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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6월24일 19시37분

일요신문고

<일요시사 신문고-억울한 사람들> (23)국정원이 이용하고 버린 탈북동포 이석환씨

“국정원이 날 이용하고 버렸다”

[일요시사 취재1팀] 신상미 기자 = <일요시사>가 연속기획으로 ‘신문고’ 지면을 신설합니다. 매주 억울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담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좋습니다. <일요시사>는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겠습니다. 스물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탈북동포 이석환씨입니다. 
 

이석환(51·가명)씨는 태어나서 열여덟 해를 북한공민으로 살았다. 그 후 30년을 중국 국적자로 살았다.

이제 또 다시 한국인으로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것이 본래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난해 3월 입국 당시 국정원은 그에게 “중국인으로 사는 것이 너에게도 편한 일”이라며 탈북자 지위는 물론 한국 국적도 주지 않았다. 이씨는 조사가 끝난 어느 밤 택시비 13만원을 받아들고 쫓기듯 합동신문센터를 나왔다.

소모품 취급

이씨의 아버지는 조선족이었다. 1960년대 초 대기근을 피해 북한에 들어왔다. 당시 북한 정권은 조선족에게 우호적이었다. 부친은 김책공대를 졸업하고 황해도 사리원에 배치를 받았다.

1965년 이씨는 사리원에서 태어났다. 그 후 이씨 가족은 국경도시인 함북 회령으로 이주했다. 18세가 되던 1983년, 이씨 일가는 탈북했다. 북한공민으로서 중국에서 산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이씨의 아버지는 중학교 동창에게 뇌물을 주고 가족의 호구를 꾸몄다. 이씨가 길림성 안도현에서 출생해 중학교를 졸업한 것처럼 서류를 꾸며서 호구를 받을 수 있었다.


이씨는 “불법으로 만든 호구였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고 했다. 그 후 1990년대 말, 이씨는 우연한 기회에 같은 탈북자인 김모(67)씨의 소개로 대성공사(국정원의 옛 명칭) 일을 해주게 됐다. 그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대성공사와 북한 사람을 연결해 주는 안전판”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이 아는 북한주민 중 고급정보에 접근 가능한 사람들을 설득해 대성공사에 연결해 주는 일이었다.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일이었지만 이씨는 이 일을 3년 동안이나 지속했다. 보수에 대한 욕심도 있었지만 통일을 앞당기는 데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모든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이씨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장사를 하기도 하고 탈북 브로커 일을 하기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지난해 3월, 재외동포자격으로 두 달 먼저 한국에 입국해 있던 아내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 아내를 돌보기 위해 자신도 한국으로 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아내의 경과가 좋아지자, 그는 국정원에 자진출두해 조사를 받고 한국 국적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국정원에선 “당신이 이렇게 안전하게 중국에서 오래 있었던 것만 봐도 당신의 중국 국적은 진짜가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는 “자신을 감추는 법, 1분 이상 통화하면 추적 당하는 것, 은어로 말하는 것 모두 대성공사에서 가르쳐 준 것”이라고 항변했다. 

대성공사 일 3년 도와…북한정보원 연결
목숨 걸고 도왔는데 정권 바뀌고 나몰라

국정원 측에선 그가 중국에 거주하면서 몇 차례 한국을 드나든 기록을 갖고 있는 점, 북한 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상 ‘북한을 떠나 제3국에 10년 이상 머문 자는 탈북자 지위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조항을 거론하며 문제 삼았다. 몇 년 전 탈북 브로커를 통해 태국까지 갔다가 국정원 측의 거절로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와야 했던 점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이씨는 자신의 호구가 불법적으로 취득된 점, 자신이 북한에서 나고 자란 분명한 북한공민이었다는 점 등을 들어 억울함을 호소했다. 무엇보다 한때나마 국정원 일을 해준 것이 오히려 국정원 측에 부담으로 작용해 자신이 소외 당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실제로 남한에 정착한 탈북동포 중엔 회령에서 알고 지낸 이들이 여럿 있어 이들이 이씨가 북한공민이었음을 증명해 줄 수 있다. 이씨가 대성공사와 연결해 준 사람들 중엔 간첩으로 몰려 정치범 수용소에 다녀온 이도 있다. 최근 1969년에 탈북해 약 30년간 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들어와 한국 국적을 받은 예도 있다. 이씨 스스로 자신이 국정원 일을 해줬기 때문에 국정원이 자신을 부담스러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가 아닌 상황이다.

그는 “남한 국적을 받고 싶은 맘에 이것저것 솔직히 말하다가 대성공사 협조자로 일한 걸 털어놨는데 오히려 말 안 하는 게 나을 뻔 했다”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현재 이씨의 아내는 뇌출혈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 이씨 역시 신분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직업을 얻기가 어려워 하나뿐인 아들이 이씨와 아내를 부양하고 있다. 그는 동대문 쪽방촌에서 하루하루 의미 없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이씨는 자신에게 유리한 일도 불리한 일도 모두 정직하고 일관되게 기자에게 털어놨다. 정착지원금도, 임대 아파트도 필요 없고 국적만이 소원이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남과 북 사이에서 희생양이 되고 이름 없이 묻혀진 이가 이씨뿐일까. 옳은 일에 헌신한다는 생각으로 목숨 걸고 3년간이나 국정원 일을 도왔지만 이씨에게 남은 것은 쪽방 한 칸과 아픈 아내뿐이다.

“국적 주세요”

“나는 정체성이 없어요. 크게 기대는 안 했지만 국적은 주겠지 했는데. 국정원에 내 자료가 있어요. 왜 그걸 인정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개인적 감정은 없겠지만 모든 것을 업무적으로 풀면서 소모품이 됐어요. 더 이상 피해 입을 것도 없고 물러날 데도 없어요. 한 번은 평양 말을 듣는다, (남과 북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다 하면서 오해를 받기도 했어요. 내 원래 이름을 찾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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