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형 외톨이’ 5인의 고백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4.05.21 14:00:16
  • 호수 14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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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안 가도 아무도 모른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방 안에 틀어박힌 뒤 잠을 자고 나면 그런 느낌이었다. 여태까지 골치 아팠던 일이 끝난 느낌. 그래서 집 밖을 안 나갔고, 과하게 잠에 의존했다.”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한 사람의 말이다. 이들은 부모에게 강압적인 양육을 받거나, 불합리한 직장생활을 했다. 이들은 모두 ‘집 밖을 안 나가도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한국의 은둔형 외톨이 문제가 대두된 것은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 청년들은 사회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 힘들었는데 경제적, 사회·제도적, 관계적 영역 등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2000년대 초반은 입시경쟁이 극심해 청소년들에게 등교 거부, 은둔, 고립하는 경향이 드러나며 은둔형 외톨이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4.5%가…
대부분 남성

은둔형 외톨이에 대한 실태조사는 2019년 처음 실시됐다. 광주광역시 내 아파트 거주 세대의 20%인 10만 가구를 대상으로 안내문을 발송해 수집된 1095부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237명이 은둔형 외톨이인 것으로 나타났다.

2022년에는 서울특별시 내 19세부터 39세 사이의 청년이 포함된 5000가구를 조사했는데 조사 대상자의 4.5%가 고립 혹은 은둔 상태인 것으로 조사됐다. 즉, 서울에 거주 중인 청년 인구 중 약 12만9000명은 은둔형 외톨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평균연령이 29.55세였으며, 남성이 76.49%로 여성보다 많았다. 은둔 기간 평균은 80.66개월로 조사됐다.

은둔형 외톨이의 판단 기준은 ▲학교나 직장에 다니지 않거나 ▲집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며 ▲혼자 외출하는 날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날을 집에서 보내고 ▲집 밖을 전혀 나가지 않고 고립돼있거나 ▲은둔 기간이 6개월 이상을 넘어가는 경우를 말한다.


결국 국내서도 은둔형 외톨이 현상이 상당한 규모로 나타나고 있다. 은둔형 외톨이의 개인적 문제는 불규칙한 생활 습관 및 운동 부족, 고혈압과 비만을 포함한 만성질환 증가 시에도 전문적인 도움을 받기 힘들다는 점이다.

특히 청소년기부터 시작된 은둔 생활은 학업 결손으로 이어져 실업과 빈곤 문제로도 이어진다. 은둔 중인 자녀나 배우자를 돌봐야 하는 가족원의 스트레스, 우울, 죄책감 수치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은둔형 외톨이 가족이 있다는 것으로 타인에게 낙인이 찍히거나 차별을 당해, 은둔형 외톨이와 가족이 외부로부터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드물다는 것도 큰 문제다. 

하지만 더 심각한 부분이 존재한다. 한국보다 은둔형 외톨이 현상을 먼저 겪었던 일본은 중‧장년 은둔형 외톨이가 늘어나면서 ‘8050 문제’라는 용어까지 나왔다. 80대 노부모가 50대 은둔형 외톨이 자녀를 연금 수입으로 먹여 살리다가 빈곤에 빠지고 노인 우울증에 걸린다는 것이다.

또 80대 노부모가 사망했는데도 50대 자녀가 사망신고를 하지 않고 집에서 시신과 함께 살거나, 부모 사망 뒤 50대 자녀가 집에서 고독사하는 경우도 사회 문제로 대두됐던 바 있다. 심지어 부모가 은둔형 외톨이 자녀를 살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한국도 은둔형 외톨이가 늘면서 일본의 절차를 따라가고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2000년대 초반 시작, 일본은 ‘8050 문제’
부모 사망해도 사망신고 안 하는 이유는?

은둔형 외톨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이들이 왜 은둔형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취재진은 5명의 은둔형 외톨이를 분석한 책 <청년 은둔형 외톨이의 경험과 발생 원인에 대한 분석>(저자 노가빈·이소민·김제희) 사례를 참고했다.

이들은 20대 중반부터 가족 이외에 교류를 단절하고 한정된 공간서 최소 3개월 이상 칩거했다. 여성 1명, 남성 4명으로, 학력은 고교 중퇴부터 대학 재학까지 다양했다. 최초 은둔 시기는 주로 10대 후반서 20대 초반이었며, 총 은둔 기간은 6개월에서 4년까지였다.


5명 중 유일한 여성인 A(29)씨는 초등학교 시절 부모 이혼 후 엄마와 함께 살다가 아빠의 사업 실패로 다시 귀가하자, 엄마는 집을 나갔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그는 환청·환각 증상이 발생해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정신과 치료를 받지 못했다.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 아빠, 여동생과 함께 반지하 방 한 칸에서 지냈던 B씨는 대학에 합격했지만, 아빠의 입학금 탕진으로 대학에 갈 수 없었다. 이후 A씨가 24세 때 아빠가 식물인간이 됐으며 치료비가 없어 사망했다.

이후 여동생이 동사무소를 통해 엄마를 찾았고, 엄마와 엄마의 남자친구, 여동생과 넷이서 함께 살았다. A씨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부터 은둔 중이며 최장 4년을 은둔하기도 했다. 잠시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다. 

B(25)씨는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20세까지 엄마·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아빠와는 1년에 1~2번 정도 만났다. 21~23세까지 친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지금은 주변 원룸서 살고 있다. 할머니를 제외한 다른 가족과는 만나지 않았고, 할머니의 도움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불우한
가정환경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B씨는 중학교 때까지 교우관계가 원만하고 활발했지만, 고등학교 진학 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퇴했다. 당시 부모님도 B씨의 자퇴를 말리지 않았다. 자퇴 이후 바로 은둔 생활에 들어갔던 그는 엄마와 여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했으며, 고립 생활을 벗어나고 싶어 사이버 경찰에 연락하기도 했다.

C씨도 일반적이지 않은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C씨는 8세 때 엄마와 모자원(배우자가 없는 어머니와 그 자녀를 수용해 보호하는 미혼모 임시 거주시설) 입소 생활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때는 새 환경에 잘 적응했지만, 중학교 때 왕따를 당하는 등 힘든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으며, 고등학교 때 바로 교우관계를 회복했다. 그러나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C씨가 무기력함을 느낀 것은 진로를 찾으면서다. 친구들이 전공을 정하거나 취직하는 모습을 보며 심한 괴리감과 무기력감을 느꼈고 20세 이후부터 칩거에 들어갔다.

그나마 C씨의 엄마가 다정하고 양육에 적극적이라는 점은 다행이었다. 특히 C씨를 데리고 상담센터를 방문하거나 아르바이트를 알아봐 주는 등 적극적이었다. 이 와중에도 무기력감을 호소하며, 평생 엄마에게 용돈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을 거라고 비관하고 있다.

D씨는 초등학생이 되기 전 아빠가 돌아가셨다. 이후 엄마, 새아빠, 이복형제 2명과 함께 살았다. 새아빠는 충실했지만 D씨에게만 유독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자주 집을 나와 친구 집에서 잤고, 이복형제들과는 교류가 거의 없었으며 평소 아빠와의 자주 다퉜다. 

고등학교 자퇴 후 직업교육학교에 입학해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졸업 후 공장에 취직했다. 그러나, 일이 너무 힘들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님의 떡집 일을 도왔다. 이후 아빠와 잦은 갈등으로 다시 집을 나갔고 친구 집에서 장기간 고립 생활을 시작했다. 엄마에게는 미안함과 고마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E씨는 중학교 때부터 뉴미디어 계통에 흥미를 보여 적극적으로 꿈을 키웠다. 그러나 부모님은 지지하지 않았고 공부를 강요했다. 이때부터 E씨는 무기력하고 소심한 성격으로 변했다.


“누구 하나
신경 안 써”

아빠는 매우 가부장적이었고, 엄마는 오랫동안 고부갈등을 겪었다. 아빠는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48세에 의사가 돼 사회적으로 성공했으나, E씨와의 정서적 유대는 거의 없었다. “무조건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아빠의 말에 3수 끝에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으나, 일상은 점점 힘들고 무기력해졌으며 방은 음식물과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했다.

아빠는 화를 냈고, 엄마는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속수무책인 가운데, E씨 스스로 인터넷 검색과 전화상담을 받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은둔 생활이 직전 직장이나 아르바이트, 학교 등 교육서 노동으로 이행되는 과정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또 ▲직장이나 아르바이트 중 10시간 넘는 강도 높은 노동 ▲과도하고 불필요한 업무 ▲업무 실수 시 상사·동료의 폭언 경험 ▲부당해고 ▲저임금 일자리 고용의 반복을 겪었다.

B씨는 “사장님이 잘해줬는데 폭력까진 아니었지만 엄청 거칠었다. 그럴 때마다 정말 많이 울었다. 이제는 못 버틸 것 같아 그만두게 됐다. 거기서 더 일하면 정말 정신적으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고 말했다.

A씨도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새벽 3시에 퇴근했다. 야근수당은 하나도 못 받았다. 월급도 엄청 조금 줬고 ‘사회초년생인데 어떻게 일을 잘하냐’며 사장한테 말했더니 ‘네 몸값만 받고 일할래? 아니면 지금 받는 돈 그대로 받되 더 힘든 일을 버틸래?’라며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고 털어놨다.


결국 A씨는 바로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스스로 하고 싶었던 일이 꺾이면서 상실감도 컸다. E씨는 “학생 때 온라인 커뮤니티를 운영했다. 진짜 열심히 했는데, 부모님한테는 얘기도 제대로 해 볼 수 없었다. 특히 어른들은 이 일을 하는 걸 엄청 싫어했다. 그래서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싶은 일인 척 연기했다. 이게 내가 은둔 생활을 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인 것 같다”고 돌아봤다.

“싫어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처럼 연기”
“기초생활수급자 유지 위해 병원 다녀”

이어 “학교도 늦게 온 만큼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느낌을 항상 받았는데, 사실은 너무 하기 싫었다. 이런 게 오히려 나를 옭아맸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A씨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집에서는 계속 나를 지적했다. 나도 지적받기 싫었지만 강요받는 느낌이었고,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엄마는 계속 지적만 했다”며 “‘넌 의지가 약해’ 이런 식으로. 나도 아는데 그런 말 계속 듣다 보면 정말 몸이 안 움직인다. 그래서 간판 디자인 회사에 들어갔다. 너무너무 괴로웠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결국 이들은 사회활동을 시작하며 육체와 정신이 점차 피폐해져갔다. 학업, 직장생활, 가족과의 관계서 상당한 피로감이 축적되면서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운 단계까지 이른 것이다.

가족 간의 정서적 교류가 적기에 이들은 주변 환경과 관계를 돌보지 못하는 등 일상적 생활패턴을 회복시키지 못했다. 이런 경험 직후 이들은 주거지 밖을 나서지 않았고,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회적 관계서 고립됐다.

E씨는 “귀가하면 허물 벗듯이 옷을 벗어놓고 누워 버렸는데, 정신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어느 순간 밥을 먹거나 씻는 등 가장 기본적인 것도 힘들어졌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도 자기학대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굶다가 폭식을 한다든지, 아예 안 씻고 며칠 동안 지내는 등의 생활이 잦아졌다”고 자책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학교 및 양육자에게 통제적이며 억압적인 감정을 느꼈다는 점이고, 양육자를 제외한 다른 가족 구성원, 친구들과도 정서적 유대감이 낮았다. 결국 어디서든 소외감을 느꼈던 셈이다. 

끝없는
소외감

이들은 “집이 어려워서 대학 원서 쓸 돈도 없었다. 아빠는 며칠 전에 술 먹고 술집 여자를 때려서 경찰서에 끌려갔다고 해서 한 달 동안 울었다” “엄마도 나를 방치했다.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학교를 가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병원을 다녀 가족이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할 수 있었다. 병원을 다니지 않으면 기초수급마저 끊어져 계속 병원을 다니게 했다”고 털어놨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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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령 1500호 특집기획> 한눈에 보는 김건희 8가지 의혹 총정리 ①어떻게 살아왔나

[지령 1500호 특집기획] 한눈에 보는 김건희 8가지 의혹 총정리 ①어떻게 살아왔나

[일요시사 취재1팀] 최윤성 기자 = 어릴 적부터 예술에 재능을 보이며, 화려한 경력을 쌓은 김건희는 무려 10살 차이를 극복하고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현재 영부인의 자리까지 올랐다. 개명하기 전 이름인 김명신의 과거 행적 의혹이 제기됐지만, 현재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는 윤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 녹취록 공개 파장에 무속 논란으로 후폭풍을 맞기도 했다. 의혹이 빗발치자 조용한 내조를 약속했으나 이를 까먹은 듯 광폭 행보를 이어 나가는 중이다. 김건희는 지난 1972년 9월2일 경기도 양평군서 아버지 고 김광섭, 어머니 최은순 사이서 셋째로 태어났다. 서울 남동부로 이주해 지금의 송파구에 살며 잠동초등학교, 잠실중학교를 졸업하고 강동구로 이사한 후 명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이름은 김명신이다. 예술 두각 숱한 경력 김건희가 15세 때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어머니 최은순이 홀로 자식들을 키웠다. 부친 김광섭은 양평군청 공무원으로 지낸 것으로 알려졌고, 지난 1987년 작고했다. 김건희는 어린 시절 오래된 골동품이나 예술품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연스레 그림과 예술에 관심이 커진 김건희는 향후 문화예술 사업에 뛰어든다. 서울 명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기대학교 예체능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서 학사학위를 취득했던 그는 이 시기부터 예술적 재능을 발휘했다. 지난 1995년 ‘대한민국미술대전’서 입선을 차지하는 등 주목받는 작품을 선보였다. 대학 졸업 후 다양한 교육과 업무 경험을 쌓으며 전문가로서 발전을 거듭해 왔다. 지난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서 미술교육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수료한 후, 교육 분야서 전문성을 증명했다. 이후 2001년 영락여자상업고등학교서 미술 강사로 활동하며 경험을 쌓았고, 한림성심대서도 강단에 섰다. 서일대학교와 서울정보기능대학교서도 강의를 맡으며 디자인과 컴퓨터 그래픽스 분야 전문 지식을 공유했다. 서울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에서는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인문학 과정(AFP)과 글로벌 리더 과정(GLA)을 이수하며 지식을 넓혔다. 지난 2007년 해외 유명 소장품과 미술품을 전시하는 회사인 ‘코바나컨텐츠’를 설립하고 대표이사로 재직하며 창의적인 문화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국내서 보기 힘든 유명 작품을 해외에서 들여오는 전시를 다수 기획했다. 2015년 ‘마코 로스코 전시’ 2016년 ‘르 코르뷔지에 서울특별전’ 2018년 ‘알베르토 자코메티 전시’ 등이 대표적이다. 결혼 후엔 안양대학교와 국민대학교 등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하며 문화 콘텐츠와 색채, 대중문화 등 다양한 분야서 학문적인 역량을 발휘했다. 또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화예술 최고경영자 과정을 이수하고, 테크노디자인대학원서 강의를 통해 학문적 기여를 이어갔다. 김건희는 윤석열 대통령이 대검 중수부 1과장 시절이던 지난 2012년 3월 결혼했다. 결혼 당시 윤 대통령의 나이는 52세로, 40세였던 김건희와 12살 띠동갑의 나이 차이를 극복했다. 그는 과거 한 언론 인터뷰서 윤 대통령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에 대해 “오래전부터 그냥 ‘아는 아저씨’로 알고 지내다 한 스님이 나서서 연을 맺어줬다”고 밝힌 바 있다. “과거에 유흥주점 근무” 주장 “쥴리 하고 싶어도 못해” 반박 윤 대통령 주변 인사는 “김건희를 처음 만난 자리서 마음에 들었지만, 나이 차가 많고 여건상 이뤄지기 어렵다는 생각에 김건희의 명함을 버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얼마 후 윤 대통령은 명함에 적혀있던 김건희의 이메일 주소를 기억해 메일을 보내 마음을 표현했고 지인들의 도움으로 다시 만났다고 한다. 지난 2017년 남편인 윤 대통령이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임명됐을 당시 그의 직업적 성취와 함께 김건희는 사회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이후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으로 승진하면서 더 큰 관심을 받게 됐으며, 지난 2019년 청와대서 검찰총장 임명장을 수여받는 자리에도 함께 참석했다. 윤 대통령의 재산은 대부분 김건희 명의로 밝혀졌다. 그는 결혼 당시 윤 대통령의 재산이 불과 2000만원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대선후보 시절 윤 대통령이 신고한 재산은 약 77억4500만원이다. 신고액 중 68억9900여만원이 김건희의 재산이다. 대부분 김건희가 소유한 땅과 건물, 예금이다. 재산 형성 과정에 대해 윤 대통령은 지난 1990년대 IT붐이 일었을 당시 주식으로 번 돈이 밑천이 돼 사업체를 키웠다고 설명한 바 있다. 윤 대통령과 김건희 부부는 역대 대통령 배우자 중 유일하게 자녀가 없다. 한 번 임신한 적이 있었는데, 스트레스로 유산한 후 다시는 임신하지 못했다. 김건희는 지난 2021년 12월 허위 경력 의혹으로 열린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 당시 “결혼 후 어렵게 아이를 가졌지만, 남편의 직장 때문에 몸과 마음이 지쳐 아이를 잃었다”며 “예쁜 아이를 낳으면 업고 출근하겠다던 남편의 간절한 소원도 들어줄 수 없게 됐다”고 유산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 당시 심리적으로 힘들었던 그는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반려견 4마리와 반려묘 3마리를 키우고 있다. 이들 가운데 비숑 프리제 종 2마리를 제외한 반려견 2마리와 반려묘 3마리는 모두 유기동물을 입양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의 대선 기간 중 각종 소문에 시달리기도 했다. 특히 유흥업소서 일했다는 의혹과 경력 관련 논란은 진위 여부를 떠나 그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정천수 열린공감TV 대표와 안해욱 전 한국초등학교태권도연맹 회장 등은 김건희가 과거 서울 강남구에 위치했던 라마다르네상스호텔 지하 1층 모 나이트클럽서 ‘쥴리’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고 수차례에 걸쳐 언급해 왔다. 나이트클럽서 접대부로 활동했던 김건희를 조남욱 전 삼부토건 회장 개인 접대 공간(호텔 6층)까지 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봤다고 말한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이에 김건희는 지난 2021년 6월 <뉴스버스>와 전화 인터뷰를 통해 의혹에 해명했다. 먼저 ‘강남 유흥주점의 접객원 쥴리로 검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의혹을 두고 김건희는 “누가 소설을 쓴 것”이라며 “기가 막힌다”고 억울해했다. 각종 소문들 숨겨진 과거 이어 “제가 원래 좀 남자 같고 털털한 스타일이고 오히려 일 중독”이라며 “석사학위 두 개에 박사학위까지 받고, 대학 강의 나가고 사업하느라 정말 쥴리를 하고 싶어도 시간이 없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윤 대통령도 “김건희가 술 마시고 흥청거리는 것을 싫어한다”며 “이런 사람이 술집 가서 이상한 짓 했다는 얘기가 상식적으로 안 맞다”고 반박했다. 이어 “집사람은 새벽 2~3시까지 책을 읽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만큼 쉴 틈 없이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며 “고교 교사와 대학 초빙 겸임교수도 했고, 석사학위도 2개나 받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나이트클럽 운영자들 역시 정천수 대표와 안해욱 전 회장의 주장을 모두 부인한 상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4부(한성진 부장판사)는 지난달 10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정천수 전 대표와 안해욱 전 회장의 6차 공판을 진행했다. 1994년부터 1999년까지 나이트클럽 공동대표였던 조모씨와 배모씨는 이날 증인으로 출석해 “쥴리에 대해 전혀 듣도 보도 못했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조씨는 “삼부토건 회장을 비롯해 이른바 VIP들이 따로 사용하는 공간은 없었다”며 “또 호텔 건물로 직결되는 엘리베이터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비중 있는 손님들과 친교를 가진 여성이 있었느냐’는 검사의 질문엔 “한번도 들은 적 없고, 전혀 없다”며 “종업원 외에 다른 여자는 있을 수 없다”고 부인했다. ‘르네상스 지하 또는 1층에 그림을 전시했던 적 있느냐’는 질문에는 “기억이 안 난다”고 답했다. 조남욱 회장이 특정 여성을 동석시키거나 같이 다녔냐는 물음에 “본 적 없다”고 일축했다. 배씨 역시 비슷한 증언을 내놨다. 호텔 6층까지 직통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가 있었냐는 취지로 검사가 묻자 “구조상, 상식적으로 안 맞는 것 같다”며 “건물이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건 미친 사람 아니면 그걸 왜 하나 싶다”고 말했다. 배씨는 ‘조남욱 전 삼부토건 회장이 특정 여성이랑 있거나 다른 사람을 초대한 것을 본 적 있느냐’는 취지의 질문에 “못 봤다”고 답했다. ‘김 교수’라는 여성의 호칭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고 답했다. 경력 논란도 김건희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김건희는 지난 2008년 개명한 이후 전시 관련 일을 하며 사업을 확장했지만, 업계에서는 김건희를 제대로 아는 이가 없다는 뒷말이 나왔다. 또 거물급 대형 전시회를 가져왔는지 의문이라고 할 정도라고 전해지기도 했다. 당시 김건희는 페이스북에 서울대 대학원 졸업이라고 개재하며 SNS로도 본인을 홍보하는 데 힘썼다. YG 빅뱅 멤버들이 홍보도 해줄 정도로 정관계, 연예계와도 친분을 쌓았다. 이때 전시회에 LG전자, GS칼텍스, 우리은행 등 12~16곳이 넘는 협찬을 끌어오는데,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 후보자로 발표될 무렵 일주일 사이에 협찬사가 무려 12곳이나 불어났다. 무속인 연결 녹취록 공개 수사에 들어가 확인해 본 결과 김건희의 코바나컨텐츠 협찬사였던 GS칼텍스는 대기오염물질 측정치를 조작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었고, 협찬에 나선 한 유명 게임업체 대표는 개인 비리로 수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기업들은 행사를 주최한 <국민일보> <연합뉴스> 등 언론사에 협찬한 거라고 해명해 왔지만, 수사팀은 협찬금이 언론사를 거쳐 그대로 코바나컨텐츠 측에 전달된 사실도 확인했다. 김건희의 무속 논란도 끊이질 않았다. 윤 대통령 부부가 스님·법사라는 이름을 붙인 이들과 교류가 잦았고 중요한 국면서 이들로부터 조언을 받았다는 의혹이 대선 경선 과정서부터 이어졌다. 김건희와 인터넷 매체 기자와의 7시간 통화 녹취록에도 윤 대통령과 역술인의 오랜 인연이 등장한다. 당시 국민의힘 권영세 선거대책본부장은 지난 2022년 1월18일 현안 관련 기자회견을 열어 “네트워크본부를 이 시간부로 해산한다”며 “네트워크본부를 둘러싸고 후보와 관련해서 불필요한 악의적인 오해가 확산하는 부분에 대해 단호하게 차단한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건진 법사’로 불리는 무속인 전씨가 국민의힘 선거대책본부 산하 네트워크본부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아예 조직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다. 전씨는 지난 2022년 1월1일 윤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 대하빌딩 네트워크본부 사무실을 방문하자 윤 대통령을 사무실 안쪽으로 이끌며 직원들을 소개했다. 국민의힘은 전씨를 “대한불교종정협의회 기획실장”이라고 소개했다. 전씨의 존재가 알려진 건 이번 언론 보도가 처음이 아니었다. 유튜브 방송 <열린공감TV>는 지난 2021년 10월 충북 충주 일광사의 혜우 스님을 만나 ‘건진 법사에게 윤 대통령을 지키라고 했고, 그가 윤석열 캠프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발언을 보도했다. 충주 일광사는 조계종과 관련 없는 일광조계종의 본산이며 혜우 스님은 건진 법사의 스승이라고 한다. 혜우 스님은 김건희에게 초청 받아 코바나컨텐츠서 주관한 전시회에 3차례 참석해 축원을 해줬다고도 밝혔다. 건진 법사도 김건희를 통해 윤 대통령과 연결됐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언이었다. 건진·천공과 인연은? “도사들과 대화 좋아해” 유튜버 ‘천공 스승’과 윤 대통령의 인연도 논란을 낳았다. 천공 스승은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직서 사퇴했던 지난 2021년 3월4일 <최보식의 언론>과 인터뷰서 “윤 총장은 내 공부를 하는 사람이다” “자기 자리서 일을 잘하도록 돕는 것이다” “열흘에 한번쯤 만난다”고 주장했고 “윤 총장이 대선에 나온다”고 단언해 ‘윤석열 멘토’로 불렸다. 논란이 되자 천공 스승은 같은 해 10월 <YTN> 인터뷰서 “멘토가 아니다”라고 했지만 “(김건희에게서)연락이 와서 만났는데, 윤 전 총장이 남편이니까 같이 왔다”며 검찰총장 사퇴 문제를 조언해 줬다고 했다. 김건희가 천공 스승과 윤 대통령을 연결했다는 얘기다. 김건희와 <서울의 소리> 이 기자 통화 녹취록서도 윤 대통령 부부가 미래를 보는 역술인에게 의존하고 교류하는 내용이 확인된다. 같은 해 7월20일 전화 통화에서 김건희는 ‘무정 스님’ 이야기를 꺼냈다. 무정 스님은 이미 검찰 주변서 윤 대통령의 대선 당시 멘토로 알려진 인물이다. 김건희는 이 기자에게 무정 스님이 “진짜 스님은 아니다”라면서도 윤 대통령이 20대 시절에 그와 만났고 “(남편이)사법고시서 떨어지니까 한국은행에 취직하려고 했는데 ‘너는 3년 더해야 한다’고 해서 3년 했는데 정말 붙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자신에게는 “너는 석열이하고 맞는다”며 결혼을 권했다는 이야기도 털어놨다. 하지만 “(무정 스님이)문재인 대통령이 되고 나서 갑자기 남편 앞에서 ‘문재인은 망한다’고 했다”며 “우리 남편 망한다는 말밖에 더 돼냐” “그때부터 인연을 끊었다”고 전했다. 김건희는 “내가 되게 영적인 사람이라 차라리 도사들하고 같이 얘기하면서, 삶은 무엇인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세간에 내가 무당을 많이 만난다고 돼있는데, 전혀 아니고 무당을 원래 싫어한다”며 “제가 더(점괘 등을) 잘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기자에게 얼굴·손금 사진을 보내라고 한 뒤 그걸 토대로 “이직을 하라”며 “국정원, 정보 일이 맞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드러난 사실과 제기된 의혹을 종합하면, 윤 대통령 부부는 무속인·역술인과 깊은 교분을 유지하며 이런저런 조언을 받아왔던 것으로 해석된다. 아내 역할만 충실한다더니… 김건희는 대선 과정서 자신을 둘러싼 의혹들이 제기되자 지난 2021년 12월 기자회견서 “남편이 대통령이 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며 이른바 ‘조용한 내조’를 약속한 바 있다. 취임 초반에는 패션 등이 시선을 끌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구설과 논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김건희가 남편인 윤 대통령보다도 더 많은 주목을 받으면서 조용한 내조 대신 ‘광폭 행보’라는 논란이 이어졌다. <yuncastle@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