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만일 자신을 믿고, 기다리면서도 기다림에 지치지 않고, 꿈을 꾸되 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성취한 모든 것을 올바른 모험에 걸었다가 잃고도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네 것이 되리라…….’
올바른 모험
그들은 마음속으로 시 구절을 외면서, 눈과 눈을 피해 다니며 대들보를 갉아먹는 생쥐처럼 기를 쓰고 경첩의 쇠못을 갈아댔다.
그런 어느 날 피에로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아, 그래도 엿장수 할 때가 좋았지. 흐흐…….”
“형, 뭔 소리야?”
“춘천의 어느 고아원에 있다가 갑갑해서 결국 탈출을 했지. 치사스런 밥 한 숟갈보다는 시원한 바람이 그리웠어. 배를 곯다가 우연히 어느 엿방에 들어갔거든.”
“히히, 형이 엿장수를 했다구?”
“응. 방랑천하 아니것냐. 엿장수 맘대로란 말도 있지만…… 엿판 하나 둘러메고 발길 닿는 대로 떠돌면 세상천지에 부러울 게 뭐 있것어. 엿가위를 쟁강쟁강거리며 달달한 엿 사려! 고소한 깨엿 콩엿 호박엿도 있소! 외치고 다니느라먼 웃음도 울음도 나더군. 혹시 채플린이 조선의 배우였다면 아마 엿장수로 분장해서 방랑자로 떠돌지 않았을까 싶어. 히히…….”
“응.”
용운은 열심히 경첩을 갈아대면서 대꾸했다.
“새벽이면 생엿을 가지고 두 사람씩 마주 서서 짜장면발을 뽑듯이 반복적으로 늘이지. 그러면 거무스레하던 강엿은 갈색을 거쳐 차츰 하얗게 변해. 아, 인간도 신의 손으로 그렇게 하면 악인이 선인으로 환생할지 몰라. 흐흐…… 공기가 잘 배어들어 부풀어오른 엿가락은 아주 하얗고 양도 불어나서 최상품이 돼.”
“꼬마 엿장수가 고생이 많았겠구나.”
“여름과 겨울이면 뺑이치는 거지 뭐. 삼복 더위엔 까딱하면 눅진하게 녹아 버리니까 볼장 다 봐. 한겨울엔 더 어렵단다. 아이놈들도 따스한 방구석에 박혀 만화책이나 보는지 좀체 코빼기를 보이질 않거든. 찬바람이 쌩쌩 불어대는 고갯길을 걸으며 허기진 배를 엿가락 한두 개로 달래느라면 때로 눈물도 나지.”
“청승맞군.”
“그래도 엿판 덮개 위에 애들의 호기심을 끌 만한 색색가지 고무풍선이나 딱지, 껌 따윌 얹은 채 돌아다니다가…… 영화에 나오는 얘기를 들려 주면 코흘리개들이 무척 좋아했었지.”
피에로는 그때의 추억 속에 젖어들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부터 계절에 맞지 않게 센 바람이 귓바퀴를 윙윙 소리내어 스친다 싶더니 정오를 넘으면서부터는 미친 듯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태풍의 시초 같았다.
굵은 소나기까지 동반한 태풍은 축사 지붕을 종잇장처럼 날려 버렸고 나무도 뿌리째 넘어뜨렸다.
비상소집을 당한 원생들은 각종 연장을 들고 논, 염전 등지로 떼지어 몰려갔지만 대자연의 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보리가 미친 듯 춤을 추며 쓰러졌고 고춧잎이 뜯겨 날렸다.
바다는 지옥 속의 혼돈 같았다. 산처럼 거대한 파도가 방파제 너머로 밀어닥쳤다. 당산의 나무들이 바람과 싸우느라 필사적으로 뒤흔들렸고 부러져 나가는 나뭇가지의 비명이 처절하게 들렸다.
섬 전체가 이대로 물에 잠기고 세상엔 끝이 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축사 지붕 종잇장처럼 날려
비상소집 원생들 속수무책
그러나 아침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난장판 위로 태양은 변함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원생들은 연장을 있는 대로 챙겨 들고 염전으로 뛰었다. 여기저기 복구 작업에 나선 부락민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논밭도 문제였지만 염전의 피해는 참담할 지경이었다.
파도가 훑어가 버린 뒤의 모습이란 쑥대밭이었다. 염전이 있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황폐한 벌판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수용소 원생들이 집합하자 원장의 지휘로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다. 인근의 흙을 퍼다 둑부터 쌓아 나갔다.
평소 같으면 감독이나 하며 기세등등할 사장과 반장들까지도 삼태기를 들고 뛰었다.
누가 누군지 서로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었다. 그저 한곳에 뒤섞인 무리가 개미떼처럼 오고 갈 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염전과 야산 기슭을 무수히 왕복했다.
삽질로 야산의 한모퉁이가 작은 집터만큼 다져졌을 때였다. 피에로가 다가오더니 흙을 퍼담는 용운의 옆구리를 툭 치고 빠르게 비껴갔다. 용운은 대번에 그의 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갑작스런 상황이라 당혹스러웠지만 언제까지 서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삼태기를 둘러메고 그의 뒤를 쫓아갔다.
원생들 틈에 섞여 저만치 앞서가던 피에로가 슬그머니 자리를 이탈하여 마을 옆 골목으로 꺾어들고 있었다.
용운은 졸아드는 가슴으로 그를 따라갔다. 당장에라도 누군가가 뒷덜미를 낚아챌 것만 같었다.
외진 둔덕을 돌아들기 무섭게 피에로가 삼태기를 내던지며 소리쳤다.
“빨리 공동묘지 위로 해서 저쪽 숲속으로 들어가! 곧 갈께.”
용운은 몸을 낮추고 수수밭 옆으로 해서 공동묘지 위로 내달렸다. 바람에 나뭇잎이 우수수 날렸다. 땀방울이 스멀스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진달래가 핀 산허리를 타고 숙사의 변소 앞에 도착했다.
열린 변소 문으로 파리만 윙윙거릴 뿐 사방은 고요했다.
용운이 책임졌던 아래쪽 경첩은 아직 덜됐지만 위쪽 쇠못은 완전히 갈린 상태였다.
금방 나타난 피에로가 위쪽 쇠못을 빼고 문짝을 잡아당겨 좌우로 비틀었다. 아래쪽 경첩이 이리저리 찌그러지면서도 끈질기게 버텼다.
초조해진 피에로가 몇 번을 힘있게 걷어차자 문짝은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노루고개로 뛰어!”
선착장 상류
피에로가 문짝을 둘러메며 소리쳤다. 노루고개란 당산을 넘는 오솔길로 그곳만 넘으면 곧바로 나루오름 선착장의 상류와 만나게 되었다.
둘러멘 문짝이 바람을 받아 자꾸만 피에로의 몸을 뒤틀리게 했다. 바람과 싸워 가며 고개를 넘어 해변에 도착했지만 피에로는 계속 상류로 달렸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