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사건 75주년 특집> 광주가 부러운 제주의 한탄

“여기는 딴 나라입니까?”

[일요시사 정치팀] 정인균 기자 = “동굴에 숨어있던 3살배기 어린아이는 한 토벌대 대원에게 양다리를 잡혀 그대로 바위에 내쳐졌다. 바위에 머리를 부딪힌 아기는 그 자리서 두개골이 박살 나 즉사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 4·3 사건 당시 일어난 ‘빌레못 동굴 학살 사건’ 중 일부 내용이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갓난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게 다리를 붙잡혔고, 본인의 몸보다 한참 큰 바위에 내쳐져 죽임을 당했다.

불과 74년 전, 제주도에선 이 같은 잔혹한 살인이 섬 곳곳서 일어났다. 4·3사건 기간 동안, 3만여명의 양민들이 소리 없이 죽어갔고, 유족들은 오랜 세월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알릴 수도, 추모할 수도 없었다.

자주독립을 실현하지 못한 대한제국 현대사는 실로 비참했다. ‘남의 손’에 맡겨진 한반도는 곧장 절반으로 갈라졌고, 얼마 후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전쟁이 끝나도 비극은 이어졌다. 남한은 미국에 기대어, 북한은 소련에 기대어 저마다의 독재 역사를 써내려갔다.

75년의 
세월이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표방한 대한민국은 대통령선거를 통해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 전 대통령은 민주적으로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임기 8년을 채운 시점부터 독재자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본인의 임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법 선거 등을 동원해 임기를 계속 늘리려 했다. 독재정치에 지친 국민들은 결국 들고 일어났고, 4·19 혁명을 통해 이 전 대통령을 하야시켰다. 


이후 박정희·전두환정권의 군부 쿠데타와 독재가 이어지며 대한민국의 완전한 민주화는 계속 지연됐다. 수많은 지식인과 시민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이 과정서 많은 시민들이 고문을 받아 죽임을 당하거나 간첩으로 몰려 사형에 처해졌다.

온당하지 못한 정권하에서 벌어진 부당한 죽음은 아직도 그 억울함이 풀어지지 않고 있다. 사건 발생 당시 압도적으로 강했던 국가권력이 진실을 은폐하고, 관련자들을 색출해 입을 막아버린 탓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또한 1980년대엔 ‘광주 폭동’으로 불리며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세월이 있었다. 1980년 5월18일 벌어진 광주 사태는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과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국가 단위의 사건이었다.

당시 집계에 따르면 10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사망자는 166명, 행방불명자는 54명, 후유증 사망자는 376명이 나왔다. 부상자는 수천명으로 알려졌고, 그 외의 재산피해 등은 정확히 집계된 것이 없다. 사건을 두 눈으로 목격한 광주 사건의 생존자들은 아직도 정신적·신체적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 사태가 대외에 폭동으로 알려진 점은 광주시민을 두고두고 괴롭혔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전두환정부는 광주에 북한 세력이 들어와 폭동을 일으켰고, 그것을 특수부대가 진압했다고 언론에 알렸다.

왜곡된 선전을 들은 대한민국 국민은 실제로 광주 사건이 폭동인 줄만 알았고, 수많은 죽음 또한 간첩과 북한으로부터 사주받은 불순분자들이 죽은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광주 사태로부터 약 8년이 지난 후에야 진실은 바로 세워지게 됐다. 

1988년 노태우정부 산하의 민주화합추진위원회는 광주 폭동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고, 이후 국회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돼 ‘5·18 민주화 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광주 폭동이 ‘공식적인’ 민주화운동이 되기까지 꼬박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제주 4·3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은 제주도의 사건 또한 광주민주화운동처럼 다시 ‘올바르게’ 세워지길 원한다. 처음부터 잘못 알려지게 된 제주 4·3사건을 사람들에게 다시 알려 피해자들의 억울함이 풀어지길 원하는 것이다. 제주 4·3사건의 진실이 덜 알려지게 된 데엔 제주도의 자주성과 섬의 지리적 특성이 한몫했다.

독재 속에 죽어간 억울한 피해자들
비교적 덜 알려진 사건…그 이유는?

제주도는 오랜 세월 육지로부터 천대받아오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때는 조정서 밉보인 정치인들이 유배 오는, 고립된 지역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제주도민들은 나름대로 철마다 각종 공물과 부역 등을 조정에 바쳤지만, 조정으로부터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보지 못했다.

이 같은 대우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까지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군부는 제주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해 군수물자와 전투기 등을 숨겨놓는 일종의 군사 거점으로 사용했다. 연합군은 그런 제주도를 일본의 군사시설로 인식했고, 주요 폭격지에 포함시켰다.

당시 벌어진 연합군의 수많은 포격과 일제의 약탈 흔적은 아직도 제주도 곳곳에 남아있다.

1945년 8월15일, 고통받던 제주도민들에게 드디어 해방의 날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거리로 뛰어나와 해방의 기쁨을 맛봤고, 곧 해방군이 내려와 일제를 몰아내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해방군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제주도가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바람에 미군이 한 달이나 늦게 군대를 보냈기 때문이다. 한 달간 제주도민들은 더욱 심해진 일제의 약탈을 견뎌야 했고, 부당한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야 했다. 이때 만들어진 게 ‘제주도 인민위원회’다. 

1945년 9월, 제주도에 도착한 미군은 다시 한번 제주도민들을 실망시켰다. 도민들에게 약탈을 서슴지 않았던 친일파들을 주요 요직에 다시 등용한 것이다. ‘사회주의 확장’을 막기에만 급급했던 미군은 친일 세력을 완전히 내치지 못했고, 이를 지켜본 도민들은 미군에게 큰 불만을 갖게 됐다.

그러던 중 ‘3·1 발포’ 사태가 터지게 됐다. 3·1절 기념행사를 갖기 위해 제주북초등학교 인근에는 3만명의 시민이 모였다. 좁은 골목에 수만명의 시민이 모이자 경찰은 긴장하게 됐고, 수백명의 경찰이 경비에 투입됐다.

그러나 현장은 매우 밀집됐고, 훈련되지 못한 경찰의 경비는 오히려 방해만 됐다. 복잡한 상황이 이어지던 중 결국 한 경찰의 기마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어린아이를 치고 간 경찰은 그대로 ‘뺑소니’를 친 채 행렬 속으로 도망갔고, 이를 지켜본 시민들은 그런 경찰에게 돌을 던지며 따라갔다.

비참한
현대사

당시 경찰에 대한 반감이 깊었던 도민들이 하나둘 돌팔매질에 합류하며 사태는 더욱 커지게 됐다. 경찰 지도부는 이를 진압하라며 시위대에 발포를 허가했고, 6명의 무고한 시민이 경찰의 총격에 목숨을 잃었다. 이때 사망한 사람 중에는 한살배기 젖먹이도 있었고, 아이를 지키려던 21세의 젊은 여성도 있었다.


6명의 시민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제주도민들은 경찰과 미군부에 대한 반감이 더욱 심해졌고,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들에 대한 저항운동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3·1 발포사건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제주도민은 ‘3·10 총파업’을 단행했다. 166개 단체와 자영업자, 경찰, 기자, 공무원 등 총 4만여명의 인원이 파업에 참여하며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3·10 파업’을 지켜본 미군과 경찰 간부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더욱 큰 공권력을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응원 경찰을 제주도에 더욱 부르게 된 것이다.

이때 들어온 무리 중엔 악명 높은 ‘서북청년회’도 있었다. 서북청년회는 말 그대로 한반도의 서북부서 살던 인물들로 사회주의 세력에게 재산을 모두 뺏겨 북한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던 집단이었다.

당시 미군부와 경찰 책임자들은 이들에게 ‘좌익 세력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들은 제주도에 도착해 무차별적인 검거와 고문을 이어나갔다. 

서북청년회의 폭거를 견디다 폭발한 제주도민들은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 아래 하나로 뭉치게 됐고 결국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와 ‘단독선거’ 등을 주장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이 제주 4·3 사건의 대략적인 전개 과정이다.


일반 시민들로 이뤄진 무장대는 결국 중앙정부서 파견한 토벌대로부터 피의 보복을 당하게 된다. 중앙정부와 미군정의 눈에는 모든 제주도민들이 사회주의 세력에 세뇌된 폭도 세력으로 보였고, 도민들은 제주지역 곳곳서 죽임을 당했다.

1954년에 가서야 멈춘 학살은 약 3만명의 사망자를 냈다. 당시 제주 인구가 30만여명이었으니, 약 7년간 제주도민의 약 10%가 제주 4·3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셈이다. 

지난 70년간 제주도에 있었던 이 비극은 대외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건 자체가 너무 오래된 탓이기도 하고, 당시 비극을 겪은 유가족이 수십년의 세월 동안 입 밖에 내놓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유가족은 ‘연좌제’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해당 사실을 대외에 알릴 수 없었다고 전한다.

강병삼 제주시장도 제주 4·3 사건의 유가족이다. 강 시장의 큰아버지는 당시 4·3 사건에 휘말려 감옥에 체포된 뒤, 서울로 이송돼 행방불명됐다.

반복되는
기대·실망

강 시장은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서 “아버지의 형님이 제주 사건이 벌어진 당시 토벌대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셨다”고 담담하게 운을 뗀 뒤 “아버지에게 전해 듣기로는 (토벌대가 큰아버지에게)어느 학교에 모이라고 했다더라. 그런데 당시 ‘모이면 죽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 큰아버지는 그대로 산으로 들어가셨다”고 말했다.

이어 “그랬는데 (토벌대 측에서)사면해준다고 산에서 내려오라고 거짓말했고, 큰아버지를 포함해 그때 내려간 사람들은 전무 죽임을 당하거나 그대로 형무소로 끌려갔다. 큰아버지는 마포 형무소에 도착했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그 이후 소식은 아직도 접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강 시장은 이 같은 큰아버지에 관한 사연도 본인이 20대 후반이 된 후에야 부친에게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는 군부 독재가 계속되는 상황서 4·3 사건 유가족이 쉽게 이 문제를 공론화시킬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마 그런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연좌제가 무서워서 가족관계를 다르게 신고하는 경우도 허다했다”며 “그런 세월이 매우 오래 지나게 됐으니 아직도 4·3 사건을 잘 모르는 이가 많은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제주4·3 평화재단’ 관계자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전했다.

재단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서 “광주민주화운동은 제주 사건보다 40년 뒤에 일어난 비교적 최근 사건이다. 그런 사건도 바로잡는 데 10년이 걸렸는데, 75년 전 사건을 바로잡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느냐”고 반문했다.

연좌제 공포로 지워진 진실
끊임없이 싸워가는 도민들

이어 “김대중 대통령이 발의한 ‘제주 4·3 사건 특별법’ 이후에야 본격적인 법제화 노력이 시작됐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강 시장과 재단 관계자는 제주 4·3 사건 전국화의 또 다른 장애물로 극우 단체의 과도한 폄훼 시위를 들었다. 강 시장은 “현재 여기 제주도 곳곳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4·3 사건을 폄훼하려는 시도들이 있는 것”이라며 “그 사람들이 이른바 빨갱이 폭동이며 4·3 사건의 전국화를 방해하고 있다. 특정 개인일 때도 있고 정당일 때도 있다”고 전했다.

재단 관계자도 “소위 극우 세력이라고 하는 곳에서 지속적으로 폄훼하고 있다. 올해는 특히 4·3 사건 학살의 한 축이었던 서북청년단이 4월3일 추념식 행사장 인근서 집회를 하겠다고 하는 등 역사왜곡 행위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또 사건 생존 당사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등지고 있는 점도 사건을 전국으로 알리는 데 큰 저해요소로 꼽힌다. 4·3 사건의 전국화, 법제화가 1년, 2년 지연될 때마다 법정에 나와 생생한 증언을 해줄 생존 피해자들이 계속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강 시장은 “4·3 사건의 생존 피해자분들의 연세가 많아서 자료를 더 확보하고 기록을 남겨놔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선 지속적인 교육도 필요하다. 지금 제주대학교 쪽과 제주도청이 협의해 청년 세대에 제주 4·3 사건을 교육하고 그런 사람들을 키우는 일을 진행하려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지속적인 교육과 홍보는 제주 4·3 평화재단서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 중 하나다.

재단 관계자는 “4·3 사건의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평화와 인권의 기억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또 이제는 4·3 당시 제주도민들이 가졌던 열망이 무엇인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며 “지금의 시각이 아닌 당대의 시각서 한반도의 분단을 반대했던 목소리를 잊어선 안 되며 이를 다음 세대의 기억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전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제주 4·3 사건 위령제에 참석해 대통령으로선 최초로 제주도민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자리서 “오랜 세월 말로 다 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뎌오신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몇몇 4·3 사건 피해자와 유가족은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고, 눈물을 훔치며 노 전 대통령에게 박수로 화답했다.

드러나는
진실들

2019년 1월17일에는 제주지방법원이 제주 4·3 사건 생존 군사재판 수형인 18명에게 공소 기각 판결을 내려 사실상 무죄를 선고했다. 제주 사건 관련한 최초의 무죄 판결이었다.

연좌제에 대한 두려움으로, 극우 세력의 지속적인 폄훼 공작으로 가려져 있었던 제주 4·3 사건의 진실이 이제 세상 밖에 나오려 한다. 오래된 세월 만큼 그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제주도민들은 지금도 광범위한 홍보 및 교육과 끈질긴 법정 싸움으로 이 싸움을 이겨내려 하고 있다.
 

<ingyu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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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단독기획> 26년 만에 다시 꺼낸 산업증권 파산의 비밀(상)

[창간특집 단독기획] 26년 만에 다시 꺼낸 산업증권 파산의 비밀(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1997년 말 국가부도 상황이 벌어졌다. 기업이 줄줄이 도산했고 수많은 근로자들이 길거리에 나앉았다. 자본금 수천억원, 국책은행을 뒷배로 둔 대형 증권사들도 고꾸라졌다. ‘절대 망할 리 없다’던 회사의 붕괴는 30여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피해자의 마음에 상흔으로 남아 있다. 산업증권 ‘파산의 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08년 10월21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공성진 의원이 한국산업증권(이하 산업증권) 파산 문제를 언급했다. 당시 공 의원은 “산업증권이 IMF 위기 시에 불·탈법적으로 강제 파산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산업증권은 한국산업은행(이하 산업은행)이 자본금을 100% 출자해 설립했다. 산업은행이 산업증권의 1인 대주주였던 셈이다. 망하지 않는다 이날 국감에서는 산업증권이 파산에 이르는 과정서 일어난 일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공 의원은 ▲산업증권 해산 과정서 이사회와 재정경제부의 허가 여부 ▲산업증권을 파산으로 끌고 간 1041억원 ▲개인명의의 계좌 ▲개인 계좌를 통해 한국산업선물로 흘러간 54억원 등에 대해 질의했다. 1998년 산업증권 해산 이후 10년 만에 당시 상황이 국감에 언급되면서 각종 의문이 제기됐다. 특히 개인명의의 계좌를 통해 오고 간 자금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됐다. MB(이명박)정부 들어 처음 열린 국감서 산업증권 파산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자 일부 언론은 이전 정부의 비자금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 국감에 증인으로 참석한 이충현 전 산업증권 채권관리팀장은 여전히 사건을 추적하고 있다. 현재 서울 강서구의원으로 활동 중인 그는 “외환위기 당시 좌파 정부의 고위관료들은 기업과 금융기관에 대한 범죄적 구조조정과 부정부패로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하고 나라와 국민에게 회복 불능의 상처를 남겼다”고 일갈했다. 이 구의원은 산업은행에 근무하다가 산업증권 설립과 동시에 이직했다. 그는 산업증권이 파산하면서 일자리를 잃은 피해자이고 ‘강제파산’ ‘사기파산’ 의혹을 제기한 제보자, 산업증권강제퇴출피해대책위원장이자 손해배상청구소송의 원고로 26년을 보냈다. 그사이 소송서 패소했고 법적 시효는 끝났다. 그럼에도 이 구의원을 비롯한 피해자들은 산업증권 파산 사건을 놓지 못한 상태다. 산업증권에 근무했던 직접 피해자와 가족 등이 일한 간접 피해자들은 “IMF 사태였다고 해도 산업증권이 망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개인을 고객으로 하는 일반은행이 아니라 산업자본 조달을 위해 설립된 국책은행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 하지만 산업증권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망했다. 400여명의 근로자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문제는 1997년 12월 IMF 사태 이후 1998년 해산, 1999년 파산 선고 때까지 석연치 않은 의문이 여럿 나온 점이다. 특히 청산 절차가 시작된 이후 개인명의 계좌를 통해 자금이 움직인 증거가 나왔다. 이 구의원이 가지고 있는 71개의 이른바 ‘비밀 통장’의 존재가 드러난 것이다. 산업증권은 ‘산업은행이 발행하고 있는 산업금융 채권의 원활한 소화 및 국제업무 특화’를 목적으로 1991년 4월 설립됐다. 산업은행이 100%를 댄 초기 자본금은 1500억원에 달했고 1992년 11월 1000억원, 1998년 3월 1500억원을 증자해 1998년 7월25일 해산 당시 산업증권의 자본금은 4000억원에 이르렀다. IMF 사태로 증권사 강제 퇴출 산업은행 1인 대주주로 안정성↑ IMF 사태로 휘청이긴 했지만 산업증권은 명예퇴직, 임금 반납 등 고강도 구조조정을 통해 상황을 개선하려 했다. 산업은행 역시 산업증권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증자하는 등 위기 타파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산업증권 본사에서 근무하던 이 구의원과 지방 지점에 있던 김영수(가명)씨는 “회사에 큰 문제는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기류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98년 5월 산업은행에 새 총재가 부임하면서부터다. 특히 언론을 통해 ‘산업증권 연내 폐쇄’가 발표되자 내부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고객과 채권자들은 동요했고 예금인출을 서두르는 등 대혼란이 일어났다. 당연히 신규영업도 줄어들었다. 영업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2개월 뒤 1998년 7월 산업은행은 산업증권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해산결의를 진행했다. 이후 1999년 2월 산업증권의 청산인은 ‘부채 초과 및 지급불능’을 이유로 파산선고를 신청했고 같은 해 3월13일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산업증권은 파산했다. 연내 폐쇄 발표부터 파산까지 채 1년이 걸리지 않은 셈이다. 이 구의원에 따르면 산업은행의 산업증권에 대한 해산결의는 노동조합과의 퇴출 위로금 규모를 합의하는 사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산업증권의 노조위원장과 산업은행의 대표이사, 부총재 등이 퇴출 위로금으로 24개월치 임금을 지급하기로 구두 합의를 진행하는 과정서 해산이 결정됐다. 당시 산업증권 대구지점서 근무하던 김영수씨는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서 “명예퇴직으로 나간 직원들은 20개월치 월급을 받은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산업증권이 망한 이후 나간 직원들은 퇴직금 수준의 돈만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산업증권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명예퇴직을 신청하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했다. 이 구의원은 2010년 5월 산업증권 파산으로 직장을 잃은 피해자를 모아 산업은행, 금융감독원, 전 산업은행 총재와 부총재, 산업증권 청산인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산업증권 파산 과정서 피고들의 불법행위가 자행됐고 이로 인해 피해자(직원)가 생겼으니 이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해달라는 취지다. 수장 바뀌고 급변한 기류 이 구의원은 “먼저 산업은행의 산업증권에 대한 해산결의가 적법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또 파산 신청의 원인이 된 자본잠식 상황은 조작됐고 1041억원의 대지급도 실제 진행됐는지 여부가 불분명하다. 무엇보다 산업증권 해산결의 이후 만들어진 수십여개의 개인명의 계좌와 이를 통한 자금흐름은 사기파산, 강제파산의 가장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1999년 2월 산업증권 청산인 명의로 서울지방법원에 제출한 파산선고신청서를 보면 ▲지급불능 ▲채무초과를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1500억원에 달하는 산업은행의 유상증자, 대규모 인원 정리, 조직 슬림화 등 자구 노력에도 수습이 안 될 정도로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또 회계법인의 실사 결과 부채가 자산보다 많다는 점도 명시했다. 반면 이 구의원은 결산보고서와 회계법인이 청산 가치 기준으로 작성한 조사보고서를 근거로 해산일 기준(1998년 7월25일) 자산이 부채보다 약 100억원가량 많다고 주장했다. 일반 채권자에게 변제해도 돈이 남는 만큼 파산이 아니라 청산 형태로 종결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산업은행은 청산이 아닌 파산의 방식을 택했다. 청산은 재산관계를 정리해 이를 분배하는 절차를 뜻한다. 파산은 회사의 총 재산을 총 채권자에게 공평하게 나눠주는 절차다. 파산은 법원의 결정에 따라 진행된다. 산업증권이 청산으로 마무리됐다면 산업은행은 유일한 대주주로서 손해를 피할 길이 없다. 하지만 법원이 파산 결정을 내리면서 산업은행은 대주주이면서 채권자가 됐다. 산업증권의 파산과 관련해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1041억원’의 존재다. 산업은행이 산업증권에 빌려준 단기자금으로 파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돈이다. 산업증권은 1998년 7월28일 ‘1998년 7월25일자로 회사 해산을 결의하고 청산 절차를 진행하던 중 1998년 7월27일 교환에 회부된 어음(금액 1041억원)을 결제하지 못해 1차 부도 조치를 당했다. 자체 자금 조달도 어려우니 추가 자금 지원을 부탁한다’고 산업은행에 요청했다. 의문점 많아 국감서 다뤄 산업은행은 이 돈을 산업증권 대신 갚았다(대지급). 다시 말해 산업증권이 산업은행에 빌린 돈을, 산업은행이 산업은행에 갚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산업은행이 대지급한 1041억원은 산업증권의 채무로 잡혔다. 이 과정서 부채가 자산보다 늘어나면서 산업증권 파산의 원인, 채무초과 상태가 됐다. 실제 회계법인이 작성한 1998년 10월31일 기준 산업증권의 부채는 2190억원, 자산은 1950억원이다. 부채가 자산보다 240억원 많다. 법원은 이를 근거로 산업증권의 파산을 선고했다. 240억원이 산업증권 파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 후폭풍은 400명이 넘는 산업증권 직원에게 미쳤다. 이 구의원은 산업은행이 대지급했다는 1041억원이 실제 거래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업증권은 대지급 요청문서 ‘산업증권 청산 절차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라고 기술했고 현금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돼있지만 실제로 산업은행은 산업증권에 1041억원을 신규 지원한 사실이 없고 내부 문서에도 신규 추가지원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 구의원에 따르면 산업은행은 파산 절차 과정서 ‘사후관리대지급금’으로 1041억원을 파산채권으로 신고해 2009년 5월 기준 파산채권의 100%를 돌려받았다. 산업은행 입장에서는 단 한 푼의 손해도 없이 대신 지급한 돈을 전부 회수한 것이다. 1041억원의 진실은 현재로선 알기 어렵다. 법원의 허가로 산업증권 메인 전산 서버가 파기된 상태기 때문이다. 다만 산업증권 청산 절차 과정서 개설된 통장은 실물로 존재한다. 이 구의원은 71개의 통장을 산업증권 전 직원에게 전달받아 보관해 왔다. 이 구의원은 해당 계좌들을 통해 수천억원에 이르는 자금이 움직였고 일부는 사용처도 불분명하며 최후의 사용처를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비자금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문제가 제기된 부분은 또 있다. 산업증권과 같은 날인 1998년 7월25일 청산 절차에 들어간 한국산업선물(이하 산업선물)에 송금된 54억원의 성격이다. 산업선물은 산업은행의 자회사로 금융 선물거래를 위해 설립됐다. 파산으로까지 이어진 산업증권과 달리 산업선물은 1998년 정상영업이 시작되기 전에 청산 종결 처리됐다. 그런 회사에 1998년 8월11일 개인 명의의 계좌서 54억원이 이체된 것이다. 이 구의원은 “산업선물은 자본금 100억원의 회사로 산업은행 해산 당시 정식으로 영업개시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무엇보다 1998년 5월 산업증권 연내 폐쇄 발표가 난 상태서 산업선물에 54억원이라는 거액을 입금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1998년 7월부터 시중은행에 개설된 통장은 모두 개인 명의로 돼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계좌 명의자 가운데 2명이 산업증권에 대한 특별검사(1998년 7월25일~8월11일)에 투입된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 검사역이었다는 점이다. 직원 400여명 한순간에 길거리로 법적 판단 끝났어도 문제 제기 중 이 구의원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서 피고 측은 “1998년 당시 고객예탁금은 한국증권금융주식회사에 별도로 예치 관리되는 현행 제도와 달리 증권회사의 고유재산과 구분해 관리되지 않았다”며 “금감원(피고)은 특별검사 기간 중 고객예탁금을 안전하게 고객에게 반환되는 것을 보장하는 적법한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IMF 사태로 금융회사 파산이 일어난 것은 1998년 이전에 없던 일로 제도가 미비했고 방법을 찾던 중 금감원 검사역의 개인 명의를 이용, 계좌를 개설해 이를 고객예탁금 관리 용도로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계좌를 개설했던 2명의 검사역 가운데 1명은 금감원에, 또 다른 1명은 증권사 감사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 명의 계좌와 관련해서는 2008년 국감서도 다시 한번 언급된 바 있다. 국감서 공 의원은 2명의 금감원 검사역 외 계좌를 만든 또 다른 개인 명의자에게 “누구의 지시로 개인명의 계좌를 개설했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해당 인물은 “금융감독검사국 직원들 지시로 그렇게 했다”고 답했다. 공 의원이 거듭 “산업증권의 자금을 개인, ○○○(명의 당사자)의 이름으로 관리하게 된 것은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해당 인물은 “감독 당국의 지시에 의해서 한 것이다. 개인적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은 2011년 이 구의원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서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하며 피고 측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총 주식을 한 사람이 소유하는 이른바 1인 회사의 경우에는 주주총회 소집 절차를 밟지 않거나 총회를 개최한 사실이 없다고 하더라도 1인 주주에 의해 의결이 있었던 것으로 주주총회의사록이 작성됐다면 그 내용의 결의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그 결의는 유효하므로 해산결의가 무효라거나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산업은행이 산업증권의 해산을 결의하는 과정이 절차적으로 하자가 없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해산결의 절차가 적법하고 유효한 이상 근로자에 대한 해고도 위법하지 않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또 소송을 제기한 시기가 사건 발생일 이후 10년이 경과된 상황이라 손해배상채권 시효가 소멸됐다고 봤다. 항소심 재판부 역시 이 구의원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법적인 판단은 끝난 셈이다. 정치적 이유 끝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구의원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나섰다. 이 구의원은 2012년 법적 판결이 확정된 이후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해왔다. 현재 이 구의원이 용산 대통령실에 넣은 청원은 경찰청 중대범죄수사과, 반부패공공범죄수사과 등을 거쳐 금감원으로 이송된 상태다. 이 구의원은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았다면 인수합병, 매각 등의 방식을 써도 됐을 일이다. 하지만 산업은행은 1인 대주주라는 점을 이용해 산업증권을 없애버렸다. 산업증권의 파산이 정치적인 목적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정부가 산업증권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고르면서 429명의 직원과 그 가족들은 지금까지도 고통받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