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여행지 ④정선 삼탄아트마인

폐광서 피어나는 예술의 향기

한때는 기계 소리 가득한 산업 현장이었다. 당시 이름은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1964년 문을 연 뒤 수십 년 동안 광부들의 피땀으로 대한민국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정부의 석탄 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생산량이 감소하다, 2001년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2013년 옛 삼척탄좌 정암광업소가 150여개국에서 수집한 예술품 10만여점을 갖춘 복합 문화 예술 단지 ‘삼탄아트마인(samtan art mine)’으로 다시 태어났다.

강원도 정선, 아름다운 함백산 자락에 자리 잡은 삼탄아트마인 주차장에 들어서면 철탑이 뿔처럼 비쭉 솟아난 야트막한 건물이 보인다. 삼척탄좌 시절 종합사무동이던 건물은 현재 삼탄역사박물관과 마인갤러리, 아트레지던스룸 등을 갖춘 삼탄아트센터로 이용한다. 주차장에서 보면 단층 같지만, 언덕에 기댄 건물 4층이다. 여기서 표를 끊고 아래로 내려가며 관람하는 구조다.

옛 모습 그대로

주차장에서 연결되는 입구로 들어가면 탄가루가 범벅된 얼굴에 선량한 눈동자가 빛나는 광부의 대형 초상화가 관람객을 맞는다. 이곳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한 조선족 화가 권학준의 작품이다. 광부의 초상화가 있는 4층은 로비와 매표소, 국내외 작가가 상주하며 창작 활동을 하는 아트레지던스룸 등으로 운영한다.

옛 모습 그대로인 계단을 따라 한 층 내려가면 삼탄역사박물관과 현대미술관(Contemporary Art Museum, CAM)이 나온다. 삼탄역사박물관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작은 도서관만 한 공간에 가득한 서류 더미다. 수십 년간 모은 직원 급여 명세서와 건강관리표 등 각종 행정 문서가 지나간 시대를 증언한다. 옛 사무 공간에 마련된 현대미술관에서 시즌마다 다양한 미술품을 만날 수 있다.

2층에서 1층으로 이어지는 마인갤러리는 탄광 시설이 작가의 손을 거치며 새롭게 태어난 전시 공간이다. 광부 3000여명이 3교대로 이용하던 샤워실은 몇 가지 오브제와 그림을 더해 독특한 전시실이 됐고, 작업용 장화를 씻던 세화장은 다양한 격자무늬 발판 아래 조명을 달아 거대한 설치 작품으로 거듭났다. 광부들이 옷을 갈아입던 갱의실에는 삼탄아트마인을 일군 고(故) 김민석 관장이 30여년간 150여개국에 다니며 모은 수많은 미술품과 오브제를 보관한다.


아트숍과 체험 공간인 예술놀이터가 있는 1층은 옛 석탄 조차장(열차를 잇거나 떼어내는 곳)이 변신한 레일바이뮤지엄으로 연결된다. 삼척탄좌에서 캐낸 모든 석탄이 모이던 곳으로, 높이 53m에 이르는 권양기(광부와 석탄을 운반하는 산업용 엘리베이터)를 비롯한 설비가 거대한 뼈대를 드러낸다. 엘리베이터 앞 거대한 게시판에 ‘우리는 가정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그 속에 직장을 사랑한다’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이렇듯 옛 모습을 간직한 레일바이뮤지엄은 영화와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의 단골 촬영지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면 널찍한 마당에 여러 조형물이 들어선 ‘기억의 정원’이다. 연탄으로 쌓아 올린 탑, 광부의 실루엣을 담은 철근 작품, 석탄을 실어 나르던 탄차 등이 옛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기억의 정원 끄트머리에 군부대 막사를 닮은 제2권양탑 건물이 눈에 띈다. 왠지 낯익어 표지판을 보니, 한류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다. 코로나19 발생 전만 해도 이걸 보기 위해 수많은 해외 관광객이 삼탄아트마인에 다녀갔다고 한다.

광부의 피땀으로 고도성장 이끌어
2013년 복합 문화 예술 단지로

제2권양탑 옆, 지하에서 작업하는 광부들에게 공기를 공급하던 중앙압축기실에는 원시미술관이 들어섰다. 원시미술이란 이름 그대로 선사시대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미술을 가리킨다. 유럽의 동굴벽화와 아프리카의 민속 조각, 고대 인도의 석상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커다란 기계장치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세계 각국의 원시미술 작품이 중앙압축기실에서 공급하던 공기처럼 관람객에게 신선한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는다. 삼탄아트마인 관람 시간은 오전 9시30분~오후 5시30분(월요일 휴관), 관람료는 어른 1만3000원, 중·고등학생 1만1000원, 초등학생 1만원이다.

삼탄아트마인에서 33㎞ 남짓 떨어진 정선 화암동굴은 갱도와 천연 동굴이 어우러진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금광으로 개발돼 갱도를 뚫는 작업을 하다가 천연 동굴이 발견됐다. 해방 이후 발굴을 지속해 1980년에 강원기념물로 지정되고, 2019년 천연기념물로 승격됐다. 색깔과 형태가 다양한 석순, 석주, 종유석, 석화 등이 다른 동굴에서 보기 힘든 것들이라 학술적·자연 유산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금과 대자연의 만남’이란 주제로 일반에 개방된 구간은 총 1803m다. 길이 515m 상부 갱도는 일제강점기 금광맥의 발견부터 채취까지 전 과정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365개 계단을 내려가면 ‘동화의 나라’ ‘금의 세계’ 등을 테마로 환상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이어지는 천연 동굴은 거대한 광장으로, 392m 탐방로에서 유석폭포와 대형 석순, 곡석, 석화 등 진귀한 동굴 생성물을 볼 수 있다.

나전역은 예쁘기로 소문난 간이역이다. 일찍이 드라마 〈모래시계〉, 서태지가 출연한 이동통신 광고, 〈내일은 미스터트롯〉의 스핀오프 예능 프로그램 〈뽕숭아학당〉 등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지난해 말 나전역에는 ‘국내 1호 간이역 카페’가 문을 열었다. 추억이 떠오르는 인테리어와 지역 특유의 메뉴로 많은 이를 불러들인다. 나전역 변화의 주역이 주민이란 점도 눈길을 끈다.


정선아리랑시장

이곳저곳 둘러봤다면 이제 특산품을 쇼핑할 시간. 정선아리랑시장으로 가자. 주말이면 관광객으로 붐비는 시장엔 곤드레를 비롯한 산나물, 황기와 더덕, 감자 등 정선을 대표하는 산물이 지천이다. 매콤한 메밀전병과 고소한 수수부꾸미, 수리취떡, 콧등치기국수까지 출출한 배를 채워줄 먹거리도 줄줄이 이어진다. 끝자리 2·7일에는 오일장이, 주말에는 주말장이 열려 더욱 흥성한 분위기다.

 

<여행 정보>
당일 여행 코스
삼탄아트마인→화암동굴→정선아리랑시장→나전역

1박2일 여행 코스
첫째 날: 삼탄아트마인→화암동굴→정선아리랑시장→나전역
둘째 날: 정선아라리촌→아우라지→정선레일바이크  

관련 웹 사이트 주소
- 정선여행 www.jeongseon.go.kr/tour
- 삼탄아트마인 https://samtanartmine.com
- 화암동굴(정선군시설관리공단) www.jsimc.or.kr
- 정선아리랑시장 https://blog.naver.com/jungsun_mk  

문의 전화
- 정선군종합관광안내소 1544-9053
- 삼탄아트마인 033)591-3001
- 화암동굴 033)560-3410
- 나전역 1544-7788

대중교통
[기차] 청량리역-사북역, 무궁화호 하루 5회(07:35~19:10) 운행, 약 3시간 소요. 사북역에서 사북시장 정류장까지 도보 약 4분, 농어촌버스 이용, 콘도 정류장에서 상갈래-만항 농어촌버스 환승, 못골 정류장 하차, 삼탄아트마인까지 도보 약 10분.
*문의: 레츠코레일 1544-7788, www.letskorail.com
[버스] 서울-고한사북,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하루 18~19회(06:00~22:30) 운행, 약 3시간 소요. 고한사북공용버스터미널 정류장에서 농어촌버스 이용, 콘도 정류장에서 상갈래-만항 농어촌버스 환승, 못골 정류장 하차, 삼탄아트마인까지 도보 약 10분.
*문의: 동서울종합터미널 1688-5979 시외버스통합예매시스템 https://txbus.t-money.co.kr 고한사북공용버스터미널 033)592-9951

자가운전
중앙고속도로 제천톨게이트→북부로 단양·영월 방면 우측 도로→강원남로 사북·태백 방면 직진→함백산로 상동 방면 우회전→삼탄아트마인

숙박 정보
- 하이원콘도: 고한읍 하이원길, 1588-7789, www.high1.com
- 메이힐스리조트: 고한읍 물한리길, 033)590-1000, www.mayhills.co.kr
- 상유재: 정선읍 봉양3길, 033)562-1162, https://sangyouje.modoo.at

식당 정보
- 함백산돌솥밥(돌솥밥): 고한읍 상갈래길, 033)591-5564
- 중앙식당(산채비빔밥): 화암면 화암동굴길, 033)562-2225
- 동광식당(황기족발): 정선읍 녹송1길, 033)563-3100

주변 볼거리
몰운대, 화암약수, 정선양떼목장, 백두대간생태수목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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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