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기획> 2012 대한민국 성희롱 보고서

  • 김민석 ideaed@ilyosisa.co.kr
  • 등록 2012.12.28 15: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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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 여직원에 "스트립쇼 어때?" 교장, 여교사에 "남녀의 성기는…"

[일요시사=사회팀] 교수가 여제자에게 '여행가자'고 말만 해도 성희롱일까. 농담과 성희롱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법적으로 '성희롱이 성립하느냐'에 대한 판단은 국가인권위원회를 거쳐 최종적으로 법원이 결정한다. 하지만 그 사례가 워낙 다양해 어디까지가 성희롱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매우 어려운 게 현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성희롱 진정사건 백서'를 통해 성희롱 실태를 살펴봤다.

현행법상 성희롱이란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 등과 관련해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 행위 또는 성적 언동이나 그밖에 요구에 따르지 아니했다는 이유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성희롱이 법률에 명시되어 규제대상이 된 것은 1999년 12월30일 '여성발전기본법'이 제정되면서부터다.

2001년 11월25일 설립된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여성부 소속 남녀차별개선위원회에서 담당하던 성희롱 시정 업무를 이관받아 고용 및 업무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희롱에 관한 조사와 구제업무를 해오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성희롱 백서 발간

지난 12일 인권위가 발간한 '성희롱 진정사건 백서'(이하 백서)에 따르면 올해 6월 말까지 총 1209건이 인권위에 접수된 것으로 나타났다. 매년 200건이 넘는 성희롱 진정이 접수되고 있으며 건수가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성희롱 진정자는 주로 20대와 평직원이 다수를 차지했다. 나이대별 진정자 비율은 20대가 36.3%로 가장 많았고, 30대(25.3%), 40대(12.6%) 순으로 나타났다.


성희롱 피진정자(가해자)와 진정자(피해자) 간 직위를 상호 비교해보면 중간관리자가 평직원을 성희롱한 경우가 316건(27.4%), 고위관리자가 평직원을 성희롱한 경우는 55건(4.8%), 대표자가 평직원을 성희롱한 경우는 280건(24.3%)으로 중간관리자 이상이 평직원을 성희롱한 경우가 전체의 80.2%를 차지해 권력관계에 의한 성희롱이 주로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권고 사건만을 놓고 볼 경우 피진정자가 대표자인 경우가 44건(35.2%)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개인 사업체 및 자영업 등 소규모 업체 경우 1인 사업주가 고용인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성희롱 발생 장소를 보면 사업장에서 발생한 성희롱이 50.3%로 가장 많았다. 이어 회식 장소(19.6%), 학교 수업 등 교육 장소(4.2%), 출장(3.2%) 순으로 조사됐다.

기관별 성희롱 발생 비율을 보면 기업체가 618건(53.6%)으로 가장 많았고, 초·중·고등학교 및 대학 등 학교가 123건(10.7%)으로 나타났다. 병원과 의원 등 의료기관에서 발생한 사건은 97건(8.4%), 협회, 조합 등 단체는 83건(7.2%), 국가기관은 73건(6.3%), 공사 및 공단 등 공공기관은 60건(5.2%)이다.

성적 언동의 종류는 성적 농담 등 언어적 성희롱이 419건(36.4%)으로 가장 많고 원치 않는 신체 접촉 등 육체적 행위 389건(33.8%), 언어적 행위와 육체적 행위가 같이 발생한 경우가 238건(20.7%)으로 집계됐다. 이 중 직접적인 신체 접촉이 있는 육체적 성희롱의 경우 가장 중한 행위로 형법상 강제추행죄로 고소도 가능하다. 인권위를 거치지 않은 채 경찰에 사건이 접수된 경우 인권위 집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성희롱 사건 발생장소 1위는 기업체
권력관계 있을 때 주로 발생 '말조심'

공공기관에서 벌어진 권고 이상 성희롱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권고란 성희롱 행위로 판단되어 그 소속 기관·단체 또는 감독 기관의 장에게 필요한 조치를 해달라고 권고하는 것을 말한다. 


진정인 A씨는 ㅇㅇ공단 주차관리부장인 피진정인 B씨가 자신과 동료 여직원을 지칭하면서 "젖탱이나 한 번씩 만져주면 된다"라고 발언해 성적 굴욕감을 느꼈다며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참고인 조사 등을 통해 B씨가 실제로 이와 같은 발언을 한 것을 확인하고 B씨 소속 기관의 장인 ㅇㅇ공단 이사장에게 B씨를 경고 조치할 것을 권고했다.

사회복지법인 대표의 아르바이트생 성희롱 사례도 소개돼 있다. 진정인 C씨는 △△복지관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중 복지관장인 D씨의 요구로 수안보에 온천을 갔고 목욕을 마치자 D씨는 "호텔을 예약했다"며 "함께 들어가자"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또 D씨는 밤늦게 전화해 "보고 싶다"는 등의 발언을 해 성적 굴욕감을 받았고 이 때문에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며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참고인들의 진술과 C씨가 제출한 이메일 자료 등을 종합해 D씨의 성적 발언을 확인하고 D씨는 C씨에게 400만원을 지급할 것을 권고했다. 또 인권위가 주최하는 특별인권교육을 수강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D씨는 "'호텔에서 쉬었다 가자'고 한 것은 성인에게 한 제안이므로 원하지 않으면 거절하면 될 일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했다. 이에 인권위는 "D씨는 복지관 관장이고 C씨는 수습직원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채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등 단순 남녀 사이의 제안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호텔서 쉬었다 가자"
  권력관계면 성희롱

서울구치소 여성 수용자에 대한 성희롱 사건은 인권위가 나서면서 실체가 드러난 경우다. 인권위는 2006년 2월 서울구치소에서 발생한 성추행 사건에 대해 직권조사를 실시했다. 구치소에 수용 중이던 여성 수용자 E씨가 분류 심사 도중 교도관 F씨에게 성추행당했다고 구치소 측에 알린 후 같은 달 19일 자살을 시도하면서 인권위가 재조사를 맡은 것이다.

앞서 법원은 F씨가 피해자 E씨의 손을 잡고 위로한 적은 있으나 이를 성적 괴롭힘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자살의 직접적 원인은 성적 괴롭힘이 아니라 '처지 비관'이라고 판시했다.

하지만 인권위 조사 결과 F씨에 의해 자행된 성추행 정도는 심각했고 경찰 조사에서 은폐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밀폐된 분류 심사실에서 F씨는 E씨를 껴안는가 하면 관복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과 엉덩이를 만진 것으로 드러난 것. 또한 이러한 성추행은 E씨뿐만 아니라 서울구치소에 수용된 적 있는 여러 여성 수용자들에게도 자행된 것으로 확인됐다.

인권위는 구치소 측이 이를 알면서도 사건 발생 직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하려 했던 정황을 발견하고 이 사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판단, 서울지방교정청 관련자들을 징계할 것을 법무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또 가해 교도관인 F씨를 강제 추행 치상 혐의 등으로 검찰총장에게 고발했다.

백서에는 경찰 수사 과정에서 일어난 성희롱 사건도 소개돼 있었다. 진정인 G씨는 본인의 강제추행 사건 담당 경찰인 피진정인 H씨가 사건을 조사하면서 사건과 관련 없는 질문을 하고 G씨가 여성 경찰관이 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묻자 "처녀도 아닌데 가슴 한 번 만진 거 가지고 무슨 여형사냐"라고 말해 성적 굴욕감을 느꼈다는 진정을 제기했다.

이에 H씨는 "G씨의 나이가 40세인데 가슴 한 번 만진 것은 본인이 조사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발언했다고 진술했고 인권위는 H씨가 인정한 발언도 충분히 성적 모욕감 또는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사안이라고 판단했다.

다만 H씨가 G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가슴을 오른손으로 만졌다는데 어느 정도 어떻게 만지던가요?"라고 질문한 것은 강제추행 사건을 조사하는 데 필요한 내용으로 보고 문제 삼지 않았다. 인권위는 H씨 소속 경찰서장에게 소속 경찰들을 대상으로 성폭력 범죄 피해자 조사 방법과 관련한 특별인권교육을 실시할 것을 권고하고 사건을 마무리했다.


백서에는 기업체에 의한 다양한 성희롱 사례가 소개돼 있었다. 건수가 많은 만큼 성희롱 수위도 강했다.

한 기업체는 퇴폐 영업 술집에서 회식하며 여직원을 불러 성희롱을 자행하다 덜미가 잡혔다. 소속 부서의 상급자인 I씨 등은 회식이란 명분으로 알몸 스트립쇼를 하는 술집에 J씨를 동석시키고 J씨에게 쇼를 본 소감을 물었다. J씨는 이 일로 말미암은 충격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I씨 등은 "J씨를 회식 자리에 동석시키고 소감을 물은 것은 J에게 수치심을 주려는 의도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 젊은 직원과 세대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농담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권위는 "I씨 등이 부적절한 곳을 회식 장소로 선택했고 회식하는 동안 먼저 집에 가겠다는 J씨를 만류한 후 J씨에게 스트립쇼를 본 소감을 물어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만든 것은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밖에 "회식 자리에서 '남자친구가 있느냐, 성관계 경험이 있느냐, 모텔에 가봤느냐'라는 질문을 하는 것은 여성 직원들에게 성적 수치심과 불쾌감을 야기하는 것으로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인권위는 I씨 등은 J씨에게 손해 배상금 200만원을 지급할 것과 대표이사를 포함한 전 직원을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성희롱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해 위원회에 제출할 것을 권고했다.

간접적 성적 언동도
성희롱 될 수 있어

성희롱은 직접적이고 모욕적인 방식으로 가해지는 성적 언동이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이 사건을 보면 성적 언동 당시 당사자가 면전에 없어도 성희롱에 해당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3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성적 언동도 성희롱이 되는 것.


주유소에서 일하던 K씨는 주유소의 선임직원인 L씨가 직장 동료에게 K씨를 두고 "콜라에다 약을 타서 어떻게 해보지 왜 그냥 보냈느냐?" "그 여자는 내 것이니까 건들지 말라" 등의 발언을 한 것을 전해 듣고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이후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한 성적 언동이 '국가인권위원회법'상 규제 대상인 성희롱에 해당하는지 판단하는 기준이 됐다.

인권위는 "법률이 직장 내 성희롱을 금지하고 제재하는 것은 성차별적 편견이나 권력관계에 근거해 직장에서 직간접적으로 이루어진 성적 언동이 피해자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고 고용 관계에 있어 위축되거나 배제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데 있다"며 "직장 동료나 상하 관계에 있는 사람들 간의 대화는 당사자에게 전달되지 않더라도 근무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직장 내에서 특정 여성을 대상으로 성적 언동을 하는 것은 비록 해당 여성이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할지라도 성희롱의 범주에 해당한다"라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이 사건에서 L씨가 말한 내용은 여성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표현으로 사회 통념이나 합리적 여성의 기준에 비추어 봤을 때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며 이러한 언동이 당사자인 K씨에게 전달되었다면 당사자가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판단했다.

스트립쇼 보며 여직원에게 "어땠어?"
입으로 전해져도 성희롱 될 수 있어

신체 특징을 비유한 농담도 성희롱에 해당될 수 있다. M씨는 퇴근 후 식사 자리에서 옷에 음식물이 묻을지 몰라 앞치마를 달라고 하자 상사인 N씨는 "너는 가슴이 작아서 음식물이 묻지도 않을 텐데"라는 발언을 해 M씨는 성적 굴욕감을 느꼈다며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이 발언은 회식자리에서 발생한 것으로 업무 관련성이 인정되고 여성의 관점에서 볼 때 성적 굴욕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며 N씨에게 특별인권교육을 받을 것을 권고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음담패설도 성희롱에 해당될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초등학교 교사인 O(남)씨는 교장인 P(남)씨가 학교 전체 교직원이 워크숍에 가는 버스 안에서 약 3시간 동안 마이크를 잡고 미리 종이에 준비해온 음담패설(여자와 무의 공통점, 수험생과 신혼부부의 공통점, 책과 여자의 공통점 등)을 장시간 낭독해 O씨는 자신과 특히 여교직원들로 하여금 성적 수치심 및 굴욕감을 느끼게 했다며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P씨가 20여 명의 교사가 탑승한 버스 안에서 미리 준비해온 음담패설을 장시간에 걸쳐 공개적으로 낭독하였고 그 내용이 남성 및 여성의 성기를 빗대어 표현해 누가 들어도 성관계를 연상할 만한 내용이다"며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비유하거나 한자 풀이를 빙자해 여성 및 남성의 성기를 직접 언급하는 등 피해자의 관점에서 볼 때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주는 성적 언동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남성 부하직원이 여성 상사에게 성희롱을 당했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한 사례도 있었다.

진정인 Q(남)씨는 회사 사장인 피진정인 R(여)씨가 사무실이나 차 안에서 팔짱을 끼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거의 매일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하는가 하면 Q씨의 집 앞까지 와서 만나자고 하는 등의 언동을 반복해 정신적 고통을 느끼다 퇴사했다며 진정을 제기했다.

여사장이 부하직원
성희롱한 경우도…

인권위는 참고인들 모두 Q씨가 R씨에게 "그만하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을 고려해 성희롱 사실을 인정했다. 또한 기혼인 여성 고용주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미혼 남성 부하 직원을 상대로 팔짱을 끼거나 '사랑한다'는 등의 언동을 하는 것은 보통의 남성이라면 충분히 성적 굴욕감을 느낄 만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인권위는 P씨는 Q씨에게 손해배상금 300만원을 지급하고 특별인권교육을 받을 것을 권고했다.

백서에는 성희롱 피해 구제 절차 및 사례뿐 아니라 성희롱 관련 법제와 향후 정책 방향 등이 담겨있다. 인권위는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전국 대학 및 공공도서관, 관련 단체 등에 배포할 계획이다. 현재 인권위 사이트(http://www.humanrights.go.kr)에 게시돼 있다.

김민석 기자 <ideaed@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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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발 검찰과의 전쟁 막전막후

여당발 검찰과의 전쟁 막전막후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검찰의 대장동 항소 포기 후폭풍이 거세다. 더불어민주당과 검찰의 시각이 크게 엇갈리면서 서로를 향해 날을 겨누는 형국이다. 검찰청은 내년 9월 폐지될 시한부 운명이지만, 더불어민주당은 ‘검찰개혁’을 필두로 이참에 검찰의 뿌리를 뽑겠다는 방침이다. 국민의힘을 등에 업고 버티기에 나선 검찰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아 당분간 양측 간의 힘겨루기가 이어질 전망이다. 지난 7일 서울중앙지검이 대장동 사건에 대한 항소 시한을 넘기면서 논란에 불이 붙었다. 서울중앙지검이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을 비롯해 ▲남욱 변호사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 ▲정민용 변호사 ▲정영학 회계사 등 대장동 일당에 대한 1심 판결에 항소하지 않은 것이다. 꺾이거나 되치거나 검찰이 항소를 포기하면서 ‘불이익변경 금지 원칙’에 따라 피고인에게 더 무거운 형을 선고할 수 없게 됐다. 대장동 개발 비리로 발생한 범죄수익의 국고 환수 규모가 축소될 것이란 해석에도 힘이 실린다. 화살은 곧바로 이재명 대통령에게로 향했다. 이 대통령은 대장동 사건에서 이해충돌방지법 위반 혐의 등을 받는데, 이미 대장동 민간업자 재판에서 무죄가 나온 만큼 항소 포기로 인해 추가로 다툴 여지를 차단했다는 게 국민의힘의 설명이다. 여기에 대통령실이 항소 포기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이재명 면죄부’라고도 주장했다. 국민의힘 곽규택 대변인은 “대통령실 민정수석실 비서관 4명 중 3명, 법무부 장관 정책보좌관, 법제처장, 국정원 기조실장까지 모두 이 대통령의 변호인 출신”이라며 “이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인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대장동 사건 주요 피고인 정진상, 김용, 이화영 등을 특별 면회하면서 ‘검찰은 증거가 없다’는 발언으로 회유를 시도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보수 성향인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 역시 “국가의 유례없는 사법 정의 포기 사태는 이재명정부의 책임”이라며 “공소 사실의 핵심에 무죄 선고가 난 사건에 검찰이 항소를 포기한 전례를 찾기 어렵다. 대통령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것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정부 출범 이후 대검찰청 차장검사로 승진한 노만석 검찰총장을 겨냥해서는 책임론이 불거졌다. 법조계에 따르면 항소 시한을 앞두고 서울중앙지검은 대장동 일동에 대해 일부 무죄가 선고되는 등 다툼의 여지가 있는 1심 판결에 대해 “관행대로 항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지만, 이를 전해 들은 대검 수뇌부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에 노 대행은 지난 9일 “대장동 사건은 일선 검찰청의 보고를 받고 통상의 중요 사건의 경우처럼 법무부의 의견도 참고한 후 해당 판결의 취지 및 내용, 항소 기준, 사건의 경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며 “검찰총장 대행인 저의 책임하에 서울중앙지검장과의 협의를 거쳐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 역시 대장동 일동에 대해 검찰의 구형량보다 높은 형량이 선고된 만큼 항소 포기가 ‘적절한 판단’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항소 포기 지시는 없었다”고 일축했다. 화약고에 불붙인 ‘항소 포기’ 후폭풍 이재명·노만석·정성호 몽땅 도마 위로 정 장관은 지난 12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 회의에 출석해 ‘(이진수) 법무부 차관에게 대장동 사건 관련으로 어떤 지시를 했느냐’는 국민의힘 배준영 의원의 질문에 “노 검찰총장 직무대행에게 지휘권을 행사할 수도 있으니 항소를 알아서 포기하라는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이어 정 장관은 총 3번 정도 대장동 사건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언급하며 “(두 번째인) 11월6일 목요일에는 국회에서 예결위 종합질의가 있어 국회에 왔는데, 예결위 끝나고 대검에서 항소할 필요성이 있다고 한 의견을 들었다”며 “당시 ‘중형이 선고됐는데 신중한 판단을 해야 하지 않는가’란 정도의 이야기만 하고 돌아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다음 날인 11월7일에도 마찬가지”라며 “저녁에 예결위가 잠시 휴정돼 검찰에서 항소할 것 같다는 구두 보고를 식사 중에 받았고, 그날 저녁 예결위가 끝난 후 최종적으로 항고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부연했다.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대목을 놓고 국민의힘은 “신중한 검토(판단)가 곧 항소 포기인지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며 법무부가 사실상 외압을 행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송언석 원내대표는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이 8글자에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들어가 있다”며 “법무부 장관이 개인적인 견해임을 전제로 하며 검찰에 지시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대장동 사건 수사·공판팀을 이끌었던 일선 검사를 중심으로 반발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김영석 대검찰청 감찰1과 검사는 검찰 내부망 이프로스를 통해 “검찰 역사상 일부 무죄가 선고되고 엄청난 금액의 추징이 선고되지 않은 사건에서 항소 포기를 한 전례가 있었나”라며 이번 결정으로 대장동 일당 등 민간업자에게 수천억원 상당의 범죄수익이 돌아간 점을 꼬집었다. 대장동 사건의 수사·공판팀을 이끌었던 강백신 대구고검 검사도 “항소 포기로 남욱·정영학을 상대로는 범죄수익을 단 한 푼도 환수할 수 없게 됐고, 김만배를 상대로는 당초 예상 금액의 1/10에 불과한 금액만 추징 선고가 이뤄졌음에도 이를 묵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기막힌 타이밍 검찰 안팎에서 책임론이 확산하자 결국 노 대행은 항소 포기 논란이 불거진 지 닷새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자 일선 검사들은 ‘검찰총장 권한대행께 추가 설명을 요청드린다’는 제목의 글을 통해 항소 포기 과정에 대한 상세 설명을 요구하는 입장문을 냈다. 해당 입장문은 박재억 수원지검장을 비롯해 ▲박현준 서울북부지검장 ▲박영빈 인천지검장 ▲박현철 광주지검장▲임승철 서울서부지검장 ▲김창진 부산지검장 등 검사장 18명 명의로 작성됐다. 이들은 “서울중앙지검장은 명백히 항소 의견이었지만 검찰총장 권한대행의 항소 포기 지시를 존중해 최종적으로 공판팀에 항소 포기를 지시했다”며 “검찰총장 권한대행을 상대로 항소 의견을 관철하지 못하고 책임지고 사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면 검찰총장 권한대행이 어제 배포한 입장문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의 항소 의견을 보고받고 법무부의 의견도 참고한 뒤 해당 판결의 취지 및 내용, 항소 기준, 사건의 경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며 “검찰총장 권한대행의 책임 하에 서울중앙지검장과 협의를 거쳐 숙고 끝에 항소 포기를 지시했다는 것”이라고 짚었다. ▲하담미 수원지검 안양지청장 ▲최행관 부산지검 동부지청장 ▲신동원 대구지검 서부지청장 등 8개 대형 지청을 이끄는 지청장들도 집단 성명을 냈다. 이들은 “이번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 지시는 그 결정에 이른 경위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면 검찰이 지켜야 할 가치, 검찰의 존재 이유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이라며 “그간 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 권한대행의 입장문, 법무부 장관의 설명만으로는 항소를 포기한 구체적 경위가 설명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법적·행정적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정치 검사들의 반란을 분쇄하겠다”며 검찰의 집단 반발을 ‘항명’이라고 규정하고 이에 대한 징계를 예고했다. 현재 일반 공무원은 6단계 징계 처분(파면·해임·강등·정직·감봉·견책)이 가능하지만, 검사는 파면에 해당하는 징계 규정이 없다. 검사에 대한 징계는 검사징계법에 따라 이뤄지는데, 이를 ‘검사 특혜법’이라고 지적하며 폐지하겠다는 설명이다.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는 “정치 검사들의 반란에 철저하게 책임을 묻겠다”며 사실상 검찰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김 원내대표는 “정 법무부 장관께 강력히 요청한다. 항명 검사장 전원을 즉시 보직 해임하고 이들이 의원면직하지 못하게 징계 절차를 바로 개시하라”며 “항명에 가담한 지청장과 일반 검사들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이후 김 원내대표가 검사징계법 폐지 법률안·검찰청법 개정안을 각각 국회에 제출하면서 사실상 검찰 징계는 당론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항소 포기 논란 이후 박재억 수원지검장에 이어 송강 광주고검장이 연달아 사의를 표명했지만 민주당은 “사표를 수리하지 말고 징계 절차를 밟아야 한다”며 퇴로를 막았다. 항명? 투쟁? 법무부 내부에서 집단행동에 나선 일부 검사장을 대상으로 평검사 보직이동을 하거나 국가공무원법 위반 등으로 형사 처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지면서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검찰 측에서는 “보복용 강등”이라는 거센 반발이 나오지만 법무부는 “검사장은 직급이 아닌 보직”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강등·징계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검사장의 집단행동을 비판하며 징계의 타당성을 주장했지만, 일선 검사들은 항소 포기 판단 경위에 대해 추가 설명을 요청한 것이 어떻게 항명이냐며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그동안 민주당 의원들이 앞다퉈 일선 검사장을 향해 “빨리 나가라”고 윽박지르던 것과 달리 최근 지도부는 숨 고르기에 돌입한 모양새다. 국민의힘이 계속해서 이정부와 대장동을 엮어 공격하는가 하면, 이 대통령의 UAE(아랍에미리트) 순방 성과가 묻힐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톤 조절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와 김병기 원내대표는 이 대통령이 순방을 떠난 17일부터 이틀간 공개 석상에서 검사 항명, 징계 등 관련 현안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 등 일부 최고위원이 내란전담재판부 도입을 주장했으나 당은 “지도부 차원의 의견은 아니”라며 거리를 뒀다. 정 법무부 장관 역시 지난 18일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검사장 징계 검토 관련 질문에 “어떤 것이 좋은 방법인지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국민을 위해 법무부나 검찰이 안정되는 것”이라며 신중한 자세를 택했다. 낮은 볼륨을 유지하는 지도부와 달리 의원 개개인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민주당 김현정 원내대변인은 한 라디오를 통해 정 법무부 장관의 ‘검찰조직 안정’ 발언에 대한 질문에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넘어가는 것이 조직의 안정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방법은 아니”라고 답했다. 이어 “정 법무부 장관은 법무부와 검찰 전체를 총괄하는 수장이기 때문에 고민이 있으신 것 같다”면서도 “다만 중요한 것은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현재 민주당이 내세우는 원칙은 항명 검사에 대한 징계로, 그 원칙을 지키는 것이 국민 여론이라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몰아붙이던 지도부 잠시 숨 고르기 이제는 각개전투…검사들도 ‘부글’ 민주당이 다수 석을 차지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에서는 ‘집단 항명 검사장 18인’ 전원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항소 포기 결정에 반발하는 검사장 18명을 겨냥해 “헌정 질서의 근본인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과 검찰조직의 지휘 감독체계를 정면으로 무너뜨린 사건”이라고 비판하며 법적 조치에 나선 것이다. 지난 19일 법사위 여당 간사인 김용민 의원은 조국혁신당·무소속 의원과 함께 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이 밝히며 “검찰의 집단 항명은 정치적 집단행동으로 헌정 질서를 훼손하는 중대 범죄”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들의 행동은 단순한 의견 개진이 아니었으며 법이 명백히 금지한 공무의 집단행위, 즉 집단적 항명”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피고발인 18명은 모두 각 검찰청을 대표하는 검사장급 고위 공무원으로서 정치적 중립성이 누구보다 강하게 요구되는 위치에 있다”며 “그런데 이들은 서로 합의해 공동성명을 작성하고 이를 동시에 내부망과 언론에 공개했다. 이는 다수가 결집해 실력으로 주장을 관철하려는 집단적 압력 행위”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압박이 거세지자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뒤 검사들이 반격에 나설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권력이 교체됨에 따라 검사의 태도 역시 손바닥 뒤집듯 바뀌고, 만일 보수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경우 검사의 날이 다시 이 대통령을 향할 것이란 점에서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내년 10월 해체 예정인 검찰청이지만 막강한 권력을 지니던 시절의 관행을 버리지 못한다면 이들을 중심으로 정치 검찰의 모습을 한 또 다른 집단이 탄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실은 “검사 인사권은 법무부에 있다”며 이번 사안에 직접 개입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논란의 중심으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며 대통령실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부각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 민주당 관계자 역시 “‘대통령실 외압’은 궁지에 몰린 국민의힘의 프레임”이라며 “만약 5년 뒤에 검찰이 반기를 들면 그때는 (이 대통령의 거취를) 국민 여론에 맡기면 된다. 지난 몇 년간 수십번의 압수수색과 조사가 이뤄졌고, 그 결과를 전부 국민이 지켜봤다”고 설명했다. 피바람 과도기 이 모든 과정을 놓고 최요한 정치 평론가는 “과도기”라고 설명했다. 최 평론가는 <일요시사>를 통해 “검찰이 하나의 권력으로 등장해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그 대상을 개혁하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고, 이정부는 그걸 시스템으로 헤쳐나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 “개혁은 혁명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혁명은 싹을 자르면 되지만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며 “검사 징계, 검찰개혁을 놓고 같은 진보라 하더라도 결이 다르지 않나. 다양한 논의와 의견을 두들겨 맞춰서 하나의 안을 만드는 게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개혁안은 보수도 일정 정도 동의를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시스템 개혁이라는 건 단칼에 두부처럼 잘리는 게 아닐뿐더러 이정부가 끝날 때까지 (개혁을) 시도하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일일 수도 있다”고 부연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