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TV> 일본제국 황족 장녀서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된 이방자 여사

조선의 마지막 국모 하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대부분 명성황후 또는 순종효황후를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대한제국에는 마지막 왕비가 따로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바로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황태자비입니다.

일본의 구 왕족으로 태어나 대한제국의 이은 황태자와 혼인하면서 황태자비가 됐지만 엄밀히 따지면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은과 혼인했기에 그녀의 조선 황족 논란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평생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며 한일 미래세대가 소통하길 바랐던 이 마사코.

과연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에게는 여러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대부분 어린 시절 일찍 세상을 떠나고 명성황후의 소생 순종 이척(순종), 귀인 장씨 소생 의친왕 이강, 순헌황귀비 엄씨 소생 영친왕 이은(영친왕), 복녕당 귀인 양씨 소생 덕혜옹주뿐이었습니다.

순종은 슬하에 자녀가 없어 뒤를 이을 황태자로 이은을 책봉했는데, 이은은 11살 때 유학이란 명목으로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게 됩니다.

일본은 이은 황태자를 이용하기 위해 일본군에 입대시킨 뒤 왕족과 강제로 혼인을 시켰는데 이때 상대 여성이 바로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이방자 여사였습니다.

이방자 여사는 구 왕족의 장녀로 어린 시절부터 적극적인 성격을 가졌으며 연극을 좋아하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동경해 여류 비행사를 꿈꾸는 평범한 소녀였는데요.

그런 그녀가 16세 되던 해 여름, 자신의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우연히 신문을 보게 되었는데 자신이 이은 황태자와 혼인한다는 소식을 보게 됩니다.
 

[이방자 여사 회고록 중]

이은 세자 전하와 내가 약혼했다는 주먹만한 활자가 내 이마를 쳤다.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왕세자 전하와 약혼을 한다니!

약혼 사실을 신문에서 알게 되다니!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사실에 머릿속이 핑핑 돌고 눈앞이 어지러워 활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패망한 국가의 황태자와 혼인한다는 것은 자신이 꿈꾸었던 모든 미래가 산산조각 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방자 여사는 부모에게 이렇게 말을 전했는데요.

“잘 알겠습니다. 힘든 역할이라는 걸 잘 알겠지만 부모님의 뜻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약혼이 결정된 후 이방자 여사는 조선의 역사와 언어를 공부하며 혼인을 준비했습니다.

당시 이은 황태자는 소위에 임관했는데 매주 일요일 외출을 할 때면 이방자 여사를 만나러 갔습니다.

이방자 여사는 그때 이은을 떠올리며 회상하길 ‘키는 작지만, 어깨가 넓어 믿음직스러웠고 교양이 깊어 보였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만나 보니 무척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19년 1월25일은 이방자 여사의 결혼식 날이었는데, 나흘을 앞두고 고종 황제가 승하했습니다.

승하 원인으로 독살을 의심했고 이를 계기로 3·1 운동이 시작되면서 조선은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많은 한국인이 일제의 총검 아래 잡혀가고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반일 감정은 극으로 치달았는데요.

그 분노는 이방자 여사에게도 향했는데, 하루에도 수십통씩 결혼을 단념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 전화가 이어졌습니다.

모리마사 왕은 딸이 걱정되어 혼인을 취소할지 고민하고 있었지만,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이방자 여사는 다시 한번 결단을 내렸습니다.

1920년 4월28일, 결국 두 사람은 백년가약을 맺었고 결혼식 후 열린 파티는 3일간 계속됐습니다.

그러나 이때 이방자 여사에게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이 전해지는데요.

바로 결혼식에 가기 위해 그가 오른 마차에 한국인 유학생이 폭탄을 던졌던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폭탄은 터지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은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비밀로 하고 있었는데요.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이방자 여사가 크게 놀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닥칠 모든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각오한 이방자 여사는 오히려 침착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은과 이방자 여사 사이에서 첫째 아들 이진이 태어납니다.

두 사람은 아들을 데리고 순종 황제를 만나러 조선을 방문하는데 비극적이게도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날,  왕자가 청록색 젖을 토하면서 생후 7개월에 숨을 거두고 맙니다.

2년 뒤인 1923년 일본에서는 대지진이 일어납니다.

당시 일본은 자국의 불안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는데요.

당시 이방자 여사는 엄청난 수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이 사건을 떠올리면서 “일본인들의 잔인한 행위는 무엇인가? 전하와 내가 결혼함으로써 한일관계를 위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가? 우리의 결혼이 무슨 의미가 있나? 나의 아들 진의 죽음조차 이제는 아무 가치가 없게 되었구나!”라고 개탄했습니다.

1주일 내내 슬픔과 분노로 떨고 있는 이은 황태자를 보며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뿐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3년 뒤 한국 정부가 수립됩니다.

이때 이방자 여사는 호적상 재일 한국인이었습니다.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는 당시 이승만정부에 귀국 및 국적 취득을 타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일본 황족으로 살았기 때문에 일본으로 귀화한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무국적자가 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이어 나갔습니다.

1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국 국적은 취득할 수가 없었고 결국 둘째 아들의 장래를 위해 일본으로 귀화해 일본 국적을 취득하게 됩니다.

이방자 여사가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것은 1963년 박정희정권이 들어선 뒤인데요.

이때부터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귀국 후 창덕궁 낙선재서 기거하며 조현병을 앓고 있던 덕혜옹주와 뇌내출혈을 앓고 있는 영친왕을 보살피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평소 남편과 구상한 사회봉사를 시작했는데요.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으로 취임해 장애인들의 재활을 위한 자행회 언어장애 및 소아마비 장애인들을 위한 명휘원을 설립했습니다.

1970년 남편이 사망한 뒤에도 지적장애 학생들을 위한 특수 교육기관인 수원시 자혜학교, 안산시 명혜학교를 설립하며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방자 여사는 덕혜옹주가 세상을 떠난 지 9일 뒤인 1989년 4월30일, 창덕궁 낙선재서 향년 87세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이방자 여사 회고록 중]

내게는 2개의 조국이 있다.

하나는 나를 낳아준 곳이고, 하나는 나에게 삶의 혼을 넣어주고 내가 묻힐 곳이다.

내 남편이 묻혀 있고 내가 묻혀야 할 조국, 이 땅을 나는 나의 조국으로 생각한다.

 

구성&편집: 김희구
일러스트: 정두희


<khg531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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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소문이 어느덧 사실처럼 인식되고 있다. 명확한 물증이 없는 가운데 파편적인 의혹이 덧씌워진 양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으며, 흐름을 파악할 만한 유의미한 흔적이 이제야 겨우 나왔을 뿐이다. 증폭된 의혹 뒤편에서 여전히 진실은 빼꼼히 잘 보이지 않는다. 2010년 9월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황해경제자유구역에 자리 잡은 유일한 농산물 가공 업체로, 그간 심심치 않게 밀수 의혹을 받아왔다. 가공 목적으로 수입한 농산물을 가공 없이 시중에 유통시켜 엄청난 차익을 봤다는 꼬리표가 뒤따랐다. 의혹하는 눈초리 선라이즈에프앤티가 취급했던 대다수 농산물이 고관세 품목이라는 점은 이 같은 의혹을 부채질했다. 그간 선라이즈에프앤티는 ▲녹두 ▲콩나물콩 ▲다대기(혼합양념) ▲생강 ▲마늘 ▲참깨 ▲팥 ▲서리태 등 높은 세율이 붙는 고관세 품목을 주로 수입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 예로 콩나물콩의 경우 그대로 들여와 국내에 유통하면 487% 관세가 부과되지만, 콩나물 재배 목적으로 수입하면 27%만 반영된다. 평택세관에 몸담았던 다수의 전직 세관공무원이 기업 출범 및 운영에 관여했다는 점도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심지어 선라이즈에프앤티 이사진에 포함됐던 특정 세관 출신 임원이 한때 다이아몬드 밀수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린 사례도 존재한다. 수년 전부터는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선라이즈에프앤티의 밀수 의혹을 수차례에 걸쳐 제기했던 공익 제보자 이성열씨가 재판에 연루되는 과정에서 김건희씨의 모친인 최은순씨가 거론됐던 게 이 같은 흐름에 불을 지핀 형국이다. 이런 가운데 정치평론가인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이 최근 ‘평택항’을 언급하자,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질 정도가 됐다. 장 소장은 SBS라디오 <김태현의 뉴스쇼>가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김건희씨 일가의 수상한 물건 수입 의혹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했다. 갈수록 증폭되는 평택 논란 이제야 공개된 소소한 흔적 장 소장은 “최은순씨가 주인으로 있는 농수산물 수입업체에서 이상한 것을 들고 오려고 하다가 걸려서 (김건희) 오빠와 김건희씨가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며 “어떤 물건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부적절한 물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급기야 선라이즈에프앤티의 폐업이 알려지자, 의혹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양상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국세청 사업자 과세 유형 조회 결과 지난 10일자로 폐업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폐업자로 조회된 지난 10일은 김건희 특검법이 공포된 시기와 맞물린다. 물론 꾸준히 의혹이 제기된 것과 별개로,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단서는 없는 상황이다. 특히 주주명부가 지금껏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게 의혹과 진실을 구분 짓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시사>가 최초 입수한 주주명부는 간접적으로나마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로 작용할 여지를 남긴다. 2022년 10월 작성된 ‘카리나에프앤티(선라이즈에프앤티에서 2020년 9월 상호 변경) 주주명부’를 검토한 결과 주주는 총 17명, 발행주식은 91만8400주(1주당 5000원)로 확인됐다. 2010년 9월 자본금 5억원으로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수차례 증자를 거쳤고, 해당 시기에 자본금을 45억9200만원으로 늘린 상태였다. 의문 해소 첫 단추 일단 주주명부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경영권 교체 과정이나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법인 등기와 주주명부를 교차 검증한 결과를 토대로 추정하면, 표면상 선라이즈에프앤티 지배 세력은 ‘전직 세관공무원(설립~2018년 중순)→지엔티에이치(~2020년 중순)→킴스에O엔O(~2022년 초순)→동OO앤에스(~2025년 6월)’ 순으로 변경된 흐름이다. 첫 번째 경영권 교체는 ‘펀딩하이 연체 사건’과 함께 발생했다. 펀딩하이는 중국·동남아시아에서 농산물을 수입하는 업체에 돈을 빌려 주고, 투자자들에게 15% 이상 수익을 보장하는 펀딩 상품으로 인기를 끌던 P2P 업체였다. 그러나 펀딩하이는 2018년 6월20일 ‘마늘 시즌2-17차(모집 금액 3억원, 차주 승리산업)’ 펀딩 상품의 연체를 시작으로 ▲세척 당근 시즌2-18차(모집금액 5억원, 차주 지엔티에이치) ▲김치 펀딩 2차(모집금액 1억2000만원, 차주 상아농산) ▲번데기 펀딩 1차(모집금액 1억8000만원, 차주 월량완코리아) 등에서 차주의 투자금 상환 실패를 알렸다. 연체 금액은 ▲지엔티에이치 29억원 ▲승리산업 33억원 ▲상아농산 11억8000만원 ▲월량완코리아 1억8000만원 등 총 75억6000만원에 달했다. 급기야 펀딩하이는 연체율 100%를 찍은 채 영업을 중단했다. 상환 실패 이후 차주 사이에 관련성이 드러났다. 지엔티에이치와 승리산업에서 대표이사였던 윤석호씨는 두 회사 지분을 각각 60%, 100% 보유 중이었다. 또한 월량완코리아 사내이사로도 등재돼있었다. 거듭되는 교체 수순 연체가 발생한 직접적인 사유는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대상으로 한 지분 투자였다. 지엔티에이치는 펀딩받은 금액을 농산물을 들여오는 데 쓰지 않고,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매입하는 데 활용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이를 계기로 지엔티에이치는 2018년 6월경 주식 16만1400주를 확보한 선라이즈에프앤티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확보한 이후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명단에 변화가 목격됐다. 선라이즈에프앤티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사내이사와 부친에 이어 회사에 몸담았던 대표이사를 대신해 지엔티에이치가 끌어들인 얼굴들이 등기임원 자리를 꿰찼다. 정작 지엔티에이치는 연체 발생 넉 달 후인 2018년 10월 보유 중이던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에 넘겼다. 펀딩하이 투자자들과의 소송전이 불거지자 중국에 본거지를 둔 우군에 주식을 양도한 모양새였다. 두 번째 경영권 교체는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의 주체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권에 본적을 둔 킴스에O엔O는 2022년 10월 기준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10만8200주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의 친인척이 보유한 주식 13만2800주를 합산하면 우호 주식은 24만주 안팎이다. 기존 지엔티에이치 측 우호 세력(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 16만1400주+마송재 3만주)과 비교해 5만주 가까이 격차를 벌린 셈이다.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대량 매입한 시기는 2020년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선라이즈에프앤티 등기임원 구성이 크게 요동쳤다는 점을 통해 짐작 가능한 사안이다. 실제로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발휘하던 2018년 7월 대표이사에 선임됐던 김정일 대표는 2020년 3월 해임됐다. 2018년 9월 취임했던 또 다른 대표이사 역시 당해 10월을 넘기지 못한 채 사임했다. 쉽게 거두지 못하는 의심 의미심장 세력 교체 과정 공석이 된 주요 등기임원 자리는 킴스에O엔O 측 인물로 채워졌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가 2020년 10월 선라이즈에프앤티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해당 시기에 사외이사, 감사 등 등기임원 전원이 새 얼굴로 교체됐다. 킴스에O엔O에 이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곳은 식료품 제조업을 영위하는 동OO앤에스였다. 이 회사는 2022년 10월 기준 주주명부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지분율 44.64%)를 보유한 단일 최대주주로 등재돼있다. 여기에 우호 세력(글로O포O 1만주+김성수 2만주+김종봉 788주)의 주식을 합산하면 지분율은 50%에 육박한다. 동OO앤에스는 사실상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인수하고자 만든 업체로 비쳐질 여지를 남긴다. 2022년 2월 출범 당시 자본금 10억원짜리였던 동OO앤에스는 불과 두 달 만인 2022년 4월14일 자본금을 21억원으로 두 배 이상 키웠다. 공교롭게도 동OO앤에스가 설립 이후 8개월 사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투입한 금액은 총 20억5000만원이었다. 이는 동OO앤에스 자본금 21억원이 선라이즈 주식 41만주를 매입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게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기존 61만8400주였던 발행주식을 2022년 4월22일 91만8400주로 30만주 확대했다. 동OO앤에스가 자본금을 21억원으로 확충한 지 8일 만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가 발행주식을 30만주 늘린 덕분에 동OO앤에스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주식 41만주를 확보한 형국이다. 동OO앤에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지배하는 위치로 올라설 무렵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구성은 또 한 번 바뀌었다. 동OO앤에스 대표이사가 사내이사, 글로O포O 대표이사가 사외이사에 이름을 올렸고, 김성수 대표이사가 신규 선임됐다. 이후 김성수 대표는 선라이즈에프앤티 폐업 전까지 자리를 지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되짚어보는 연결고리 한편 일각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는 지엔티에이치 측이 지배력을 상실한 이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나마 킴스에O엔O 혹은 동OO앤에스와의 연관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관여한 직접적인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만약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를 2021년 이후로 특정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항간에 떠도는 마약 적발 여부는 2022년 근방으로 얘기가 오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heaty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