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야구계 풍운아 정수근

‘시원하게’ 술로 다 말아먹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야구선수 출신이자 스포츠해설가인 정수근이 또 폭행 사건에 휘말렸다. 그는 술자리서 처음 본 남성의 머리를 술병으로 가격한 혐의를 받는다. 정수근은 나름 잘나갔던 야구선수였다. 사업과 해설위원으로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여러 사건에 휘말리며 그의 명성도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정수근은 전 OB·두산 베어스, 롯데 자이언츠 소속 야구선수였다. 야구계서 풍운아로 꼽히던 선수다. 베어스 시절, 빠른 발과 준수한 타격 능력을 바탕으로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까지 성장했다. 그러나 잇단 자기관리 실패로 이른 나이에 커리어가 끝났다. 그는 무려 전과 7범이다.

전과 7범
관리 실패

정씨는 두산 베어스 역대 최고의 리드오프로 이종욱과 더불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선수다. 리그 최고급의 중견수비, 타격도 2할8푼은 쉽게 칠 수 있는 베어스 사상 최고의 리드오프 중견수로 평가받았다. 특히 4년 연속(1998년~2001년) 도루왕을 할 만큼 빠른 발을 가지고 있었다.

도루왕 제조기 김평호가 주루코치로 바로 부임하면서부터 입단 2년차부터 주전 중견수로 자리잡기 시작, 도루 2위를 2번 기록하면서 차세대 대도로 주목받기도 했다,

해태 타이거즈 ‘바람의 아들’ 이종범이 일본으로 이적한 1998년부터 도루왕 4연패를 하면서 일약 스타로 등극했다. 이병규, 박재홍, 제이 데이비스 등과 함께 리그의 대표적인 중견수로 자리 잡음과 동시에 2000년 시드니올림픽 야구 동메달의 주역이 됐다.


문제는 2002 시즌을 정점으로 타력이 떨어지는 등 불안요소도 안고 있었다는 점이다.

두산 베어스 시절 팀에서 도루 담당으로 정수근은 거의 모든 지분을 먹고 있었다. 김상호는 주루가 좋았지만 정씨가 데뷔할 즈음엔 클린업 타선으로 가면서 주루 능력이 감퇴했고, 1995년 당시 1번 타자였던 김민호는 타격이 좋지 않았던 데다 9번 타순으로 이동하면서 도루서 돋보이는 성적을 보이지 못했다.

성격 탓에 2003년 하와이 스프링캠프에서는 팀 동료 한태균과 같이 폭력 사고에 휘말리기도 했다. 시즌 중엔 경기 중 멋대로 짬뽕을 시켜 심재학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는 루머도 있었는데 정씨가 직접 부인한 바 있다.

정씨는 엇나간 행동으로 두산 프런트의 눈 밖에 나게 됐고, FA를 앞둔 2003년 잔부상으로 89경기 출장에 그치는 등 하락세가 시작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두산은 자금 사정으로 인해 FA를 절대로 잡지 않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두산이 정씨의 잔류를 포기한 주된 이유다.

2003년 시즌 종료 후 FA시장서 해외 진출을 선언한 이승엽을 제외하고 진필중, 마해영 등과 함께 자연스레 그해 FA시장의 최대어로 떠오르면서 여러 팀의 러브콜을 받았다.

원 소속팀과 우선 협상 기간이 지난 후 정씨는 부산의 야구 열기에 끌려 부산을 연고로 하는 롯데 자이언츠를 희망했으나 먼저 삼성 라이온즈로부터 옵션 포함 최대 60억원의 오퍼가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롯데 측과의 협상 테이블을 마련했으나 삼성에 비해 적은 40억원을 제시해 상당히 많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롯데 쪽과 계속 협상을 진행했고, 정씨는 롯데 측과 FA 계약하면 좋은 곳에 기부하고 싶다며 6000만원만 더 얹어주면 롯데로 가겠다고 제안, 결국 롯데와 6년 40억6000만원에 계약했다.


빠른 발로 프랜차이즈 스타 성장
‘잇단 말썽’ 징계에 폭행 사건도

정씨는 롯데와 계약하며 “한국 최고의 야구 열기를 지니고 있는 구도 부산서 한국 야구의 부흥을 이끌고 싶다”며 부산 야구팬들의 열화와 같은 환영과 함께 롯데에 입단하게 되지만 이때부터 그는 날개 없는 추락을 겪게 된다.

방황은 끝나지 않았다. 도박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더니 2007년도엔 이혼까지 당해 온갖 고난과 악재를 당했다. 중징계 처분이 해제돼 1군으로 복귀하긴 했지만 이 사건은 롯데 정씨의 잔혹사를 알리는 서막과도 같았다. 2006~2007년까지 2년간 다시 롯데 감독을 맡았던 강병철 감독과의 불화도 한몫했다.

강병철 감독은 당시 상대 선발이 좌완이면 좌타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9번에 내리꽂는 등 강 감독은 정씨와 마찰을 빚었다. 강 감독은 정씨의 평소 행색에 대해서도 자주 지적했다고 한다. 프로야구 선수에게 헤어스타일이나 귀걸이 등을 지적을 했는데 귀걸이 등을 하고 다니는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아프리카 방송서 증언했다.

그는 데뷔 1년 차 이후 사상 최악의 모습을 보이며 이대로 다시 올라가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롯데 팬들에 의해 KBO 올스타전에 뽑히게 됐고, 그 경기서 역전 홈런을 뽑아내며 미스터 올스타에 뽑히게 된다.

당시 인터뷰서 정씨는 “힘든 일로 인해 야구가 싫어지게 됐지만 오늘 다시 야구가 좋아지게 됐다”는 멘트를 날렸고 그 이후로 기적같이 부활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게 된다. 전성기 때보다 발도 느려졌고 수비력도 떨어졌으나 전반기까지 시즌 타율 0.253에 불과하던 것을 시즌 최종 0.293까지 끌어올렸으며 시즌, 느려진 발을 대신해 어퍼스윙으로 장타율을 올리는 등 의지를 보여줬다.

2008년 시즌을 앞두고 롯데의 주장으로 선임됐다. 전년도인 2007년 후반기의 좋았던 폼과 더불어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제리 로이스터와도 좋은 캐미를 보이며 팀 상승세의 한 축을 담당했다. 심지어 도루 실패를 하고 덕아웃으로 뛰어 돌아오는데 로이스터 감독이 먼저 하이파이브를 권하며 손을 내밀었을 정도.

방망이도 오랜만에 3할 이상의 타율을 유지하며 부활을 알리는 줄 알았으나 사직구장서 4연패한 2008년 7월16일, 만취 후 새벽 3시경에 건물 관리원과 경찰관을 폭행해 유치장에 입감됐다. 당시 술자리에 늦게 나타난 후배 투수 송승준을 폭행했다는 소리도 나왔다.

당시 상승세를 타고 있던 롯데는 사실상 최악의 악재였는데, 심지어 정씨는 팀 주장이었다. 주장이 연패 중에 대놓고 술을 마신 것도 모자라 사고까지 쳤으니 엔트리서 제외된 것은 물론이고 2008년 KBO 올스타전 선발서 탈락했다.

도박에 빠져
고난과 악재

이후 보석금을 내고 가석방됐지만, KBO에서는 무기한 자격정지 처분을 내렸다. 정씨의 공백으로 인해 비게 된 주장 자리는 조성환이 맡았다.

정씨의 징계가 장기화되자 KBO 내에서도 멀쩡한 선수를 죽여선 안 된다는 의견이 우세해 복귀가 허락됐고, 롯데 측도 조성환의 부상과 팀의 부진으로 복귀를 타진해 2009년 8월12일부로 1군에 복귀했다.


복귀 당일에 바로 2번 타자로 출장해 첫 타석서 안타와 도루를 성공시키며 기대감을 높이더니, 8월13일 역시 선발 2번 타자로 출장, 5타수 2안타 1타점 1득점 및 7회말 기아 공격 시 1사 주자 2루 상황서 이종범의 안타성 타구를 점프해 잡아내는 등, 대활약을 펼쳐 기아의 12연승 도전을 중요 기점서 차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삼성의 패배와 함께 하루 만에 복귀하며 복귀 2경기 만에 히어로 인터뷰를 했다.

하지만 한 달도 되지 않은 2009년 8월31일 밤, 또 술 난동 문제로 언론에 오르내렸다.

신고자는 정씨가 술을 마시고 있던 해운대구 재송동의 한 호프집 종업원이었는데, 정씨가 난동을 피운 적은 없고, 팀이 포스트시즌에 가느냐 마느냐 하는 중요한 순간에 술을 먹고 있는 정씨를 보고 순간 화가 나 허위 신고를 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은퇴 후 정씨 본인이 개인방송서 밝힌 바에 따르면 “실제 고소하려고 신고자의 신원을 확보해 만났으나 신고자의 개인적인 사정이 좋지 않았고, 신고자가 자신을 만난 후 사과했고 당시 힘들게 복귀했으나 이런 식으로 다시 꼬여버려서 야구에 대해 흥미를 아예 잃어버린 탓에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정씨는 야구 해설위원으로 잠깐 활동했으나 2010년 6월 음주운전으로 택시를 들이받아 또 입건됐다. 2016년 3번째 음주운전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2021년 6월 무면허에 만취 상태서 운전하다 적발돼 징역형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후 불과 3개월 뒤인 같은 해 9월 5번째 음주운전에 걸렸고, 결국 징역 1년으로 옥살이까지 했다.

이후 지난해 가을에 출소한 것으로 확인됐는데, 얼마 되지도 않아 또 음주 후 사고를 쳤다. 이번에는 식품회사 간부였던 노모씨를 비롯한 지인 3명과 노래방서 술을 마시다가 정수근의 3차 제안을 거절하자 맥주병으로 폭행을 가했다.


사고 치고
조용히 은퇴

폭행에 사용한 맥주병은 유리병이었다. 노씨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친 후 며칠이 지난 2024년 1월4일에 정씨를 고소했다. 해당 폭행으로 인해 노씨는 두피 찰과상과 두개관 내 출혈, 뇌진탕후증후군, 경추 염좌 등 상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폭행 행위가 법정서 모두 인정될 경우 도로교통법 위반, 폭행, 특수상해를 포함해 전과 8범이 된다.

야구선수들의 사건 사고는 해마다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6일, 김하성은 넥센 히어로즈서 2년간 2군에 머물렀던 전직 야구선수 임혜동에게 공갈 협박을 당했다며 경찰에 고소했다. 김하성 측의 주장에 따르면 김하성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전 2021년 당시에 후배였던 임혜동과 서울 강남의 한 주점서 술을 마셨다. 당시 음주 도중 실랑이가 몸싸움으로 번졌고 김하성이 출국 전 합의금을 전달했지만 임혜동이 폭행과 코로나 기간 중 집합금지의무 위반을 빌미로 이후로도 계속 금품을 요구했다.

12월7일, 임혜동은 한 유튜브 채널에 직접 출연해 김하성 측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면서 본인이 단순히 김하성과 선후배 사이로 알고 지내던 관계가 아니라 김하성의 로드매니저로 일해오면서 그에게 상습적으로 구타를 당해왔다고 밝혔다. 

같은 날 <디스패치>에서는 임혜동의 주장을 반박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김하성에게 맞은 사진이라며 공개한 것은 본인의 부친에게 맞은 사진이었고 김하성 이외에 다른 메이저리그 선수에게도 협박으로 금품을 뜯어낸 정황이 있다는 게 골자였다.

<디스패치> 기사가 나온 다음 날인 12월8일, 임혜동은 다시 유튜브 출연해 김하성에게 폭행당한 증거 사진을 변호사를 통해 언론에 공개하는 과정서 아버지에게 폭행당했던 사진이 잘못 섞여 들어간 것일 뿐 김하성에게 상습적으로 폭력을 당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또, 김하성 측이 본인에게 2억원을 합의금으로 준 후 지속적인 협박에 못 이겨 2억을 추가로 뜯긴 것처럼 말하면서 본인을 협박공갈범으로 몰고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상습폭행을 당한 피해자인 것이 맞다면 고소하라는 김하성 측의 공식 입장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고소를 할 것이라는 입장도 밝혔다.

또 음주 구설수…이번엔 폭행 피소
“3차 거부하자 맥주병으로 때렸다”

<디스패치>는 김하성 측의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추가 보도를 내보냈다. 그날 술자리에 동석했던 것으로 알려진 또 다른 야구선수와의 인터뷰와 함께 폭행 사건이 있었다고 임혜동이 주장한 다음 날 김하성과 임혜동은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는 내용이었다.

김하성과 같이 미국에 갔던 임혜동이 50여일 만에 홀로 돌아온 것에 대해선, 임혜동이 미국서 당한 부당한 대우에 못 이겨 돌아온 것처럼 말했던 것과는 달리 부친의 건강문제 때문에 돌아온 것임을 보여주는 카톡 대화 내용도 공개했다.

단순 실랑이에 대해 4억원이라는 거액의 합의금을 준 것에 대해 김하성 측의 해명은, 당시 병역특례를 받은 상태이긴 했으나 봉사활동 시간이 좀 모자랐던 데다 코로나 기간 중 술자리를 가져서 방역법 상 집합금지의무를 어긴 것이 밝혀지면 병역특례가 취소돼 현역으로 입대하게 될 것이 두려워 서둘러 합의를 해줬으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죄송하다는 점을 밝혔다.

여성을 강제추행하고 후배들을 폭행한 야구선수 출신 조직폭력배도 있다. 부산지법 형사3단독(송호철 부장판사)은 지난해 1월 특수상해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1년4개월을 선고했다. 법원은 또 강제추행, 특수재물손괴, 모욕 등의 혐의에 대해서는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하고 4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도 명령했다.

A씨는 지난 2020년 7월28일 새벽 부산 중구 한 노래방서 같은 조직 소속의 후배 20대 남성 B씨를 시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조직원 C씨에게 위해를 가하라고 지시했다. B씨가 이를 거부하자 A씨는 C씨를 노래방 마이크로 폭행해 치아 4개를 부러뜨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씨는 2022년 5월8일 B씨와 전화로 말다툼하다 흉기를 들고 B씨를 찾아다녔으나 발견하지 못하자 포장마차 천막을 찢은 혐의도 받는다. 당시 그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에게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또 A씨는 이로부터 약 2주 후 부산 중구서 길거리 방송을 하던 중 20대 여성 D씨를 불러 세워 자신의 무릎에 강제로 앉힌 뒤 신체 일부를 만지는 등 강제추행했다.

A씨는 한때 부산의 야구 유망주로 주목받으며 프로야구단에 입단했지만, 고교 시절 범죄이력이 논란이 돼 스스로 퇴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 제대 후에는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폭력조직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계속되는
야구 사건

재판부는 “피해자의 상해 정도가 비교적 중하고, 강제추행의 경우 인터넷 방송을 하면서 추행하는 장면을 방송 소재로 삼았기에 죄질이 매우 나쁘다”며 “피고인은 범행을 모두 반성하고 있고 피해자들과 원만히 합의한 점 등은 유리한 정상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앞서 A씨는 지난 2021년 11월 부산진구 한 유흥주점서 자신에게 인사하던 50대 종업원의 얼굴을 이유 없이 폭행한 혐의로도 항소심서 벌금 800만원을 선고받기도 했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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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