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인’ 검찰 공화국 대해부

낄 데 안 낄 데 다 낀다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윤석열정부의 요직 인선이 검찰 출신 인사들에 편중돼있다는 비판이 나온 건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동안 정부는 ‘능력과 전문성’이라는 명분 아래 이를 정당화해왔다. 하지만 정부 요직에 검찰 출신이 더욱 많아진 지금, 이들을 겨눈 자격·자질 논란이 모두 매섭다. 정치권에선 정부가 무리한 인선으로 비판을 자초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5일, 논평을 통해 윤석열정부 취임 이후 핵심 지위에 임명된 검찰 출신 인사가 총 29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박성준 민주당 대변인은 이날 국회 소통관에서 브리핑을 열고 “만사검통, 검찰 카르텔이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검찰 공화국으로 만들 생각이냐”며 윤정부를 직격했다.

윤 사단
대거 등판

박 대변인은 논평에서 “윤석열정부에서 임명된 검찰 출신을 대략 헤아려봤다”며 29명의 명단을 일일이 거명했다. 해당 명단에는 권영세 통일부 장관·한동훈 법무부 장관·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등 장차관급 인사를 필두로 석동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사무총장·박경오 서울대병원 감사 등이 포함됐다.

박 대변인은 “이들 대부분이 서울중앙지검·특수부 등 윤 대통령과 개인적 인연이 있는 검찰 출신 인사들”라며 “국가수사본부장에서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도 검찰 출신, 심지어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상근전문위원을 검찰 출신 한석훈 변호사로 임명했다고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에 인재가 많은데 전문가를 쓰지 않고 죄다 검찰 출신만 임명하고 있다. 검찰 공화국을 완성 시키는 게 정권의 제1 목표인지 대한민국의 미래가 참으로 걱정된다”고 꼬집었다.


윤정부가 검찰 출신 인사를 대거 전방 배치한 배경에는 ‘분배’보다는 ‘실익과 효율’에 주안점을 둔 윤 대통령의 의중이 작용했다는 게 정치권의 해석이다.

지난해 6월 윤 대통령은 도어스테핑에서 상황에 따라 정부 주요 조직에 검찰 출신을 추가로 배치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전했다. 신임 금융감독원장에 이복현 전 서울북부지검 부장검사를 임명한 직후였다. 검찰 편중 인사에 대한 비판이 최고점에 달한 시기였다.

하지만 야권의 의견은 달랐다. 이들은 정부 인선이 실익과 효율 면에서도 실패했다고 비판해왔다. 특히 국가보훈처, 민주평통, 교육부 등 명시적으로 검사 업무과 큰 연관성을 보이지 않는 부처에도 검사 출신 인사가 배치된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례로 윤정부는 국가보훈처장 자리에 박민식 전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의원을 앉혔다. 박 전 의원은 검사 시절 윤 대통령과 같은, 이른바 ‘특수통’이었다. 부산지검 특수부 주임검사와 서울중앙지검 특수 1부 수석검사를 지냈다.

정부 요직 곳곳에 검 출신 인사들 포진
민주 공개한 명단 보니 “지금까지 29명”

하지만 박 처장 이력에서 국가보훈처 업무와 관련된 내용은 찾기 어렵다. 박 처장은 18~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법제사법위원회·지식경제위원회 등에서 활동했을 뿐, 국가보훈처 업무와 가장 밀접한 국방위원회 활동 이력이 없다.

박 처장의 아버지가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것이 사실상 유일한 연결고리다.


인선 과정에서 뚜렷한 대안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당초 국가보훈처장 하마평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던 이는 국민의힘 윤주경 의원이었다. 윤 의원은 윤봉길 의사의 손녀로, 의정활동 이전에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이사·독립기념관장 등을 역임했다.

이외에도 각종 독립운동 기념사업과 독립운동인명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아울러 윤 의원이 제20대 대선 당시에도 윤대통령 캠프의 국가정체성회복특별위원장 직을 수행한 점 역시 결정적인 근거로 꼽혔다.

하지만 결국 정부의 선택은 윤 의원이 아닌 박 처장이었다. 윤 의원이 보훈처장 자리에 대해 거부 의사를 표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박 처장이 분당 국회의원 재보선 출마를 추진하다 내정 나흘 전 돌연 자진 사퇴한 배경에도 이목이 쏠렸다.

일각에서는 박 처장의 직무 부적합성을 뒷받침할만한 과거 행적을 들고 나왔다. 박 처장은 2021년 10월 자신의 SNS에 “5·18 왜곡 처벌법은 위헌”이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그는 게시글에서 “5·18 왜곡 처벌법은 보편성의 원칙, 비례의 원칙 등 법률 제정의 기본원칙에 저촉될 뿐 아니라,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우리 헌법상 가장 핵심적인 기본권을 침해한다”면서 “일부 편향적 시각을 빌미로 위헌적 법률을 제정한다면, 5·18 민주화운동의 의미는 되레 퇴색될 것이며 통합을 가로막는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쏠리는 인선 
대안이 없다?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유공자 지원 및 5·18 행사 기념’은 보훈처의 주요 업무 중 하나다. 얼마 전 관련법에 반대 의사를 표한 이가 보훈처장을 맡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석 사무처장 역시 임명 직후부터 적절성 시비에 시달렸다. 민주평통은 헌법 제92조에 근거해 창설된 대통령 자문기관이다. 해당 조항은 ‘평화통일정책의 수립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해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를 둘 수 있다’고 명시돼있다. 

이 조직에서 사무처장의 서열은 의장인 대통령과 수석부의장 다음 가는 수준으로,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 사무처장은 내부 사무와 공무원 지휘·감독 업무를 총괄하는 권한을 가진다.

문제는 석 처장 이력에서 엿볼 수 있는 민주평통 인선 근거가 논쟁의 불씨를 지폈다는 점이다. 석 처장은 서울대 법대 79학번으로 윤 대통령의 대학 동기이자 ‘40년지기’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검사로 임용된 점도 공통점이다. 석 처장은 사법연수원 15기로 임관해 2012년 서울동부지검장을 끝으로 검복을 벗었다.

정부는 석 처장이 검찰 시절 법무부 법무과장·출입국본부장으로 재직하면서 ▲통일법령 정비 ▲재외동포지원 ▲북한이탈주민 국내 정착 업무 등을 담당한 점을 유관 경력으로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석 처장은 변호사 개업 이후 약 10년간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 공동대표로 활동한 바 있다. 

하지만 야권은 석 처장의 관련 이력보다도 윤 대통령과의 친분에 더 주목했다.  


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는 지난해 8월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서 “윤석열정부의 초법적 임명직 내쫓기의 끝이, 결국 ‘측근과 지인 자리 챙기기’가 아닌지 하는 우려 또한 커지고 있다”며 “이석현 민주평통 부의장이 사퇴 압박에 직을 내려놓자마자 김무성 전 의원이, 사무처장에는 대통령의 40년 지기 석동현 변호사가 내정됐다”고 발언했다.

카르텔 
리스크

실제로 석 처장은 사무처장 취임 이후에도 윤 대통령을 옹호하는 발언을 연일 이어갔다. 이 중 일부가 입길에 오르내릴 때마다 대통령과의 각별한 관계가 다시금 주목받기도 했다. 검찰 출신 인사의 논란이 정권 자체의 리스크로 연결되는 모양새다.

우선 석 처장은 지난해 ‘윤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윤사모) 임원들이 본인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민주평통 사무실을 방문한 자리에서 실언한 사실이 알려져 야권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더불어민주당 김경협 의원은 지난해 12월5일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서 석 처장에게 관련 사실에 대해 질의했다.

김 의원은 “처장은 이 자리에서 윤사모에게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한 윤 대통령 호위무사 역할을 주문하고 민주평통 자문위원에 윤사모 회원을 대거 등용하겠다는 약속을 했느냐”고 물었다. 이에 석 처장은 “그런 사실이 있다”면서도 “두루 추천해달라는 취지”라고 해명했다. 


김 의원은 “민주평통은 진보·보수의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을 자문위원으로 구성해 국민적 합의를 추구하기 위한 기관”이라며 “민주평통을 ‘친윤’으로 구성하려는 것이냐”고 비판했다. 이어 “처장의 행태는 국민적 합의를 해야 할 자문기구로서 성격을 무시한 편가르기와 갈라치기”라며 “정권의 홍위병, 홍보단을 만들겠다는 취지냐”고 맹폭했다.

석 처장은 “지적한 부분을 유념하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지난 7일에는 최근 정부가 발표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해법을 옹호하는 글을 SNS에 남겼다가 역풍을 맞았다. 

전문성·자질 논란 도마 위
과거 행적 논란도 ‘판박이’

석 처장은 “얼마나 의젓하고 당당한 해법인가. 윤 대통령에게 박수를 보낸다”며 “이제는 마치 우리가 아직도 일제 식민지배하에 있어서 독립운동이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몰아가는 좌파들의 비참한 인식에서 좀 탈피하자. 일본에 반성이나 사죄 요구도 이제 좀 그만하자! (일본에 의해)식민 지배받은 나라 중에 지금도 사죄나 배상하라고 악쓰는 나라가 한국 말고 어디 있나”라고 적었다.

정부 해법에 반발하는 피해자와 관련해서는 “국가가 함부로 국민 개개인의 청구 권리를 박탈한다는 뜻이 아니라 더 큰 이익을 위해 국민 개개인의 청구권 행사를 금하는 대신에 국가가 보상해준다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될 일”이라며 “국가가 개인 피해 감정을 설득하지 못하고 국제분쟁으로 끌고 가는 것은 국제관계에 무지한 하지하책”이라고 주장했다.

졸지에 국민적 공분을 산 석 처장은 지난 8일 여론 진화를 위해 추가 입장문을 냈다. 그는 ‘논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는 제목 아래 전날 작성한 글이 강제징용 피해 당사자가 아닌, 반일 감정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세력을 향한 글이었다고 설명했다. 주로 논란이 된 표현에 관한 개별적인 해명도 담겼다.

석 처장의 해명에도 야권은 공세 수위를 낮추지 않고 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야당 위원들은 성명서를 내고 정부에 석 처장 파면을 재차 요구했다.

이 가운데 석 처장의 과거 행적 역시 도마에 올랐다. 그는 2019년 말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존중을 요구하는 한·일 법률가 공동성명’에 한국 쪽 인사로 이름을 올렸다. 상대편에는 일본 쪽 우익 인사들이 대거 포함됐다.

해당 성명에는 ▲대법원 판결은 한일관계에 큰 균열을 일으키고 전후 최악이라고 평가될 만큼 한일관계의 악화를 가져온 중대한 요인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한국인 근로자들이 입었다고 주장하는 손해 등에 관한 청구권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국제문제로서는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다 ▲사법부가 특정 역사해석을 하는 것은 법 해석의 측면에서도 학문 연구의 측면에서도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실리 인사?
여론은 글쎄

이는 2018년 대법원이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 등 전범기업에게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의무를 지운 판결을 부정하는 내용이다. 야당은 검찰 출신 인사들이 야기한 논란을 묶어 대정부 총공세에 나서는 모양새다. 특히 민주당은 석 처장 논란뿐만 아니라 정 변호사에 관해서도 공격을 이어나가고 있다. 

정 변호사는 아들의 학교폭력 논란으로 국가수사본부장 자리서 하루 만에 낙마했다. 한 장관, 이원석 검찰총장과 사법연수원 동기로, 대표적인 ‘윤석열 사단’으로 꼽힌다. 검찰 출신 인사임에도 경찰청 산하 조직의 장으로 임명되면서 적절성 시비가 일었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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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