특검 후보를 물색하고 후보자들에 연락을 취하고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검 수사팀장은 통상 부장검사, 특검보는 차장검사, 특검은 검사장급 인사가 맡는다. 하지만 ‘최순실 특검’ 당시 수사팀장을 차장급이었던 윤 전 대통령이 맡은 전례를 감안하면 이번 특검 역시 사건 성격과 수사 난이도에 따라 유동적인 인선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내란 특검은 파견 검사 수가 많아 복수의 차장급 간부가 함께 투입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검찰 내부에서는 특검 파견 검사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너무 많은 인력들이 특검에 몰려 주요 수사가 불가능해 민생 수사에 위험이 된다는 입장이 나온다. 한 현직 부장검사는 “최대 6개월에 가까운 기간에 서울남부지검 검사 수(107명)보다 많은 검사들이 3개 특검에 투입되면, 검찰의 주요 수사가 마비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 차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관련 특검에 기존 수사팀이 합류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라며 “문제는 해당 부서가 맡고 있는 사건이 특검에 속한 사건 외에도 많이 산적해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새로운 인원으로 부서를 다시 꾸린다고 해도 수사기록을 훑어보는 데 시간이 더 걸려 수사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고 꼬집었다. 한 검찰 수사관은 “특검팀으로 파견되지 않으면 남은 사람들이 산적해 있는 모든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며 “지금도 인력이 부족해 업무가 과중돼있는 상황이라 ‘차라리 특검으로 파견을 가서 원활하게 수사하고 싶다’는 의견이 수사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수사 난이도 유동적 인선 한 부장검사는 “특검으로 지정된 사건의 규모가 만만치 않기에 수사 베테랑이 파견될 수밖에 없다”며 “그렇게 되면 수사 지휘부는 물론 베테랑도 일선청에 남아있지 않아 수사를 하더라도 미흡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특검을 경험한 적 있는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특검에는 한창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검사들의 파견된다”며 “하나의 특검만 시작하더라도 일선청에서는 업무과중이 일어나는데 3개의 특검, 특히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은 3개의 특검을 한번에 하는 것은 검찰을 완전히 마비시키겠다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한편으로는 특검을 통해 수사력을 인정받아 새롭게 개편되는 중대범죄수사청(이하 중수청)에서 영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일반적으로 특검에 파견되는 검사들은 수사력을 인정받았다. 성공적인 특검으로 평가받는 ‘ 드루킹 특검’의 허익범 전 특검도 “수사 검사가 특검 성공의 기본”이라며 “가장 정치적인 사건을 비정치적으로 풀어야 하기에 무엇보다 수사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한 검찰 특수부 소속 평검사는 “검찰 내부에서는 특검으로 파견 요청이 온다는 것은 지휘부에 수사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라며 “평검사들 사이에선 ‘파견 이후 특검 지휘부에 수사력을 인정받으면 이후 중수청에서 더 기회를 받을 수 있지 않겠나’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과거에도 윤 전 대통령이 문재인정부 당시 최순실 국정 농단 특검을 잘 이끈 후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영전했으며 그와 같이 수사팀에서 근무했던 검사들도 한 자리씩 꿰찼다. 특히 윤 전 대통령은 차장검사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중앙지검장을 맡기도 했다. 부장검사 출신 한 변호사는 “현재 서울중앙지검 같은 경우 지검장이 부재한 상황”이라며 “윤석열 전 대통령도 특검에서 수사력을 인정받고 초고속 승진을 할 수 있었다. 이번 특검은 지난 최순실 국정 농단 특검보다 파견 검사가 많아 수사력뿐만 아니라 지휘력까지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보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지휘부 눈도장 부장 및 차장급 검사들은 특검과 더불어 이직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윤정부 들어서 로펌으로 이직이 잦던 검사들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 이후 검찰을 퇴직하더라도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거나 기업의 법무팀으로 이직하는 것 외에는 법조계에 남을 방도가 없던 검찰 간부들이 특검으로 성과를 인정받고 이직해 검찰개혁을 피하겠다는 것으로 분석된다. 복수의 법무법인 관계자들은 “특검이 진행되는 동안 겸직과 영리행위가 금지돼있는 만큼 특검 이후에는 돌아갈 검찰이 없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며 “로펌들은 이 때를 위해 실력있는 검찰 출신 법조인을 로펌으로 데려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귀띔했다. 한 10대 로펌 소속 변호사는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라며 “3대 특검에 검찰만 다수 파견되는 것이 아니라 로펌 업계에서도 다수 파견을 나갈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 자리가 없다며 이직을 받아주지 않던 로펌들이 문을 열고 다른 사건 대응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기업에서 검찰 출신 인재 스카우트 제의도 늘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김건희 특검의 경우 기업 사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기업이 신속하게 대응책 마련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한 검찰 간부 출신 변호사는 “최근 동기들에게 기업 법무팀 이직에 관해 물어보는 사람이 늘었다”라며 “이재명정부가 나온 후 공정거래위원회 인력 충원, 중대재해처벌법 등 기업과 관련된 법안을 손보려는 움직임이 계속해서 보이고 있는 상황에 기업은 발등에 불똥 떨어진 듯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특히 김건희 특검에서 기업 사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이권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기업들은 대응책 마련에 부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3대 특검을 지휘할 특별 검사는 지난 13일에 지명됐다. 3대 특검을 지휘할 특별검사는 ▲내란 특검은 조은석 전 감사원장 권한대행 ▲김건희 특검은 민중기 전 서울중앙지법원장 ▲채상병 특검에는 이명현 전 국방부 검찰단 고등검찰부장이 지명됐다. “민생 수사에 차질 있어” 검 개혁과는 모순적 태도 조 특검은 박근혜정부 당시인 2014년 대검 형사부장으로서 세월호 참사 검경 합동 수사를 지휘했고, 문정부에서 서울고검장과 법무연수원장을 지냈다. 윤정부 때 감사원 감사위원 시절에는 전현희 전 국민권익위원장에 대한 감사가 ‘표적 감사’라며 제동을 걸었고, 감사원의 대통령 관저 비리 의혹 감사 결과가 부실하다며 재심의를 주장하는 등 전 정권과 대립했다. 민 특검은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출신으로 김명수 전 대법원장의 측근으로 분류된다. 문정부 때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추가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사건 조사를 주도했고, 이후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을 역임했다. 이 특검은 군법무관 출신으로, 2022년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의 장남 병역비리 의혹을 수사한 이력이 있다. 법조계에서는 특검 수사 인력으로 신속한 수사 착수와 효율성을 위해 기존 수사팀 인원과 특수통 출신 검사 차출이 유력하다고 보고 있다. 3대 특검은 수사팀을 구성한 뒤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음 달 초에 수사가 시작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다만 이 대통령이 각 당 추천 후보자 중 1명씩을 임명하는 시한은 3일 이내인데, 추천 당일 즉시 지명을 완료함에 따라 3대 특검팀 출범에 한층 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법조계에서는 “검찰청을 폐지하겠다면서 전 정권 수사엔 검사를 쓰겠다는 모순적 태도”라는 지적도 나온다. 검찰 안팎에선 “민주당 의원들이 검찰을 없애겠다고 외치면서, 정치적 성과가 필요한 수사에 검사를 끌어다 쓰는 격”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한 10년 차 검사는 “이재명정부가 검찰청 문을 닫겠다고 하는데 직장을 잃게 생긴 검사들이 특검에 들어가고 싶겠느냐”고 말했다. 특수 수사 경험이 있는 한 부장검사도 “정치적 목적으로 사실상 결과를 정해놓고 하는 수사이다 보니, 선뜻 특검에 가겠다는 검사들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른 부부장검사도 “굳이 특검에 발을 담가야 하는지 의문”이라며 “차라리 육아휴직이라도 내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2016년 ‘최순실 국정 농단 특검’ 당시 검찰에 재직했던 한 변호사는 “과거 특검팀은 검찰총장에게 편지까지 써가며 수사에 참여하겠다고 나서는 젊은 검사들이 많았다”며 “지금은 개혁과 수사를 동시에 하겠다고 하니, 후배 검사들은 마음이 내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수사에 참여” 젊은 검사들 법조계 일각에선 검찰의 칼이 이정부에 ‘부메랑’처럼 돌아올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문정부 시절 전 정권 수사를 이끌었던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2019년 ‘조국 사태’를 집중 수사하며 정권에 맞선 것과 비슷한 상황이 재현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차장검사는 “전 정권 수사와 검찰개혁을 동시에 하겠다는 것은 욕심”이라며 “우선순위를 정하지 않으면 수사도, 개혁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법조계 인사는 “민주당과 이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특검 수사 결과가 나오게 되면, 결국 특수부 검사들의 힘이 훨씬 더 세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