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기획> 2012 대한민국 성희롱 보고서

  • 김민석 ideaed@ilyosisa.co.kr
  • 등록 2012.12.28 15: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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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 여직원에 "스트립쇼 어때?" 교장, 여교사에 "남녀의 성기는…"

[일요시사=사회팀] 교수가 여제자에게 '여행가자'고 말만 해도 성희롱일까. 농담과 성희롱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법적으로 '성희롱이 성립하느냐'에 대한 판단은 국가인권위원회를 거쳐 최종적으로 법원이 결정한다. 하지만 그 사례가 워낙 다양해 어디까지가 성희롱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매우 어려운 게 현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성희롱 진정사건 백서'를 통해 성희롱 실태를 살펴봤다.

현행법상 성희롱이란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 등과 관련해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 행위 또는 성적 언동이나 그밖에 요구에 따르지 아니했다는 이유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성희롱이 법률에 명시되어 규제대상이 된 것은 1999년 12월30일 '여성발전기본법'이 제정되면서부터다.

2001년 11월25일 설립된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여성부 소속 남녀차별개선위원회에서 담당하던 성희롱 시정 업무를 이관받아 고용 및 업무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희롱에 관한 조사와 구제업무를 해오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성희롱 백서 발간

지난 12일 인권위가 발간한 '성희롱 진정사건 백서'(이하 백서)에 따르면 올해 6월 말까지 총 1209건이 인권위에 접수된 것으로 나타났다. 매년 200건이 넘는 성희롱 진정이 접수되고 있으며 건수가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성희롱 진정자는 주로 20대와 평직원이 다수를 차지했다. 나이대별 진정자 비율은 20대가 36.3%로 가장 많았고, 30대(25.3%), 40대(12.6%) 순으로 나타났다.


성희롱 피진정자(가해자)와 진정자(피해자) 간 직위를 상호 비교해보면 중간관리자가 평직원을 성희롱한 경우가 316건(27.4%), 고위관리자가 평직원을 성희롱한 경우는 55건(4.8%), 대표자가 평직원을 성희롱한 경우는 280건(24.3%)으로 중간관리자 이상이 평직원을 성희롱한 경우가 전체의 80.2%를 차지해 권력관계에 의한 성희롱이 주로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권고 사건만을 놓고 볼 경우 피진정자가 대표자인 경우가 44건(35.2%)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개인 사업체 및 자영업 등 소규모 업체 경우 1인 사업주가 고용인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성희롱 발생 장소를 보면 사업장에서 발생한 성희롱이 50.3%로 가장 많았다. 이어 회식 장소(19.6%), 학교 수업 등 교육 장소(4.2%), 출장(3.2%) 순으로 조사됐다.

기관별 성희롱 발생 비율을 보면 기업체가 618건(53.6%)으로 가장 많았고, 초·중·고등학교 및 대학 등 학교가 123건(10.7%)으로 나타났다. 병원과 의원 등 의료기관에서 발생한 사건은 97건(8.4%), 협회, 조합 등 단체는 83건(7.2%), 국가기관은 73건(6.3%), 공사 및 공단 등 공공기관은 60건(5.2%)이다.

성적 언동의 종류는 성적 농담 등 언어적 성희롱이 419건(36.4%)으로 가장 많고 원치 않는 신체 접촉 등 육체적 행위 389건(33.8%), 언어적 행위와 육체적 행위가 같이 발생한 경우가 238건(20.7%)으로 집계됐다. 이 중 직접적인 신체 접촉이 있는 육체적 성희롱의 경우 가장 중한 행위로 형법상 강제추행죄로 고소도 가능하다. 인권위를 거치지 않은 채 경찰에 사건이 접수된 경우 인권위 집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성희롱 사건 발생장소 1위는 기업체
권력관계 있을 때 주로 발생 '말조심'

공공기관에서 벌어진 권고 이상 성희롱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권고란 성희롱 행위로 판단되어 그 소속 기관·단체 또는 감독 기관의 장에게 필요한 조치를 해달라고 권고하는 것을 말한다. 


진정인 A씨는 ㅇㅇ공단 주차관리부장인 피진정인 B씨가 자신과 동료 여직원을 지칭하면서 "젖탱이나 한 번씩 만져주면 된다"라고 발언해 성적 굴욕감을 느꼈다며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참고인 조사 등을 통해 B씨가 실제로 이와 같은 발언을 한 것을 확인하고 B씨 소속 기관의 장인 ㅇㅇ공단 이사장에게 B씨를 경고 조치할 것을 권고했다.

사회복지법인 대표의 아르바이트생 성희롱 사례도 소개돼 있다. 진정인 C씨는 △△복지관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중 복지관장인 D씨의 요구로 수안보에 온천을 갔고 목욕을 마치자 D씨는 "호텔을 예약했다"며 "함께 들어가자"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또 D씨는 밤늦게 전화해 "보고 싶다"는 등의 발언을 해 성적 굴욕감을 받았고 이 때문에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며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참고인들의 진술과 C씨가 제출한 이메일 자료 등을 종합해 D씨의 성적 발언을 확인하고 D씨는 C씨에게 400만원을 지급할 것을 권고했다. 또 인권위가 주최하는 특별인권교육을 수강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D씨는 "'호텔에서 쉬었다 가자'고 한 것은 성인에게 한 제안이므로 원하지 않으면 거절하면 될 일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했다. 이에 인권위는 "D씨는 복지관 관장이고 C씨는 수습직원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채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등 단순 남녀 사이의 제안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호텔서 쉬었다 가자"
  권력관계면 성희롱

서울구치소 여성 수용자에 대한 성희롱 사건은 인권위가 나서면서 실체가 드러난 경우다. 인권위는 2006년 2월 서울구치소에서 발생한 성추행 사건에 대해 직권조사를 실시했다. 구치소에 수용 중이던 여성 수용자 E씨가 분류 심사 도중 교도관 F씨에게 성추행당했다고 구치소 측에 알린 후 같은 달 19일 자살을 시도하면서 인권위가 재조사를 맡은 것이다.

앞서 법원은 F씨가 피해자 E씨의 손을 잡고 위로한 적은 있으나 이를 성적 괴롭힘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자살의 직접적 원인은 성적 괴롭힘이 아니라 '처지 비관'이라고 판시했다.

하지만 인권위 조사 결과 F씨에 의해 자행된 성추행 정도는 심각했고 경찰 조사에서 은폐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밀폐된 분류 심사실에서 F씨는 E씨를 껴안는가 하면 관복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과 엉덩이를 만진 것으로 드러난 것. 또한 이러한 성추행은 E씨뿐만 아니라 서울구치소에 수용된 적 있는 여러 여성 수용자들에게도 자행된 것으로 확인됐다.

인권위는 구치소 측이 이를 알면서도 사건 발생 직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하려 했던 정황을 발견하고 이 사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판단, 서울지방교정청 관련자들을 징계할 것을 법무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또 가해 교도관인 F씨를 강제 추행 치상 혐의 등으로 검찰총장에게 고발했다.

백서에는 경찰 수사 과정에서 일어난 성희롱 사건도 소개돼 있었다. 진정인 G씨는 본인의 강제추행 사건 담당 경찰인 피진정인 H씨가 사건을 조사하면서 사건과 관련 없는 질문을 하고 G씨가 여성 경찰관이 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묻자 "처녀도 아닌데 가슴 한 번 만진 거 가지고 무슨 여형사냐"라고 말해 성적 굴욕감을 느꼈다는 진정을 제기했다.

이에 H씨는 "G씨의 나이가 40세인데 가슴 한 번 만진 것은 본인이 조사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발언했다고 진술했고 인권위는 H씨가 인정한 발언도 충분히 성적 모욕감 또는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사안이라고 판단했다.

다만 H씨가 G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가슴을 오른손으로 만졌다는데 어느 정도 어떻게 만지던가요?"라고 질문한 것은 강제추행 사건을 조사하는 데 필요한 내용으로 보고 문제 삼지 않았다. 인권위는 H씨 소속 경찰서장에게 소속 경찰들을 대상으로 성폭력 범죄 피해자 조사 방법과 관련한 특별인권교육을 실시할 것을 권고하고 사건을 마무리했다.


백서에는 기업체에 의한 다양한 성희롱 사례가 소개돼 있었다. 건수가 많은 만큼 성희롱 수위도 강했다.

한 기업체는 퇴폐 영업 술집에서 회식하며 여직원을 불러 성희롱을 자행하다 덜미가 잡혔다. 소속 부서의 상급자인 I씨 등은 회식이란 명분으로 알몸 스트립쇼를 하는 술집에 J씨를 동석시키고 J씨에게 쇼를 본 소감을 물었다. J씨는 이 일로 말미암은 충격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I씨 등은 "J씨를 회식 자리에 동석시키고 소감을 물은 것은 J에게 수치심을 주려는 의도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 젊은 직원과 세대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농담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권위는 "I씨 등이 부적절한 곳을 회식 장소로 선택했고 회식하는 동안 먼저 집에 가겠다는 J씨를 만류한 후 J씨에게 스트립쇼를 본 소감을 물어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만든 것은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밖에 "회식 자리에서 '남자친구가 있느냐, 성관계 경험이 있느냐, 모텔에 가봤느냐'라는 질문을 하는 것은 여성 직원들에게 성적 수치심과 불쾌감을 야기하는 것으로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인권위는 I씨 등은 J씨에게 손해 배상금 200만원을 지급할 것과 대표이사를 포함한 전 직원을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성희롱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해 위원회에 제출할 것을 권고했다.

간접적 성적 언동도
성희롱 될 수 있어

성희롱은 직접적이고 모욕적인 방식으로 가해지는 성적 언동이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이 사건을 보면 성적 언동 당시 당사자가 면전에 없어도 성희롱에 해당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3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성적 언동도 성희롱이 되는 것.


주유소에서 일하던 K씨는 주유소의 선임직원인 L씨가 직장 동료에게 K씨를 두고 "콜라에다 약을 타서 어떻게 해보지 왜 그냥 보냈느냐?" "그 여자는 내 것이니까 건들지 말라" 등의 발언을 한 것을 전해 듣고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이후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한 성적 언동이 '국가인권위원회법'상 규제 대상인 성희롱에 해당하는지 판단하는 기준이 됐다.

인권위는 "법률이 직장 내 성희롱을 금지하고 제재하는 것은 성차별적 편견이나 권력관계에 근거해 직장에서 직간접적으로 이루어진 성적 언동이 피해자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고 고용 관계에 있어 위축되거나 배제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데 있다"며 "직장 동료나 상하 관계에 있는 사람들 간의 대화는 당사자에게 전달되지 않더라도 근무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직장 내에서 특정 여성을 대상으로 성적 언동을 하는 것은 비록 해당 여성이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할지라도 성희롱의 범주에 해당한다"라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이 사건에서 L씨가 말한 내용은 여성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표현으로 사회 통념이나 합리적 여성의 기준에 비추어 봤을 때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며 이러한 언동이 당사자인 K씨에게 전달되었다면 당사자가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판단했다.

스트립쇼 보며 여직원에게 "어땠어?"
입으로 전해져도 성희롱 될 수 있어

신체 특징을 비유한 농담도 성희롱에 해당될 수 있다. M씨는 퇴근 후 식사 자리에서 옷에 음식물이 묻을지 몰라 앞치마를 달라고 하자 상사인 N씨는 "너는 가슴이 작아서 음식물이 묻지도 않을 텐데"라는 발언을 해 M씨는 성적 굴욕감을 느꼈다며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이 발언은 회식자리에서 발생한 것으로 업무 관련성이 인정되고 여성의 관점에서 볼 때 성적 굴욕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며 N씨에게 특별인권교육을 받을 것을 권고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음담패설도 성희롱에 해당될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초등학교 교사인 O(남)씨는 교장인 P(남)씨가 학교 전체 교직원이 워크숍에 가는 버스 안에서 약 3시간 동안 마이크를 잡고 미리 종이에 준비해온 음담패설(여자와 무의 공통점, 수험생과 신혼부부의 공통점, 책과 여자의 공통점 등)을 장시간 낭독해 O씨는 자신과 특히 여교직원들로 하여금 성적 수치심 및 굴욕감을 느끼게 했다며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P씨가 20여 명의 교사가 탑승한 버스 안에서 미리 준비해온 음담패설을 장시간에 걸쳐 공개적으로 낭독하였고 그 내용이 남성 및 여성의 성기를 빗대어 표현해 누가 들어도 성관계를 연상할 만한 내용이다"며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비유하거나 한자 풀이를 빙자해 여성 및 남성의 성기를 직접 언급하는 등 피해자의 관점에서 볼 때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주는 성적 언동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남성 부하직원이 여성 상사에게 성희롱을 당했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한 사례도 있었다.

진정인 Q(남)씨는 회사 사장인 피진정인 R(여)씨가 사무실이나 차 안에서 팔짱을 끼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거의 매일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하는가 하면 Q씨의 집 앞까지 와서 만나자고 하는 등의 언동을 반복해 정신적 고통을 느끼다 퇴사했다며 진정을 제기했다.

여사장이 부하직원
성희롱한 경우도…

인권위는 참고인들 모두 Q씨가 R씨에게 "그만하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을 고려해 성희롱 사실을 인정했다. 또한 기혼인 여성 고용주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미혼 남성 부하 직원을 상대로 팔짱을 끼거나 '사랑한다'는 등의 언동을 하는 것은 보통의 남성이라면 충분히 성적 굴욕감을 느낄 만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인권위는 P씨는 Q씨에게 손해배상금 300만원을 지급하고 특별인권교육을 받을 것을 권고했다.

백서에는 성희롱 피해 구제 절차 및 사례뿐 아니라 성희롱 관련 법제와 향후 정책 방향 등이 담겨있다. 인권위는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전국 대학 및 공공도서관, 관련 단체 등에 배포할 계획이다. 현재 인권위 사이트(http://www.humanrights.go.kr)에 게시돼 있다.

김민석 기자 <ideaed@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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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승자박’ 정청래 리더십 위기

‘자승자박’ 정청래 리더십 위기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리더십이 위기다. 1인1표제가 통과된 이후 힘을 받나 싶더니,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문제와 2차 종합특검 후보 논란 등 악재가 겹치면서 연임에 적신호가 켜졌다. 이재명 대통령도 시시각각 리더십 시험대에 올랐지만 결국 대권가도의 길을 걸었다. 정 대표도 무사히 ‘이재명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지난 10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과의 합당 논의를 ‘일시 중지’하기로 결론지었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의원총회서 민주당 의원들은 대체로 지방선거 전 합당 추진을 중단하자는 의견을 낸 것으로 전해진다. 충분한 논의 없이 합당을 띄워 당을 혼란스럽게 하고, 당·청 관계까지 어색해진 만큼 ‘정청래 책임론’이 불거지면서 리더십은 타격을 입게 됐다. 더 좁아진 운신의 폭 이날 정 대표는 국회에서 비공개 최고위원회의를 연 뒤 브리핑에서 “오늘 민주당 긴급 최고위와 함께 지방선거 전에 합당 논의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대신 지방선거 후 통합을 추진하기 위한 ‘연대와 통합을 위한 추진준비위원회(이하 통합추진준비위)’ 구성을 결정하고, 혁신당에도 준비위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정 대표는 “당 대표로서 혁신당과 통합을 제안한 것은 오직 지방선거 승리와 이재명정부의 성공을 위한 충정이었다”며 “그러나 통합 제안이 당 안팎에서 많은 우려와 걱정을 가져왔고, 통합을 통한 상승 작용 또한 어려움에 처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러 자리에서 의원들의 말씀을 경청했고 민주당 지지층 여론조사 지표도 꼼꼼히 살피는 과정에서 더 이상 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당 안팎의 여론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당을 혼란케 한 점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정 대표는 “그동안 통합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은 저의 부족함 때문”이라며 “국민 여러분과 민주당 당원들, 혁신당 당원들께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당초 이달 13일 입장을 밝히겠다던 혁신당은 날짜를 앞당겨 지난 11일 긴급 최고위원회를 열고 사안에 대해 입을 열었다. 혁신당 조국 대표는 통합추진준비위 구성에 동의하며 6월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열어뒀다. 민주당을 향한 뼈있는 말도 이어졌다. 조 대표가 “선거 후에는 통합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내용과 방식에 대한 논의를 책임감 있게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동안 혁신당은 민주당에 흡수되는 방법을 피하고자 했던 만큼 합치는 방식에 대한 합의점을 찾는 것이 합당의 최대 과제로 남아있다. 조 대표는 “양당 간 회동이 이뤄지면 먼저 민주당이 제안한 연대가 지방선거에서의 연대인지 아니면 추상적 구호로서의 연대인지 확인해야 한다”며 “지방선거 연대가 맞다면 추진준비위에서 그 원칙과 방법을 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모든 과정에서 양당은 상호 신뢰와 존중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며 “특정 정치인 개인과 계파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반드시 역효과가 난다. 국민과 양당 당원께 또다시 실망을 드리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동 걸린 민주당-혁신당 합당…다음 복안은? ‘쌍방울 변호인’까지…제대로 꽂힌 ‘2연타’ 조 대표는 정 대표의 사과를 수용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조 대표는 “정 대표께서 혁신당 당원에게 표명한 사과를 받아들인다”며 “혁신당 당원은 당으로 향해지는 비방과 모욕에 큰 상처를 입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밝혔다. 혁신당 박병언 선임대변인도 회견 후 기자들과 만나 “(민주당이) 단순히 연대라고만 표현했는데 우당 간 레토릭적 연대를 의미하는지, 실질적으로 두 당이 지선을 치러낸다는 선거 연대인지 분명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민주당의 답변을 요구했다. 앞서 민주당은 합당이 아닌 ‘지선 이후 통합’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민주당의 답변에 따라 향후 당의 대응이 달라질 것으로 풀이된다. 합당 논의가 중지되면서 당이 숨 고르기에 들어가나 싶더니 2차 종합특검으로 추천된 전준철 변호사가 새로운 불씨가 됐다. 민주당이 추천한 전 변호사는 2023년 ‘불법 대북 송금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 등의 변호인으로 선임된 인물이다. 1심 이후 사임했지만, 친명(친 이재명)계에서는 “이재명 죽이기” “제2의 체포동의안 사태” 등 격하게 반발했다. 친청(친 정청래)계로 분류되는 이성윤 최고위원이 전 변호사를 추천하면서 반발이 더욱 거세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전 변호사는 검사 시절 김건희 주가조작 사건, 한동훈 채널A 사건 등을 담당했다. 이 최고위원은 “(전 변호사가) 윤석열·김건희 수사를 할 때 서슬 퍼런 윤 총장하에서도 결코 소신을 굽히지 않고 강직하게 수사했다”며 “이번 2차 종합특검의 중요성에 비춰 적임자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확한 팩트 확인 없이 전 변호사가 김성태 대북 송금 조작 의혹 사건을 변호했고, 그런 변호사를 추천함으로써 마치 정치적 음모가 있는 것처럼 의혹이 확산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정·이 차이는? ‘윤정부에서 탄압을 받은 변호사’를 강조했지만, 민주당을 설득시킬 명분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자 이 최고위원은 “이번 2차 종합특검 추천 과정에서 조금 더 세밀하게 살피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앞으로는 더 세심히 살피겠다”고 사과했다. 정 대표도 거듭 고개를 숙였다. 정 대표는 해당 사태를 인사 검증 실패에 따른 ‘사고’로 규정하고 “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의 책임은 당 대표인 저에게 있다. 대단히 죄송하다”며 사과의 뜻을 밝혔다. 지도부가 진화에 나섰지만 사태는 이 최고위원을 향한 사퇴 압박으로 이어졌다. 이번 사태가 단순한 인사 사고가 아닌 정청래 체제를 향한 불만이 표면화된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합당 무산과 후보자 논란으로 정 대표의 리더십이 2연타를 맞으며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연임 가능성도 불투명해졌다. 정 대표는 직접 연임 여부를 밝히지 않았지만 1인1표제 등 당원의 힘을 강화하는 작업에 공을 들이며 대권주자로 나서기 위한 입지를 다지고 있다는 해석이 우세했다. 혁신당과의 합당 이후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끈다면 공은 정 대표에게 돌아간다. 그 성과를 토대로 대표 연임에 성공한 뒤 차기 대권까지 밟는 이른바 ‘이재명의 길’을 염두에 뒀다는 것이다. 여의도가 바라본 이재명의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친문(친 문재인)계가 민주당을 꽉 쥐던, 시절 그는 한 줌의 계파도 없이 고군분투하며 기득권에 맞섰다. 온건파 사이에서 파격적인 개혁을 앞세워 당원들의 갈증을 해소했고, 이들을 ‘개딸(개혁의 딸)’로 묶어 본격적인 팬덤 정치에 나섰다. 당 대표 시절에는 대선에 출마하려는 대표의 사퇴 시한인 ‘대선 1년 전’에 예외를 두는 내용의 당헌을 바꾸면서 극심한 내홍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당시 이재명 대표는 자신 있게 뜻을 밀어붙였고 전당대회서 최종 득표율 85.4%로 연임에 성공했다. 리더십 심폐소생 권력의 정점에 선 이 대통령이 걸어온 길은 비주류에서 주류로 거듭나고 싶어하는 정치인들의 ‘롤모델’로 자리 잡았다. 정 대표는 그런 거친 이재명의 길 초입에 들어섰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사이다 화법’으로 지지 세력을 키우는 시도는 이 대통령과 매우 유사하다. 이 대통령도 성공하지 못했던 1인1표제를 정 대표는 해냈다”면서도 “서둘렀던 게 문제다. 합당도 시기가 적절하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어 “이 대통령은 당 대표이던 시절부터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맞아떨어졌다. 그때는 민주당이 야당이었고 윤석열·김건희라는 공공의 적이 있으니 친명과 비명(비 이재명)이 매일같이 싸워도 봉합할 명분이 충분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대통령과 정 대표의 차이는 측근의 유무다. 이 대통령은 성남시장일 때부터 함께해 온 이른바 ‘성남 라인’이 존재했고, 김현지 대통령비서실 제1부속실장 등 측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며 “친청을 자처하는 의원들이 있지만 이들을 측근이라고는 볼 수 없다. 김어준·유승민 두 사람이 정 대표에게 영향을 주는 인물로 꼽히지만, 그들조차도 자기 정치에 당 대표를 쓰는 느낌이 든다. 누가 중심이고, 누가 휘둘리는지 알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승부수를 던지지 않는 한 지방선거가 정 대표의 마지막 리더십 시험대가 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린다. 지방선거에 사활을 걸어 ‘압승’을 끌어낸다면 무너진 리더십을 다지는 건 물론 8월 전당대회 출마 명분까지 얻을 수 있다. 당장은 정 대표가 타격을 받았지만 선거 국면을 통과하면서 과오가 희석되는 흐름에 기대를 건 셈이다. 민주당은 오는 4월 중순까지 모든 지방선거 공천을 마무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다만 경선 규칙과 공천 룰 등을 두고 계파 간 갈등이 재점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모든 권력에는 비판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한 정치권 관계자의 말처럼 반대 여론을 찬성 여론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리더십이 판가름 난다. 시계를 돌려 2024년 4월, 이 대통령 역시 당 대표이던 시절 공천 시즌을 앞두고 ‘비명횡사’ 논란에 휩싸였다. 현역 의원 의정평가 하위 20% 통보를 박은 이는 6명으로 모두 비명계였던 만큼 의원들 대다수가 ‘친명’을 내세워 마케팅을 이어갔다. 이, 비주류서 180석 야당 대표로 지선 앞둔 대표님의 큰 그림은? 공천 갈등은 당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고 민주당이 패배했던 2012년 총선이 되풀이될 것이란 당내 우려가 커졌다. 하루가 멀다고 나오는 사퇴 요구에 이 대표는 “툭 하면 사퇴 요구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사퇴하면 1년 내내 대표를 바꿔야 한다”며 오히려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친명과 비명 간의 갈등은 “환골탈태 과정에서 생기는 약간의 진통”으로 진단했다. 이 대표의 리더십이 총선의 최대 걸림돌로 여겨졌지만, 180석 공룡 야당을 탄생시키면서 여론을 뒤집었다. 정 대표 역시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합당 논란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지방선거 승리에 올인하겠다”며 반전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기습 행동으로 당을 흔들지 종잡을 수 없어 잃어버린 신임을 되찾는 것이 지방선거를 앞둔 첫 번째 과제로 여겨진다. 정 대표는 ‘억울한 컷오프를 최소화하는 것’에 방점을 찍었다. 지난 11일에는 “공천 과정 전반의 불공정·불합리한 사례를 사전에 점검해 신뢰받는 공천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노력하겠다”며 공천신문고 구성 안건을 의결했다. 이날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민주당이 합당 과정에 여러 가지 내홍을 겪고 걱정을 끼쳐드렸지만 그런 와중에도 할 일은 빈틈없이 해왔다”며 “민주당은 공정한 경선을 통한 공천, 투명한 공천이 지방선거 승리의 요체임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당 대표의 이 같은 의지가 (공천신문고) 제도를 통해서 충실히 반영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말한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가 ‘이재명 모델’로 노선을 잡았지만 ‘제2의 ○○○’이라는 꼬리표가 오히려 발목을 잡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대선을 앞두고 과감하게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은 이 대통령의 ‘중도 보수’ 전략까지 정 대표가 따라 할 수 있겠냐는 점에서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문재인 전 대통령에 실망한 사람들이 정권교체에 손을 들어줬다. 이 대통령이 임기를 마칠 때 즈음이면 정권 유지든 교체든 국민의 마음속에 새로운 잣대가 세워질 것”이라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좌우 통합을 이뤄낼 지도자를 원할지, 지금보다 조금 더 강경한 지도자를 원할지는 현 정부에 달려 있다. 그 시대에 맞는, 또 국민이 원하는 사람이 차기 대권주자로 분류될 것”이라고 봤다. 신선한 뉴페이스? 이어 “이 대통령은 후임자를 키우지 않는다고 한다. 미래의 민주당은 당 대표도, 차기 대권주자도 ‘포스트 이재명’이 아닌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며 “이 대통령의 행보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이재명 그림자에만 메어서는 민주당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극단으로 치닫는 여야 갈등 지난 12일 이재명 대통령이 설을 앞두고 민생 회복과 국정 안정을 위한 초당적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여야 대표를 오찬에 초대했지만, 약속 시간을 한 시간 앞두고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불참을 통보했다. 장 대표는 “(이번 회동이) 부부 싸움하고 둘이 화해하겠다고 옆집 아저씨 불러놓는 꼴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어 “오늘 회동에 가면 여야 합치를 위해 무슨 반찬을 내놨고, 쌀에 무슨 잡곡을 섞었고 그런 것들로 오늘 뉴스를 다 덮으려 할 것”이라며 “대한민국 사법시스템 무너지는 소리를 덮기 위해 여야 대표와 대통령이 악수하는 사진으로 모든 걸 다 덮으려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날 밤 민주당이 추진하는 이른바 ‘재판소원법’과 ‘대법관증원법’이 국민의힘 반발 속에 여당의 주도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한 것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정청래 대표는 SNS를 통해 “국민과 대통령에 대한 예의는 눈곱만큼도 없는 국민의힘의 작태에 경악한다”며 “본인이 요청할 때는 언제고 약속 시간 직전에 이 무슨 결례인가. 국민의힘, 정말 ‘노답(답이 없음)’”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청와대도 “이번 회동은 국정 현안에 대한 소통과 협치를 위한 자리였다. 그런 취지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데 깊은 아쉬움을 전했다”고 밝혔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