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포] '강제철거 쑥대밭' 구로 S오피스텔 가보니…

  • 김민석 ideaed@ilyosisa.co.kr
  • 등록 2012.11.13 09:4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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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주 일주일 만에…포크레인이 덮쳤다"

[일요시사=사회팀] 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S오피스텔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땅주인과 집주인 사이 이권 다툼에 애꿎은 세입자들만 쫓겨나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땅주인에 의해 지난 6월 철거명령이 떨어졌는데 집주인은 철거 전날까지 세입자를 받았다. 또 경찰은 등기부등본조차 없는 유령건물이라는데 구청에서는 문제없다며 등기부등본을 떼어줬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빗방울이 추적추적 내린 지난 6일은 공기가 유난히 찼다. 기자는 겨울이 다가왔음을 실감하며 구로경찰서 맞은편에 위치한 S오피스텔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S오피스텔은 토지주와 건물주 간 싸움에 세입자들이 거리로 내몰렸다는 바로 그 건물이다.

출근 땐 멀쩡
퇴근 후 박살

지난 2일 오전 10시 서울남부지법은 S오피스텔이 '준공허가를 받지 않은 위법 건축물'이라며 철거용역 130여 명과 중장비를 동원해 건물 철거를 위한 명도집행을 시행했다. 이날 집행관들과 용역들에 의해 건물철거가 일부 진행돼 12층 건물의 지상 1층부터 3층까지 초토화됐다.

당시 S오피스텔의 일부 세입자들은 아침 출근 때 멀쩡했던 집이 퇴근 후 돌아오니 엉망진창이 돼 있는 황당한 일을 겪어야 했다. 철거 중 집을 지키고 있던 세입자들 역시 강하게 항의했지만 경찰도 방관하는 통에 자신의 집이 부서지는 것을 눈뜨고 지켜봐야 했다.

강제 철거 4일 후 기자는 해당 오피스텔을 다시 찾았다. 멀리서부터 붉은 스프레이로 쓴 '철거'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건물 앞에 다다르자 1층 유리창이 모두 깨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건물 입구엔 알루미늄 구조물 더미와 쓰레기가 한데 뒤엉켜 있었고 건물 안쪽은 부서진 건물 자재가 널브러져 있었다. 천장 곳곳이 뜯겨나가 있었는데 어떤 곳은 천장 타일이 전선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건물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거울도 망치로 내려치기라도 한 듯 금이 쩍쩍 나가 있었다. 거울 외에도 유리라는 유리는 모두 깨져 바닥엔 유리조각 천지였다. 벽면에는 철거와 X자가 곳곳에 표시돼 있었다. 철거 당일 소형 굴착기까지 동원됐다는 1층은 한 마디로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철거당한 집을 살펴보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2층에 도착하자마자 한 세입자를 만나 이것저것 물으려 했지만 그는 바쁘다며 "땅주인·집주인 싸움에 죽어가는 건 세입자들이야"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주거구역인 2층은 복도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1층보다 을씨년스러웠다.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건물 가운데 뻥 뚫린 공간 덕에 찬바람만 쌩쌩 불었다. 건물 중앙 하늘이 뚫린 터엔 2층과 3층에서 부서진 채 떨어진 창문틀과 부서진 현관문이 널브러져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스산한 기운이 돌았다. 또 벽면 곳곳엔 붉은색으로 철거와 X자가 표시돼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자 현관문 뜯겨 나간 집이 보였다. 있어야 할 문은 없고 '안전제일' 테이프가 바람에 너덜거리며 으스스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토지·건물주 싸움에 세입자 거리로 내몰려
이른 아침 예고 없이 용역 철거반 들이닥쳐

현관문이 사라진 집들은 2일 철거를 당한 곳이었다. 입구에는 철거 당일 붙인 것으로 보이는 서울남부지방법원의 '강제집행예고 고시문'이 보였다. '이 건물은 철거대상 건물로 건물에 입주하고 있는 점유자들은 2012년 6월30일까지 자진하여 퇴거하시길 바랍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부서진 가구들과 깨진 전등이 굴러다녔다. 벽지가 찢긴 벽면엔 어김없이 붉은색으로 철거라고 쓰여 있었다. 화장실의 변기와 세면대는 망치로 깨부순 티가 역력했다. 집안 창문도 깨져있었다. 깨진 창 너머로 구로경찰서가 보였다.

처참한 광경은 3층에서도 볼 수 있었다. 철거당한 가구수를 세보니 2층은 20세대 중 6가구, 3층은 20세대 중 7가구였다.


3층을 둘러보던 중 한 여성이 낑낑거리며 쓰레기더미를 옮기는 것을 발견했다. 기자가 "입주자냐"고 물으니 뒤편에 있는 문을 가리키며 "일주일 전에 입주했는데 다행히 철거를 당하지는 않았다"고 답했다. 기자라고 밝히니 할 말이 많은 듯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대학생 최모(25)씨의 집은 깔끔했다. 철거할 당시 집을 지키고 있었다는 최씨는 "사람들이 문을 열려고 할 때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며 강하게 반항했다"며 말을 시작했다.

철거 당일 어땠는지 묻자 그는 "그날 아침 예고도 없이 불법건물이라며 짐을 빼라는 방송이 나왔다"며 "어안이 벙벙한 채 집안에 그대로 있었더니 해머와 야구방망이를 들고 몰려온 사람들이 벽과 유리를 내려쳐 너무 무서웠다"고 말했다. 이어 "부동산을 통해 등기부등본도 다 뗐었고 이것저것 충분히 알아보고 입주한 것인데 들어온 지 일주일 만에 나가라니 말이 되느냐"며 울분을 토했다.

다른 세입자를 만나고 싶다고 하자 최씨는 함께 입주한 송모(25)씨 집으로 안내했다. 송씨의 집안은 온통 핑크색으로 꾸며져 있었고 귀여운 고양이가 기자를 반겼다.

송씨는 "으슥한 골목에 위치한 오피스텔이나 반지하 방 등에서 살면서 몇 차례 위험을 느껴 안전한 집을 찾게 됐다"며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60만원으로 괜찮은 조건인데다가 경찰서가 바로 맞은편에 있어 기쁜 마음에 입주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기자가 사전에 분쟁이 있는 건물인지 몰랐느냐고 묻자 "입주 전엔 토지주와 건물주 사이에 분쟁이 있다는 얘기를 전혀 듣지 못했고 불과 며칠 전에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 오피스텔엔 젊은 여성들과 임산부도 많이 살고 있는데 그 난리통에 현금 뭉치와 귀금속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많고 옷가지와 식료품 등이 한 자루 속에 뒤섞여 엉망이 된 사람이 대다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집 비운 사이 
집이 없어졌다"

주민 대표 전모(38)씨를 만났다. 318호에 살았던 전씨는 집을 철거당한 직접적인 피해자였다.

피해 정도를 묻자 그는 "20만원에 상당하는 고급 책상이 완전히 파손돼서 버렸고 선물 받은 아디다스 신발은 신어보지도 못한 채 용역들이 가져갔는지 없어졌다"며 "대부분 세입자들의 침대 매트리스는 컨테이너 녹에 젖어서 버렸고 모든 가구를 함부로 밖으로 빼내는 통에 흠집은 물론 다리가 부러진 가구들이 많다"고 호소했다.

전씨는 "건물주와 토지주 간 싸움 때문에 세입자들만 피해를 보고 있는 상황"이라며 "2층과 3층 같은 경우 실질적인 피해를 많이 받았는데 대표자 협의회를 구성해서 공동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건물주는 보증금을 한꺼번에 다 지급할 여력이 없다며 버티고 있고 자신도 전세보증금 6000만원이 걸려있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기자가 집을 철거당한 세입자들은 다들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전씨는 "불안해서 살 수 없다며 다른 집으로 이미 옮기신 분도 있고 나머지 분들은 11층에 살고 있다"고 답했다. 건물주가 11층에 비어있는 방들을 임시로 쓸 수 있게 해줬다는 것. 전씨도 남은 짐을 추슬러 1116호로 주거지를 옮긴 상태였다.

집을 잃은 세입자를 더 만나보기 위해 11층으로 올라갔다. 퇴근 시간이 지났지만 빈집이 많았다. 문을 몇 차례 두드린 끝에 박모(42)씨를 만났다. 그는 "준공이 나지 않은 건물에 대해 구청에서 전입신고나 확정일자 등 요구를 다 받아 줬다"며 "구청에서 입주 허가를 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불법이라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는 "심지어 중개료까지 받아가면서 이곳에 입주를 시킨 일부 부동산업자들은 연락도 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만난 대학생 최씨, 송씨 모두 부동산 업자에게 복비를 냈다고 말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렇다면 정당한 계약절차를 밟고 입주한 세입자들이 거리로 내몰리는 이 황당한 상황은 왜 벌어진 것일까.

구로구청에 따르면 S오피스텔이 들어선 부지는 학교재단 A학원의 부지였다. A학원은 학교를 폐지하면서 해당 부지 일부를 공원용지로 구청에 기부 채납했고 이때 12층짜리 오피스텔 건설을 허가받았다.

그런데 A학원이 파산하면서 건물주가 성원건설로 바뀌었고 이후 성원건설도 부도나면서 건물주가 B주식회사로 넘어가는 등 오피스텔이 완공되지 못한 채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그 와중 해당 토지는 경매에 붙여져 제3자가 낙찰받아 그때부터 토지주가 건물주가 나뉘게 됐다. 

이후 토지주와 건물주는 서로 토지와 건물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고, 양측의 협의가 이뤄지지 않아 준공허가가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러다 현 건물주가 건물을 완공한 후 오피스텔 임대사업을 철거 하루 전날까지 지속했던 것.

반면 토지주는 토지주대로 불법점유물 철거소송을 진행해 2006년 10월 대법원으로부터 "건물주는 건물을 철거하고 토지를 토지주에게 돌려주라"는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그로부터 6년이 흘러 지난 6월에 이르러서야 철거통지가 내려졌다.


토지주 법정 대리인은 "오래전 철거 발표가 났는데도 건물주는 이를 무시하고 세입자를 받아 왔다"며 "건물주가 세입자들을 계속 받아들이며 이들을 방패로 삼아 최대한 시간을 끌어 그 임대사업으로 자신의 배만 불리려는 속셈"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지난 6월 법원에서 입주자들에게 퇴거 명령을 내렸는데도 건물주는 "아무 문제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기존 세입자들을 안심시켰고 철거 전날까지도 신규 입주자를 받아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경찰은 "이 오피스텔 건물은 건축 도중 건설사가 부도나면서 준공검사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등기부 등본조차 없는 유령 건물"이라며 "법원의 판결과 지난 6월 퇴거 고지 이후에도 건물주가 유령 건물도 계약 자유의 원칙에 따라 부동산 임대가 가능하다는 법의 빈틈을 악용해 지속해서 세입자들을 받아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건물주 측은 "350억원의 가치를 가진 건물을 토지주가 15억원이라는 헐값에 사들이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있다"며 "가치의 30%만 인정해줘도 깨끗하게 건물을 넘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철거 전날까지도 세입자 받아
경찰·구청 나몰라라 구경만

구로구청 측은 "대법원 판결이 났어도 토지주와 건물주 사이에 공동소유나 둘 중 하나의 소유로 협의만 이뤄지면 되는데 사인 간에 협의가 이뤄지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 신규 세입자의 전입신고를 받아준 것에 대해서는 "행정안전부에 문의한 결과 전입신고를 받아주라는 의견을 전달받았다"고 해명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건물주가 1명이 아닌 김모씨, 이모씨로 2명인 것. 게다가 220여 세대 중 130세대를 소유하고 있는 김모씨와 88세대를 소유하고 있는 이모씨는 서로 입장이 달랐다. 또 김씨는 연락이 두절된 반면 이씨는 1층에 사무실을 두고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며 세입자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씨는 철거 당일 건물 1층 바닥에 인화성 물질을 뿌리며 "차라리 불을 지르겠다"라고 난동을 피워 공무집행방해죄로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이에 세입자들은 경찰의 입장과는 반대로 이씨에 대해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씨의 보증금을 한꺼번에 돌려주기 곤란하다는 입장도 충분히 이해하는 듯했다. 세입자들에 따르면 이씨는 철거당한 세입자를 위해 11층 빈집을 내어주는가 하면 보증금도 돌려주려고 노력하는 등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

요약하면 토지주와 건물주 간 이권 다툼과 구청 측의 안일한 행정 처리로 인해 세입자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 특히 토지주 측은 "15억에 건물을 팔아라"는 입장인 반면 건물주 측은 "적어도 100억은 넘어야 한다"며 맞설 정도로 간극이 벌어져 있어 빠른 해결은 힘든 실정이다. 

이에 세입자들은 "토지주·건물주 양쪽 모두 돈 없고 힘없는 세입자들을 인질로 잡고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다"고 토로하고 있다. 앞으로 세입자들은 대책모임을 꾸려 준공허가가 나지 않은 건물에 대해 전세권설정, 확정일자, 전입신고 등을 가능하게 해 준 구로구청을 상대로 계속 항의할 예정이다. 전씨는 "S오피스텔에 거주하는 세입자는 총 300여명으로 임차인 보증금만 30억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이들 중 큰 보증금이 걸려있는 일부 세입자들은 보증금만 돌려받을 수 있으면 바로 떠날 것이라 말한다. 날이 어두워진 후 퇴근하던 이모(34)씨는 "건물주 측은 항상 분쟁이 마무리 단계고 조만간 끝날 것이라고 말해왔다"며 "전세보증금만 준다면 지긋지긋한 이곳을 당장 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남아있는 최근 입주한 세입자 중에선 용산 때처럼 끝까지 남아서 싸우겠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건물주 이씨의
진짜 속마음은?

주위를 둘러보던 건물 관리직원은 "이렇게 철거를 할 것이었다면 오래전 건물이 올라가기 전에 할 것이지 왜 이제 와서 이 난리를 치는 것이냐"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건물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건물주 이씨는 기자가 또 다른 건물주 김씨와의 관계와 세입자를 계속해서 받은 이유에 대해 물으려 하자 중요한 회의가 있다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다음 날 전화도 받지 않았다.

땅주인과 집주인이 벌이는 이권 다툼에 힘없고 이용당하는 세입자들만 추운 겨울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다. 곧 불어 닥칠 엄동설한, 올겨울은 유난히 추울 것이라 한다.

김민석 기자 <ideaed@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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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