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격차> “당신도 무연고자 될 수 있다” 소외된 자들의 죽음에 관하여…

[기사 전문]

진행자: 혹시 여러분은 이웃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가요?

홀로 임종을 맞은 뒤 일정 기간 후에 발견되는 죽음인 ‘고독사’. 우리나라의 고독사 사망자는 2019년 659명에서 2021년 953명으로, 나날이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즉 사회의 음지에서 일어나는 소외된 죽음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죠.

특수청소업체 ‘바이오해저드’를 운영하는 유품정리사 김새별씨가 그 현장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김새별(유품정리사): 쉰 아홉 살 드신 남성 분이 고시텔에서 이렇게 돌아가셨어요. 근데 사실 그 나이쯤 되고 그러면 직장 구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대부분 하시는 일이 청소용역 또는 경비용역.

결국은 이제 회사에서 나오게 되셔서 일이 없으니까, 고시텔에서 본인이 갖고 있는 돈으로... 최소한의 돈으로 먹고 살 수 있는 데만 집중을 하셨더라고요. 근데 제가 볼 때는 약주 이런 걸 드시지는 않았는데 굶어서 돌아가신 것 같아요. 아사죠. 많지는 않은데 더러 있어요.


전체적인 통계라고 하긴 그렇지만 제가 느낄 때 40~50대 중장년층의 고독사가 한 70% 정도 되고, 20%가 청년들의 극단적 선택. 한 10%가 노인 고독사죠.

예전에는 독거노인이라 그랬잖아요. 가족이 없는 노인 분들, 혼자 사는 노인 분들. 그런데 지금은 ‘홀몸 노인’이라고 그러죠. 가족이 있어도 혼자 사니까.

홀몸 노인에 대한 어떤 복지가 좋아지고 방문이나 이런 걸 통해서 계속 관리하고, 모니터링하니까 노인 고독사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그럼에도 한 10% 정도를 잡는 이유는, 그렇게 한다고 해서 노인 고독사를 다 막을 순 없어요. 사각(지대)이 없을 수가 없죠.

청년들이 고독사 하는 곳은 90%는 집이 쓰레기장 같고요. 사실 우리가 접근해야 될 부분 중 하나가 ‘고독사, 사회적 문제, 이웃 간의 단절, 가족 간의 단절’ 이런 얘기를 하는데. 이게 ‘주변 사람들이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신경 쓰고 관심 가져 달라’고 얘기하잖아요.

근데 사실 혼자 사시는 분들이 외부와 단절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스스로 벽을 만들고 다가오지 못하게, 얼굴 한번 보고 인사를 나누려고 해도 너무 차갑고 무서우니까 사람들이 못 다가가는 거죠. 그러니까 저는 이게 돌아가신 분의 책임이 큰 것 같아요.

진행자: 이외에도 ‘사회적 차별에 의한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소외 계층’입니다.

부모를 여의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인 ‘고아’는 그중 큰 영역을 차지하는데요. 고아권익연대 조윤환 대표가 입을 열었습니다.


조윤환 대표(고아권익연대): 제가 한 일곱 살 여섯, 일곱 살 정도 됐을 때 저보다 한 살 어린 고아 후배가 있었어요. 제 옆에서 이 아이가 죽었어요. 자고 있는데 이 아이가 오줌을 쌌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고아원에서 오줌을 싸면 좀 큰 사건이거든요. “큰일 났다. 빨리 치워!” 그랬는데 근데 이 친구가 안 일어나요. 이유는 간단해요. 너무 추워서 감기로 죽은 거예요. 시설이 너무 안 좋으니까 간단하게 제때 의료 조치조차도 받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했는데... 시설 측에서는 왜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냐? 이 아이가 살아 있어야만 지원금이 이 아이의 이름으로 나오거든요.

재작년에 28세 여성이 죽었던 사건은 너무나 안타깝죠. 연락이 안 돼 실종 신고했는데 사망했다 하더라고요. 경찰서에서. ‘사인이 뭐냐’고 했더니 경찰서에서는 ‘극단적 선택으로 판결하고 있다. 자세한 얘기는 못 해 준다‘고 하더라고요. 적극적으로 수사를 부탁한다고 했더니 ‘그 부분은 더 이상 우리가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고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더 적극적으로 수사하고 진상규명을 국가가 책임지고 해야 하는데, 진상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모습이 너무 안 좋아요. 일반 가정에서 컸다면... 아무리 경찰에서 “수사 제대로 했다”고 해도 끝까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거예요. 근데 고아들은 그렇게 해 줄 사람들도 없고, 국가도 관심이 없어요.

그분은 결국 자살 처리됐고… 그래서 실체를 수사해달라고 요청한 건데 결국 못 한다고 하더라고요.

(한 분은)어려서부터 고아원에 버려지고, 고아원에서 초등교육도 못 받고 중등교육도 못 받고 고아원에서 노예로 사는 거죠. 살다가 고아원이 폐쇄되니까 갈 곳이 없잖아요. 폐쇄된 고아원에 갔어요. 그분이 살았던 흔적이 그대로 있더라고요. 이분은 지금도 아무도 몰라요. 이게 무연고자예요.

국가는 이 사람의 데이터는 있잖아요. 이 사람이 계속 나이는 먹어가죠. 150세까지 사망신고가 안 되니까. 우리나라에 150세로 살고 계신 분들이 꽤 돼요 지금. 행안부(행정안전부)에 150세 이상인데 사망신고가 안 된 호적들이 꽤 많대요. 가족이 있다면 실종신고해서... 어쨌든 실종신고가 약 10년이 되면, 10년인가 20년이 되면 자동으로 사망 처리가 된대요. 근데 실종 신고까지 안 된 애들은 그냥 누적되는 거예요. 나이만 먹는 거예요.

고아가 죽으면 경찰서에서도 수사하기 싫어해요. 폭행당했든 강력범죄를 당했던 관심이 없어요. 어차피 그걸 찾아 봤자 누구도 관심 없으니까.

우리 현대 사회의 복지 가치에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있잖아요. 여전히 고아들한테만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이야기가 적용되지 않고 있어요.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아예 실종신고조차 안 되는 것.

대한민국 고아 신분은 죽음조차도 애도 받지 못하는(사람들). 나쁘게 말하면 ‘국가의 실적’ ‘빨리 죽게 만들어야 하는 존재’. 이건 격차가 아니라 비참한 거죠. 바닥 중의 바닥이고...

진행자: 죽음마저 외면당하는 소외 계층의 현실. 이에 더해, 극심한 차별로 평범한 생활조차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먼 타지에서 돈을 벌러 한국에 온 사람들, 바로 ‘이주노동자’입니다.

2020년 기준 우리나라의 외국인 부검률은 17.4%로, 한국인 부검률 2.9%보다 6배 높았습니다. 즉 한국에서 외국인이 부검 당할 가능성이 한국인보다 6배 높다는 것입니다.

캄보디아 출신 여성 속헹씨의 죽음은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줍니다. 그녀는 불법 비닐하우스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농업노동자로, 2020년 겨울 밤 돌연사했습니다. 당시 김달성 목사가 우연히 해당 사건을 접하게 됐는데요.


김달성 대표(포천이주노동자센터): 그게 2020년 12월20일에 사망한 거예요. 속헹씨와 네 동료 여성 노동자들이 함께 일했던 농장 있죠. 그 농장의 한가운데에 까만 차광 막을 뒤집어쓴 불법 가건물이 숙소였었죠. 샌드위치 패널(판넬) 가건물이에요.

중요한 초점이, 속헹씨가 20일에 사망했다는 건데 이틀 전부터 기숙사에 난방이 가동이 안 됐다는 거예요. 그게 핵심이었어요. 영하 16도 한파가 며칠 동안 계속되는 그때였어요. 그리고 또 하나 핵심은 뭐냐, ‘평상시에 지병이 없었다’

나는 즉각적으로 이 사망사건에 대한 대책위를 구성했죠. 그랬는데 근로계약서를 나중에 받아보니까 한 달에 (인당)15만원씩 기숙사비를 내는 것으로 기록돼있고...

진행자: 김달성 목사의 노력으로, 2022년 5월 마침내 산업재해가 승인됐습니다. 영하 16도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쓸쓸히 숨을 거둔 속헹씨. 그녀는 한 달 후 캄보디아로 돌아갈 비행기표를 예매한 상태였습니다.

김달성 대표(포천이주노동자센터): 속헹씨 사망한 그 사업주는 아직도 해요. 끄떡없어요. 고발했는데 ‘불법시설물을 제공했다’는 것만 문제 삼아서 한 200만원 벌금만 받고 말았어요. 사람 죽여도 끄떡없습니다.

진행자: 만약 연고자가 없는 사람이 사망할 경우, 그는 ‘무연고 사망자’로 분류됩니다.


무연고 사망자의 시신은 안치실에서 바로 화장장으로 이송됩니다. 즉 이들에게는 ‘장례’라는 애도의 순간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죠.

단, 서울시에서는 2018년부터 대부분의 무연고 사망자에게 공영장례를 지원하는데요. 그 배경에는 한 시민단체의 지대한 노력이 있었습니다. 소외된 자들의 ‘애도 받을 권리’를 지키는 사람들, ‘나눔과나눔’입니다.

김민석 팀장(나눔과나눔):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요. 제도적인 기준에 부합해야 되고, 두 번째는 경제적인 기준에 부합해야 해요. 시장에서 요구하는. 그 두 가지 자격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그런 사람들이 무연고 사망자가 되고 있는 거잖아요.

무연고 사망자가 한 해에 3000분이 훌쩍 넘어가고 있는데요. 그걸 단순히 3000명의 무연고 사망자라고 볼 순 없어요. 고인 한 명당 굉장히 보수적으로 잡아도 서너 사람의 인연이 있을 거거든요. 그렇게만 잡아도 우리는 한 해 만명이 넘어가는 박탈된 애도를 경험하는 사람들을 양산해내고 있는 거예요.

진행자: 나눔과나눔은 연고자의 범위를 ‘혈연 중심’에서 ‘관계 중심’으로 넓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경제적 조건에 부합하더라도, 단지 직계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무연고 사망자가 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입니다.

김민석 팀장(나눔과나눔): '무연고 사망자'라는 말이 주는 이미지가 굉장히 세요. 고인이 굉장히 외롭고 쓸쓸하게 그리고 빈곤하게, 우리가 생각했을 때 너무 안타깝고 슬픈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데 실제로 장례 현장에서 만나보면 모두가 그렇지 않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관계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다 각자의 삶이 있었는데 그것도 다 지워 버리는 거예요. 죽은 이후에 장례를 치를 수 있는 그 협소한 범위의 연고자가 없다는 이유 딱 하나로.

실제로 굉장히 저명한 교수님이 돌아가셔서, 근데 자녀가 없이 돌아가셨던 거예요.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동료 교수,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명망 높고 이름 있는 사람들이 30명 넘게 빈소에 찾아왔어요.

조카가 장례 치를 의사가 충분히 있고 경제적 능력도 되고 마음도 있는데 굳이 그 사람에게서 장례 치를 권리를 빼앗아서 무연고 사망자로 만들어서 공영장례를 치르고 있는 거죠.

저희 아버지한테 장례를 치를 수 있는 범위에 대해서 쭉 얘기를 하니까 아버지도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왜 조카가 장례를 못 치러?” “왜 이모나 삼촌, 조카, 며느리는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연고자가 아닌 거야?” “왜 친구들은 장례를 치를 수가 없어?”

이런 사례는 계속 늘어나겠죠. 저부터도 1인 가구이고... 제가 무연고 사망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부모님보다 먼저 죽는 것.

공영장례가 보편적인 제도가 된다고 하면 그 사람들이 적어도 한 가지 불안은 줄일 수 있는 거죠. ‘내가 죽었을 때 돈이 있건 없건, 혹은 주변에 장례를 치러 줄 사람이 있건 없건 우리 사회가 나를 존엄하게 존중하면서 배웅할 거다’라는 믿음이 생기는 거죠.

진행자: 소외된 죽음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목격하고, 그 이후의 과정을 책임지는 사람들. 각자의 일을 할 때 그들이 느끼는 심경은 어떨까요?

김새별(유품정리사): 처음에 시작할 때는 멋모르고 그냥 집만 정리하고 그러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사진이 없는 집이 없어요. 근데 왜 사진이라는 것들이 좋은 사람들하고 좋은 곳에 놀러 갔을 때 그 좋았던 기억을 평생 간직하고 싶어서 찍는 게 사진이거든요. 그런 사진들을 보면서 그분의 인생, 그분의 노트들, 일기장들을 보면서 그분의 모든 인생을 알게 돼요.

휴먼 다큐처럼 그런 느낌이 들어요. 어떤 인생을 살았는데 최근에 어떤 고비가 있었고, 예를 들어 스스로 생을 마감하시는 분들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런 생각도 들고... 모든 게 보이는 것 같아요.

조윤환 대표(고아권익연대): 고아들이 죽었을 때 국가가 대응하는 거나 시스템을 보면 ‘이렇게 무관심할 수 없다’ 전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고아원 출신이라고 하는 순간 ‘국가의 결과물’이 되기 때문에 국가가 최대한 그 흔적을 없애려는 같아요.

시설에서 자란 고아 출신 성인들은 어쩌면 ‘국가가 입양한 자식’이기 때문에, 죽을 때도 (국가와)함께였으면 좋겠다.

김민석 팀장(나눔과나눔): 일단 장례를 치른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면, 돌아가신 분을 존엄하게 배웅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이 세상에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를 전환하는 일종의 순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 장례라는 게 보편적인 사회보장제도로 기능해야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됐을 때 이 공영장례가 빈곤한 사람 혹은 외롭고 쓸쓸하게 사망한 사람에게 제공되는 일반적인 장례보다 못한 장례가 아니라... 그게 일종의 낙인을 만들고 있거든요. 그런 낙인 없이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제공되는 걸 저희는 희망하고 있고, 그렇게 사회가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진행자: 빈곤 때문에, 우울 때문에, 혹은 협소한 제도적 범위 때문에... 소외된 죽음은 우리 자신의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해 한국의 사망자 수는 31만7800명. 2011년과 비교하면 10년 만에 약 23% 증가한 수치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늘어나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2006년부터 2020년까지 출생을 위해 소모된 예산은 380조2000억원. 그러나 죽음은 오롯이 개인의 영역으로 여겨지며, 그 예산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국가는 삶의 시작 뿐만 아니라 삶의 끝 역시 보장해야 하지 않을까요?
 

취재팀: 장지선
사진팀: 고성준/박성원
영상팀: 배승환/김희구/강운지/김미나
프로젝트: 죽음의 격차 (죽어서도 차별받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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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눈 뜨고 당하는’ 임차권등기 말소의 이면

[단독] ‘눈 뜨고 당하는’ 임차권등기 말소의 이면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잘못된 판단이 불러온 후폭풍은 엄청났다. 생전 걸음할 일 없다고 생각했던 경찰서를 드나들었고 송사를 치르느라 법정을 오갔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발이 닳도록 돌아다녔지만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 모든 일은 법원에서 날아온 문서 한 장에서 시작됐다. 어떤 실수는 손쓸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당시에는 실수인지조차 모르고 넘어갔다가 뒤늦게 알아채는 경우도 허다하다. 모든 상황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수습하기 어려운 일도 있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계약이 이뤄진 상태라면 더더욱 원상복구가 쉽지 않다. 김모씨가 처한 상황이 딱 그렇다. 놀라서 해줬다가 사건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7년 7월 김씨는 경기도 광주의 한 빌라에 거주할 목적으로 전세 계약을 맺었다. 계약 기간은 2017년 8월부터 2019년 8월까지 2년, 보증금은 2억200만원으로 했다. 해당 빌라의 등기부등본을 보면 김씨가 전세 계약을 맺은 후 임대인이 바뀌었다. 문제는 새로운 임대인이 계약 기간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김씨에게 전세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씨는 전세 계약 기간 만료 후인 2019년 9월 해당 빌라에 임차권등기를 마쳤다. 임차권등기명령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가 임차주택에 대한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유지하면서 이사할 수 있는 제도다. 엄정숙 법도 종합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임차주택에 거주할 때는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로도 대항력이 발생한다. 하지만 계약 기간이 끝나 퇴거하게 되면 이사하는 곳으로 주소를 옮겨야 하니 임차권등기명령을 통해 대항력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임차권등기명령은 등기부등본에 기재되는 만큼, 강한 대항력을 가진다”고 부연했다. 다시 말해 등기부등본에 임차권등기명령이 기재돼있다는 것은 세입자는 더 이상 그 집에 살지 않지만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상황임을 의미한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김씨가 주택도시보증공사(이하 HUG)에서 운영하는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 상품에 가입해 뒀다는 사실이다.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 상품은 전세 계약이 종료됐을 때 임대인이 임차인에게 돌려줘야 하는 전세보증금을 HUG가 대신 돌려준다는 내용이 골자다. HUG가 임차인에게 먼저 전세보증금을 대위변제한 뒤 임대인에게 구상권을 행사해 청구하는 방식이다. 김씨는 2019년 10월 HUG로부터 전세보증금 전액인 2억200만원을 받았다. 전세 살다 보증금 못 받아 전세보증금 보험으로 구제 이후 김씨는 경기도 안양으로 이사했고 해당 빌라와 관련한 일은 새카맣게 잊고 지냈다. 그는 <일요시사>와 만난 자리에서 “HUG에서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았으니 모든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제 2019년 이후 5년여 동안 해당 빌라와 관련해 김씨에게까지 영향이 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사이 해당 빌라의 주인이 바뀌는 등 소유권 변동이 일어났지만 김씨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던 것. 그러다 지난해 11월 김씨에게 임차권등기명령 취소 신청서가 날아들었다. 김씨는 “법원에서 문서가 송달돼 크게 당황했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려고 문서에 기재된 번호로 연락했더니 7년 전 전세로 살았던 빌라의 집주인이라고 하더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집주인이 임차권등기를 말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지 않으면 소송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며 “갑자기 법원에서 종이가 날아오고 소송을 제기한다는 말에 덜컥 겁을 먹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씨는 임차권등기 말소를 위한 서류를 직접 떼 서울 서초동의 한 법무사 사무실에 가져다줬다고 했다. 그 결과 지난해 11월20일 김씨가 해당 빌라에 걸어놨던 임차권등기가 말소됐다. 해당 빌라에 김씨가 행사할 수 있던 권한이 소멸한 것이다. 동시에 집주인으로서는 등기부등본이 깨끗해지는 효과를 얻게 됐다. 이렇게 되면 세입자를 구하는 일도 수월해진다. 줄줄이 꼬였다 이때 김씨가 간과한 사실은 HUG의 존재였다. 김씨가 해당 빌라의 집주인으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돌려받고 임차권등기를 말소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보증금을 반환받지 못한 세입자가 돈을 받은 뒤 임차권등기를 말소해주는 게 실제 일반적인 절차다. 이 과정에서도 공인중개사 등 부동산 전문가는 보증금을 돌려받기 전까지 임차권등기를 말소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김씨는 전세보증금을 HUG에서 받았다. HUG 입장에서는 해당 빌라의 집주인에게 2억200만원 즉, 돌려받아야 할 돈이 있는 상황에서 김씨가 임차권등기를 무단으로 말소해버린 것이다. 동시에 김씨가 배당 순위에서 밀리게 되면서 HUG는 대위변제한 보증금을 회수할 방법이 요원해졌다. 여기에 은행, 지자체 등 후순위 채권자들도 있는 상황이다. 김씨 사건을 들여다보고 있는 HUG 경기관리센터(이하 HUG 경기센터)는 “모든 임차인은 HUG에 대위변제를 받으면서 대위변제증서를 작성한다”고 말했다. 실제 김씨가 HUG로부터 전세보증금에 해당하는 돈을 받았을 당시 작성한 대위변제증서에는 ‘본인(김씨)은 HUG가 대위변제금 및 제반 비용을 회수할 때까지 HUG의 동의 없이 주택임차권등기를 말소하지 않겠으며 본인의 주택임차권등기 말소로 인해 HUG에 손해가 발생할 경우 배상할 것을 확약한다’는 문구가 기재돼있다. HUG 경기센터는 “HUG는 대위변제 물건을 경매에 넘겨서 배당을 회수하는데 임차권등기명령을 무단 말소하면 경매에서 배제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HUG에 연락했으면 대신 응소해 임차권등기를 지켰을 텐데 당시 김씨가 연로해 이런 생각을 못한 것 같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낙장불입 그러나… 김씨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집주인이) 내가 전세보증금을 반환받았기 때문에 임차권등기를 말소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 본인(집주인)이 손해를 보고 있다. 임차권등기를 말소하지 않으면 손해배상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나를 속였다”며 “내 입장에서는 전세 사기를 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집주인 말에 속아 임차권등기를 말소해줬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은 김씨가 집주인과 해당 빌라의 채권자들에게 제기한 ‘임차권등기 말소 회복 청구 등’ 소송에서 “피고(집주인)가 원고(김씨)가 주장하는 것처럼 고의적인 기망행위를 했다거나 그로 인해 김씨가 신청 취하 행위 자체에 착오에 빠져 있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김씨의 “속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현재 김씨의 상황은 여의치 않다. HUG 경기센터는 대위변제한 보증금 회수를 위해 일단 김씨의 부동산 등에 가압류를 걸어둔 상태다. 그러면서도 김씨의 상황을 참작하고 손해를 회복하기 위해 ‘임차권등기 무단 말소 무효 소송’을 추진하고 있다. HUG 측 관계자에 따르면 그동안 한번도 진행한 적 없는 소송이라고 한다. “억울하다” 법원 인정 안 해 HUG, 구제 위해 소송 제기 HUG 경기센터는 “그동안 임차권등기가 말소되면 복구할 가능성이 없는 것(낙장불입)으로 보고 임차인 손해배상 청구로 업무를 진행해 왔는데, ‘임차권등기 말소 무효 소송을 통해 원상복구 가능성이 있다’는 법률 자문이 있어 소송을 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소송이 HUG의 승소로 종결돼 임차권등기가 부활하면 김씨에 대한 구제가 가능하다. 이때 김씨는 소송 실비만 부담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HUG 경기센터가 제기한 소송은 김씨에게 해당 빌라에 걸려 있던 임차권등기를 말소할 권한이 없다는 취지인 것으로 알려졌다. HUG가 김씨에게 전세보증금을 대위변제한 만큼 임차권등기를 말소할 권한도 HUG에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니 김씨의 임차권등기 말소 행위는 무효라는 게 골자다. HUG 경기센터는 “김씨가 임차권등기를 무단 말소하면서 채권 선순위로 올라온 은행, 세무서, 지자체 등이 김씨의 억울함을 헤아려 대승적인 차원에서 응소하지 않길 기대하고 있지만, 이들은 김씨가 별도로 제기했던 소송에 모두 대응한 전력이 있어 HUG가 제기한 소송에도 응대할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판단 중”이라고 밝혔다. 이어 “HUG가 김씨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대신 구제를 위해 소송을 진행하는 것처럼 이들 후순위 채권자들도 집주인의 허위 소송에 안타깝게 속아 임차권등기를 말소한 김씨를 구제하는 방향으로 업무를 진행하기를 바라는 입장”이라고 전해왔다. 실제 김씨가 제기한 ‘임차권등기 말소 회복 청구 등’ 소송에서 은행 한 곳은 대응하지 않았다. 순간 실수 인정될까? 김씨는 집주인과 채권자들을 상대로 한 소송의 항소심을 준비하고 있다. 동시에 HUG와도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법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일이 벌어지고 HUG로부터 연락을 받고 난 뒤에야 상황을 파악했다”며 “재산은 (가압류로) 묶였고 소송비용도 만만찮다. 무엇보다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다. 다른 사람에게는 나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한탄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