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기획> 2012 대한민국 성희롱 보고서

  • 김민석 ideaed@ilyosisa.co.kr
  • 등록 2012.12.28 15: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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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 여직원에 "스트립쇼 어때?" 교장, 여교사에 "남녀의 성기는…"

[일요시사=사회팀] 교수가 여제자에게 '여행가자'고 말만 해도 성희롱일까. 농담과 성희롱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법적으로 '성희롱이 성립하느냐'에 대한 판단은 국가인권위원회를 거쳐 최종적으로 법원이 결정한다. 하지만 그 사례가 워낙 다양해 어디까지가 성희롱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매우 어려운 게 현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성희롱 진정사건 백서'를 통해 성희롱 실태를 살펴봤다.

현행법상 성희롱이란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 등과 관련해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 행위 또는 성적 언동이나 그밖에 요구에 따르지 아니했다는 이유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성희롱이 법률에 명시되어 규제대상이 된 것은 1999년 12월30일 '여성발전기본법'이 제정되면서부터다.

2001년 11월25일 설립된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여성부 소속 남녀차별개선위원회에서 담당하던 성희롱 시정 업무를 이관받아 고용 및 업무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희롱에 관한 조사와 구제업무를 해오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성희롱 백서 발간

지난 12일 인권위가 발간한 '성희롱 진정사건 백서'(이하 백서)에 따르면 올해 6월 말까지 총 1209건이 인권위에 접수된 것으로 나타났다. 매년 200건이 넘는 성희롱 진정이 접수되고 있으며 건수가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성희롱 진정자는 주로 20대와 평직원이 다수를 차지했다. 나이대별 진정자 비율은 20대가 36.3%로 가장 많았고, 30대(25.3%), 40대(12.6%) 순으로 나타났다.


성희롱 피진정자(가해자)와 진정자(피해자) 간 직위를 상호 비교해보면 중간관리자가 평직원을 성희롱한 경우가 316건(27.4%), 고위관리자가 평직원을 성희롱한 경우는 55건(4.8%), 대표자가 평직원을 성희롱한 경우는 280건(24.3%)으로 중간관리자 이상이 평직원을 성희롱한 경우가 전체의 80.2%를 차지해 권력관계에 의한 성희롱이 주로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권고 사건만을 놓고 볼 경우 피진정자가 대표자인 경우가 44건(35.2%)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개인 사업체 및 자영업 등 소규모 업체 경우 1인 사업주가 고용인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성희롱 발생 장소를 보면 사업장에서 발생한 성희롱이 50.3%로 가장 많았다. 이어 회식 장소(19.6%), 학교 수업 등 교육 장소(4.2%), 출장(3.2%) 순으로 조사됐다.

기관별 성희롱 발생 비율을 보면 기업체가 618건(53.6%)으로 가장 많았고, 초·중·고등학교 및 대학 등 학교가 123건(10.7%)으로 나타났다. 병원과 의원 등 의료기관에서 발생한 사건은 97건(8.4%), 협회, 조합 등 단체는 83건(7.2%), 국가기관은 73건(6.3%), 공사 및 공단 등 공공기관은 60건(5.2%)이다.

성적 언동의 종류는 성적 농담 등 언어적 성희롱이 419건(36.4%)으로 가장 많고 원치 않는 신체 접촉 등 육체적 행위 389건(33.8%), 언어적 행위와 육체적 행위가 같이 발생한 경우가 238건(20.7%)으로 집계됐다. 이 중 직접적인 신체 접촉이 있는 육체적 성희롱의 경우 가장 중한 행위로 형법상 강제추행죄로 고소도 가능하다. 인권위를 거치지 않은 채 경찰에 사건이 접수된 경우 인권위 집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성희롱 사건 발생장소 1위는 기업체
권력관계 있을 때 주로 발생 '말조심'

공공기관에서 벌어진 권고 이상 성희롱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권고란 성희롱 행위로 판단되어 그 소속 기관·단체 또는 감독 기관의 장에게 필요한 조치를 해달라고 권고하는 것을 말한다. 


진정인 A씨는 ㅇㅇ공단 주차관리부장인 피진정인 B씨가 자신과 동료 여직원을 지칭하면서 "젖탱이나 한 번씩 만져주면 된다"라고 발언해 성적 굴욕감을 느꼈다며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참고인 조사 등을 통해 B씨가 실제로 이와 같은 발언을 한 것을 확인하고 B씨 소속 기관의 장인 ㅇㅇ공단 이사장에게 B씨를 경고 조치할 것을 권고했다.

사회복지법인 대표의 아르바이트생 성희롱 사례도 소개돼 있다. 진정인 C씨는 △△복지관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중 복지관장인 D씨의 요구로 수안보에 온천을 갔고 목욕을 마치자 D씨는 "호텔을 예약했다"며 "함께 들어가자"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또 D씨는 밤늦게 전화해 "보고 싶다"는 등의 발언을 해 성적 굴욕감을 받았고 이 때문에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며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참고인들의 진술과 C씨가 제출한 이메일 자료 등을 종합해 D씨의 성적 발언을 확인하고 D씨는 C씨에게 400만원을 지급할 것을 권고했다. 또 인권위가 주최하는 특별인권교육을 수강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D씨는 "'호텔에서 쉬었다 가자'고 한 것은 성인에게 한 제안이므로 원하지 않으면 거절하면 될 일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했다. 이에 인권위는 "D씨는 복지관 관장이고 C씨는 수습직원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채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등 단순 남녀 사이의 제안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호텔서 쉬었다 가자"
  권력관계면 성희롱

서울구치소 여성 수용자에 대한 성희롱 사건은 인권위가 나서면서 실체가 드러난 경우다. 인권위는 2006년 2월 서울구치소에서 발생한 성추행 사건에 대해 직권조사를 실시했다. 구치소에 수용 중이던 여성 수용자 E씨가 분류 심사 도중 교도관 F씨에게 성추행당했다고 구치소 측에 알린 후 같은 달 19일 자살을 시도하면서 인권위가 재조사를 맡은 것이다.

앞서 법원은 F씨가 피해자 E씨의 손을 잡고 위로한 적은 있으나 이를 성적 괴롭힘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자살의 직접적 원인은 성적 괴롭힘이 아니라 '처지 비관'이라고 판시했다.

하지만 인권위 조사 결과 F씨에 의해 자행된 성추행 정도는 심각했고 경찰 조사에서 은폐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밀폐된 분류 심사실에서 F씨는 E씨를 껴안는가 하면 관복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과 엉덩이를 만진 것으로 드러난 것. 또한 이러한 성추행은 E씨뿐만 아니라 서울구치소에 수용된 적 있는 여러 여성 수용자들에게도 자행된 것으로 확인됐다.

인권위는 구치소 측이 이를 알면서도 사건 발생 직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하려 했던 정황을 발견하고 이 사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판단, 서울지방교정청 관련자들을 징계할 것을 법무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또 가해 교도관인 F씨를 강제 추행 치상 혐의 등으로 검찰총장에게 고발했다.

백서에는 경찰 수사 과정에서 일어난 성희롱 사건도 소개돼 있었다. 진정인 G씨는 본인의 강제추행 사건 담당 경찰인 피진정인 H씨가 사건을 조사하면서 사건과 관련 없는 질문을 하고 G씨가 여성 경찰관이 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묻자 "처녀도 아닌데 가슴 한 번 만진 거 가지고 무슨 여형사냐"라고 말해 성적 굴욕감을 느꼈다는 진정을 제기했다.

이에 H씨는 "G씨의 나이가 40세인데 가슴 한 번 만진 것은 본인이 조사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발언했다고 진술했고 인권위는 H씨가 인정한 발언도 충분히 성적 모욕감 또는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사안이라고 판단했다.

다만 H씨가 G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가슴을 오른손으로 만졌다는데 어느 정도 어떻게 만지던가요?"라고 질문한 것은 강제추행 사건을 조사하는 데 필요한 내용으로 보고 문제 삼지 않았다. 인권위는 H씨 소속 경찰서장에게 소속 경찰들을 대상으로 성폭력 범죄 피해자 조사 방법과 관련한 특별인권교육을 실시할 것을 권고하고 사건을 마무리했다.


백서에는 기업체에 의한 다양한 성희롱 사례가 소개돼 있었다. 건수가 많은 만큼 성희롱 수위도 강했다.

한 기업체는 퇴폐 영업 술집에서 회식하며 여직원을 불러 성희롱을 자행하다 덜미가 잡혔다. 소속 부서의 상급자인 I씨 등은 회식이란 명분으로 알몸 스트립쇼를 하는 술집에 J씨를 동석시키고 J씨에게 쇼를 본 소감을 물었다. J씨는 이 일로 말미암은 충격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I씨 등은 "J씨를 회식 자리에 동석시키고 소감을 물은 것은 J에게 수치심을 주려는 의도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 젊은 직원과 세대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농담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권위는 "I씨 등이 부적절한 곳을 회식 장소로 선택했고 회식하는 동안 먼저 집에 가겠다는 J씨를 만류한 후 J씨에게 스트립쇼를 본 소감을 물어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만든 것은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밖에 "회식 자리에서 '남자친구가 있느냐, 성관계 경험이 있느냐, 모텔에 가봤느냐'라는 질문을 하는 것은 여성 직원들에게 성적 수치심과 불쾌감을 야기하는 것으로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인권위는 I씨 등은 J씨에게 손해 배상금 200만원을 지급할 것과 대표이사를 포함한 전 직원을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성희롱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해 위원회에 제출할 것을 권고했다.

간접적 성적 언동도
성희롱 될 수 있어

성희롱은 직접적이고 모욕적인 방식으로 가해지는 성적 언동이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이 사건을 보면 성적 언동 당시 당사자가 면전에 없어도 성희롱에 해당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3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성적 언동도 성희롱이 되는 것.


주유소에서 일하던 K씨는 주유소의 선임직원인 L씨가 직장 동료에게 K씨를 두고 "콜라에다 약을 타서 어떻게 해보지 왜 그냥 보냈느냐?" "그 여자는 내 것이니까 건들지 말라" 등의 발언을 한 것을 전해 듣고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이후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한 성적 언동이 '국가인권위원회법'상 규제 대상인 성희롱에 해당하는지 판단하는 기준이 됐다.

인권위는 "법률이 직장 내 성희롱을 금지하고 제재하는 것은 성차별적 편견이나 권력관계에 근거해 직장에서 직간접적으로 이루어진 성적 언동이 피해자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고 고용 관계에 있어 위축되거나 배제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데 있다"며 "직장 동료나 상하 관계에 있는 사람들 간의 대화는 당사자에게 전달되지 않더라도 근무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직장 내에서 특정 여성을 대상으로 성적 언동을 하는 것은 비록 해당 여성이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할지라도 성희롱의 범주에 해당한다"라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이 사건에서 L씨가 말한 내용은 여성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표현으로 사회 통념이나 합리적 여성의 기준에 비추어 봤을 때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며 이러한 언동이 당사자인 K씨에게 전달되었다면 당사자가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판단했다.

스트립쇼 보며 여직원에게 "어땠어?"
입으로 전해져도 성희롱 될 수 있어

신체 특징을 비유한 농담도 성희롱에 해당될 수 있다. M씨는 퇴근 후 식사 자리에서 옷에 음식물이 묻을지 몰라 앞치마를 달라고 하자 상사인 N씨는 "너는 가슴이 작아서 음식물이 묻지도 않을 텐데"라는 발언을 해 M씨는 성적 굴욕감을 느꼈다며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이 발언은 회식자리에서 발생한 것으로 업무 관련성이 인정되고 여성의 관점에서 볼 때 성적 굴욕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며 N씨에게 특별인권교육을 받을 것을 권고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음담패설도 성희롱에 해당될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초등학교 교사인 O(남)씨는 교장인 P(남)씨가 학교 전체 교직원이 워크숍에 가는 버스 안에서 약 3시간 동안 마이크를 잡고 미리 종이에 준비해온 음담패설(여자와 무의 공통점, 수험생과 신혼부부의 공통점, 책과 여자의 공통점 등)을 장시간 낭독해 O씨는 자신과 특히 여교직원들로 하여금 성적 수치심 및 굴욕감을 느끼게 했다며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P씨가 20여 명의 교사가 탑승한 버스 안에서 미리 준비해온 음담패설을 장시간에 걸쳐 공개적으로 낭독하였고 그 내용이 남성 및 여성의 성기를 빗대어 표현해 누가 들어도 성관계를 연상할 만한 내용이다"며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비유하거나 한자 풀이를 빙자해 여성 및 남성의 성기를 직접 언급하는 등 피해자의 관점에서 볼 때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주는 성적 언동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남성 부하직원이 여성 상사에게 성희롱을 당했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한 사례도 있었다.

진정인 Q(남)씨는 회사 사장인 피진정인 R(여)씨가 사무실이나 차 안에서 팔짱을 끼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거의 매일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하는가 하면 Q씨의 집 앞까지 와서 만나자고 하는 등의 언동을 반복해 정신적 고통을 느끼다 퇴사했다며 진정을 제기했다.

여사장이 부하직원
성희롱한 경우도…

인권위는 참고인들 모두 Q씨가 R씨에게 "그만하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을 고려해 성희롱 사실을 인정했다. 또한 기혼인 여성 고용주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미혼 남성 부하 직원을 상대로 팔짱을 끼거나 '사랑한다'는 등의 언동을 하는 것은 보통의 남성이라면 충분히 성적 굴욕감을 느낄 만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인권위는 P씨는 Q씨에게 손해배상금 300만원을 지급하고 특별인권교육을 받을 것을 권고했다.

백서에는 성희롱 피해 구제 절차 및 사례뿐 아니라 성희롱 관련 법제와 향후 정책 방향 등이 담겨있다. 인권위는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전국 대학 및 공공도서관, 관련 단체 등에 배포할 계획이다. 현재 인권위 사이트(http://www.humanrights.go.kr)에 게시돼 있다.

김민석 기자 <ideaed@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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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