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삼성경영' 25주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 김민석 ideaed@ilyosisa.co.kr
  • 등록 2012.11.26 15: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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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이끈 초일류 혁신과 도전

[일요시사=사회팀]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습니다."
삼성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25년 전 이건희 회장의 약속과 만나게 된다. 당시만 해도 그의 원대한 포부가 실현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오늘날 삼성은 전 세계 9위 기업으로 우뚝 솟았다. 반도체·TV·휴대폰 부문은 명실상부 세계 정상에 올랐다. 이것을 일군 이 회장 경영은 혁신과 도전 그 자체였다. 이건희 회장의 취임 25주년을 맞아 한국경제 발전을 이끈 이 회장의 발자취를 집중 조명해봤다.

"책임경영과 공존공영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의 경영이념을 실현해 나갈 것입니다. 미래 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1987년 11월19일 삼성은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했다. 향년 78세를 일기로 삼성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이 별세하자 사장단들은 이건희 부회장을 제2대 삼성그룹 회장으로 추대했다.

1987년 12월1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신임 회장 취임식에서 이 회장은 삼성에 가장 먼저 입사한 최관식 삼성중공업 사장으로부터 사기를 넘겨받아 힘차게 흔들었다.

브랜드 가치
전 세계 9위

이 회장은 취임한 지 3개월, 삼성 창립 50주년을 맞은 자리에서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그는 자율경영, 기술 중시, 인간존중 등을 창업정신으로 내세웠다. 그로부터 25년, 위기를 정면 돌파하는 혁신과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도전정신이 내수기업에 불과했던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삼성은 혁신에 혁신을 거듭해 브랜드 가치 전 세계 9위 기업으로 우뚝 솟았다. 매출 규모만 놓고 봐도 25년 전과 비교해 39배 성장했다. 2100억원 수준이었던 순이익도 20조3000억원으로 늘었다. 또 해외 직수출 규모는 1987년 63억달러에서 25배나 성장한 1567억달러에 이른다. 이 모두 25년 만의 변화다. 이렇듯 수치만 봐도 이 회장을 '경영의 신'이라 일컬을 만하다. 특히 삼성의 '반도체 도전'은 우리나라 정보기술 산업을 일으킨 원동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계일류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은 전자·IT 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1992년 이후 반도체 D램 부문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휴대폰 시장에서는 갤럭시 시리즈를 내세워 노키아, 모토로라, 소니 등을 따돌렸고 이젠 애플의 아성도 뛰어넘고 있다. TV와 LCD 산업 역시 삼성이 꽉 쥐고 있다. 명실상부 삼성은 한국의 대기업을 넘어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이 회장이 삼성을 이끌어가기 시작한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은 새로운 글로벌 환경이 도래하던 때였다. 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개방으로 기업의 활동 무대가 전 세계로 확장됐고,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고 있었다. 과거의 방법과 시스템으로는 새로운 글로벌 시대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 이 회장의 생각이었다.

삼성이 근본적인 수술에 나서게 된 사건은 삼성전자의 일본 현지법인 기술고문이 기술개발 수준부터 경영자의 자세, 직원들의 근무태도에 관한 것까지 삼성의 문제점을 뼈아프게 지적하면서부터다. 특히 삼성전자 디자인센터에서 근무하던 산업디자인 고문 후쿠다의 보고서를 사업본부장이 묵살한 것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혁신은 시작됐다.

'세계 초일류기업' 25년 전 약속 지켜
"처자식 빼고 다 바꿔라" 혁신의 리더십

이 회장은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이 보고서를 읽고 격노했다. 여기에 1981년 이후 자신이 각사로 별도 지시한 284쪽 분량의 지시문이 대부분 실행되지 않은 것을 알고 통탄했다. 이 회장의 "이대로는 안 된다. 처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 선언이 나온 것은 이 때문이다.

이 회장은 즉시 사장단과 핵심간부를 독일 프랑크푸르트까지 불러 호통 쳤다. 그는 "삼성전자는 진행성 암에 걸려 있고, 삼성중공업은 영양실조, 삼성건설은 당뇨병, 삼성종합화학은 애초부터 설립해서는 안 되는 회사, 삼성물산은 삼성전자와 삼성종합화학의 중간쯤 되는 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는 계열사 사장단에게 충격을 줘 대대적 혁신을 일구기 위함이었다.


당시 LA에서 도쿄, 다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거치며 장시간 회의를 가진 이 회장은 품질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시대에는 무엇보다 신용과 이미지, 다시 말해 브랜드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 회장은 이미 그때 알아차린 것이다. 당시 이 회장은 "단 한 개의 불량 제품을 만드는 것은 회사를 좀먹는 암적 존재이자 경영의 범죄행위"라고 역설했다. 이것은 '품질은 곧 삼성의 얼굴'이라는 선언으로 이어졌다. 이는 '삼성 신경영' 체제의 밑바탕이 됐다.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은 개혁의 고삐를 단단히 잡았지만 초창기 개혁의 속도는 이 회장의 기대에는 다소 못 미쳤다. 이 회장은 1995년 <알게마이네 자이퉁지>에 기고한 '21세기를 향한 아젠더'라는 글에서 이 같은 위기의식을 한 번 더 전달했다.

이 회장은 "품질 위주의 경영을 끊임없이 강조해 왔지만 경영관행은 여전히 양적 기조를 벗어나지 못했다"며 "대단히 위험한 타성이 그룹을 지배하고 있다"고 진단하며 삼성 임직원들을 향해 일침을 가했다. 이처럼 항상 한발 앞서가는 삼성의 혁신은 철저한 현실 인식과 절박한 위기의식으로부터 시작됐다.

개혁과 혁신으로
위기 정면돌파

이 회장의 위기론은 계속 이어졌다. 1993년 처자식만 빼고 모두 '바꾸자', 1998년 IMF를 맞아 위기 극복을 위해 구조조정에 나선다는 '버리자', 그리고 2002년 5년 후 10년 후 무엇이 삼성을 먹여 살릴 것인지 '찾아라'까지 항상 위기의식을 강조했다.

2011년 1월 신년하례식에서도 이 회장은 "10년 내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새로운 위기론을 꺼냈다. 한마디로 안주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임직원들에게 보낸 것이다. 위기 그리고 혁신은 이 회장이 항시 강조하는 단골 메뉴다.

신경영과 함께 삼성이 초일류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저력은 품질경영으로부터 나왔다. 특히 반도체, TV, 휴대폰, 냉장고 등 삼성의 20여 개 주력제품은 당시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미국, 일본 등의 시장선도 업체들의 제품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가격 경쟁력 면에서 앞섰고 세계인들로부터 신뢰를 쌓아갔다.

이제는 '삼성'이라는 한글 발음 그대로 부르는 사람들보다 '쌤송'이라는 영어 발음으로 부르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다. 삼성은 그만큼 한국의 대기업을 넘어선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선 것이다.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올라서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은 반도체와 휴대폰 등 IT 사업부문의 경쟁력이었다. 하지만 내수산업과 경공업 중심의 사업구조로 성장해왔던 삼성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이 회장은 사운을 건 결단을 수차례나 내려야했다.

그 시작은 반도체다. 이 회장은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 전자사업을 하려면 반도체를 자체 개발해야 한다"며 한국반도체 인수를 통한 반도체 산업 진출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반도체 사업 진출은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막대한 자금이 드는 것은 물론이고 반도체 기술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팔 수 있는 시장이 개척될지도 미지수였다. 당시 경공업에 머물러 있었던 우리나라 현실에서 반도체 사업 진출은 실패가 불 보듯 뻔했다.

당시 주위에서도 이 회장의 한국반도체 인수를 부정적으로 봤다. 전 세계가 오일 파동 중인데다가, 삼성전기와 삼성전관은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회장은 "오히려 고전을 거듭하는 전자부문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반도체 자급에 달려있다"며 반도체 사업을 밀어붙였다.


이 회장의 이런 집념이 결실을 맺은 것은 1981년 초였다. 삼성이 컬러TV용 색신호 집적회로(IC)를 개발했고 64K D램도 6개월 만에 개발했다. 이어 1984년 10월에는 256K D램을 개발하며 반도체 기술과 노하우를 쌓아갔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삼성에서 쌤송으로

1987년은 반도체 역사에 전환점을 맞는 중요한 시기였다. 당시로서는 대용량이었던 4Mb D램 개발과 관련 '스택' 방식과 '트렌치' 방식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시점이었다. 두 기술은 서로 장단점을 가지고 있어 양산 단계 전 누구도 어떤 방식이 유리한지 알기 어려웠다. 이때 이 회장이 "단순하게 생각하자. 안으로 파는 것보다 위로 쌓는 게 쉽지 않겠느냐"고 단숨에 결정한 것은 유명하다. 

이 회장의 판단은 결국 옳았다. 트렌치 방식을 채택했던 당시 반도체 부문 세계 1위 도시바는 양산 저하 문제를 일으키며 D램 선두자리를 삼성에 내줬다. 반면 삼성은 과감한 투자로 64메가 D램 개발로 세계 반도체 산업에서의 기술 주도권을 확보했다. 이후 생산량을 지속적으로 늘려 시장 점유율도 1위로 올라섰다.

1993년 이 회장의 8인치 웨이퍼의 채택은 삼성 반도체가 세계 1위로 부상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실패하면 당시 1조원의 손실이 예상됐지만 이 회장은 세계 1위 반도체 업체가 올라서기 위한 도전을 시도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삼성은 일본에 늘 한 단계 앞서가며 세계 1위 메모리 반도체 업체로 부상했다.

특히 이 회장은 지난 2001년 당시 플래시메모리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도시바가 합작을 제안해 왔을 때도 흔들림 없이 독자적인 길을 고수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삼성의 플래시메모리 사업은 거짓말처럼 세계 1위 도시바의 시장 점유율을 역전했다.


사운을 건 반도체·휴대폰 '역전드라마'
프랑크푸르트 선언 20돌…대변화 예고

이후 삼성은 비메모리 반도체(시스템LSI) 사업도 진출했다. 삼성은 1996년 미국 디지털이큅먼트와 손잡고 64비트 알파칩 개발에 나서면서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현재 삼성은 스마트폰의 바람을 타고 모바일 분야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인텔과 동등한 지위로 올라서고 있다.

반도체에 이어 '애니콜 신화'가 뒤를 이었다. 현재의 글로벌 스마트폰 판매 1위 역시 이 회장의 집념에서 비롯됐다. 이 회장은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갖는 시대가 온다"며 삼성의 신수종 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을 예견했다. 1994년 10월 애니콜 첫 모델인 SH-770을 출시했고, 1년도 안 돼 전 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시장 점유율 51.5%를 차지하며 국내 정상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통화가 원활하지 않는 등 품질 문제가 지적되자 이 회장은 500억원 상당의 완제품을 태워버리는 결단을 했다. 1995년 3월 삼성전자 구미공장에서 2000여 명의 직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수 만대의 휴대폰이 불태워진 것. 당시 이 회장은 "고객을 두려워하라. 돈을 받고 불량품을 파는 것은 고객을 속이는 짓"이라고 질책했다. 삼성은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15년 후 갤럭시 신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회장은 2000년을 기점으로 삼성의 글로벌 경영을 본격화했다. 2006년 출시된 TV '파브'는 삼성TV를 글로벌 1위로 만들었고, 2007년 삼성중공업은 수주액 200억달러를 돌파하며 세계 최고의 조선소로 성장했다. 삼성물산 건설부문도 2010년 1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인 두바이의 '부르즈칼리파'를 완공했다.

글로벌 삼성은 질적으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냈다. 삼성전자는 미국의 소비자전문지 <컨슈머리포트>가 선정한 '올해 10대 전자제품'에 갤럭시S3, 갤럭시노트10.1, HT-E6730W(홈시어터) 등 3개 제품이 이름을 올렸다.

삼성의 브랜드 가치도 올해 인터브랜드 조사결과 벤츠와 토요타, 디즈니, HP, 시스코 등을 제치고 당당히 세계 9위에 진입하는 기염을 토했다.

신사업 없이
미래도 없다

삼성의 혁신과 도전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이 회장은 2010년 3월 경영에 복귀한 후 두 달 만에 태양전지와 자동차용 전지, LED, 바이오제약, 의료기기 등 삼성의 미래를 책임질 5대 신수종 사업을 발표했다. 특히 내년 6월은 이 회장의 신경영 포부를 담은 프랑크푸르트 선언 20주년을 맞는 해다. 이에 삼성 안팎에서는 내년에 대대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벌써부터 미래 전략과 비전이 동시에 담길 내년 이 회장의 '제2의 신경영' 선언이 기대된다.

김민석 기자 <ideaed@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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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내란 비선’ 노상원 민간인 사찰 준비 의혹

[단독] ‘내란 비선’ 노상원 민간인 사찰 준비 의혹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방첩사가 댓글 공작을 계획한 정황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사이버작전사령관 후보군을 블랙리스트로 관리하면서 여론전에 나서려 한 게 골자다. MB·박근혜정부 때의 악몽이 재발할 수 있었던 셈이다. 군 안팎에서는 계엄이 유지됐다면 여론 공작뿐만 아니라 민간인 사찰까지 벌어졌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군 정보기관 간부들은 이 계획을 준비하려 했던 인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아닌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을 지목한 것으로 파악됐다. “여인형은 댓글 공작을 지시한 사람일 뿐 계획한 사람은 노상원이다.” 한 군 고위관계자의 말이다.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이 부정선거 수사만을 담당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도 복수의 군 관계자들로부터 관련 진술을 받아냈다. 특히 사이버작전사령부가 댓글 공작을 계획한 정황을 포착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진보 성향 진급 제외 공수처는 이달 초 복수의 국군방첩사령부 간부들로부터 군 댓글 공작 의혹과 관련된 진술을 받아냈다. 한 방첩사 간부는 공수처에 “사이버사령관에 대한 정치 성향, 개인정보 등 신원 검증을 진행했다. 진보 계열 정치인과 친분이 있거나 알고 지낸 적이 있는 군 간부에 대해서는 신원 검증을 더욱 철저히 했다”고 진술했다. 공수처는 방첩사가 사이버작전사령관 후보군을 블랙리스트로 관리하면서 정권 ‘코드 인사’가 정해지면 댓글 공작팀을 구성하려 했다고 보고 있다. 공수처가 확보한 블랙리스트는 지난해 12월과 지난 1월 두 차례에 걸친 방첩사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것이다. 당시 압수수색 대상엔 사이버사령관 관련 블랙리스트 문건도 포함됐다.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은 이 문건들을 김용현 전 장관에게 수차례 보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문제는 보고 시점이다. 김 전 장관이 대통령경호처장이던 지난해 초부터다. 김 전 장관이 군 인사에 개입하고 신원식 국가안보실장보다 영향력이 강했던 것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도 방첩사의 댓글 공작 플랜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지난 1월 국회 국정조사특위에서 “조원희 사이버사령관이 사이버 정예 요원 28명으로 구성된 ‘사이버 정찰 TF’를 구성해 2024년 10월7일∼12월27일 약 3개월간 운영할 계획이었다”며 “사이버사가 국가정보원, 국군방첩사령부 등 그동안 비상계엄에 협조해 온 기관과 연계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이른바 인지전·심리전을 하려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주장했다. 인지전은 전단 살포 등 기존 심리전에 더해 SNS를 통한 사이버 여론전까지 포괄한다. 실제 방첩사는 예하 보안연구소에 인지전을 전담하는 ‘정보종합통합대응팀(대응팀)’ 신설을 계획했다. 이 대응팀은 방첩사가 인지전 조직 설립을 추진하다 내부 반발에 부닥치자 만들어진 TF(태스크포스) 성격의 팀으로 알려졌다. 일부 인원을 보안연구소로 이동시켜 TF를 꾸린 뒤 인지전 조직을 설립할 계획이었다. 사이버사 통해 인지·심리전 작업 선관위 서버 탈취 성공하면 서포트 여 전 사령관은 보안연구소에 인지전 전문가를 직접 추천하기도 했다. 실제 여 전 사령관이 추천한 인사는 지난해 12월2일 보안연구소 연구기획팀에 임용됐다. 지난해 10월에는 여 전 사령관실에 있던 소령이 전 부대원을 대상으로 인지전 내용이 포함된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여 전 사령관의 지시를 받았던 건 그의 비서실장이던 정성우 전 1처장과 최측근인 소형기 전 방첩사 참모장(현 육군사관학교 교장)이다. 정 전 1처장은 보안처와 방첩처에 인지전 관련 조직 신설을 지시했으나 간부 대부분이 ‘업무 관련성이 없다’며 거부했다. 소 전 참모장은 지난 2023년 11월6일 인사를 통해 여 전 사령관과 함께 방첩사로 온 인물이다. 두 사람은 인사 이전 육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에서 부장과 계획편제차장으로 함께 근무했다. 방첩사는 육·해·공군 장성급 직책과 국방부 예하기관장 등에 대한 인사안도 작성했다. 이 인사안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공수처는 관련 진술을 확보하고 지난달 29일부터 방첩사 신원보안실과 군사정보실 등을 압수수색했다. 방첩사 신원보안실은 본래 육·해·공군 각군 인사참모부에서 인사 계획안을 작성하면, 해당 인물의 세평 등 정보를 수집·조사해 검증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여 전 사령관이 지난 2023년 11월 방첩사령관으로 임명된 이후 신원보안실은 여 전 사령관 측근들로 구성돼 군 인사와 비상계엄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신원보안실장을 맡고 있는 나모 실장(대령)은 지난해 전역을 앞두고 있었으나 비상계엄을 나흘 앞둔 11월29일 인사에서 이례적으로 임기가 2년 연장됐다. 신원보안실 산하 신원검증과장 등을 맡았던 진모 당시 중령은 충암고 출신으로 지난해 9월 인사에서 대령으로 진급했다. 내란 사태 이후 지난해 12월6일 육군 제5군단 방첩부대장으로 부임했다. 공수처 진술 확보 방첩사 신원보안실은 여 전 사령관을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하는 계획 문건을 만들고, 이를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당시 그 자리는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이 맡고 있었으나 박 전 총장 임기 만료 전이던 지난 4월 인사에서 여 전 사령관을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하는 안을 염두에 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8월 여 전 사령관 지시로 만들어진 블랙리스트인 이른바 ‘최강욱 라인 명단’은 2017~2020년, 군 법무관 출신인 민주당 최강욱 전 의원과 근무 시기가 겹치거나 만난 적이 있다는 군 판사·검사 명단을 30명 가까이 정리해 둔 문서다. 최 전 의원은 문재인정부 시절인 2018년 9월~2020년 3월 청와대 직원 직무감찰과 군을 포함한 주요 공직자 인사 검증을 담당하는 공직기관비서관으로 근무했다. 명단에는 김상환 육군본부 법무실장(준장)과 서성훈 중앙지역군사법원장(대령) 등 비육사 출신 군 법무관들이 주로 이름을 올렸다. 공수처는 여 전 사령관이 김 법무실장을 국방부 검찰단장직에 보임되는 일을 막기 위해 그를 강제 전역시킬 방안을 연구했다고 보고 압수수색 영장에 관련 혐의도 적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수처는 여 전 사령관이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기 위해 장군 인사에도 개입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정치 성향 등 단순 세평 수집이 아닌 각 군에서 작성한 인사안을 검토하거나 직접 작성했는지가 의혹의 핵심이다. 한 군 정보 소식통은 “정보사를 포함해 계엄에 협력할 만한 인물을 정리한 문건도 방첩사가 관리했다.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을 포함해 계엄에 반대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은 모두 노 전 사령관과 김 전 장관에게 보고됐다”고 주장했다. 조 사령관은 블랙리스트가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난해 4월 사이버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노 전 사령관이 김 전 장관과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하기도 한다. 부임 6개월도 안 된 해군 출신이던 이동길 전임 사령관을 교체하고 조 사령관을 임명한 건 이례적인 일이라는 게 군 내부의 시선이다. 사령관 추천 노 ‘오케이’ 조 사령관은 평소 여 전 사령관과의 친분을 과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김 전 장관이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 시절(2015~2017년) 작전본부 중령으로 근무했다. 방첩사 출신 군 관계자는 “여 전 사령관이 노상원을 멀리 했으나 계엄을 놓고 본다면 자신의 측근이자 믿을 수 있는 인물을 사이버사령관으로 둬야 했을 것이다. 여 전 사령관이 김용현에게 조 사령관을 추천, 노상원이 ‘오케이’한 인물”이라고 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초부터 김 전 장관과 연락하면서 12·3 비상계엄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을 검증하려 계엄사령부 산하 수사2단을 지휘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서버 탈취를 계획했다. 정치권과 군 일각에서는 조 사령관이 여 전 사령관의 지시로 노 전 사령관에게 협력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노 전 사령관의 선관위 서버 탈취 계획이 성공했다면 조 사령관이 사이버사 산하 해킹 부대인 900연구소를 중심으로 댓글 및 여론 공작에 나섰을 것이란 분석이다. 복수의 정보사 간부들은 댓글·여론 공작의 다음 플랜이 ‘민간인 사찰’이라고 전했다. 노 전 사령관이 선관위 서버 탈취에 성공하면 진보 성향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SNS를 들여다볼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부정선거가 사실이었다’는 여론을 조성하는 데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는다. 계엄이 2~3주 정도 유지됐다면 방첩사와 노상원이 지휘하는 수사2단이 주체가 돼 진보 성향 시민단체의 동향 파악은 기본이고 실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결론적으로 방첩사가 사이버사를 통해 댓글·여론 공작을 하려 했던 건 ‘윤석열의 계엄이 옳았다’는 헛소리를 유포하기 위함이다. 노상원이 김용현에게 조언했고 MB·박근혜 때의 국정원 댓글부대 사건을 참고해 시나리오를 짰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노, MB·박정부 국정원 댓글부대 사건 참고 여, 블랙리스트 김용현에 직보…김·노 논의 여 전 사령관은 사이버사를 통해서만 댓글·여론 공작을 실행하려 하지 않았다. 직접 국정원에 방첩 업무를 담당할 도·감청 전문가들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이 여 전 사령관의 요청을 거절한 직후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홍 전 차장은 윤 전 대통령이 “방첩사를 지원하라”고 하자 여 전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윤 전 대통령 지시 사항을 전달했고, 여 전 사령관은 체포 대상자 명단을 불러주며 위치 추적을 요청했다. 합참의 ‘계엄실무편람’에 따르면, 계엄사는 합동수사본부 지원을 맡는다. 합동수사본부는 예하에 수사1·2·3·5국을 둔다. 2018년 논란이 됐던 기무사의 계엄 대비 문건에는 합동수사본부장은 방첩사령관이, 수사5국은 국정원이 맡는다고 적혀 있다. 당시 문건에는 ‘국정원은 국정원법을 이유로 계엄사령관의 지시에 소극적으로 대응할 가능성 내재’ ‘이럴 경우 대통령께서 국정원장에게 계엄사령관의 지휘·통제를 따르도록 지시’라고 기록됐다. 여 전 사령관은 ‘민간인 사찰을 계획했느냐’는 <일요시사>의 여러 질문에 대해 “너무 구체적이다. 어떤 게 맞고 틀린지 답하기 곤란한 내용이 포함돼있다”며 “수사를 앞두고 있어 답할 수 없음을 양해해 달라”고 말한 바 있다. 공수처는 방첩사의 댓글·여론 공작 의혹과 군 간부들에 대한 평가와 사찰에 대한 문건이 윤 전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됐는지 수사 중이다. 공수처는 조만간 여 전 사령관에 대한 피의자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지만 내란 특검이 출범하게 되면 모든 자료를 특검에 넘겨야 한다. 공수처 최근 정례 브리핑에서 “지난주부터 방첩사에 대한 압수수색을 거의 매일 진행 중”이라며 “포렌식이 오래 걸리는 건 여러 곳에 분산된 서버를 복구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통해 윤 전달? 공수처는 12·3 비상계엄 사태 수사와는 별개로 방첩사 관련 사건을 입건해 사건번호를 부여한 상태라고 부연했다. 지난 5일 내란 특검법, 채상병 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해 조만간 특별검사 수사 체제가 가동될 것으로 예상돼 공수처는 특검 출범 이후 방첩사 블랙리스트 관련 수사와 기존 고발 사건 수사에 집중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공수처 관계자는 “특검이 출범하고 자료 요청이 오면 당연히 자료를 넘겨야 하지만 그 전까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수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