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형 외톨이’ 5인의 고백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4.05.21 14:00:16
  • 호수 14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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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안 가도 아무도 모른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방 안에 틀어박힌 뒤 잠을 자고 나면 그런 느낌이었다. 여태까지 골치 아팠던 일이 끝난 느낌. 그래서 집 밖을 안 나갔고, 과하게 잠에 의존했다.”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한 사람의 말이다. 이들은 부모에게 강압적인 양육을 받거나, 불합리한 직장생활을 했다. 이들은 모두 ‘집 밖을 안 나가도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한국의 은둔형 외톨이 문제가 대두된 것은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 청년들은 사회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 힘들었는데 경제적, 사회·제도적, 관계적 영역 등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2000년대 초반은 입시경쟁이 극심해 청소년들에게 등교 거부, 은둔, 고립하는 경향이 드러나며 은둔형 외톨이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4.5%가…
대부분 남성

은둔형 외톨이에 대한 실태조사는 2019년 처음 실시됐다. 광주광역시 내 아파트 거주 세대의 20%인 10만 가구를 대상으로 안내문을 발송해 수집된 1095부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237명이 은둔형 외톨이인 것으로 나타났다.

2022년에는 서울특별시 내 19세부터 39세 사이의 청년이 포함된 5000가구를 조사했는데 조사 대상자의 4.5%가 고립 혹은 은둔 상태인 것으로 조사됐다. 즉, 서울에 거주 중인 청년 인구 중 약 12만9000명은 은둔형 외톨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평균연령이 29.55세였으며, 남성이 76.49%로 여성보다 많았다. 은둔 기간 평균은 80.66개월로 조사됐다.

은둔형 외톨이의 판단 기준은 ▲학교나 직장에 다니지 않거나 ▲집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며 ▲혼자 외출하는 날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날을 집에서 보내고 ▲집 밖을 전혀 나가지 않고 고립돼있거나 ▲은둔 기간이 6개월 이상을 넘어가는 경우를 말한다.


결국 국내서도 은둔형 외톨이 현상이 상당한 규모로 나타나고 있다. 은둔형 외톨이의 개인적 문제는 불규칙한 생활 습관 및 운동 부족, 고혈압과 비만을 포함한 만성질환 증가 시에도 전문적인 도움을 받기 힘들다는 점이다.

특히 청소년기부터 시작된 은둔 생활은 학업 결손으로 이어져 실업과 빈곤 문제로도 이어진다. 은둔 중인 자녀나 배우자를 돌봐야 하는 가족원의 스트레스, 우울, 죄책감 수치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은둔형 외톨이 가족이 있다는 것으로 타인에게 낙인이 찍히거나 차별을 당해, 은둔형 외톨이와 가족이 외부로부터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드물다는 것도 큰 문제다. 

하지만 더 심각한 부분이 존재한다. 한국보다 은둔형 외톨이 현상을 먼저 겪었던 일본은 중‧장년 은둔형 외톨이가 늘어나면서 ‘8050 문제’라는 용어까지 나왔다. 80대 노부모가 50대 은둔형 외톨이 자녀를 연금 수입으로 먹여 살리다가 빈곤에 빠지고 노인 우울증에 걸린다는 것이다.

또 80대 노부모가 사망했는데도 50대 자녀가 사망신고를 하지 않고 집에서 시신과 함께 살거나, 부모 사망 뒤 50대 자녀가 집에서 고독사하는 경우도 사회 문제로 대두됐던 바 있다. 심지어 부모가 은둔형 외톨이 자녀를 살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한국도 은둔형 외톨이가 늘면서 일본의 절차를 따라가고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2000년대 초반 시작, 일본은 ‘8050 문제’
부모 사망해도 사망신고 안 하는 이유는?

은둔형 외톨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이들이 왜 은둔형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취재진은 5명의 은둔형 외톨이를 분석한 책 <청년 은둔형 외톨이의 경험과 발생 원인에 대한 분석>(저자 노가빈·이소민·김제희) 사례를 참고했다.

이들은 20대 중반부터 가족 이외에 교류를 단절하고 한정된 공간서 최소 3개월 이상 칩거했다. 여성 1명, 남성 4명으로, 학력은 고교 중퇴부터 대학 재학까지 다양했다. 최초 은둔 시기는 주로 10대 후반서 20대 초반이었며, 총 은둔 기간은 6개월에서 4년까지였다.


5명 중 유일한 여성인 A(29)씨는 초등학교 시절 부모 이혼 후 엄마와 함께 살다가 아빠의 사업 실패로 다시 귀가하자, 엄마는 집을 나갔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그는 환청·환각 증상이 발생해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정신과 치료를 받지 못했다.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 아빠, 여동생과 함께 반지하 방 한 칸에서 지냈던 B씨는 대학에 합격했지만, 아빠의 입학금 탕진으로 대학에 갈 수 없었다. 이후 A씨가 24세 때 아빠가 식물인간이 됐으며 치료비가 없어 사망했다.

이후 여동생이 동사무소를 통해 엄마를 찾았고, 엄마와 엄마의 남자친구, 여동생과 넷이서 함께 살았다. A씨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부터 은둔 중이며 최장 4년을 은둔하기도 했다. 잠시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다. 

B(25)씨는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20세까지 엄마·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아빠와는 1년에 1~2번 정도 만났다. 21~23세까지 친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지금은 주변 원룸서 살고 있다. 할머니를 제외한 다른 가족과는 만나지 않았고, 할머니의 도움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불우한
가정환경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B씨는 중학교 때까지 교우관계가 원만하고 활발했지만, 고등학교 진학 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퇴했다. 당시 부모님도 B씨의 자퇴를 말리지 않았다. 자퇴 이후 바로 은둔 생활에 들어갔던 그는 엄마와 여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했으며, 고립 생활을 벗어나고 싶어 사이버 경찰에 연락하기도 했다.

C씨도 일반적이지 않은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C씨는 8세 때 엄마와 모자원(배우자가 없는 어머니와 그 자녀를 수용해 보호하는 미혼모 임시 거주시설) 입소 생활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때는 새 환경에 잘 적응했지만, 중학교 때 왕따를 당하는 등 힘든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으며, 고등학교 때 바로 교우관계를 회복했다. 그러나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C씨가 무기력함을 느낀 것은 진로를 찾으면서다. 친구들이 전공을 정하거나 취직하는 모습을 보며 심한 괴리감과 무기력감을 느꼈고 20세 이후부터 칩거에 들어갔다.

그나마 C씨의 엄마가 다정하고 양육에 적극적이라는 점은 다행이었다. 특히 C씨를 데리고 상담센터를 방문하거나 아르바이트를 알아봐 주는 등 적극적이었다. 이 와중에도 무기력감을 호소하며, 평생 엄마에게 용돈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을 거라고 비관하고 있다.

D씨는 초등학생이 되기 전 아빠가 돌아가셨다. 이후 엄마, 새아빠, 이복형제 2명과 함께 살았다. 새아빠는 충실했지만 D씨에게만 유독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자주 집을 나와 친구 집에서 잤고, 이복형제들과는 교류가 거의 없었으며 평소 아빠와의 자주 다퉜다. 

고등학교 자퇴 후 직업교육학교에 입학해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졸업 후 공장에 취직했다. 그러나, 일이 너무 힘들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님의 떡집 일을 도왔다. 이후 아빠와 잦은 갈등으로 다시 집을 나갔고 친구 집에서 장기간 고립 생활을 시작했다. 엄마에게는 미안함과 고마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E씨는 중학교 때부터 뉴미디어 계통에 흥미를 보여 적극적으로 꿈을 키웠다. 그러나 부모님은 지지하지 않았고 공부를 강요했다. 이때부터 E씨는 무기력하고 소심한 성격으로 변했다.


“누구 하나
신경 안 써”

아빠는 매우 가부장적이었고, 엄마는 오랫동안 고부갈등을 겪었다. 아빠는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48세에 의사가 돼 사회적으로 성공했으나, E씨와의 정서적 유대는 거의 없었다. “무조건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아빠의 말에 3수 끝에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으나, 일상은 점점 힘들고 무기력해졌으며 방은 음식물과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했다.

아빠는 화를 냈고, 엄마는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속수무책인 가운데, E씨 스스로 인터넷 검색과 전화상담을 받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은둔 생활이 직전 직장이나 아르바이트, 학교 등 교육서 노동으로 이행되는 과정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또 ▲직장이나 아르바이트 중 10시간 넘는 강도 높은 노동 ▲과도하고 불필요한 업무 ▲업무 실수 시 상사·동료의 폭언 경험 ▲부당해고 ▲저임금 일자리 고용의 반복을 겪었다.

B씨는 “사장님이 잘해줬는데 폭력까진 아니었지만 엄청 거칠었다. 그럴 때마다 정말 많이 울었다. 이제는 못 버틸 것 같아 그만두게 됐다. 거기서 더 일하면 정말 정신적으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고 말했다.

A씨도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새벽 3시에 퇴근했다. 야근수당은 하나도 못 받았다. 월급도 엄청 조금 줬고 ‘사회초년생인데 어떻게 일을 잘하냐’며 사장한테 말했더니 ‘네 몸값만 받고 일할래? 아니면 지금 받는 돈 그대로 받되 더 힘든 일을 버틸래?’라며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고 털어놨다.


결국 A씨는 바로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스스로 하고 싶었던 일이 꺾이면서 상실감도 컸다. E씨는 “학생 때 온라인 커뮤니티를 운영했다. 진짜 열심히 했는데, 부모님한테는 얘기도 제대로 해 볼 수 없었다. 특히 어른들은 이 일을 하는 걸 엄청 싫어했다. 그래서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싶은 일인 척 연기했다. 이게 내가 은둔 생활을 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인 것 같다”고 돌아봤다.

“싫어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처럼 연기”
“기초생활수급자 유지 위해 병원 다녀”

이어 “학교도 늦게 온 만큼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느낌을 항상 받았는데, 사실은 너무 하기 싫었다. 이런 게 오히려 나를 옭아맸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A씨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집에서는 계속 나를 지적했다. 나도 지적받기 싫었지만 강요받는 느낌이었고,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엄마는 계속 지적만 했다”며 “‘넌 의지가 약해’ 이런 식으로. 나도 아는데 그런 말 계속 듣다 보면 정말 몸이 안 움직인다. 그래서 간판 디자인 회사에 들어갔다. 너무너무 괴로웠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결국 이들은 사회활동을 시작하며 육체와 정신이 점차 피폐해져갔다. 학업, 직장생활, 가족과의 관계서 상당한 피로감이 축적되면서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운 단계까지 이른 것이다.

가족 간의 정서적 교류가 적기에 이들은 주변 환경과 관계를 돌보지 못하는 등 일상적 생활패턴을 회복시키지 못했다. 이런 경험 직후 이들은 주거지 밖을 나서지 않았고,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회적 관계서 고립됐다.

E씨는 “귀가하면 허물 벗듯이 옷을 벗어놓고 누워 버렸는데, 정신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어느 순간 밥을 먹거나 씻는 등 가장 기본적인 것도 힘들어졌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도 자기학대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굶다가 폭식을 한다든지, 아예 안 씻고 며칠 동안 지내는 등의 생활이 잦아졌다”고 자책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학교 및 양육자에게 통제적이며 억압적인 감정을 느꼈다는 점이고, 양육자를 제외한 다른 가족 구성원, 친구들과도 정서적 유대감이 낮았다. 결국 어디서든 소외감을 느꼈던 셈이다. 

끝없는
소외감

이들은 “집이 어려워서 대학 원서 쓸 돈도 없었다. 아빠는 며칠 전에 술 먹고 술집 여자를 때려서 경찰서에 끌려갔다고 해서 한 달 동안 울었다” “엄마도 나를 방치했다.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학교를 가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병원을 다녀 가족이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할 수 있었다. 병원을 다니지 않으면 기초수급마저 끊어져 계속 병원을 다니게 했다”고 털어놨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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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