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4년 84세를 일기로 타계한 고 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는 1901년 전남 나주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박 창업주는 1920년 나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해 오성강습소에서 5개월, 중동학교에서 3개월 수학해 1928년 보통문관시험과 고등문관예시에 합격했다.
그는 20세 때부터 전라남도 광주에서 목화를 취급하는 장사와 잡화상, 목포에서 미곡상, 송정리에서 가마니와 무명장사를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가 토대를 세운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생년월일은 1946년 4월7일. 고 박인천 창업주가 17만원의 자본금으로 미국산 중고택시 두 대를 사들여 설립한 광주택시가 모태다.
이후 박 창업주는 1948년 금호고속(당시 광주여객)을 설립, 버스운수업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한편 금호타이어(1960년)와 금호석유화학(1970년) 등을 잇달아 설립하며 1973년에는 6개사로 그룹체제를 출범시켰다.
‘정직’ ‘근면’ ‘성실’이라는 세 가지 신념을 가슴에 늘 새겼던 박 창업주는 약속과 믿음 또한 중요시했다. 특히 고객과의 약속, 고객과의 믿음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박 창업주는 항상 강조했다.
실제로 고객들의 편의를 위해 막차 시간이 지났더라도 임시차를 운영해 막차를 놓친 손님들을 태우는가 하면 자신이 인수한 한 기업의 사장이 빚더미에 올라앉자 그 사장을 위해 집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또 정치 입문에 대해 그는 “기업인과 정치인은 별개”라고 일축, 수많은 유혹을 끝내 거부했다. 현재 그룹 이름으로 쓰이는 ‘금호’는 고인의 아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