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표정이 어둡다. 화려한 비상을 꿈꾸며 공들여 가꿔왔던 대우건설을 인수한 지 3년 만에 다시 토해내게 된 탓이다. 업계는 박 회장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인수에 적극적이었던 점을 상기시키며 그만큼 현재 금호아시아나의 유동성 악화가 심각하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최근 아시아나항공, 금호석유화학 등 그룹 주력 계열사들의 초라한 성적표도 이 같은 분석을 뒷받침하고 있다. 업계는 자연스레 박 회장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분위기다. ‘수장’의 판단 미스로 인한 무리한 덩치 키우기가 그룹의 재무건전성을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해석인 셈이다. 진퇴양난에 빠진 박 회장의 향후 움직임에 귀추가 주목된다.
대우건설 매각 선언…박 회장 오판 비난하며 ‘책임론’ 대두
“60년 형제경영 전통 따라 박 회장도 짐 꾸리나” 관심 증폭
무리한 덩치키우기
금호 자금난에 ‘휘청’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결국 대우건설 포기를 선언했다. 인수 3년 만에 소화도 채 못시키고 다시 토해낸 것이다. 하지만 금호아시아나의 ‘대우건설 재매각’ 소식에 업계는 이미 예상했던 시나리오라는 반응이다. 인수 당시부터 금호건설의 무리수가 독이 되어 돌아올 것이 불 보듯 뻔했다는 것.
금호아시아나가 M&A 시장 최대어 대우건설(자산 5조9000억원)을 인수한 것은 지난 2006년 11월이다. 금호아시아나는 시공능력 1위인 대우건설을 삼켜 단숨에 재계 판도를 바꿔 놨다. 자산기준 재계서열 11위에서 8위(민영화 공기업 제외)로 껑충 뛰어오른 것.
대우건설 ‘풋백옵션’
독이 되어 돌아오다
그러나 이때부터 업계에는 금호아시아나의 ‘자금난설’이 흘러나왔다. 엄청난 인수금액 탓이었다. 당시 금호아시아나는 대우건설을 무려 6조4000억원에 인수했다. M&A 사상 최대의 자금이 투입된 사례다.
금호아시아나는 부족한 인수 자금 마련을 위해 산업은행을 비롯한 18개 금융기관에서 3조원가량을 빌렸다. 이 과정에서 금호아시아나는 재무적 투자자에게 ‘풋백옵션’을 약속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금호의 발목을 붙잡는 독이 됐다.
풋백옵션이란 실물이나 금융자산을 약정된 기일, 가격에 팔 수 있는 권리를 인수자에게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금호아시아나는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대우건설 주가가 올 12월14일까지 1주당 3만2000원을 밑돌 경우 주식을 되사주기로 하는 조건을 내걸고 투자자를 모집했다.
당시 재무적 투자자가 사들인 주식은 1억2000만 주로, 전체 주식의 약 40%에 달한다. 만약 올해 말 투자자들이 풋백옵션을 행사할 경우 대우건설의 주가가 현재 1만2000원대에 머물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금호아시아나는 당장 4조원의 ‘실탄’이 필요한 셈이다.
하지만 금호아시아나는 세계 경제위기 속 건설경기 침체의 어려움이 겹치면서 대우건설 인수 후 충분한 시너지 효과를 보지 못한 상태다. 결국 인수자금 부담에 이은 자금난으로 재매각이라는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또한 업계는 금호아시아나의 대우건설 재매각 사태를 두고 ‘수장’인 박 회장의 차후 거취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2006년 대우건설 인수 당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인수를 진두지휘한 이가 바로 박 회장인 탓이다.
그는 일치감치 대우건설 인수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의지를 불태웠던 인물이다. 2005년 말부터 그룹 내 유명 ‘기획통’들을 불러들여 신규사업팀을 신설, 인수전을 준비할 정도였다. 당시 박 회장은 “인수를 통해 건설부문을 강화하고 택배시장과 3자 물류시장에 진출, 건설과 물류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것”이라는 큰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박 회장의 꿈을 향한 도전에 업계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그룹 내 자금사정을 간과한 엄청난 규모의 인수금 책정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풋백옵션이라는 자구책들이 모두 위험천만하다 해석이었다.
믿었던 항공, 석유화학
니들마저…“한숨만”
그러나 주변의 이러한 우려에도 고집스럽게 꿈을 키웠던 박 회장이었다. 결국 상황이 악화되자 회사 내부에서는 “박 회장의 오판으로 그룹의 재정안전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며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새어나오고 있다.
박 회장에 대한 논란은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양대 계열인 아시아나항공과 금호석유화학의 초라한 성적표에 박 회장의 경영능력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횐율과 고유가, 이자부담 등 3중고를 겪고 있는 아시아나항공은 지난해 1분기 매출이 9793억원으로 전년동기대비 13.6% 증가했지만 당기순이익은 33억원으로 전년(121억원)에 비해 4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금호석유화학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매출은 6511억원으로 사상최대 실적을 올렸지만 당기순이익은 55억원으로 78.4%나 줄었다.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 등의 순이익이 악화되면서 지분법평가손실이 190억원이나 발생한 탓이다. 특히 금호석유화학의 경우 박 회장이 건설 산업을 대신해 그룹 핵심 사업으로 내세우며 주력해 왔던 점을 고려한다면 실망스런 결과다.
박 회장은 사실 대우건설을 인수함과 동시에 건설업을 핵심주력사업으로 추진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2007년부터 업계에는 금호아시아나가 석유화학을 핵심주력사업으로 키운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실제로 당시 금호아시아나는 석유화학 관련 국내 사업장의 확대는 물론 해외진출 공장의 증설도 추진했다.
업계에선 이와 관련 무리한 자금운용에 따른 현금유동화 문제와 함께 국내 건설시장의 경기가 바닥을 치고 있는 점을 고려해 박 회장이 이익이 많이 남는 석유화학사업에 기를 모으는 것 아니겠냐는 해석을 내놓았다.
박 회장의 이러한 노력에도 금호석유화학은 2007년 말부터 결국 공장 가동률을 70%로 떨어뜨리는 감산 정책까지 내세우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물론 당시 시장 전반이 유가상승 등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등 대내외적인 악재가 있었지만 업계 일각에선 박 회장의 경영능력 미숙으로 피해가 더 커진 것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박 회장에 대한 설왕설래가 많은 가운데 그룹 내 형제경영의 미묘한 기류까지 흐르면서 업계는 박 회장의 차후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다. 궁금증의 핵심은 박 회장이 자의든 타의든 회장직을 물러나게 된다면 다음으로 경영승계를 받을 주역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금호아시아나는 지난 60년 동안 ‘형제경영’을 자랑해온 그룹이다. 장자 승계 원칙인 다른 그룹과는 달리 형제끼리 경영권을 공유하고 있는 것. 형제간 우선순위에 따라 그룹 회장과 지주회사를 맡는 방식이다.
먼저 1984년 박 창업주가 타계하자 장남인 고 박성용 명예회장이 그룹 지휘봉을 이어받았다. 이후 고 박성용 회장은 65세가 되던 1996년 그룹 창사 50주년을 맞아 동생 인 고 박정구 회장에게 자리를 넘겼다.
이후 고 박정구 회장이 65세가 되던 2002년 폐암으로 세상을 뜨자 삼남인 박삼구 회장이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지분이 동등해 가능했던 일이다. 실제로 금호가는 경영에 참여하지 않은 5남 박종구씨를 제외한 4형제의 지분이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최근 금호의 자랑거리로 여겨지던 ‘형제경영’이 흔들릴 조짐을 보이고 있다. 현재 그룹을 이끌고 있는 박삼구 회장의 외아들인 박세창 상무가 경영일선에 전면 부각되고 있는 탓이다.
형제경영 60년 전통
다음 주자는 박찬구?
최근 박 상무는 계열사들의 지분 매집과 함께 계열사의 해외사업장 기공식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경영 3세 중 유일하게 ‘경영수업’을 받으며 내실을 다지고 있는 셈. 따라서 일각에선 형제들끼리 회장 자리를 돌아가며 맡았던 대권이양에 판도변화가 올 가능성을 조심스레 제기하고 있다.
업계 일각에선 박 회장이 형제경영의 ‘65세 룰’을 지킨다면 임기가 1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장자상속이라는 욕심을 부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대두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최근에는 다음 왕관을 이어받도록 예정되어 있는 박 회장의 동생 박찬구 석유화학 회장의 움직임 또한 수상하다. 박찬구 회장 부자가 최근 금호산업 지분을 처분하고 금호석유화학 주식을 매입한 탓이다.
때문에 그동안 형제들이 똑같이 보유하고 있던 계열사 지분율의 틀이 깨졌다. 박찬구 회장 부자는 최근 금호석유화학 지분율을 13.97%로 늘리며 최대주주로 등극했다. 반면 금호산업은 2.15%로 지분율이 다른 형제들에 비해 크게 줄었다.
이를 두고 업계는 박찬구 회장이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분가를 하려는 셈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최근 그룹내 박삼구 회장의 장남인 박세창 상무의 대권 승계 가능성이 크게 점쳐지면서 이에 섭섭함을 느낀 박찬구 회장이 미리 살길을 찾아 나선 것 아니겠느냐는 뜻이다.
일각에선 계속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그룹의 유동성 위기가 박찬구 회장의 결심에 힘을 실었다는 분석도 있다. 향후 금호의 경영승계가 박세창씨를 중심으로 이뤄질지, 형제경영을 이어 박찬구 회장으로 이어질지 박삼구 회장의 차후 움직임이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