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구청-해밀톤 이태원 카르텔 막후

살아야 했던 상인들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핼러윈 데이 비극의 여파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담당 기관들의 부실·소극 행정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경찰은 ‘이태원 참사 특별수사본부’를 꾸리고 안일했던 대응에 사과했으나 도의적 책임을 지는 이는 없는 상황이다. ‘경찰이 경찰을 수사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까지 제기되고 있다. 특히 경찰과 용산구청, 이태원 상권을 장악한 해밀톤 호텔 간 유착 의혹까지 제기돼 논란은 지속될 전망이다.

이태원 상인연합회와 해밀톤 호텔은 사실상 한 몸이라고 불린다. 해밀톤 호텔 간부가 상인회 간부를 맡기도 하기 때문이다. 해밀톤 호텔 대표도 마찬가지다. 그는 경찰뿐만 아니라 용산구청 및 정치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상인회는 수백억원대 자산을 가진 해밀톤 호텔 대표의 문제점에 대해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그들의 카르텔에 대해 사실상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상권 장악
막강 인맥

해밀톤 호텔 이상용 대표이사는 불법 증축으로 호텔 주변 골목을 좁혀 참사 규모를 키웠다는 의혹을 받는다. 그는 구청 출연기관 이사장과 경찰발전협의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용산구 유관 단체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이어왔다. 이 때문에 해밀톤 호텔 불법 증축물이 강제철거가 돼야 했음에도 10년 가까이 이행강제금을 내며 버텨올 수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대표는 2020년 5월부터 2년간 용산구 조례에 근거해 운영되는 용산복지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용산복지재단 이사장 자리는 이사회가 추천한 인물을 구청장이 임명한다. 박희영 용산구청장의 임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용산구청과의 관계가 시작된 셈이다.

당연직 이사로 용산구 주민복지국장 포함돼있고 구청으로부터 자원봉사센터 운영을 수탁받는 만큼 용산구청과의 관계는 불보듯 뻔하다. 특히 구청에서 퇴직한 공무원이 재단으로 소속을 옮기기도 해 사실상 낙하산 창구로 전락했다는 지적도 나온 바 있다.


이태원 지역 일대에서 수백억원대 자산가로 알려진 이 대표는 참사 발생 두 달 전인 8월17일, 용산구 통합방위협의회에 민간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날에는 박 구청장과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 최성범 용산소방서장 등도 자리했다.

2000년대 초부터 해밀톤 호텔이 용산구 랜드마크로 자리 잡으면서 용산구상공회 고문과 용산구 구세심의위원회 외부위원까지 맡았다. 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용산구협의회장까지 역임해 정치권과의 관계도 유지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용산구의회 관계자는 “용산구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과 이 대표의 관계가 굉장히 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용산구 유관기관과 단체에서 이 대표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주장했다.

호텔 대표, 유관기관·단체와 깊은 친분
불법 증축 미철거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이 대표의 손길은 경찰에까지 뻗쳤다. 2012년부터 용산경찰서 경찰발전협의회(경발협) 위원으로 활동해온 것이다. 경발협은 경찰과 지역사회의 협력을 위해 만들어진 기구로 지역주민들이 경찰서의 치안정책 등에 대해 조언한다는 명목으로 운영되기에 소속 위원들은 자연스럽게 경찰 간부들과 친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경발협은 2018년 ‘버닝썬 사태’ 당시 경찰과 지역 유지들의 유착 통로로 지목되기도 했다.

경찰은 이 대표에 대해 적극적으로 수사하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 특별수사본부’ 출범 이후에야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수본이 적용한 건축법과 도로법 위반 혐의는 경찰도 이태원 참사 이전 들여다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2013년 용산구청이 해밀톤 호텔의 불법 증축물을 적발했음에도 호텔이 5억553만원의 이행강제금을 내며 시정조치 없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 대표와 용산구와의 긴밀한 관계가 작용했다는 주장에도 무게가 실리고 있다.

특수본 관계자는 “언론 보도를 통해 해밀톤 호텔과 구청 등의 유착 의혹이 제기된 사실을 알고 있다. 현재 확인하고 있다”며 “수사 과정에서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엄정하게 처리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수상한
연결고리

해밀톤 호텔은 용산구 랜드마크로 꼽힌다. 부동산 가치만 1500억원 가까이 되고 보유 현금이 약 130억원에 이른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해밀톤 호텔 운영회사인 해밀톤관광의 지난해 말 보유한 이태원 토지의 공시지가는 1499억원으로 집계됐다.

해밀톤 호텔 일대의 5558.46㎡ 면적의 부지를 보유 중인 해밀톤 호텔은 해당 부지를 86억원에 취득했다. 공시지가가 취득가의 17배에 달했다. 호텔은 부동산 장부 가치를 158억원으로 회계 처리했다.

이태원 일대의 1500억원대 부동산을 확보한 해밀톤 호텔은 고 이철수 회장이 1973년에 완공했다. 자금 조달 문제로 우여곡절 끝에 호텔을 열었으며 2015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진행했다. 리모델링 시점 직후에 불법 증축물인 분홍색 철제 임시벽이 설치됐다는 관측이 많다.

불법 증축물을 철거하지 않은 까닭으로는 매출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밀톤 호텔은 2010~2019년까지 매년 2억~3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코로나19로 관광객이 줄면서 수십억원대 영업손실이 났다.

2~3년간 적자가 났지만 탄탄한 재무구조를 바탕으로 버틸 수 있었다. 지난해 말 기준 이익잉여금은 209억원에 달했고 같은 기간 부채 비율은 49.8%에 불과한 사실이 해밀톤 호텔이 버틸 수 있었던 비결로 보인다. 해밀톤 호텔은 이 회장의 장남인 이 대표 등 그의 일가족이 지분 86.2%를 보유 중이다.

일부 상인들은 이태원에서 유흥업소와 술집 등을 운영하려면 이 대표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가 사실상 이태원의 상권을 장악했다는 주장이다.

상인회 윗선 지목 사실상 갑 위치
“불만·항의 시 장사 접을 각오해야”

이태원의 한 상인은 “한 달에 수억원의 매출을 올려도 해밀톤 호텔이 갑에 위치해 있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고 보면 된다”며 “불법 증축물과 관련된 문제를 제기해도 정치권 인맥과 용산구 유관기관 카르텔이 심하기 때문에 제대로 해결된 적이 전무하다”고 주장했다.

다른 상인도 “이 대표에 대한 문제나 항의를 하면 이태원에서 장사를 하지 못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며 “먹고 살아야 하는 입장에서 쉽사리 나설 수 없었다”고 했다.


특수본은 최근 이 대표를 출국금지 조치했다. 또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이 대표 등의 휴대전화 5점과 건축물 설계도면을 분석 중이다. 해밀톤 호텔의 불법 증축 건축물과 이태원 참사 인명피해의 연관성도 확인할 계획이다.

또 용산구청 관계자를 이틀 연속으로 불러 조사하는 등 박 구청장의 혐의 입증에 주력하고 있다. 앞서 박 구청장은 핼러윈 기간 안전사고 예방대책 마련을 소홀히 하고 참사에 부적절하게 대처한 혐의 등으로 입건돼 수사받고 있다.

특수본은 용산구청이 핼러윈 안전대책을 제대로 수립했는지, 실제 어떤 업무를 이행했는지 꼼꼼히 살펴보는 중이다. 지난 4월 용산구의회에서 제정된 이른바 ‘춤 허용 조례(서울시 용산구 객석에서 춤을 추는 행위가 허용되는 일반음식점의 운영에 관한 조례)’도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중이다.

문제 제기
안 해? 못해?

일반음식점에서도 음향시설을 갖추고 손님이 춤을 출 수 있게 허용한 조례 탓에 참사 당일 일대 업소들이 클럽처럼 운영되면서 피해가 커졌을 가능성 등을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특수본은 용산구청이 재난문자 발송을 지체한 이유도 살펴보고 있다. 용산구청은 참사 직후 재난문자를 발송해달라는 정부와 서울시 요구에도 78분간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특히 특수본 수사가 시작된 이달 7일에야 해밀톤 호텔을 포함한 불법 증축물 7곳을 경찰에 뒤늦게 고발했다.


특수본은 용산경찰서 간부가 참사 발생 후 핼러윈 기간 안전을 우려하는 내용의 정보보고서를 부당하게 삭제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수사 중이다. 용산경찰서 소속 정보관들을 불러 진술을 들었고 관련자 추가 조사와 압수물 분석이 완료되는 대로 삭제를 지시한 용산경찰서 정보과장과 정보계장을 소환할 방침이다.

특수본은 용산서 정보과 간부들에게 다른 직원을 시켜 정보보고서를 작성한 정보관의 업무용 PC에서 문건을 삭제하고 이 과정에서 직원들을 회유·종용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증거인멸·업무상 과실치사상)가 있다고 보고 입건해 수사 중이다.

또 보고서 삭제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는 박성민 서울경찰청 공공안녕정보외사부장도 관련자 조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소환할 계획이다. 박 부장은 용산서를 포함한 일선 경찰서 정보과장들이 가입된 메신저 대화방에서 “감찰과 압수수색에 대비해 정보보고서를 규정대로 삭제하라”고 지시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행안부와 서울시의 참사 책임에 관해서는 사실관계를 추가로 파악한 뒤 적용할 법리를 검토하기로 했다. 혐의 관련성이 있고 압수수색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강제수사에 착수하겠다는 방침이다. 이와 관련해 특수본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본격 수사 가능성을 내비쳤다.

특수본 유착 의혹 수사 검토
수사 칼끝 정치권 향할 수도

김동욱 특수본 대변인은 지난 16일 언론 브리핑에서 행안부 압수수색 여부에 대해 “수사에 필요한 절차는 모두 진행할 것”이라며 “현재 7명을 피의자로 입건해 조사 중이지만 추가 피의자가 나올 수도 있다”고 밝혔다.

특수본은 지난 14∼15일 행안부 중앙재난안전상황실장을 비롯한 재난안전 관련 부서 직원들을 잇따라 참고인으로 소환했다. 이들 조사와 법리검토 결과를 토대로 조만간 이 장관에 대한 강제수사에 착수할 여지를 열어둔 것으로 풀이된다.

특수본은 이 장관이 경찰 지휘·감독 책임자로서 지위는 물론 재난을 예방·수습할 직접적인 법적 책임을 갖는지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단순히 경찰을 지휘·감독하는 수준을 넘어서 재난 발생에 직접 책임을 지는 당사자로 인정되면 직무유기는 물론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를 곧바로 적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 장관이 재난을 방지하고 수습하는 정부부처 수장으로서 객관적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은 탓에 참사가 발생했다는 법리 구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수본은 특히 주최자가 없는 행사에 대해 국가가 어떤 법적 책임을 지는지 들여다본 후 이 장관의 혐의를 구체적으로 파악한다는 방침이다. 특수본은 “행안부 직원들 참고인 조사를 통해 (이 장관의)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지휘 의무가 존재하는지 등을 확인 중에 있다”고 말했다.

특수본은 이 전 서장 등 경찰 소속 피의자들의 참사 책임 여부도 신중히 들여다보고 있다. 특수본은 경찰 현장 책임자였던 이 전 서장이 현장에 늦게 도착한 경위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 당시 수행원과 용산경찰서 직원들을 불러 조사할 방침이다.

또 이 전 서장이 핼러윈 안전사고를 예방하는 현장 책임자로서 안전조치를 충분히 했는지 따져보기 위해 이날 오후 용산경찰서 경비과장을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할 계획이다.

특수본은 경비과장 등 용산경찰서 직원들을 상대로 이 전 서장이 참사 발생 직후 현장에 도착한 것처럼 상황보고서를 조작했다는 의혹도 캐물을 예정이다.

봐주기 논란
의식한 경찰

경찰청 특별감찰팀이 수사를 의뢰한 용산경찰서 112상황실장과 서울경찰청 상황3팀장도 조만간 불러 조사한 뒤 입건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특수본은 이들에게 참사 발생 사실을 윗선에 제때 보고하지 않아 경찰 보고체계에 혼란을 일으키고 적절한 사고수습 조치를 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고 보고 있다.

다만 특별감찰팀은 이들에게 어떤 범죄 혐의를 물을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특정하지는 않았다. 특수본은 당사자와 관련자 진술을 모두 살펴 입건 여부를 판단할 것으로 전망된다.


<hounder@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