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전국 노래자랑’ 새 MC 김신영

무거운 마이크 물려받다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지난 6월 별세한 KBS <전국 노래자랑> 진행자 고 송해. 그의 34년 이력을 누가 이어갈지가 전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KBS는 숱한 예측을 깨고 개그우먼 김신영을 차기 진행자로 낙점했다. “의외의 발탁”이라는 반응과 함께 낙점 배경에 이목이 쏠린다. 그 답은 개그부터 진행·연기까지 모두 수준급인 그의 이력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국민 MC’ 송해의 <전국 노래자랑> 후임자는 그가 작고한 지 두 달을 훌쩍 넘기고서야 비로소 결정됐다. 하지만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이들도 KBS의 장고를 책망하지는 않는 분위기다. 34년간 자리를 지켜온 거목을 대체할 누군가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건 온 국민이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장고 끝에
묘수 뒀다

다만 장고 끝 KBS가 내린 결론은 의외라는 반응이 많다. KBS는 지난달 30일 <전국 노래자랑>의 진행자로 개그우먼 김신영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앞서 김신영은 세간에 돌던 후임자 하마평 속에 언급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당초 하마평 속 유력 후보군은 이상벽·이상용·임백천·이택림 등이었다. 그간 <전국 노래자랑>이나 전 MC 송해와 깊은 인연을 쌓은 이들이다. 세간에서는 진행 능력과 인지도 등을 고려해 남희석·이수근·이찬원 등이 적임자라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KBS의 선택은 결국 김신영이었다. 

KBS 김상미 CP는 김신영 발탁 배경을 두고 “김신영은 데뷔 20년 차의 베테랑 희극인으로 TV·라디오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영화계에서도 인정하는 천재 방송인”이라며 “무엇보다 대중들과 함께하는 무대 경험이 풍부해 새로운 <전국노래자랑> MC로서 매우 적합하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 설명대로 김신영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을 인정받아온 ‘만능 엔터테이너’다. 2003년 SBS 개그 콘테스트를 거쳐 SBS 7기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했다. <웃찾사> ‘행님아’ 코너에서 개그맨 김태현과 함께 인기를 끌었다. 이를 인연으로 코너가 끝난 뒤에도 김태현과 콤비로 KBS <스타 골든벨> MBC <세바퀴> 등에서 활약했다.

이후로는 배우 이계인 성대모사로 인기를 끌었다. 특히 이계인이 MBC 드라마 <주몽>에서 연기한 ‘모팔모’역을 흉내 내는 모습으로 웃음을 자아냈다.

김신영의 개그 중 단연 압권인 것은 바로 즉흥 생활 연기다. 백반집 아줌마, 목욕탕 아줌마, 아줌마 춤, 본인의 어머니, 고모와 할머니, 전라도 아저씨 등 일상을 재현한 개그들을 적절히 활용한다. 이를 통해 연령대에 관계 없이 쉽게 공감대를 형성해낸다는 점이 강점이다.

김신영은 이 같은 개그들을 선보이며 여러 연령대에서 높은 인지도를 확보했다.

그는 즉흥 생활 연기에 강점을 보이는 만큼, 콩트에도 능한 모습이다. 여러 개그맨과 예능인이 모인 프로그램에서도 항상 순발력 있게 콩트를 주도한다. 방송계에선 “예능감을 타고났다”는 평가도 심심찮게 나온다는 후문이다.

데뷔 초 김신영을 기억하면 큰 체구가 함께 떠오른다. 하지만 사실 김신영은 어렸을 때 허리가 잘록할 정도로 늘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코미디언으로서 활동한 이래로 체중을 불리거나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연이다. 

실제로 그는 과거 대중에게 큰 체구에서 비롯된 이미지로 각인됐고, 여러 프로그램에서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이를 바탕으로 <식신원정대> MC를 맡기도 했다.


송해 후임자로 전격 발탁 “의외지만 기대”
“감사하고 영광…인생 모든 것 바칠 것”소감

이렇게 큰 체구를 유지하던 중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김신영은 병원에서 “고도비만에서 초고도비만으로 진행 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동시에 고지혈증이나 고혈압 등 여러 질환이 발견됐다. 결국 김신영은 체중감량을 결심, 체계적인 계획을 통해 약 38㎏을 감량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살을 빼는 과정에서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큰 체구를 가졌던 시절 가졌던 인기를 잃을 수 있겠다는 불안함과 “개그에 몰입하지 않고 외모만 가꾼다”는 주변의 오해가 걸림돌이었다. 악성 댓글에도 시달린 김신영은 결국 공황장애까지 앓게 됐다.

김신영은 감량한 체중을 10년째 유지하며 꾸준한 자기관리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공황장애도 극복했다. 지난 4월부터 7월까지 KBS 예능 <빼고파>에 멘토로 등장해 출연진에게 건강한 체중감량 비법을 전수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 유도선수로 활동했던 김신영은 “유도가 좋은 것보다도 가난했던 유년 시절 집에서 지내는 것보다 운동부 숙소 생활이 더 좋았다. 태릉선수촌에서 생활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밝혔다. 당시 머리를 짧게 자르고 다녔다가 남자로 오해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김신영은 JTBC <아는 형님>에 출연해 “유도를 너무 못해서 그만뒀다”고 말했다. 하지만 운동부 출신인 만큼 평소 발군의 운동신경을 보여준다. JTBC <마녀체력농구부>에선 출연진 중 돋보이는 농구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최근에는 콩트 연기 대신 웃음기를 뺀 정극 연기까지 성공적으로 소화했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 <헤어질 결심>에 김신영을 직접 캐스팅했다. 김신영으로서는 지난 2005년 <파랑주의보> 이후 약 17년 만의 영화계 재방문이다. 영화는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될 만큼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김신영 역시 ‘재발견’ 등의 수식어를 받으며 호평받았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제가 열렸던 지난 5월, 김신영의 캐스팅 비화를 직접 설명한 바 있다. 같은 달 23일 처음 선보인 <헤어질 결심>에서 김신영은 후반부 주요 배역을 맡았다. 영화 전반부에 등장한 고경표를 이어 박해일의 후배 형사로 출연했다.

콩트부터
정극까지

박 감독은 김신영을 캐스팅하게 된 계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이지만, 아주 옛날 <웃찾사>에 나올 때부터 정말 팬이었다. 저 사람은 탁월한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고 영화계가 그런 사람을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 느꼈다”고 입을 뗐다.

이어 “연기를 당연히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 안 시켜봐도 알 것 같더라”며 “즉흥적인 순발력도 그렇고 사람들의 특징을 잡고 모사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그래서 이 역할에 김신영씨를 얘기했을 때 처음에 다 찡그리는 표정을 지었다”며 “이후 1시간쯤인가 생각해보고 (제작진이)좋을 것 같다고 했다. 결국엔 모두가 환영했는데 그걸 확인하고 시나리오를 보냈다”고 전했다.


박 감독은 김신영의 연기력에 찬사를 보냈다. 그는 “확신을 갖고 캐스팅이 실현됐는데 촬영할 때 보니 정말 타고났더라. 자기 딴에는 긴장도 하고 그랬다고 하는데 전혀 못 느꼈다. 평생 연기해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연기했다”며 “캐치가 굉장히 빠르더라. 무슨 말을 해도 잘 알아듣고 뉘앙스를 잘 살리고 그렇더라. 그녀가 나오는 연기를 볼 때마다 흐뭇하다”고 칭찬했다.

박찬욱 감독에 이어 봉준호 감독도 김신영을 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봉 감독은 박 감독이 김신영을 캐스팅했다는 소식을 듣고 환영의 뜻을 전한 바 있다. 박 감독은 “봉 감독도 캐스팅 소식을 듣고 나보고 잘했다더라. 자기도 김신영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연기한 모습을 모아 놓은 파일도 따로 가지고 있다고 했다”고 말했다.

오랜 기간 라디오 DJ를 맡으며 다진 탄탄한 진행력도 강점이다. 김신영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MBC 라디오에서 <심심타파> 진행을 맡았다. 2012년부터는 MBC FM4U에서 <정오의 희망곡>을 진행하고 있다. 청취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해 소통이 뛰어나다는 점이 특징이다. 유년 시절 경제적 어려움으로 다양한 사회생활을 겪었던 경험이 자양분이 됐다. 

이 같은 경험 때문인지 특별한 사연을 가진 청취자들에게 사비로 선물을 준 미담이 종종 있었다. 가게를 처음 연 자영업자 청취자에게 화환을 보내고, 학자금대출을 다 갚은 사회초년생에겐 외식상품권을 건넸다. 곧 중학교를 입학하는 학생에겐 그 자리에서 바로 신발을 선물했다.

만능 재주
발탁 배경


<정오의 희망곡>은 김신영의 능수능란한 진행 능력과 높은 공감 능력에 힘입어 높은 청취율을 기록하고 있다. <정오의 희망곡>은 2019년 8월 방송 3사 라디오 청취율 조사에서 1위를 기록했다. 프로그램을 맡은 지 7년 만에 거둔 쾌거였다. 여세를 몰아 2020년 11월에는방송 3사·AM·FM 등을 모두 통틀어 단독 청취율 1위를 차지했다.

예능을 통한 가수 데뷔로 인기몰이를 하기도 했다. 2018년 동료 개그우먼들과 함께 여자 아이돌 컨셉의 그룹 ‘셀럽파이브’를 결성했다. 이후 세 차례 노래를 내며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아울러 MBC 예능 <놀면 뭐하니>에서 시작된 ‘부캐 열풍’에 합류했다.

김신영은 2020년부터 ‘빠른 45년생 트로트 가수’라는 콘셉트로 만든 부캐 ‘둘째이모 김다비’로 활동 중이다. 데뷔곡 ‘주라주라’ 활동 당시 광고를 여러 편 찍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로는 래퍼 마미손, 아이돌 그룹 있지(ITZY)와 함께 신곡을 발표했다. 

김신영은 스스로를 ‘둘째이모 김다비’와 친한 이모 조카 사이로 소개했다. <정오의 희망곡>에 ‘김다비’로 출연해 쇼케이스를 열기도 했다. 당시 쇼케이스는 김신영 대신 셀럽파이브 멤버 신봉선이 MC를 맡았다. 김신영은 김다비와 그의 조카 ‘도코’ 1인2역을 능청스럽게 소화했다.

이날 김다비는 쇼케이스에 힘입어 실시간 검색어 7위까지 올랐다.

다양한 분야에서 인정받아온 김신영의 이력이 바로 <전국 노래자랑> 낙점 배경이다. 의외의 소식에 놀랐던 대중들도, 발탁 이유를 이해하며 김신영의 연착륙을 응원하는 분위기다. 이 가운데 김신영은 전임자 송해처럼 출연자들에게 배우는 자세로 프로그램을 이끌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개그부터 연기, 진행까지…만능 엔터테이너
공황장애 등 부침 이겨내고 ‘제3의 전성기’

김신영은 지난달 30일 KBS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송해 선생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며 “<전국 노래자랑>은 그동안 방송에 나와준 국민 여러분이 만들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에 흡수돼 배워가는 것 자체가 MC라고 하셨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제가 웃기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여러분의 호흡대로 가겠다”며 “전국 팔도에 계신 많은 분과 가까이에서 소통하고 향토 색깔을 알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자신이 MC로 발탁된 이유에 대해 “전국 어디에 갖다놔도 있을 법한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문턱이 낮은 사람이라 편하게 말을 걸 수도 있고 장난칠 수도 있다”며 “희극인 20년 차로 행사, 오디션 프로그램, 아이들 동요대회 등을 많이 진행했다. 손녀나 동생, 이모처럼 편안한 사람이라서 선정된 것 같다”고 말했다.

김신영은 “<전국 노래자랑> MC를 맡게 된 건 가문의 영광이자 오복 중 하나”라며 벅찬 감정을 전했다. 그는 “예전에 TV 버튼을 돌리던 시대에 주말 아침에 누워있으면 ‘딴따라 딴따’하는 프로그램 시그널 음악이 들려왔다. 프로그램과 같이 성장했는데 MC를 맡게 돼 정말 뭉클하고, 울컥한다”며 “제 건강과 국민 여러분이 허락해주실 때까지 열심히 하겠다. 제 인생 모든 것을 <전국 노래자랑>에 바치겠다”고 말했다. 

이어 “못 먹는 음식도 없어서 전국 팔도에서 여러분들이 힘겹게 농사 지으신 것도 맛있게 먹겠다.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뛰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고향서
첫 녹화

김신영이 진행하는 <전국 노래자랑>은 다음 달 16일부터 방송된다. 지난달 31일 KBS는 “김신영의 <전국 노래자랑> 첫 녹화가 9월3일 대구광역시 달서구에서 진행된다”고 밝혔다. 대구는 김신영의 고향이다. 그는 고향에서 <전국 노래자랑> 새 MC 신고식을 치르며 의미를 더했다.

<jeongun15@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김신영과 선배들 돈독한 우정 일화

김신영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다진 인연을 바탕으로 넓은 인맥을 자랑한다.

특히 여러 개그우먼과 돈독한 사이인 것으로 전해진다.

대표적인 인물이 정선희다.

김신영은 가장 존경하는 선배로 정선희를 꼽았다.

2005~2006년경, 김신영은 난독증 때문에 라디오 사연을 제대로 읽지 못해 라디오에 고정 게스트로 섭외됐다가도 쫓겨나는 일이 반복됐다. 

당시 <정오의 희망곡>은 정선희가 진행하고 있었다.

이때 김신영이 고정 게스트로 출연했는데, 정선희가 난독증으로 고생하던 김신영에게 많은 응원과 도움을 줬다고 한다.

김신영은 “(정선희의)신뢰와 격려 덕분에 난독증을 고치고 정식 라디오 DJ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는 정선희를 “내 인생의 설리반 선생님”이라 부를 정도로 믿고 따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송은이 역시 김신영이 존경하는 선배 중 하나다.

김신영이 촬영 중에는 각종 농담과 서슴없는 행동으로 무례하게 보일 때가 있지만, 촬영이 아닐 때는 송은이를 깍듯한 선배로 모신다.

자주 함께 활동하는 신봉선과 김숙은 “김신영이 카메라가 꺼지면 송은이에게 거의 군대 수준으로 예의를 갖춘다”고 증언했고, 송은이도 인터뷰에서 “신영이가 나를 존경하는 건 행동으로 느껴진다”고 밝혔다.

김숙의 열렬한 팬으로 실제 팬카페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했다는 유명환 일화가 전해진다.

김신영이 아직 ‘지망생’이던 시절, 팬카페에서 쪽지를 보내면 김숙이 직접 응원과 조언의 답장을 보내줬다.

이후 김숙은 KBS <개그콘서트> 출연자 집단 하차 사태 때 SBS로 둥지를 옮겼고, 김신영 역시 SBS 공채 코미디언으로 합격하며 둘은 <웃찾사>에서 선후배 관계로 만났다.

이후 김신영이 김숙에게 “저 기억 못 하세요? 저 팬카페에서 활동했던 개그사냥(닉네임)이에요”라고 말해 김숙이 알아보고, 굉장히 감동했다는 후문이다.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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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구 친윤(친 윤석열)계 핵심으로 분류됐던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장 대표는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들의 공개 갈등엔 ‘옹립의 정치학’이 숨어 있다. 특정 세력이 정변을 일으키거나 지도자 교체를 시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지도자 옹립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정당성·생존 본능이 적절하게 조화해야 한다. 그래서 복잡한 조건이 가미된다. 지도자 옹립을 위한 조건으로는 대체로 ▲적절한 상징성 ▲새 기득권이 될 주도 세력과의 조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 등을 들 수 있다. 아무나 못 갖는 지도자 조건 이 중 가장 어려운 숙제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새 지도자가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강하게 밀어붙이면, 새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새 지도자는 자신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생존 본능은 강한 권력 의지로 연결된다. 자신만의 새로운 비전을 실천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강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을 옹립한 주도 세력과 마찰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빈번하다. 왕은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고, 귀족은 이를 막으려고 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과 귀족은 끊임없이 정치적 다툼을 벌였다. 이 때문에 많은 왕이 교체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옹립된 지도자는 대체로 권위가 약하다. 옹립된 지도자는 지배 질서가 규정한 정통성이 약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옹립되는 과정 자체가 지도자로선 주도 세력에게 빚을 진 격이 되는 사례도 많다. 조선 태종은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낸 후 즉위했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적장자 승계를 중시하는 유교 질서에선 도저히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태조는 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악수를 뒀고, 사병을 혁파하려고 했다. 새 질서를 왕이 직접 부정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기득권 세력의 기반을 침범하려고 한 것이다. 태종은 적장자 대접을 받던 형 정종을 세자·왕으로 옹립한 후 형의 양자로서 왕위를 승계해 질서를 지키는 모양새를 갖췄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주축은 주도 세력이 동원한 사병이었는데, 태종은 이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하지만 그는 주도 세력 중 상당수를 정계에서 일시 퇴출시킨 후 사병을 혁파했다. 자신과 왕조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안전판을 확실하게 확보한 것이다. 경제적 이권까지 거둬들이려고 해선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태종은 공신들이 저지르는 각종 비행을 적당한 선에서 눈감아줬다. 태종의 킹메이커 하륜은 도성 안에 조성된 신덕왕후의 능이 이장되자, 주변의 좋은 땅을 선점하기 위해 사위들을 동원했다. 하륜에겐 지금도 유능한 신하·부정부패의 상징이란 평가가 함께 따라다닌다. 조선 중종도 형 연산군 폐위 이후 옹립된 임금이었다. 엉겁결에 왕위에 올라 큰 빚을 졌기 때문에 중종은 공신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핵심 공신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이후 중종은 조광조·김안로 등 대리인을 내세웠다가 토사구팽하는 정치술을 반복했다. 너무 유능해도, 너무 무능해도 안 된다 출마설 도는 주호영·윤한홍의 장 직격 조광조 일파는 중종이 한밤중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숙청됐다. 김안로는 아들의 초례가 예정된 날 체포됐다. 주도 세력으로선 왕이 너무 유능하거나 정치에 밝으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너무 무능하거나 막 나가도 안 된다. 지나치게 막 나가서 폐위된 대표적인 왕은 고려 충혜왕이었다. 충혜왕은 아버지 충숙왕이 양위해서 즉위했다. 당시 고려 왕은 원나라 사신이 하루아침에 폐위해 귀양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권위가 없었다. 고려 친원파의 권력은 왕보다 더 강했다. 그리고 고려엔 원나라 제2황후 기황후의 오빠 기철이 있었다. 고려 왕은 정상적으로 즉위하더라도 원나라·친원파가 사실상 인준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즉위하는 임금마다 옹립된 지도자나 다름없었다. 충혜왕은 즉위 후 아무나 성폭행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성폭행 대상 중엔 서모 경화공주도 있었다. 이 사실은 원나라 사신에게도 알려졌다. 결국 충혜왕은 폐위돼 귀양 가던 중 사망했다. 한편으로 충혜왕은 폭력배들을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양성한 후 권문세족이 독점하던 유통구조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려고 했다. 아울러 권문세족의 사유지를 혁파하려 하는 등 이들의 경제기반을 뒤흔들려고 했다. 충혜왕이 폐위된 결정적인 계기는 기철의 건의였다. 원나라는 기철의 건의를 받아들여 충혜왕을 폐위했다. 충혜왕은 폐위되던 순간 사신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12·3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 대부분은 소장파 성향의 초·재선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당에 비상계엄 관련 사과와 당의 혁신을 요구했기 때문에 딱히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원조 친윤’ 중 1명으로 평가받는 국민의힘 3선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에게 비상계엄 관련 사과를 요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윤 의원은 지난 5일 진행된 국민의힘 ‘이재명정권 6개월 국정평가 회의’ 도중 장 대표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인연과 골수 지지층의 손가락질을 다 벗어던지고, 계엄 굴레에서 벗어나자”고 요구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비상계엄이 잘못됐단 인식을 아직도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계엄을 벗어던지고, 국민께 어이없는 판단의 부끄러움을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앞에서 사과 요구 이는 장 대표가 지난 3일 비상계엄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려던 계엄이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었다. 장 대표는 이날 윤 의원의 비판을 들은 후 고개만 살짝 숙인 채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국민의힘 6선 주호영 국회부의장도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은 지난 8일 대구 지역 언론인과의 정책토론회 중 장 대표를 일컬어 “자기 편을 단결시키는 과정을 밟다가 중도가 도망간다면 잘못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장 대표는 ‘12월3일까진 지켜봐 달라’고 말했고, 그 이후엔 민심에 따르는 조치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아서 당내 반발이 많다”고 강조했다. 주 부의장은 “윤 전 대통령은 폭정을 거듭하다가 탄핵당했다”며 “비상계엄도 김건희 여사 특검을 막으려던 것이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라는 등 윤 전 대통령도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과 윤 의원은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출마 가능성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 부의장은 이날 대구시장 출마 가능성에 대해 “준비는 많이 해왔고, 이른 시일 안에 의견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윤 의원은 지난 2021년 경남도지사 출마 의사를 내비쳤다가 입장을 선회했던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지난 2월 공개한 명태균씨의 전화 통화 녹취엔 “윤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윤 의원의 경남도지사 출마를 막았다”는 취지의 대화가 공개됐다. 지방선거를 약 6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주 부의장처럼 출마 가능성을 암시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방선거는 국회의원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두는 방법엔 ▲지역구 내 지방선거 공천 ▲중앙정치에 지역 이해관계 반영 등이 있다. 지방선거에선 국회의원이 공천·조직 동원 등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민주당 이상헌 의원은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재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박순자 전 의원도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지난 3월 징역형을 확정받았다. 힘 못 쓰는 2가지 이유 국민의힘 대표를 지냈던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지난 2월 <일요시사>와 만나 “국민의힘은 김종인 선거대책위원장·이준석 대표 체제 외엔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실제로 국민의힘은 지난 2016년 이후 지난 2022년 대선·지방선거 외엔 참패를 거듭했다. 국민의힘이 선거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로는 크게 2가지가 거론된다. 하나는 자체적으로 선거 후보를 양성하는 게 아니라, 선거가 임박해 외부 명망가를 데려와 주요 선거 후보로 옹립하는 특성이다. 다른 하나는 영남·강원 등 핵심 텃밭에 자리 잡아 중앙정치보다 지역구 기반 다지기에 집중하는 정치인 집단이다. 세간에선 이들을 일명 ‘언더 찐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선거 참패가 이어지면, 중앙정치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도 줄어든다. 영향력이 줄면, 지역의 이익을 중앙정치에 반영하기 어렵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둘 방법·영향력을 모두 잃는다는 것은 언더 찐윤 의원들에게 매우 치명적이다. 아무리 중앙정치·전국 단위 선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당이 정권 획득 가능성이 아예 없는 수준으로 추락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그 정당에 소속된 국회의원과 이해관계를 교환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21세기 이후 국민의힘에서 배출한 대선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 ▲홍준표 전 대구시장·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다. 이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전국적 인지도 ▲정치적 상징성 ▲낮은 당 장악력 등이다. 대선 출마 당시 “당 장악력이 낮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던 대선후보는 이 전 총재·박 전 대통령밖에 없었다. “당 장악력이 낮다”는 명제는 국민의힘 친윤계 의원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당 장악력이 높은 대통령·대권주자는 의원들과 굳이 이익을 주고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은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대표 등 수도권에 기반해 중도 공략 의지가 강한 정치인과의 불화가 잦다. 이들과 이해관계·성향·기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많아서 당권을 다투거나 알력이 있을 가능성도 큰데, 결국 화합하기 어렵다. 살기 위해 충돌하는 장 VS 친윤 “우리끼리 총구 안 돼” 의견 고수 언더 찐윤 의원들이 언론 노출을 꺼리는 성향도 ‘당 장악력이 낮은 적절한 대권주자’를 선호하는 현상과 맞물린다. 언더 찐윤의 관점으로 보자면, 윤 전 대통령은 자멸해서 사라졌다. 한 전 대표·안 의원은 수도권 엘리트 성향이 강하다. 지난 8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은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을 청산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런 상황에서 두드러진 사람이 바로 장 대표였다. 장 대표는 정치 경력이 짧으면서도 한 전 대표와 결별한 이력이 있다. 지난 2월엔 백봉신사상을 수상할 정도로 신사적 이미지도 강했다. 국민의힘 내 강성 보수 성향 당원들은 장 대표를 선택했다. 이후 장 대표는 범보수 대권주자로 주목받았다. 코리아정보리서치가 지난 6일부터 이틀 동안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범보수 차기 대선후보 적합도 여론조사에서도 21.3%의 지지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겐 정치적 기반이 없다. 대권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다. 대선에 출마하지 않더라도,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 없으면 정치 생명을 길게 유지할 수 없다. 장 대표는 장외집회 개최 위주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장외집회에선 이재명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하는 강성 발언을 주로 내놨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 장외집회에서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불법이었고, 국민의힘은 그 불법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가 강경 보수 성향 당원의 비난을 받았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김민수 최고위원은 국민의힘을 강경 보수의 길로 이끄는 ‘투톱’이다. 그런데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둔 시점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지방선거는 이들의 정치적 삶과 죽음을 좌우할 가능성이 있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의원들이 충돌하는 결정적인 지점은 살고자 하는 의지다. 윤 의원이 장 대표를 비판했다는 사실은 “국민의힘 구 친윤계가 장 대표를 통제불능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으로 연결된다. 강경 보수 성향이 짙어지면, 선거의 캐스팅보트로 인식되는 중도층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친윤계 의원들에겐 당과 개인의 이익이 모두 줄어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조 의원은 지난 8월 <일요시사>와 만나 “강경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선택지는 어차피 국민의힘밖에 없다”면서 중도 공략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이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친윤계 의원들이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한 이유와 맞물릴 가능성이 크다. 장 대표의 실질적 임기는 지방선거 결과에 달렸다. 따라서 장 대표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 정도다. 장 대표는 이 안에 강경 보수 세력을 자신의 독자적인 기반으로 삼으려 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옹립하는 세력과 옹립되는 수장은 각자의 삶과 죽음이 걸려 있어 긴장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장 대표에 대해선 “국민의힘, 나아가 보수 진영의 진정한 1인자가 될 만한 기반이 부족하다”는 다수의 분석이 나온다. 장 대표와 친윤계의 이해관계는 여기서 엇갈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남은 6개월 빠듯한 시간 새누리당 정옥임 전 의원은 지난 9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주 부의장은 신중한 사람이지만 현실감각이 굉장히 빠르다”며 “장 대표는 화장을 지운 여자의 얼굴처럼 다 보여줘서 장 대표 체제 종언은 이제 뚜껑만 열리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게 남은 시간은 불과 6개월이다. 부족한 것은 결국 시간이다. 하지만 장 대표는 윤 의원·주 부의장의 비판에 “우리끼리 총구를 겨눠선 안 된다”며 “싸워야 할 대상은 이재명 독재정권”이라고 반박했다. 장 대표는 흔들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 장 대표와 구 친윤계는 과연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