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사건 75주년 특집> 광주가 부러운 제주의 한탄

“여기는 딴 나라입니까?”

[일요시사 정치팀] 정인균 기자 = “동굴에 숨어있던 3살배기 어린아이는 한 토벌대 대원에게 양다리를 잡혀 그대로 바위에 내쳐졌다. 바위에 머리를 부딪힌 아기는 그 자리서 두개골이 박살 나 즉사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 4·3 사건 당시 일어난 ‘빌레못 동굴 학살 사건’ 중 일부 내용이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갓난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게 다리를 붙잡혔고, 본인의 몸보다 한참 큰 바위에 내쳐져 죽임을 당했다.

불과 74년 전, 제주도에선 이 같은 잔혹한 살인이 섬 곳곳서 일어났다. 4·3사건 기간 동안, 3만여명의 양민들이 소리 없이 죽어갔고, 유족들은 오랜 세월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알릴 수도, 추모할 수도 없었다.

자주독립을 실현하지 못한 대한제국 현대사는 실로 비참했다. ‘남의 손’에 맡겨진 한반도는 곧장 절반으로 갈라졌고, 얼마 후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전쟁이 끝나도 비극은 이어졌다. 남한은 미국에 기대어, 북한은 소련에 기대어 저마다의 독재 역사를 써내려갔다.

75년의 
세월이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표방한 대한민국은 대통령선거를 통해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 전 대통령은 민주적으로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임기 8년을 채운 시점부터 독재자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본인의 임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법 선거 등을 동원해 임기를 계속 늘리려 했다. 독재정치에 지친 국민들은 결국 들고 일어났고, 4·19 혁명을 통해 이 전 대통령을 하야시켰다. 


이후 박정희·전두환정권의 군부 쿠데타와 독재가 이어지며 대한민국의 완전한 민주화는 계속 지연됐다. 수많은 지식인과 시민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이 과정서 많은 시민들이 고문을 받아 죽임을 당하거나 간첩으로 몰려 사형에 처해졌다.

온당하지 못한 정권하에서 벌어진 부당한 죽음은 아직도 그 억울함이 풀어지지 않고 있다. 사건 발생 당시 압도적으로 강했던 국가권력이 진실을 은폐하고, 관련자들을 색출해 입을 막아버린 탓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또한 1980년대엔 ‘광주 폭동’으로 불리며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세월이 있었다. 1980년 5월18일 벌어진 광주 사태는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과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국가 단위의 사건이었다.

당시 집계에 따르면 10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사망자는 166명, 행방불명자는 54명, 후유증 사망자는 376명이 나왔다. 부상자는 수천명으로 알려졌고, 그 외의 재산피해 등은 정확히 집계된 것이 없다. 사건을 두 눈으로 목격한 광주 사건의 생존자들은 아직도 정신적·신체적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 사태가 대외에 폭동으로 알려진 점은 광주시민을 두고두고 괴롭혔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전두환정부는 광주에 북한 세력이 들어와 폭동을 일으켰고, 그것을 특수부대가 진압했다고 언론에 알렸다.

왜곡된 선전을 들은 대한민국 국민은 실제로 광주 사건이 폭동인 줄만 알았고, 수많은 죽음 또한 간첩과 북한으로부터 사주받은 불순분자들이 죽은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광주 사태로부터 약 8년이 지난 후에야 진실은 바로 세워지게 됐다. 

1988년 노태우정부 산하의 민주화합추진위원회는 광주 폭동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고, 이후 국회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돼 ‘5·18 민주화 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광주 폭동이 ‘공식적인’ 민주화운동이 되기까지 꼬박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제주 4·3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은 제주도의 사건 또한 광주민주화운동처럼 다시 ‘올바르게’ 세워지길 원한다. 처음부터 잘못 알려지게 된 제주 4·3사건을 사람들에게 다시 알려 피해자들의 억울함이 풀어지길 원하는 것이다. 제주 4·3사건의 진실이 덜 알려지게 된 데엔 제주도의 자주성과 섬의 지리적 특성이 한몫했다.

독재 속에 죽어간 억울한 피해자들
비교적 덜 알려진 사건…그 이유는?

제주도는 오랜 세월 육지로부터 천대받아오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때는 조정서 밉보인 정치인들이 유배 오는, 고립된 지역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제주도민들은 나름대로 철마다 각종 공물과 부역 등을 조정에 바쳤지만, 조정으로부터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보지 못했다.

이 같은 대우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까지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군부는 제주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해 군수물자와 전투기 등을 숨겨놓는 일종의 군사 거점으로 사용했다. 연합군은 그런 제주도를 일본의 군사시설로 인식했고, 주요 폭격지에 포함시켰다.

당시 벌어진 연합군의 수많은 포격과 일제의 약탈 흔적은 아직도 제주도 곳곳에 남아있다.

1945년 8월15일, 고통받던 제주도민들에게 드디어 해방의 날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거리로 뛰어나와 해방의 기쁨을 맛봤고, 곧 해방군이 내려와 일제를 몰아내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해방군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제주도가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바람에 미군이 한 달이나 늦게 군대를 보냈기 때문이다. 한 달간 제주도민들은 더욱 심해진 일제의 약탈을 견뎌야 했고, 부당한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야 했다. 이때 만들어진 게 ‘제주도 인민위원회’다. 

1945년 9월, 제주도에 도착한 미군은 다시 한번 제주도민들을 실망시켰다. 도민들에게 약탈을 서슴지 않았던 친일파들을 주요 요직에 다시 등용한 것이다. ‘사회주의 확장’을 막기에만 급급했던 미군은 친일 세력을 완전히 내치지 못했고, 이를 지켜본 도민들은 미군에게 큰 불만을 갖게 됐다.

그러던 중 ‘3·1 발포’ 사태가 터지게 됐다. 3·1절 기념행사를 갖기 위해 제주북초등학교 인근에는 3만명의 시민이 모였다. 좁은 골목에 수만명의 시민이 모이자 경찰은 긴장하게 됐고, 수백명의 경찰이 경비에 투입됐다.

그러나 현장은 매우 밀집됐고, 훈련되지 못한 경찰의 경비는 오히려 방해만 됐다. 복잡한 상황이 이어지던 중 결국 한 경찰의 기마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어린아이를 치고 간 경찰은 그대로 ‘뺑소니’를 친 채 행렬 속으로 도망갔고, 이를 지켜본 시민들은 그런 경찰에게 돌을 던지며 따라갔다.

비참한
현대사

당시 경찰에 대한 반감이 깊었던 도민들이 하나둘 돌팔매질에 합류하며 사태는 더욱 커지게 됐다. 경찰 지도부는 이를 진압하라며 시위대에 발포를 허가했고, 6명의 무고한 시민이 경찰의 총격에 목숨을 잃었다. 이때 사망한 사람 중에는 한살배기 젖먹이도 있었고, 아이를 지키려던 21세의 젊은 여성도 있었다.


6명의 시민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제주도민들은 경찰과 미군부에 대한 반감이 더욱 심해졌고,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들에 대한 저항운동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3·1 발포사건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제주도민은 ‘3·10 총파업’을 단행했다. 166개 단체와 자영업자, 경찰, 기자, 공무원 등 총 4만여명의 인원이 파업에 참여하며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3·10 파업’을 지켜본 미군과 경찰 간부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더욱 큰 공권력을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응원 경찰을 제주도에 더욱 부르게 된 것이다.

이때 들어온 무리 중엔 악명 높은 ‘서북청년회’도 있었다. 서북청년회는 말 그대로 한반도의 서북부서 살던 인물들로 사회주의 세력에게 재산을 모두 뺏겨 북한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던 집단이었다.

당시 미군부와 경찰 책임자들은 이들에게 ‘좌익 세력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들은 제주도에 도착해 무차별적인 검거와 고문을 이어나갔다. 

서북청년회의 폭거를 견디다 폭발한 제주도민들은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 아래 하나로 뭉치게 됐고 결국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와 ‘단독선거’ 등을 주장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이 제주 4·3 사건의 대략적인 전개 과정이다.


일반 시민들로 이뤄진 무장대는 결국 중앙정부서 파견한 토벌대로부터 피의 보복을 당하게 된다. 중앙정부와 미군정의 눈에는 모든 제주도민들이 사회주의 세력에 세뇌된 폭도 세력으로 보였고, 도민들은 제주지역 곳곳서 죽임을 당했다.

1954년에 가서야 멈춘 학살은 약 3만명의 사망자를 냈다. 당시 제주 인구가 30만여명이었으니, 약 7년간 제주도민의 약 10%가 제주 4·3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셈이다. 

지난 70년간 제주도에 있었던 이 비극은 대외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건 자체가 너무 오래된 탓이기도 하고, 당시 비극을 겪은 유가족이 수십년의 세월 동안 입 밖에 내놓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유가족은 ‘연좌제’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해당 사실을 대외에 알릴 수 없었다고 전한다.

강병삼 제주시장도 제주 4·3 사건의 유가족이다. 강 시장의 큰아버지는 당시 4·3 사건에 휘말려 감옥에 체포된 뒤, 서울로 이송돼 행방불명됐다.

반복되는
기대·실망

강 시장은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서 “아버지의 형님이 제주 사건이 벌어진 당시 토벌대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셨다”고 담담하게 운을 뗀 뒤 “아버지에게 전해 듣기로는 (토벌대가 큰아버지에게)어느 학교에 모이라고 했다더라. 그런데 당시 ‘모이면 죽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 큰아버지는 그대로 산으로 들어가셨다”고 말했다.

이어 “그랬는데 (토벌대 측에서)사면해준다고 산에서 내려오라고 거짓말했고, 큰아버지를 포함해 그때 내려간 사람들은 전무 죽임을 당하거나 그대로 형무소로 끌려갔다. 큰아버지는 마포 형무소에 도착했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그 이후 소식은 아직도 접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강 시장은 이 같은 큰아버지에 관한 사연도 본인이 20대 후반이 된 후에야 부친에게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는 군부 독재가 계속되는 상황서 4·3 사건 유가족이 쉽게 이 문제를 공론화시킬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마 그런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연좌제가 무서워서 가족관계를 다르게 신고하는 경우도 허다했다”며 “그런 세월이 매우 오래 지나게 됐으니 아직도 4·3 사건을 잘 모르는 이가 많은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제주4·3 평화재단’ 관계자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전했다.

재단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서 “광주민주화운동은 제주 사건보다 40년 뒤에 일어난 비교적 최근 사건이다. 그런 사건도 바로잡는 데 10년이 걸렸는데, 75년 전 사건을 바로잡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느냐”고 반문했다.

연좌제 공포로 지워진 진실
끊임없이 싸워가는 도민들

이어 “김대중 대통령이 발의한 ‘제주 4·3 사건 특별법’ 이후에야 본격적인 법제화 노력이 시작됐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강 시장과 재단 관계자는 제주 4·3 사건 전국화의 또 다른 장애물로 극우 단체의 과도한 폄훼 시위를 들었다. 강 시장은 “현재 여기 제주도 곳곳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4·3 사건을 폄훼하려는 시도들이 있는 것”이라며 “그 사람들이 이른바 빨갱이 폭동이며 4·3 사건의 전국화를 방해하고 있다. 특정 개인일 때도 있고 정당일 때도 있다”고 전했다.

재단 관계자도 “소위 극우 세력이라고 하는 곳에서 지속적으로 폄훼하고 있다. 올해는 특히 4·3 사건 학살의 한 축이었던 서북청년단이 4월3일 추념식 행사장 인근서 집회를 하겠다고 하는 등 역사왜곡 행위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또 사건 생존 당사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등지고 있는 점도 사건을 전국으로 알리는 데 큰 저해요소로 꼽힌다. 4·3 사건의 전국화, 법제화가 1년, 2년 지연될 때마다 법정에 나와 생생한 증언을 해줄 생존 피해자들이 계속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강 시장은 “4·3 사건의 생존 피해자분들의 연세가 많아서 자료를 더 확보하고 기록을 남겨놔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선 지속적인 교육도 필요하다. 지금 제주대학교 쪽과 제주도청이 협의해 청년 세대에 제주 4·3 사건을 교육하고 그런 사람들을 키우는 일을 진행하려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지속적인 교육과 홍보는 제주 4·3 평화재단서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 중 하나다.

재단 관계자는 “4·3 사건의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평화와 인권의 기억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또 이제는 4·3 당시 제주도민들이 가졌던 열망이 무엇인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며 “지금의 시각이 아닌 당대의 시각서 한반도의 분단을 반대했던 목소리를 잊어선 안 되며 이를 다음 세대의 기억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전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제주 4·3 사건 위령제에 참석해 대통령으로선 최초로 제주도민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자리서 “오랜 세월 말로 다 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뎌오신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몇몇 4·3 사건 피해자와 유가족은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고, 눈물을 훔치며 노 전 대통령에게 박수로 화답했다.

드러나는
진실들

2019년 1월17일에는 제주지방법원이 제주 4·3 사건 생존 군사재판 수형인 18명에게 공소 기각 판결을 내려 사실상 무죄를 선고했다. 제주 사건 관련한 최초의 무죄 판결이었다.

연좌제에 대한 두려움으로, 극우 세력의 지속적인 폄훼 공작으로 가려져 있었던 제주 4·3 사건의 진실이 이제 세상 밖에 나오려 한다. 오래된 세월 만큼 그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제주도민들은 지금도 광범위한 홍보 및 교육과 끈질긴 법정 싸움으로 이 싸움을 이겨내려 하고 있다.
 

<ingyu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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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2조 물먹은’ 한양 수상한 계열사와 의문의 돈거래

[단독] ‘2조 물먹은’ 한양 수상한 계열사와 의문의 돈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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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C 빛고을 설립 초기 한양이 30%로 최대주주, 우빈산업(25%), 케이앤지스틸(24%), 파크엠(21%) 등이 주주로 참여했다. 한양이 우빈산업과 케이앤지스틸의 SPC 빛고을 참여를 위한 초기자본 49억원을 댔다. 한양이 우빈산업에 49억원을 빌려주고 우빈산업이 다시 케이앤지스틸에 24억원을 대여해 지분을 분배했다. 이때 우빈산업은 케이앤지스틸에 24억원을 빌려주면서 ‘콜옵션’ 계약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콜옵션은 특정한 기초자산을 만기일이나 만기일 이전에 미리 정한 행사가격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다시 말해 우빈산업은 언제든지 원할 때 케이앤지스틸의 지분을 회수할 수 있는 조건을 걸어둔 것이다. ‘초대형’ 중앙공원 1지구 사업의 이면 한양-케이앤지스틸 모종의 관계 의혹 SPC 빛고을 주주구성에 변화가 생긴 시점은 컨소시엄 구성 당시 한양이 맡기로 한 시공권이 롯데건설로 넘어가면서부터다. 우빈산업은 케이앤지스틸의 지분 24%를 위임받아 주주권을 행사해 롯데건설과 중앙공원 1지구 아파트 신축 도급 약정을 체결했다. 이 과정서 30% 지분의 한양은 배제됐다. 롯데건설을 시공자로 선정할 당시 우빈산업에 지분을 위임했던 케이앤지스틸의 태도가 변한 시기는 2022년 5월경으로 추정된다. SPC 빛고을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케이앤지스틸은 우빈산업에 25억3000만원(대여금 24억원+이자)을 송금한 뒤 주주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SPC 빛고을 설립 과정서 빌린 돈을 갚았으니 24% 지분만큼 주주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우빈산업은 케이앤지스틸에 24억원을 빌려주면서 맺었던 콜옵션을 행사하고 49%의 지분을 확보해 SPC 빛고을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이후 우빈산업 내부 사정이 변하면서 한 차례 더 지분구조에 변화가 생겼다. 우빈산업은 대출금 100억원에 대해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고 부도 처리됐다. 지급보증을 섰던 롯데건설은 우빈산업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을 넘겨 받으면서 49%를 확보했다. 지분양도는 롯데건설이 근질권(담보물에 대한 권리)을 행사해 채무를 대신 갚아주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우빈산업이 빠진 자리에 롯데건설이 들어오면서 현재 기준 빛고을 SPC 지분구조는 한양 30%, 롯데건설 29.5%, ㈜파크엠 21%, 허브자산운용 19.5%로 재편된 상태다. 허브자산운용이 보유한 19.5%는 롯데건설로부터 양도받은 것이다. SPC 빛고을 내에서 롯데건설의 발언권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뉜 지분 콜옵션으로? 사업시행권과 시공권을 두고 롯데건설과 우빈산업, 한양과 케이앤지스틸이 궤를 같이 하면서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쟁점은 우빈산업과 케이앤지스틸이 가진 지분이 최종적으로 누구의 소유냐는 것이다. 두 회사의 지분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SPC 빛고을의 최대주주가 바뀔 수 있다. 케이앤지스틸은 우빈산업에 주금 대여금을 갚았으니 24%에 대한 주주권이 자사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양은 SPC 빛고을 설립 과정서 우빈산업에 49억원의 출자금을 대여하면서 맺은 특별약정을 내세웠다. 해당 약정에 한양이 중앙공원 1지구 사업의 비공원시설 시공권을 전부 갖는데 우빈산업이 의결권을 행사한다는 항목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우빈산업이 주도해 롯데건설로 시공사를 바꾼 것은 특별약정에 어긋난다는 설명이다. 광주지방법원은 케이앤지스틸과 한양이 각각 우빈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서 모두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케이앤지스틸 관계자는 “주주권 확인 소송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 우리가 SPC 주식을 실제로 소유한 주주라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한양 관계자도 “1심 법원은 우빈산업이 한양에게 49억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고 보유 주식 25% 전량을 양도하라는 판결을 내렸다”고 말했다. 반면 롯데건설은 소송 판결 한 달 전, 우빈산업의 지분을 인수했다고 설명했다. 우빈산업이 한양에 양도할 주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과정서 한양은 우빈산업의 ‘고의 부도’를 의심하고 있다. 한양은 1심 법원 판결을 근거로 자사가 지분 55%(한양 30%+우빈산업 25%)의 SPC 빛고을 최대주주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대법원서 한양에 ‘시공권이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놓으면서 시공자 지위는 잃게 됐다. 소송 이겨도 지위 잃었다 최근 SPC 빛고을 지분 갈등서 케이앤지스틸의 역할이 관심사로 떠올랐다. 케이앤지스틸은 상하수도 설비공사 업체로 2003년에 설립됐다. SPC 빛고을에 우빈산업과 함께 참여했다가 현재는 빠진 상태다. 케이앤지스틸 관계자는 “전 대표가 우빈산업과 친분이 있어서 (SPC 빛고을에)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현 사태서 롯데건설과 우빈산업은 이른바 ‘비한양파’로 묶여있다. 두 업체의 지분 이동도 비교적 명확히 드러나 있는 상황이다. 반면 케이앤지스틸과 한양은 두 업체 모두 우빈산업과 소송을 진행하면서도 서로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한양 관계자는 “적(우빈산업)이 같을 뿐 특별히 관계가 있는 업체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양의 모기업인 보성그룹 계열사에 속한 ‘앤유’라는 업체가 케이앤지스틸에 2022년 4월, 2억원을 빌려줬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앤유는 이기승 보성그룹 회장의 동생인 이점식씨가 지분 83.6%를 가지고 있는 친족회사다. 전기 조명장치 제조업체로 2007년에 설립됐다. 2022년 기준 매출은 28억2900만원, 영업이익은 3억300만원으로 확인된다. 한양과의 거래를 통해 27억79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앤유는 케이지앤지스틸에 2억원을 빌려주는 과정서 1주일짜리 주식근질권을 설정했다. 1주일 뒤 케이앤지스틸이 2억원을 갚지 못하면서 케이앤지스틸의 주식이 전부 앤유로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 1주일 뒤 케이앤지스틸의 대표이사를 비롯해 사내이사 3명 등 4명이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이 가운데 1명은 앤유 대표인 정모씨의 아내로 추정된다. 케이앤지스틸 수뇌부가 물갈이된 것이다. 당시 케이앤지스틸의 채무가 수십억원에 이를 정도로 적자가 누적된 상태였다고 해도 2억원을 갚지 못해 회사의 지배권을 넘겨준 것을 두고 석연찮은 의문이 일었다. 1주일이라는 짧은 주식 근질권 설정도 의문으로 떠올랐다. 보성그룹에 기생하는 ‘앤유’ 푼돈 주고 1주 만 회사 꿀꺽? 더 흥미로운 대목은 같은 해 5월 케이앤지스틸이 우빈산업에 주금 대여금 25억3000만원을 송금한 뒤 주주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의혹이 동시에 불거진 점이다. 다시 말해 2억원을 갚지 못해 회사의 지분 100%를 앤유에 넘겨주고 한 달 만에 20억원이 넘는 돈을 융통해 SPC 빛고을 지분을 확보하려 했다는 의혹이다. 여기에 우빈산업을 상대로 한 주주권 확인 소송 등에 김앤장을 변호인으로 선임하면서 수임료에 대한 의혹이 추가로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케이앤지스틸이 지분확보를 위해 사용한 자금 출처가 한양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한양 입장서 케이앤지스틸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확보하면 54%로 SPC 빛고을의 최대주주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대법원 판결로 시공자 지위는 상실했지만 롯데건설에 넘어가 있는 시공권을 흔들 수 있는 상황이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분 갈등 구조가 롯데건설과 우빈산업, 한양과 케이앤지스틸로 정리되는 셈이다. 하지만 한양과 케이앤지스틸 모두 두 업체 간 모종의 관계 의혹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한양 관계자는 “앤유라는 계열사가 있는지도 잘 몰랐다. 앤유서 케이앤지스틸에 2억원을 빌려줬다거나 주금 대여금을 대줬다는 의혹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우빈산업서 (1심)소송에 져서 계속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대응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보다 광주시가 우빈산업과 결탁해 여러 가지로 유리하게 상황을 봐주고 있다고 판단해 광주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광주시는 사업시행자이자 감독관청으로서 해야 할 일이 참 많은데 그런 일을 하지 않아 공모 제도가 다 무너졌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광주시의 행정행위에 대해 소송을 제기해 재판이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석연찮은 자금 출처 케이앤지스틸 관계자는 한양이 주금 대여금을 대줬다는 의혹에 대해 “우빈산업서 하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주주가 들어와 투자가 이뤄지면서 주금 대여금을 갚은 것이다. 우빈산업에서는 (우리가)한양의 위장계열사 아니냐, 대표이사 선임 과정이 의심스럽다, 자금 출처가 어디냐 같은 의혹을 제기하는데 그건 주주권 확인 소송서 져서 그러는 것이다. 한양이랑 우리랑은 큰 관계가 없는데 자꾸 엮어서 흠집을 내려 한다”고 주장했다. 2022년 4월 회사가 어려운 시기에 케이앤지스틸 대표로 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이 사업이 잘 마무리되면 우리 회사에 300억원 정도의 수익이 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시행이익을 1100억원으로 계산했을 때 우리 회사 지분이 24% 정도니까 그렇게 계산한 것이다. 수익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회사를 맡게 됐고, 새로운 주주들도 그 사업성을 보고 투자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