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사건 75주년 특집> 광주가 부러운 제주의 한탄

“여기는 딴 나라입니까?”

[일요시사 정치팀] 정인균 기자 = “동굴에 숨어있던 3살배기 어린아이는 한 토벌대 대원에게 양다리를 잡혀 그대로 바위에 내쳐졌다. 바위에 머리를 부딪힌 아기는 그 자리서 두개골이 박살 나 즉사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 4·3 사건 당시 일어난 ‘빌레못 동굴 학살 사건’ 중 일부 내용이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갓난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게 다리를 붙잡혔고, 본인의 몸보다 한참 큰 바위에 내쳐져 죽임을 당했다.

불과 74년 전, 제주도에선 이 같은 잔혹한 살인이 섬 곳곳서 일어났다. 4·3사건 기간 동안, 3만여명의 양민들이 소리 없이 죽어갔고, 유족들은 오랜 세월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알릴 수도, 추모할 수도 없었다.

자주독립을 실현하지 못한 대한제국 현대사는 실로 비참했다. ‘남의 손’에 맡겨진 한반도는 곧장 절반으로 갈라졌고, 얼마 후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전쟁이 끝나도 비극은 이어졌다. 남한은 미국에 기대어, 북한은 소련에 기대어 저마다의 독재 역사를 써내려갔다.

75년의 
세월이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표방한 대한민국은 대통령선거를 통해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 전 대통령은 민주적으로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임기 8년을 채운 시점부터 독재자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본인의 임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법 선거 등을 동원해 임기를 계속 늘리려 했다. 독재정치에 지친 국민들은 결국 들고 일어났고, 4·19 혁명을 통해 이 전 대통령을 하야시켰다. 


이후 박정희·전두환정권의 군부 쿠데타와 독재가 이어지며 대한민국의 완전한 민주화는 계속 지연됐다. 수많은 지식인과 시민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이 과정서 많은 시민들이 고문을 받아 죽임을 당하거나 간첩으로 몰려 사형에 처해졌다.

온당하지 못한 정권하에서 벌어진 부당한 죽음은 아직도 그 억울함이 풀어지지 않고 있다. 사건 발생 당시 압도적으로 강했던 국가권력이 진실을 은폐하고, 관련자들을 색출해 입을 막아버린 탓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또한 1980년대엔 ‘광주 폭동’으로 불리며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세월이 있었다. 1980년 5월18일 벌어진 광주 사태는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과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국가 단위의 사건이었다.

당시 집계에 따르면 10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사망자는 166명, 행방불명자는 54명, 후유증 사망자는 376명이 나왔다. 부상자는 수천명으로 알려졌고, 그 외의 재산피해 등은 정확히 집계된 것이 없다. 사건을 두 눈으로 목격한 광주 사건의 생존자들은 아직도 정신적·신체적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 사태가 대외에 폭동으로 알려진 점은 광주시민을 두고두고 괴롭혔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전두환정부는 광주에 북한 세력이 들어와 폭동을 일으켰고, 그것을 특수부대가 진압했다고 언론에 알렸다.

왜곡된 선전을 들은 대한민국 국민은 실제로 광주 사건이 폭동인 줄만 알았고, 수많은 죽음 또한 간첩과 북한으로부터 사주받은 불순분자들이 죽은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광주 사태로부터 약 8년이 지난 후에야 진실은 바로 세워지게 됐다. 

1988년 노태우정부 산하의 민주화합추진위원회는 광주 폭동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고, 이후 국회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돼 ‘5·18 민주화 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광주 폭동이 ‘공식적인’ 민주화운동이 되기까지 꼬박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제주 4·3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은 제주도의 사건 또한 광주민주화운동처럼 다시 ‘올바르게’ 세워지길 원한다. 처음부터 잘못 알려지게 된 제주 4·3사건을 사람들에게 다시 알려 피해자들의 억울함이 풀어지길 원하는 것이다. 제주 4·3사건의 진실이 덜 알려지게 된 데엔 제주도의 자주성과 섬의 지리적 특성이 한몫했다.

독재 속에 죽어간 억울한 피해자들
비교적 덜 알려진 사건…그 이유는?

제주도는 오랜 세월 육지로부터 천대받아오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때는 조정서 밉보인 정치인들이 유배 오는, 고립된 지역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제주도민들은 나름대로 철마다 각종 공물과 부역 등을 조정에 바쳤지만, 조정으로부터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보지 못했다.

이 같은 대우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까지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군부는 제주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해 군수물자와 전투기 등을 숨겨놓는 일종의 군사 거점으로 사용했다. 연합군은 그런 제주도를 일본의 군사시설로 인식했고, 주요 폭격지에 포함시켰다.

당시 벌어진 연합군의 수많은 포격과 일제의 약탈 흔적은 아직도 제주도 곳곳에 남아있다.

1945년 8월15일, 고통받던 제주도민들에게 드디어 해방의 날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거리로 뛰어나와 해방의 기쁨을 맛봤고, 곧 해방군이 내려와 일제를 몰아내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해방군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제주도가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바람에 미군이 한 달이나 늦게 군대를 보냈기 때문이다. 한 달간 제주도민들은 더욱 심해진 일제의 약탈을 견뎌야 했고, 부당한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야 했다. 이때 만들어진 게 ‘제주도 인민위원회’다. 

1945년 9월, 제주도에 도착한 미군은 다시 한번 제주도민들을 실망시켰다. 도민들에게 약탈을 서슴지 않았던 친일파들을 주요 요직에 다시 등용한 것이다. ‘사회주의 확장’을 막기에만 급급했던 미군은 친일 세력을 완전히 내치지 못했고, 이를 지켜본 도민들은 미군에게 큰 불만을 갖게 됐다.

그러던 중 ‘3·1 발포’ 사태가 터지게 됐다. 3·1절 기념행사를 갖기 위해 제주북초등학교 인근에는 3만명의 시민이 모였다. 좁은 골목에 수만명의 시민이 모이자 경찰은 긴장하게 됐고, 수백명의 경찰이 경비에 투입됐다.

그러나 현장은 매우 밀집됐고, 훈련되지 못한 경찰의 경비는 오히려 방해만 됐다. 복잡한 상황이 이어지던 중 결국 한 경찰의 기마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어린아이를 치고 간 경찰은 그대로 ‘뺑소니’를 친 채 행렬 속으로 도망갔고, 이를 지켜본 시민들은 그런 경찰에게 돌을 던지며 따라갔다.

비참한
현대사

당시 경찰에 대한 반감이 깊었던 도민들이 하나둘 돌팔매질에 합류하며 사태는 더욱 커지게 됐다. 경찰 지도부는 이를 진압하라며 시위대에 발포를 허가했고, 6명의 무고한 시민이 경찰의 총격에 목숨을 잃었다. 이때 사망한 사람 중에는 한살배기 젖먹이도 있었고, 아이를 지키려던 21세의 젊은 여성도 있었다.


6명의 시민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제주도민들은 경찰과 미군부에 대한 반감이 더욱 심해졌고,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들에 대한 저항운동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3·1 발포사건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제주도민은 ‘3·10 총파업’을 단행했다. 166개 단체와 자영업자, 경찰, 기자, 공무원 등 총 4만여명의 인원이 파업에 참여하며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3·10 파업’을 지켜본 미군과 경찰 간부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더욱 큰 공권력을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응원 경찰을 제주도에 더욱 부르게 된 것이다.

이때 들어온 무리 중엔 악명 높은 ‘서북청년회’도 있었다. 서북청년회는 말 그대로 한반도의 서북부서 살던 인물들로 사회주의 세력에게 재산을 모두 뺏겨 북한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던 집단이었다.

당시 미군부와 경찰 책임자들은 이들에게 ‘좌익 세력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들은 제주도에 도착해 무차별적인 검거와 고문을 이어나갔다. 

서북청년회의 폭거를 견디다 폭발한 제주도민들은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 아래 하나로 뭉치게 됐고 결국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와 ‘단독선거’ 등을 주장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이 제주 4·3 사건의 대략적인 전개 과정이다.


일반 시민들로 이뤄진 무장대는 결국 중앙정부서 파견한 토벌대로부터 피의 보복을 당하게 된다. 중앙정부와 미군정의 눈에는 모든 제주도민들이 사회주의 세력에 세뇌된 폭도 세력으로 보였고, 도민들은 제주지역 곳곳서 죽임을 당했다.

1954년에 가서야 멈춘 학살은 약 3만명의 사망자를 냈다. 당시 제주 인구가 30만여명이었으니, 약 7년간 제주도민의 약 10%가 제주 4·3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셈이다. 

지난 70년간 제주도에 있었던 이 비극은 대외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건 자체가 너무 오래된 탓이기도 하고, 당시 비극을 겪은 유가족이 수십년의 세월 동안 입 밖에 내놓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유가족은 ‘연좌제’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해당 사실을 대외에 알릴 수 없었다고 전한다.

강병삼 제주시장도 제주 4·3 사건의 유가족이다. 강 시장의 큰아버지는 당시 4·3 사건에 휘말려 감옥에 체포된 뒤, 서울로 이송돼 행방불명됐다.

반복되는
기대·실망

강 시장은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서 “아버지의 형님이 제주 사건이 벌어진 당시 토벌대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셨다”고 담담하게 운을 뗀 뒤 “아버지에게 전해 듣기로는 (토벌대가 큰아버지에게)어느 학교에 모이라고 했다더라. 그런데 당시 ‘모이면 죽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 큰아버지는 그대로 산으로 들어가셨다”고 말했다.

이어 “그랬는데 (토벌대 측에서)사면해준다고 산에서 내려오라고 거짓말했고, 큰아버지를 포함해 그때 내려간 사람들은 전무 죽임을 당하거나 그대로 형무소로 끌려갔다. 큰아버지는 마포 형무소에 도착했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그 이후 소식은 아직도 접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강 시장은 이 같은 큰아버지에 관한 사연도 본인이 20대 후반이 된 후에야 부친에게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는 군부 독재가 계속되는 상황서 4·3 사건 유가족이 쉽게 이 문제를 공론화시킬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마 그런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연좌제가 무서워서 가족관계를 다르게 신고하는 경우도 허다했다”며 “그런 세월이 매우 오래 지나게 됐으니 아직도 4·3 사건을 잘 모르는 이가 많은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제주4·3 평화재단’ 관계자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전했다.

재단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서 “광주민주화운동은 제주 사건보다 40년 뒤에 일어난 비교적 최근 사건이다. 그런 사건도 바로잡는 데 10년이 걸렸는데, 75년 전 사건을 바로잡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느냐”고 반문했다.

연좌제 공포로 지워진 진실
끊임없이 싸워가는 도민들

이어 “김대중 대통령이 발의한 ‘제주 4·3 사건 특별법’ 이후에야 본격적인 법제화 노력이 시작됐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강 시장과 재단 관계자는 제주 4·3 사건 전국화의 또 다른 장애물로 극우 단체의 과도한 폄훼 시위를 들었다. 강 시장은 “현재 여기 제주도 곳곳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4·3 사건을 폄훼하려는 시도들이 있는 것”이라며 “그 사람들이 이른바 빨갱이 폭동이며 4·3 사건의 전국화를 방해하고 있다. 특정 개인일 때도 있고 정당일 때도 있다”고 전했다.

재단 관계자도 “소위 극우 세력이라고 하는 곳에서 지속적으로 폄훼하고 있다. 올해는 특히 4·3 사건 학살의 한 축이었던 서북청년단이 4월3일 추념식 행사장 인근서 집회를 하겠다고 하는 등 역사왜곡 행위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또 사건 생존 당사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등지고 있는 점도 사건을 전국으로 알리는 데 큰 저해요소로 꼽힌다. 4·3 사건의 전국화, 법제화가 1년, 2년 지연될 때마다 법정에 나와 생생한 증언을 해줄 생존 피해자들이 계속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강 시장은 “4·3 사건의 생존 피해자분들의 연세가 많아서 자료를 더 확보하고 기록을 남겨놔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선 지속적인 교육도 필요하다. 지금 제주대학교 쪽과 제주도청이 협의해 청년 세대에 제주 4·3 사건을 교육하고 그런 사람들을 키우는 일을 진행하려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지속적인 교육과 홍보는 제주 4·3 평화재단서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 중 하나다.

재단 관계자는 “4·3 사건의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평화와 인권의 기억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또 이제는 4·3 당시 제주도민들이 가졌던 열망이 무엇인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며 “지금의 시각이 아닌 당대의 시각서 한반도의 분단을 반대했던 목소리를 잊어선 안 되며 이를 다음 세대의 기억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전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제주 4·3 사건 위령제에 참석해 대통령으로선 최초로 제주도민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자리서 “오랜 세월 말로 다 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뎌오신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몇몇 4·3 사건 피해자와 유가족은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고, 눈물을 훔치며 노 전 대통령에게 박수로 화답했다.

드러나는
진실들

2019년 1월17일에는 제주지방법원이 제주 4·3 사건 생존 군사재판 수형인 18명에게 공소 기각 판결을 내려 사실상 무죄를 선고했다. 제주 사건 관련한 최초의 무죄 판결이었다.

연좌제에 대한 두려움으로, 극우 세력의 지속적인 폄훼 공작으로 가려져 있었던 제주 4·3 사건의 진실이 이제 세상 밖에 나오려 한다. 오래된 세월 만큼 그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제주도민들은 지금도 광범위한 홍보 및 교육과 끈질긴 법정 싸움으로 이 싸움을 이겨내려 하고 있다.
 

<ingyun@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이재명발’ 검찰·법원 피바람 플랜

‘이재명발’ 검찰·법원 피바람 플랜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윤석열정부 당시 ‘정적 죽이기’로 가장 많은 피해를 봤던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3일 당선됐다. 이 대통령은 대선 기간 내내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을 공약으로 내놨다. 이 대통령이 당선되자 검찰 내부는 ‘어쩔 수 없다’는 분위기가 나오고 있다. 다만 법조계와 학계에서는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을 신중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된다. 이재명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하면서 검찰 내에는 긴장감이 돌고 있다. 이 대통령이 후보 시절까지 포함해 취임 전 법원·검찰과 여러 차례 대립각을 세웠고 선거 과정서 사법개혁과 검찰개혁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만큼 빠른 시일 내에 개혁에 착수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수차례 대립각 이재명정부서 문재인정부 시절 ‘미완’으로 끝난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이 완성될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이 대통령은 선거 기간부터 “검찰개혁을 완성하겠다”며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고 수사기관의 전문성을 확보하겠다”고 공약했다. 이는 문정부 때부터 줄곧 추진해 온 검찰개혁 방안과 유사하다. 문정부 당시 부패·경제 범죄 등에 대한 수사권만을 검찰에 남겨두고 다른 범죄에 대한 수사권은 경찰로 옮겼다. 하지만 윤정부 들어 이른바 ‘검수원복(검찰 수사권 원상복구)’ 시행령과 수사준칙 개정 등으로 여타 범죄에 대한 수사권도 일부 복구됐다. 이 대통령의 수사와 기소 분리는 문정부와는 궤를 달리할 것으로 예상된다. 검찰청을 기소와 공소 유지를 담당하는 ‘기소청’으로 전환하고 중대범죄수사청과 같은 새로운 수사기관을 신설한다는 것이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구상이다. 이를 통해 검찰의 기소권 남용에 대한 사법 통제가 강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검사를 일반 공무원처럼 자체 징계만으로도 파면할 수 있도록 하는 ‘검사 징계 제도’까지 도입한다는 구상이다. 또 ▲압수·수색영장 사전심문제 도입 ▲대통령령인 수사 준칙 상향 입법화 ▲피의사실공표죄 강화 ▲수사기관의 증거 조작 등에 대한 처벌 강화 및 공소시효 특례 규정 내용이 담긴 수사 절차법도 제정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이 대통령은 개헌을 통해 검찰총장 임명 시 국회 동의가 필요하도록 하고, 검사의 영장 청구권 독점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사실상 무소불위였던 검찰 권력을 수술대에 올리겠다는 취지다. 이에 대해 한 법조인은 “이 대통령이 현재 12개 혐의로 5건의 재판을 받고 있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는 지난 정부서 검찰이 수사·기소한 것”이라며 “이 대통령으로서는 검찰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사 출신인 다른 법조인은 “앞서 민주당의 검사 탄핵이 모두 헌법재판소서 기각 결정을 받았는데, 이 대통령 공약대로 기소권 남용 통제, 검사 징계 파면 등이 도입된다면 검찰에 대한 견제가 매우 강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 다른 법조인은 “이 대통령이 공수처와 국가수사본부에 힘을 실어준 뒤 두 기관을 적극 활용해 이른바 ‘적폐 청산’을 하려는 것 아니냐”고 전망했다. 수사청과 기소·공소청 분리 원칙 줄사표 신호탄…내부는 ‘초긴장’ 검찰 내부에서는 착잡한 기류가 팽배하다. 앞서 민주당이 추진했던 검사 탄핵이나 특활비 전액 삭감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도 높은 개혁이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대검찰청 한 관계자는 “검찰의 운명은 민주당에 달려있는 것 아니겠느냐”며 “이재명정부와 여당이 된 민주당이 몰아칠 텐데 검찰의 협상력은 사실상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재경지검의 한 부장검사도 “개혁을 하든, 무엇을 하든 담담하게 운명을 받아들여야지 별 수 있냐”며 “다들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대개 검찰을 지원하는 이유가 국가에 대한 사명감 때문인데, 검찰개혁에 포함된 검사징계법에 파면을 명문화하게 되면 리스크를 감수하고 공익을 위해 일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며 “4~5명의 평검사가 각 부서에 있어야 수사가 원활하게 진행되는데 지금도 2~3명의 평검사만으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검찰개혁 이후에는 부장 검사 밑에 직접 수사를 할 평검사가 전혀 없을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고 토로했다. 특수부 검사들 사이에서는 인사보복에 대한 우려가 강하게 나오고 있다. 특히 이 대통령을 수사했던 특수부 검사들은 ‘검찰개혁 이전에 인사보복을 당할 것’이라고 사석에 이야기하고 다닌다고 한다. 반면, 일선 형사 사건을 수사했던 검사들은 “우리에겐 직접적인 피해는 없을 것”이라며 선을 긋는 분위기다. 다만, 형사부·특수부 검사들이 공감대를 이루며 우려하는 부분도 있다. 과거 문정부 시절 검경수사권 조정으로 경찰의 권한이 비대해진 바 있는데, 이번 검찰개혁으로 경찰이 영장 청구권을 확보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검찰 단계서 경찰의 영장청구를 판단하지 않아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분석이다. 검찰 내부서 특수부와 형사부가 갈리는 상황에 이들을 모을 구심점도 없다. 과거 문정서 검찰개혁이 추진될 때 검사들이 단일대오로 뭉쳐 저항했던 것처럼 먼저 움직일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결국 수사로 검찰의 존재 의의를 보여야 하지만 ▲12·3 비상계엄 사태 ▲도이치 주가조작 의혹 ▲명태균·건진법사 선거개입 의혹 등 굵직한 주요 사건 관련 특검법이 국회 본회의에 부의돼있다. 특검이 시작되면 검찰의 역할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새 정부의 법무부 장관 인선 직후 대규모 인사도 예상된다. 당장 고검장·지검장 물갈이에 이 대통령 관련 사건을 맡았던 검사들의 줄퇴사도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 지난달 20일 사의를 표했던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의 사직서는 지난 3일 수리됐다. 검 운명은 민주당에 이 지검장은 수원지검 성남지청장 재직 당시엔 성남FC 및 선거법 위반 등으로 이 대통령을 기소했다. 이미 2022년부터 업무 과부하 등을 이유로 매년 100명 이상의 검사들이 퇴직했는데 이번엔 이보다 더 큰 규모로 검찰 대탈출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실제 윤정부가 들어섰던 해인 2022년엔 직전 해(79명)보다 2배쯤 많은 검사 142명이 퇴직한 바 있다. 다만 퇴사를 희망하는 검사가 많더라도 대형 로펌에 이들을 다 수용할 수 있는 자리가 없어 실제 퇴사 규모는 예상보다 적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검찰개혁 신중론도 나오고 있다. 검찰 내부에선 피할 수 없는 문제지만 속도전이 아닌 과거 수사권 조정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반추와 함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의 정책 설계가 우선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문정부 시절 검찰개혁으로 인한 수사권 조정 등으로 인한 영향을 복기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 검사장급 간부는 “다 예상했던 것들로 놀랍진 않지만 수사가 효율적으로 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했으면 좋겠다”며 “과거 수사권 조정으로 대표되는 검찰개혁이 왜 실패했다고 평가를 받겠나? 수사권 조정 등 앞선 검찰개혁에 대해 복기한 다음 추진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 차장검사는 “수사기관 간 견제는 경쟁으로 이어진다”며 “수사는 합리적이고 치밀하게 해야 하는데 다른 기관을 의식해 무리하게 하다 보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고 우려했다. 한 부장검사는 “구조적인 문제가 없도록 꼼꼼히 설계해야 한다”며 “수사권, 수사력의 문제도 있지만 법 자체가 구조적으로 난점이 있다는 것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형사소송법 등 근간이 되는 법에 속도전으로 나선다면 이번 비상계엄 사태 수사 때처럼 향후 여러 문제가 드러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부장검사도 “수사기관끼리 경쟁하게 되면 결국 윤 전 대통령 내란 수사처처럼 어느 사건이든 번번이 망가질 것”이라며 “검찰 등 수사기관, 학계, 정계 등이 참여하는 공론의 장에서 시간을 갖고 충분히 논의해야 할 문제”라고 했다. 이재명정부는 검찰개혁과 더불어 수사기관 개혁과 사법개혁도 같이 추진하려고 준비 중이다. 이 대통령은 검찰의 권한은 축소하면서 경찰과 공수처의 권한은 더욱 강화하겠다는 공약을 펼쳤다. 민주당은 공수처 검사 정원을 현행 25명에서 최대 300명까지 확대하고, 고위 공직자의 모든 범죄에 대해 영장 청구 및 기소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꼼꼼히 설계해야 법조계 안팎에서는 성급한 수사기관 확대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공수처가 2021년 출범 이후 뚜렷한 수사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12·3 비상계엄 사건서도 윤석열 전 대통령 대면조사에 실패하는 등 수사력 한계를 노출했다. 게다가 윤 전 대통령의 내란 우두머리 혐의 수사에서 검찰과 경찰, 공수처가 각자 수사권을 주장하며 혼선을 빚기도 했다. 이창현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검경 수사권이 조정된 지 5년이 지난 시점서 경찰 국가수사본부, 공수처, 검찰의 수사 성과를 냉정히 평가한 뒤 수사권 분리를 논의해도 늦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 대통령이 가장 먼저 개혁할 것으로 보이는 것은 사법개혁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달 1일, 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에 대한 파기환송을 결정하고, 다음날에 파기환송심 첫 공판기일을 그달 15일로 지정했다. 그러나 공판기일을 지정한 지 5일 만에 다시 공판기일을 대선 이후인 오는 18일로 변경했다. 연기 사유는 “대통령 후보인 피고인에게 균등한 선거운동의 기회를 보장하고, 재판의 공정성 논란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일련의 과정 이후 민주당 내에서는 ‘대법관 증원’을 비롯한 사법부 개혁이 대선 국면의 핵심 의제 중 하나로 떠올랐다. 민주당 의원들은 대법관 증원 법안을 연달아 발의했고, 박범계 의원이 법조인이 아닌 사람도 대법관으로 임명할 수 있도록 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가 논란 끝에 철회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대선 기간 발표한 공약집서 ‘내란 극복과 민주주의 회복’의 하위 범주로 “사법개혁을 완수하겠다”며 대법관 증원을 비롯한 여러 정책을 공약했다. 대법원 등 사법기관도 엎는다 “신중하게 진행해야” 의견도 공약집에는 실제 증원 규모가 명시되지 않았으나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개정안은 대법관 수를 30명으로 늘리는 방안을 담고 있다. 대법관 수를 100명으로 늘리는 법안도 발의됐으나 논란이 일자 민주당은 지난달 26일 철회했다. 대법관이 증원되면 현재 1인당 연평균 약 4000건을 처리해야 하는 대법관들의 업무 부담이 줄면서 ‘재판 지연’의 주된 원인으로 꼽히는 상고심 적체 현상은 상당수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법관 전원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를 통해 법적 안정성을 확보하고 사회적 갈등에 해답을 제시하는 최고 법원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30명이 모두 모여 깊이 있는 합의에 도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대법관 증원에 따라 이 대통령 임기 중 총원의 절반이 넘는 대법관이 대통령 임명을 받아 합류하면 사법부 구성이 편향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원의 재판에 관한 헌법소원 심판을 허용하는 ‘재판 소원’이 도입될지도 관심사다. 민주당 의원들이 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을 발의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재판소원이 허용되면 법원이 법률을 헌법에 어긋나게 해석·적용하거나, 재판의 절차적 측면서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됐다고 판단된 경우 헌재가 결정으로 위헌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헌재가 법원의 재판에 관여하는 것은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고 정한 헌법 101조에 반하고 불필요한 법적 분쟁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법안에 반대해 왔다. 법조계의 의견은 엇갈린다. 재판소원 추진 논의가 이 대통령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급물살을 탔다는 점에서 대법원을 견제하려는 시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 사실상의 ‘4심제’가 돼 최고법원으로서 대법원의 기능이 약화하고 법적 안정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반면 헌법기관 간 상호 견제를 강화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할 안전망을 두텁게 만든다는 점에서 도입을 긍정하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법조계에서는 오랜 기간 재판소원 도입의 필요성에 관한 논의가 이어져 왔다. 헌재 역시 최근 국회에 “국민의 충실한 기본권 보호를 위해 개정안의 취지에 공감한다”는 찬성 의견을 냈다. 이밖에 판결문 공개 범위 확대, 공개변론 중계 의무화 추진, 법관평가위원회 설치 등 국민의 사법 접근성을 제고하는 정책 등도 이 대통령 임기 중 추진될 전망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는 “사법개혁 문제는 최우선 문제에 속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당시 “제도 개혁이나 특히 사법·경찰·검찰개혁은 중요하다. 수사권 조정이든 다 중요하다”면서도 “여기에 주력해서 힘을 뺄 상황은 아닌 것 같다”고 덧붙였다. 민생이 우선 일단 후순위 이후 지난 6월4일 취임사에선 “먼저 민생 회복과 경제 살리기부터 시작하겠다. 불황과 일전을 치르는 각오로 비상경제대응TF를 바로 가동하겠다”며 “국가 재정을 마중물로 삼아 경제의 선순환을 되살리겠다”고 강조했다. 검찰 및 사법개혁이 중요하지만 민생 회복이 중요하다고 재차 강조한 셈이다. 이로 인해 검찰·사법개혁은 후순위로 미뤄질 것으로 보인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