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돈보다 연기 오영수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2.01.17 12:25:04
  • 호수 13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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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과 고집으로 50년 한 우물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뇌종양에 걸린 칠순 노인이자 오징어 게임 참가번호 001번. <오징어 게임> 오일남은 오영수 배우에게 제79회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선사했다. 한국 배우가 골든글로브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은 건 오 배우가 처음이다. 

제79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한국시각 10일 오전 11시 미국 캘리포니아주 베벌리힐스 베벌리 힐튼 호텔에서 열렸다. 이날 <오징어 게임>의 오일남 역할을 맡은 배우 오영수는 <테드 브래소>의 브렛 골드스타인, <더 모닝 쇼>의 마크 듀플라스, 빌리 크루덥, <석세션>의 키에란 컬킨 등과 경합해 남우조연상의 주인공이 됐다. 

인종차별 깬 
78세 노배우

오영수 배우는 “수상 소식을 듣고, 생애 처음으로 내가 나에게 ‘괜찮은 놈이야’라고 말했다”며 “이제 ‘세계 속의 우리’가 아니고 ‘우리 속의 세계’”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문화의 향기를 안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슴 깊이 안고, 세계의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아름다운 삶을 사시길 바란다. 고맙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그간 골든글로브는 백인 위주의 배타적이고 보수적 문화를 상징하는 최후의 보루와도 같았다”며 “오영수 배우의 수상은 골든글로브가 이제 문호를 넓히지 않으면 존립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고민이 반영된 결과로도 보인다”고 전했다.

이어 “<오징어 게임>에 작품상이나 남우주연상을 주지 않은 것은 아직도 ‘고집’을 완전히 놓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외신의 반응도 뜨거웠다. 로이터 통신은 “할아버지 오영수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상을 차지했다”고 전했고, CNN 방송은 “<오징어 게임> 스타 오영수가 역사를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포브스는 “독창적인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순식간에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인기 드라마라는 명예를 얻었고 극중 오영수는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였다”며 “(골든글로브 수상에 따라)78살 그의 연기 이력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골든글로브를 수상한 뒤 오 배우는 한국 최초 수상자로 인터뷰 제안이 들어왔지만 “내일 연극 공연이 있다”며 인터뷰 제안을 거절했다. 지난달 초 열린 <라스트 세션> 기자간담회에서 “제가 지금까지 50년 이상 조용한 모습으로 연기자 생활을 해왔는데 <오징어 게임> 이후 갑자기 내 이름이 여기저기 불리게 되더라”고 말했다.

당시 오 배우는 초심을 잃지 않으려 연극 <라스트 세션>에 출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는 “그런 분위기에 젖어 있어서 나름대로 자제심을 가지겠다 생각하던 차에 이 작품에 출연하게 됐다”며 “(그동안)지향해온 내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가게끔 해준 동기가 돼준 것 같아서 뜻깊게 생각한다”고 말해 무대와 관객을 만나겠다는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오 배우가 <오징어 게임> 출연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MBC 예능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그는 “<오징어 게임>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놀이의 상징성을 통해서 사회의 부조리한 현상을 찾아내는 감독의 혜안을 좋게 생각해서 참여하게 됐다.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은 <남한산성> 제작 때도 출연 제의를 줬었는데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참여하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오징어 게임> 제안을 주셔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황 감독은 지난해 SBS와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오영수 배우는 과거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의 이미지가 크게 남아 있다”며 “어느 날 오영수 배우가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 갔다. 무대 연기를 직접 보고 캐스팅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오 배우에게 <오징어 게임> 촬영은 어린아이의 삶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는 “쉬는 시간에 게임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놀기도 하고 즐거운 촬영이었다”고 촬영 당시를 기억했다.

새 역사 쓴 ‘깐부 할아버지’
골든글로브 첫 한국인 수상

오 배우가 <오징어 게임> 촬영 현장이 즐거웠다고 기억한다면, 관객들은 오영수의 오일남을 ‘목숨을 건 게임에서 원리·원칙을 지키는 사람’ ‘사람들이 패닉일 때 혼자 해맑은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이처럼 세계적 깐부(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이를 뜻하는 은어) 할아버지 오일남은 <오징어 게임>에서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오징어 게임>에서 오일남은 성기훈과 구슬치기를 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럼 자네가 날 속이고 내 구슬 가져간 건 말이 되고? 깐부끼리는 네 거 내 거 없는 거야. 그동안 고마웠네. 자네 덕분에 잘 있다가 가네.” 오 배우의 골든글로브 수상은 인종, 언어의 벽을 허문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바로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우물을 판 사람에게 보내는 찬사다.

그는 25세에 군 제대 후 취업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극단 단원이었던 친구의 권유로 1963년 극단 광장 단원으로 연극인의 삶을 시작했다. 극단 자유 단원을 거쳐 1987년에는 국립극단 단원이 됐다. 반세기 넘는 세월을 연극배우로 살아온 것이다. 

국립극단에서는 1987년부터 2010년까지 간판 배우로 활동했다. 작품으로는 1996년 연극 <혼수없는 여자>, 1997년 연극 <태>, 2001년 연극 <피고지고 피고지고>, 2008년 연극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 2010년 연극 <리어왕>, 2011년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 등 200여편 등이 있다.

그러나 일반 대중과의 접점이 많지는 않았다.

그의 짧은 머리 스타일 때문일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단역을 맡거나 주연을 하더라도 스님 역할이었다. 1998년 영화 <퇴마록>에서는 단역인 노 신부역을 맡았고, 2003년 영화 <동승>에서는 큰스님, 2003년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도 역시 노스님 역할을 맡았다. 

다수의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의 군 검사 단역과 1983년 KBS1 <전우>의 종군 기자 단역으로 시작했다. 2009년 MBC의 <선덕여왕>에서는 ‘월천대사’를 연기했는데, 승려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시청자들이 오 배우를 실제 승려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흔들림 없는 
연기 내공

오 배우는 1981년부터 지난해 <오징어 게임>까지 총 14개의 드라마 활동을 했다.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개봉했을 당시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오 배우는 “영화는 기회가 와도 하고 싶은 역할이 없었다. 연극이나 영화나 같은 예술 아닌가? <철도원> 같은 영화를 우리 나이에 맞게 왜 안 만드는지 모르겠다”고 전하기도 했다. 


오 배우의 삶 전체가 연극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오징어 게임>에서 보이는 오일남은 이 모든 배경에서 완성된 것이다. 

그렇다고 골든글로브 수상이 그의 첫 번째 수상은 아니다. 오 배우는 1979년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 1994년 백상예술대상 남자연기상, 2000년 한국연극협회 연기상을 받았다.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기 활동이 처음부터 탄탄대로였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연극배우는 배고픈 직업이라는 인식이 있다. 1960년대 극단은 경험이 없어도 들어갈 수 있지만 몇 년 동안은 청소와 잡일만 도맡아 해야 했다. 

이런 생활을 지속하면 경제적인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오 배우는 40~50대 때 경제적으로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부업으로 EBS에서 성우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안정적인 연기력과 중저음의 목소리는 목소리 연기를 하는 데 큰 보탬이 됐다.

이 시기가 모두 지나고, 그가 안정적으로 연기에 몰두할 수 있었던 시기는 국립극단 단원이 되던 해부터다. 국립극단 단원은 공무원이기 때문에 안정적인 월급을 받을 수 있다. 

오 배우는 “국립극단 단원이 된 이후에나 생활이 안정적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었다. 덕분에 결혼도 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오 배우에 대한 주변 배우들의 평은 어떨까. <오징어 게임>에서 함께한 배우들은 그를 ‘젊은 배우’라고 불렀다. 이에 대해 오 배우는 “‘나이가 들면 열정이 사라진다’는 말이 있지 않나. 나만 나이를 먹고 다 젊으니 그 속에서 내가 존재하려니까 과장되게 젊은 척을 했다”고 겸손을 표했다.  

“나에게 있어 
연극은 종교”

기훈 역할의 이정재 배우는 오 배우의 수상소감을 듣고 “일남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선생님과 함께했던 장면 모두가 영광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깐부로부터”라고 재치 있는 축하를 전했다. 상우 역할을 맡은 박해수 배우 역시 오 배우의 칭찬을 이어갔다. 

<한경 연예>의 인터뷰에서 박해수 배우는 “오영수 선생님은 국립극단에 있었을 때부터 봐왔고 동경하던 분이다. 그런 선생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오 선생님은 현장에서 남다른 무게감을 느끼고 계셔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라스트 세션>에 함께 출연 중인 이상윤 배우는 오 배우를 위해 준비한 축하 파티를 열었다. 그는 자신의 SNS에 오 배우가 분홍색 왕관을 쓰고 케이크를 안고 있는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오태근 한국연극협회 이사장도 “연극계의 큰 경사”라면서 “연극배우들이 선생님의 수상을 보고 큰 희망을 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환영했다.

이처럼 오 배우의 주변은 오랜 시간 그의 연기를 봐온 사람이 많다. 그에게 연극은 어떤 의미일까. 오 배우는 “나에게 연극은 종교”라며 짧은 말로 정의했다. 

<라스트 세션>의 출연자인 신구 배우는 “오영수와 1960년대 후반부터 알고 지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차분히 실력을 쌓는 모습은 똑같다”고 전했다. 연극 <3월의 눈>에서 오 배우와 함께 작업한 희곡 작가 배삼식은 “무대 위에 서는 것을 기쁨으로 누리는 배우”라고 그를 설명했다.

이를 증명하듯, <라스트 세션>의 첫 공연이 끝나자 인사를 하러 나온 오 배우에게 관객 330명은 일제히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 그곳에는 깐부 할아버지가 아닌 <라스트 세션>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존재했다. 

만석이 된 객석, 환호하는 사람들. 이에 기쁜 감정을 표출할 법도 하지만, 오 배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직 무대다. 기자회견도 마다한 그는 “무대로 돌아가겠다. 이 연극을 위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소중하고 행복하다”고 말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배우가 한 작품에서 큰 흥행을 하거나, 깊이 몰두하면 역할에 빠져나오기 힘들 때도 있다. 아니면 배우가 다른 연기를 하고 싶어도, 관객들이 과거의 역할로 계속 기억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 배우에게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다.

이것이 50년 이상 200명의 인생을 살았던 오 배우의 능력이자, ‘연극은 종교’라고 말한 오 배우의 말이 이해되는 부분이다.

50년 넘게 200명 인생 연기
“연극 집중이 가장 행복해”

오 배우의 연극 철학은 일상 속에서도 존재한다. <오징어 게임>에서 깐부로 인기를 얻은 오 배우는 치킨 프랜차이즈 광고모델 제의를 받았다.

광고모델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다. 드라마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깐부’를 광고에 쓰면 작품의 의미를 훼손한다는 것이 오 배우의 답변이었다. 정말 오영수답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의 경력은 아무리 열정으로 최선을 다해도 체력이 없으면 쌓기 불가능한 일이었다. 60년간 끊이지 않은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오 배우의 비결은 무엇일까. 오 배우는 10대 때부터 끊임없이 ‘평행봉’을 이용해 체력 관리를 했다고 한다.

오 배우는 “지금도 하루에 평행봉을 50번 한다”며 “젊었을 때는 이사를 자주 다녔다. 그때 우선 그 동네에 평행봉이 있나 없나 봤다. 인생의 동반자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가족끼리 함께 식사하며 얘기를 나누는 순간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뽑았다.

오 배우는 “가족끼리 같이 앉아 식사하면서 아이는 아이대로 자기 이야기를 하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대로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사는 가정이 가장 행복한 가정이 아닌가”라고 전했다.

탄탄한 연기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는 오 배우에게도 고민이 있을까. 오 배우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고민은 없고 염려라고 할까. 가족과 같이 이렇게 문제없이 잘 살아가는 것. 염려하면서 기대하면서 바람”이라고 전했다.

이어 “젊었을 때는 어디 산속을 타다가 꽃이 있으면 처음에는 그 꽃을 꺾어 간다. 내 나이쯤 되면 그냥 그대로 놓고 온다”며 “그리고 다시 가서 본다. 그게 인생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그냥 있는 그 자체를 놔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 배우는 “소유욕 같은 것은 별로 없다. 이제 딸이 자기 뜻대로 편안하게 살게끔 해주고 싶다”며 “딸한테는 우리 집사람한테 못 해줬던 일을 하나씩 갖춰가면서 해주고 싶다”고 밝혔다.

오 배우는 1975년 30대의 나이로 연극 <파우스트>에서 주인공 파우스트를 맡았다. 당시 <파우스트>는 어느 극단에서 올려도 망한 적 없이 큰 흥행을 하는 작품이었다.

연극을 올리기 전, 극단 자유 대표였던 김정옥은 오 배우에게 파우스트보다 악마 메피스토가 더 맞을 거라고 조언했다. 극중 파우스트의 나이는 많은데, 오 배우는 30대였기 때문이다. 

연출자는 오 배우의 파우스트 연기에 문제 삼지 않았다. 파우스트와 악마 메피스토 사이에서 무슨 역을 할지 고민했던 그의 선택은 파우스트였다. 주연을 하고 싶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소유욕 없다
지금 이대로

오 배우는 당시를 회상하며 “지구본을 잡고 독백하는 장면에서 20초가량 의식을 잃었다. 연습하면서 탈진해서 몸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오만과 자만심이 낳은 결과였다고 생각한다”며 “나는 항상 ‘나이 들어서 파우스트를 연기하고 싶다’고 말하고 다닌다”고 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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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 올린 이재명호 눈앞 암초들

닻 올린 이재명호 눈앞 암초들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21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비상계엄 사태와 대통령 탄핵으로 치러진 조기 대선서 국민은 정권교체를 선택했다. 3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뤄냈지만 이재명 대통령의 앞길이 마냥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지난 3일 치러진 6·3 조기 대선서 이재명 신임 대통령은 득표율 49.42%로 역대 대통령 중 최다 득표수를 기록했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는 8.34%,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는 0.98%를 각각 기록했다. 넘지 못한 과반의 벽 잠정 집계된 이번 대선 투표율은 지난 20대 대선보다 2.3%p 높은 79.4%였다. 이는 지난 1997년 투표율 80.7%를 기록한 15대 대선 이후 28년 만에 가장 높은 대선 투표율이다. 이를 두고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내란 세력을 심판하기 위한 국민의 뜨거운 의지”라고 입 모아 말했다. 지난 20대 대선서 양 후보 간의 득표율 차이는 0.7%p이었던 만큼 이번 역시 두 후보 간의 격차가 관전 포인트로 제시됐다. 지난 3일 지상파 방송 3사(KBS·MBC·SBS)가 한국방송협회와 함께 실시한 대선 출구조사에 따르면 이재명 후보는 51.7%, 김문수 후보는 39.3%로 두 후보간의 격차는 두 자릿수로 크게 벌어졌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대통령의 과반이 예상됐지만, 실제 투표함을 열자 김 후보가 40%대로 진입한 반면 이 대통령은 50%를 넘지 못했다. 두 사람 간의 격차는 289만표인 8.27%p였다. 한 민주당 초선 의원 역시 출구조사 발표 직후 <일요시사>와 만난 자리서 “4%만 더 얻어서 55%로 안정 궤도를 유지하면 좋았을 것”이라며 내심 아쉬움을 비쳤다. 민주당은 선거 기간 동안 공을 들인 TK(대구·경북)서도 약세를 보였다. 선거관리위원회 개표 마감 결과 대구서 김 후보가 67.62% 득표한 반면, 이 대통령은 23.22%에 그쳤다. 경북서도 김 후보는 66.87%, 이 대통령은 25.52%로 지난 20대 대선과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초유의 사태인 비상계엄으로 치러진 조기 대선임에도 격차가 크지 않고 보수 지역서 30% 벽을 넘지 못했다는 한계점이 제시된다. 40% 지지율을 등에 업은 국민의힘과 거대 여당인 민주당의 충돌은 불가피해 보인다. 이전까지는 민주당이 과반 의석수로 법안을 통과시키면 대통령 혹은 국무총리가 거부권을 행사해 국회로 되돌리는 방식이었지만, ‘찐명’으로 꼽히는 김민석 전 최고위원이 국무총리로 내정된 마당에 더는 국민의힘이 손쓸 방법이 없다. 빗나간 출구조사…TK도 20%대 ‘뚝’ 여대야소 정국 ‘동물 국회’ 재연? 이번 하반기 국회가 역대급 ‘혐오 정치’로 얼룩질까 벌써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이 대통령은 거듭 통합을 강조했다. 지난 4일 국회서 열린 취임 선서식서 “분열의 정치를 끝낸 대통령이 되겠다”며 “국민 통합을 동력으로 삼아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선서 누구를 지지했든 크게 통합하라는 대통령의 또 다른 의미에 따라 모든 국민을 아우르고 섬기는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도 말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국민 대통합을 위해 대통령 취임 후 첫 오찬 메뉴를 비빔밥으로 준비했다. 우 의장은 “지역과 세대, 계층, 다양한 의견이 모두 대한민국이고, 서로 조화를 이루고 화합하도록 이끄는 통합력이 도약의 동력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설명했다. 머뭇거릴 새도 없이 이 대통령은 곧바로 업무를 시작했다. 함께 국정을 운영할 내각 구성도 시급하다. 당분간은 윤석열 전 정부 출신인 각료들과 한 지붕 밑에서 일을 해야 한다. 조기 대선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 또한 정부 출범 76일 만에 전원 ‘문재인의 사람들’로 불리는 국무위원과 국무회의를 진행했다. 이날에 앞서 문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으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진행했는데, 이때 통일·외교·안보 기조가 다른 박근혜정부 인사가 함께였던 만큼 제대로 된 국정 운영이 어려웠다는 푸념도 들려왔다. 이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새 내각 구성 전까지는 ‘윤석열의 사람들’과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 국무총리를 시작으로 각 부처 장관 등 주요 인사들을 검증하기 위한 인사청문회 등 절차가 남아 있어 내각 전부를 임명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측된다. 어수선한 여의도 안팎 국무위원 선출을 위한 인사청문회 과정도 험난할 전망이다. 지난 3년간 이동관·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 박장범 KBS 사장 후보까지 피 튀기는 청문회가 밤낮으로 이어졌다. 공수교대가 이뤄진 이번 청문회서 국민의힘이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을 전망이다. 이 대통령을 둘러싼 다섯 건의 재판도 주목된다. 김혜경 여사의 법인카드 유용 논란과 대선 정국서 불거진 아들 도박 의혹도 논란이지만, 아직 털어내지 못한 본인의 재판들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법조계 등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현재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파기환송심 ▲대장동 배임 및 성남FC 뇌물 의혹 1심 ▲경기도 법인카드 유용 혐의 1심 ▲불법 대북송금 혐의 1심 ▲위증교사 혐의 항소심 등 총 5개의 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 김용태 비상대책위원장은 투표 하루 전날 이 대통령의 사법 리스크를 꼬집으며 “설사 이재명 후보가 당선된다고 하더라도 재판이 예정대로 열리고 대법원의 유죄 취지 파기환송 결정에 따라 벌금형 100만원 이상의 판결을 받을 경우, 두 달 안에 대선을 또다시 치러야 하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가장 먼저 예정된 재판은 오는 18일에 열리는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이다. 이는 지난달 1일 대법원이 1심의 무죄 판결을 엎고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사안이다. 만일 재판부가 예정대로 사건을 처리한다면 대법원의 파기환송 결정에 따라 유죄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100만원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피선거권이 박탈되는데, 이때 대통령직 유지가 가능한지에 대한 논란이 예상된다. 아울러 대통령의 불소추특권을 다루는 헌법 제84조의 해석 논란도 다시 불붙을 예정이다. 막 내리는 용산 시대 민주당은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뒀다. 대선 전부터 민주당은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공표죄의 구성 요건서 ‘행위’를 삭제하는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거대 여당인 민주당이 의석수로 법안을 처리할 수 있지만 국민의힘이 주장하는 ‘입법 독재’ 프레임을 우려해 속도 조절에 나섰다. 윤 전 대통령이 개방한 청와대도 풀어야 할 숙제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 2022년 “청와대를 국민께 돌려드리겠다”며 영빈관과 녹지원, 상춘재 등을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없이 바로 업무를 시작하는 만큼 우선은 청와대 수리를 기다리며 용산 대통령실을 사용할 예정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2일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 출연해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면 용산으로 가는 게 맞다. 대통령실 이전은 큰 비용이 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고생도 심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빨리 청와대를 수리해서 그 (수리) 기간만 (용산에) 있다가 청와대로 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대선 예비 후보이던 시절에도 대통령 집무실에 대한 질문에 “상당히 고민이다. (용산 대통령실이) 보안 문제가 매우 심각해 대책이 있어야 되는 것은 분명하다”면서도 “지금 당장 어디 딴 데로 가기가 마땅치가 않다”고 밝혔다. 이어 “국민 혈세를 들여 미리 준비할 수도 없다. 그래서 보안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일단 용산을 쓰면서 다음 단계로 청와대를 신속하게 보수해 그 길로 들어가는 것이 제일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은 윤 전 대통령이 사용하던 용산 집무실 환경에 “황당무계하다”고 밝혔다. 지난 4일 용산 대통령실서 가진 첫 기자회견서 “꼭 무덤 같다. 아무도 없다”며 “필기도구를 제공해 줄 직원도 없다. 컴퓨터도 없고 프린터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직업 공무원 전원을 복귀시켜버린 모양”이라며 “곧바로 다시 원대복귀 명령을 해서 제자리로 복귀시켜야 할 듯싶다”고 덧붙였다. 청와대 보수가 끝나는 대로 이 대통령이 집무실을 옮길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파기환송 선거법, 재판부 의지에 달려 청와대 복구, 극우 반격…험난한 여정 대통령 집무실이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된 만큼 보안과 경호 등이 늘 지적 대상이 됐다. 관련해 한 민주당 관계자는 “청와대가 100% 개방된 건 아니기 때문에 빠르게 보안 작업을 거친다면 올해 안에는 (청와대를) 집무실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정부종합청사 등 제3의 장소에 임시로 집무실을 마련하는 방안에는 선을 그었다. 그는 JTBC와의 인터뷰서 “국정 책임자의 불편함 또는 찝찝함 때문에 수백억, 수천억을 날리는 게 말이 되느냐”며 “잠깐 (용산서) 조심해서 쓰든지 하고 청와대를 최대한 빨리 보수해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끝나지 않은 극우와의 싸움과 테러 위협도 현재 진행형이다. 계엄 옹호, 탄핵 반대 그리고 부정선거를 주장해 온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와 자유통일당 중심의 극우 성향 단체는 이번 대선 결과에 불복해 선동을 이어갔다. 광화문서 지지자들과 개표를 기다리던 전 목사는 출구조사 결과가 공개되자 “선거관리위원회에 쳐들어가자” “불법 선거, 부정 투표”라고 소리쳤다. 황교안 전 국무총리 역시 부정선거론에 다시 불을 지피고 있어 대선이 끝난 후에도 잡음은 이어지고 있다. 황 전 총리는 용인의 한 사전투표소의 관외 회송용 봉투서 이미 기표된 용지가 나온 사례를 언급하며 “지난 대선서도 같은 현상이 발생했고 문자 그대로 부정선거의 스모킹 건”이라며 “그럼에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자의 자작극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선관위 시스템이 얼마든지 조작 가능해서 투표 안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만들고 한 사람을 안 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국가정보원 조사 결과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런 선관위를 도저히 믿을 수 있겠나”라며 “선거가 아니라 사기”라고 말했다. 현실 부정 테러 위협 이와 관련해 여권 관계자는 “망상에 불과하다. 갈라치기 정치의 원인”이라고 일축하며 “정치 성향이 맞지 않는 분들께선 지금 시국이 어수선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이번 대선은 내란 세력을 심판한 국민의 선택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