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 트렌드' 방송가 장악한 우먼파워

드라마도 예능도 여주인공 중심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여자가 설 자리가 없다’는 말은 비로소 옛말이 됐다. 드라마도 예능도 여성의 땀과 대립, 경쟁, 연대를 담아내는 데 여념이 없다. 능동적인 여성이 일궈내는 서사에 모두가 감동한다. 한 번 반짝이고 마는 게 아닌, 꾸준히 지속하는 메가 트렌드다. 

수년 전만 해도 여배우들의 볼멘소리가 많았다. 멋있고 능동적이며 어떤 사건이든 핵심적인 갈등을 해결하는 매력적인 인물이 대부분 남성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TV 속 여성은 밋밋하고, 우유부단하며 수동적으로 움직이기 바빴다.

노골적인
우유부단

이른바 ‘민폐 캐릭터’는 여성의 전유물이었다. 갈등이 해결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릇된 판단으로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거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저지르는 것은 여성의 몫이었다. 

때론 노골적으로 ‘여자의 적은 여자’를 드러낸 작품도 많다. 불륜과 출생의 비밀, 고부간의 갈등을 극대화한 ‘막장 드라마’에서 순진한 남자를 두고 모함과 음모를 꾸미는 건 대부분 여자였다. 

드라마 초반부에 진취적인 여성상을 그려내도, 막바지에 치달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남자의 말에 휘둘리는 답답한 얼굴이 그려지기도 했다. 여성이 남성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자연스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대장금>, JTBC <스카이 캐슬>, 영화 <암살> 등을 비롯해 다양한 작품에서 능동적인 여성이 나왔지만, 거대한 물결처럼 흐르지는 않았다. 

그런 가운데 최근 1~2년 사이에 여성을 중심으로 한 드라마가 늘어났다. 남성 대신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성보다 더 현명하고 올바르며 행동력이 있는 여성이 대거 보이기 시작했다. 미디어의 주인공이 여성으로 변모하는 모양새다. 

이야기의 주제의식도 여성 중심으로 흐른다. 대표적인 흥행작으로는 JTBC <부부의 세계>가 있다. 남편을 뺏긴 지선우(김희애 분)를 중심으로 그려진 <부부의 세계>는 기존의 남녀 구도를 완전히 바꿔버린 작품이다.

남성은 지질하고 이기적이었고, 여성은 똑똑하고 현명했다. 실수나 갈등에 대한 대처를 할 때 남성 캐릭터보다 여성 캐릭터의 판단이 더 스마트해졌다.

지난 5월 방송된 tvN <마인>은 여성의 연대를 다뤘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전투구를 벌였던 여자들이 서로 힘을 합친 것이다. 위기의 상황에 놓인 서희수(이보영 분)와 정서현(김서형 분)은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를 돕는 조력자 역할을 하며 위기를 헤쳐나간다. 

특히 성소수자였던 정서현이 자신의 목소리를 멋있게 내는 지점은 새로운 카타르시스가 됐다. 또 <마인>은 우정과 협업이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깨는 계기가 됐다.

민폐 캐릭터서 슈퍼우먼이 되기까지
전지현 한소희 이영애…원톱 드라마


<마인>의 성공 이후 여성을 중심으로 한 드라마가 물밀 듯 밀려왔다. 조여정을 중심으로 상위 0.5%의 민낯을 드러낸 tvN <하이클래스>, 전도연이 우울한 가운데서도 힘겨운 현실을 극복해나가는 JTBC <인간실격>, 맨몸으로 마약조직을 부수는 한소희가 나온 넷플릭스 <마이네임>, 이하늬의 1인 2역이 눈부신 SBS <원더우먼>이 좋은 예다.

이 외에도 호쾌한 레인저로 변신한 전지현의 tvN <지리산>, 고현정과 신현빈의 치정 복수극 JTBC <너를 닮은 사람>, 산소 같은 이영애가 180도 변신한 JTBC <구경이>, 송혜교 원톱의 SBS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 술에 미친 세 여자의 일상과 우정을 다룬 TVING 오리지널 <술꾼도시여자들> 등 한국 드라마 시장에서 여성 서사는 거대한 물결처럼 다가오고 있다.

윤석진 충남대 교수는 “과거에도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가 많았다. 최근의 변화는 여성이 동일시하기 어려운 캐릭터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라며 “<마인>이나 <원더우먼> <마이네임>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틀을 깨는 여성이 나오는데, 많은 여성이 쉽게 이입하기 어려운 포지션이다. 그런 점에서 여성이 목소리를 내는 형태가 다변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그간 남성 중심의 서사로 지겨워진 콘텐츠 시장에서 새로운 돌파구로 여성 서사 드라마가 대두됐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전까지만 해도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제외하고 스릴러나 공포 등 강력 사건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에서 여성의 역할은 대부분 장치적으로 활용됐다.

갈등을 키우거나, 결정적인 순간에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는 임무는 여성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남성이 조력하고 여성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작품이 늘어나는 추세다. 인기리에 방영 중인 <원더우먼>이나 최근 주목받는 <구경이>가 그 예다. 

이 같은 변화의 이유로 너무 많은 남성 서사로 인해 생긴 결핍과 공백을 여성 서사로 메우고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같은 구도더라도 여성이 중심이 되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이야기와 반응이 나온다. 예전에는 남자 주인공에 여성을 조연으로 세웠다면, 지금은 반대 구도가 나온다. 자연스럽게 새로운 이야기가 도출된다”며 “여성 서사 자체가 새롭고 강렬한 느낌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눈에 띄는
여성 연대

여성 서사가 늘어나면서 톱스타급 남자 배우들은 드라마에 출연이 저조해졌다. 인지도가 높은 여배우와 비교적 인지도가 떨어지는 남배우가 투톱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의 송혜교와 장기용 커플, <인간실격>의 전도연과 류준열 커플, <너를 닮은 사람>의 고현정과 김재영은 나이 차이가 꽤 크다. 이전에는 자주 보기 힘들었던 연상연하 구도가 최근 눈에 띄게 늘어났다.

심지어 <구경이>는 이영애, 김혜준, 김해숙, 곽선영 등 네 명의 여배우가 주축이 돼 작품을 끌고 간다.

한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는 “대본을 볼 때 여성 서사면 S급 남자배우들이 출연을 고사한다. 이 배역을 탐낼 만한 비교적 인지도가 낮은 배우들이 자리를 채운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드라마 소비층이 대부분 여성인데, 최근 여성 사이에서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에 대한 반응이 좋다. 메가 트렌드가 된 여성 서사는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드라마가 거대한 변화 속에 있는 가운데, 예능계 역시 여성이 중심이 되는 흐름이다. 최근 메가톤급 흥행을 거둔 작품은 대부분 여성이 앞에 서 있다. 예능계 역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그우먼에게 기회가 없다는 볼멘소리가 적지 않았다.

특히 예능에서의 여성 출연자들은 재미없다는 편견이 강했다. 남성에게 잘 보이기 위한 밋밋한 캐릭터로 소모되는 경향이 있었다. <개그콘서트>만 하더라도 강하고 센 역할은 주로 남자의 몫이었다. 여성이 두각을 나타낸 캐릭터는 손에 꼽았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남성이 예능계를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포츠 선수 출신의 여성 출연자가 방송에 나오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점차 여성 출연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MBC <나혼자 산다>나 <전지적 참견 시점> 등 관찰 예능에 출연한 여성 스타들이 기죽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특히 뜨거운 반응을 이끌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연경과 박세리다. 

멋진 언니
전성 시대

두 사람은 남자보다도 더 멋있게 자신의 영역에서 이른바 플렉스를 발휘하면서 많은 여성의 워너비가 됐다. 최선의 노력으로 주어진 일을 잘 해낼 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존중도 가미돼있으며, 옳지 않은 것에 분명히 옳지 않다고 말하는 그들의 모습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매료시켰다.


그런 변화의 과정에서 여성 서사 예능의 정점을 찍은 건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이하 <스우파>)다. 

방송 전 <스우파>는 기대보다 우려가 컸던 작품이다. <프로듀스 101> 조작 사건의 잔상이 여전히 각인돼있고, 지긋지긋할 정도로 우려먹은 서바이벌 방식의 오디션의 포맷을 그대로 가져왔다. 더구나 가수의 무대를 뒤에서 돕는 댄서를 앞세우는 점 역시 가산점보다는 걱정이 앞섰던 대목이다.

아울러 <스우파> 제작진은 ‘노리스펙 약자 지목 배틀’과 같은 노골적인 대결 구도로 여성 댄서를 몰아세웠다. 이른바 ‘여자의 적은 여자’의 구도로 자극적인 경쟁을 보여주겠다는 심산이다. 

댄스 크루들은 인터뷰부터 진짜 싸움을 하듯 으르렁댔고, 그 모습은 마치 M.net <언프리트 랩스타>의 댄스 버전과 같은 이미지였다. 성공 요인보다는 패배 요소가 더 많은 방송으로 여겨지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제작진이 세워 놓은 판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 건 댄서들이다. 제작진이 준 미션을 놀라운 실력과 리더십, 절실함으로 바꿔냈다. 단 한 장면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고 최선을 넘어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악을 쓰면서도, 승패가 결정 나면 다른 댄스 크루를 분명히 인정하고 존중했다. 패배 자체에 흔들리지 않았고, 보완할 점을 찾아 다음 무대에서 더 좋은 퍼포먼스를 냈다. 

참가자들을 존중할 줄 모르는 M.net 제작진은 과거부터 그래왔듯 <스우파> 참가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언어를 방송에 내보내며 경쟁적인 면을 강조했지만, 그 과정을 멋있게 만들어낸 건 댄서들의 동료애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하는 댄서들에 대중은 감동했다. 

강인해 보이기만 하는 <스우파> 댄서들은 눈물을 자주 흘렸다. 승자가 돼서도 패자가 돼서도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이 눈물에는 기존 방송에서 보인 연민이나 동정이 담겨있지 않다. 결과를 만들어낸 것에 대한 감동이나, 아직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에 아쉬움과 절실함만이 있다. 

<스우파> <골때녀> 도전기 인기
피와 땀 및 눈물에 남성들도 환호

그 진심이 모두 전해진 덕분에 우승 크루인 홀리뱅을 비롯해 8팀의 크루 모두 승자로 인식된다. 도전하는 여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스우파>가 보여줬다. 홀리뱅의 리더 허니제이 외에도 모니카, 립제이, 아이키, 리정, 가비, 노제 등 대다수 스타가 생겨났다. 

<스우파> 참가자들이 보인 진심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프로그램은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이하 <골때녀>)다. 어쩌다 참가한 축구에 모든 여성이 빠져들고 있다. 각 직업군을 대표해 모인 여성들은 점차 승리에 목말라 하며, 골을 넣었을 때 환희를 경험하고 패배했을 때의 아픔에 눈물을 쏟는다. 

대부분 축구 동호회가 남성으로 이뤄진 현실에서 팀 스포츠를 하는 여성 자체가 생경했던 가운데 골대에도 슛을 쏘는 여성들의 협동은 각별하게 다가온다. 

혹자는 ‘그깟 공놀이’라고 폄훼할 수 있지만, 공놀이에 진심을 다하는 여성들을 깎아내릴 수는 없다. 누구 하나 설렁설렁 뛰지 않고, 하나같이 이를 악물고 승리를 향해 달려든다. 한 치의 양보 없는 치열한 경쟁과 승패가 결정되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눈물은 안타깝거나 측은함과는 거리가 멀다. 

얼마나 오랜 연습과 노력이 있었는지가 성장한 모습을 통해 느껴지기에, 이들의 눈물 자체가 멋있게 여겨진다. 

도전하는 여성들에게 뜨겁게 반응하는 건 여성만이 아니다. <골때녀>는 남성 커뮤니티에서 더 뜨겁게 타오른다. 남성의 영역이나 다름없었던 축구 분야에서 피, 땀, 눈물을 흘리는 여성에게 마음을 열고 응원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예능 역시 기존의 구도에 남녀의 역할이 바뀌었을 뿐이다. <스우파>나 <골때녀>나 경쟁구도는 같다. 하지만 여성이 주인공이 되자 서사가 완전히 달라지고, 그 안에서 나오는 카타르시스도 새롭다. 그래서 더 열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방송가에서는 주도적인 여성이 방송에 많이 나오고 있다. 각종 관찰 예능의 패널은 남녀가 고루 분배하고 있으며, 메인 MC도 남성의 전유물로만 볼 수 없다. 특히 연애나 사랑을 주제로한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홍진경, 장도연, 김숙, 곽정은, 유라, 김윤주 등 여성이 두각을 나타낸다.

여성이 주체가 된 예능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 블루오션이자 경쟁력을 갖는다. 기존과는 다른 서사와 재미가 나온다. 남성만이 웃기고 재밌다는 편견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전환되고 있다.

젠더 갈등이 더욱 첨예하게 가속화되는 작금의 시대에 <스우파>나 <골때녀> 등은 남녀가 화합할 수 있는 장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만큼은 남녀의 우열 따윈 없기 때문이다.

여성 중심
카타르시스

따라서 페미니스트들이 줄곧 주장했던 ‘기울어진 운동장’이 도전하는 여성들로 인해 균형을 잡아가고 있는 모양새다. 이 같은 변화가 오랫동안 곪은 젠더 갈등을 모두 씻어내기엔 아직 미흡하지만, 점차 멋있는 여성이 늘어난다면 남녀 간의 지겨운 대립조차 좀 더 완만해질 것으로도 예상된다.

<intellybeast@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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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미영 팀장’ 동반 탈옥 비쿠탄 마약왕 풀스토리

[단독] ‘김미영 팀장’ 동반 탈옥 비쿠탄 마약왕 풀스토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김미영 팀장’으로 불린 보이스피싱 총책 박모씨와 함께 필리핀 구치소서 탈옥한 조직원들의 실체가 드러났다. ‘비쿠탄 이민국 수용소’서 처음 만난 이들은 보이스피싱과 마약 유통을 결합한 신종 범죄조직을 꾸렸다. ‘비쿠탄 마약왕’으로 알려진 송모씨는 2022년 수원서 필로폰을 소지한 채 붙잡힌 김모씨의 상선이라는 정황이 드러났다. 지난 8일 본지가 [<단독>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탈옥했다]를 최초 보도한 이후, 외교부 측은 루카스 베르사민 필리핀 대통령비서실장에게 “탈옥한 이들에 대한 조속한 검거와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해달라”는 공적 서한을 전달했다. 현재 박씨에 대한 검거 작전은 필리핀 이민청 도피사범추적팀과 필리핀 코리안데스크(한인 사건 전담 경찰 부서)가 협력하고 있다. 새벽 탈출 어디로 갔나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약 2년 전 비쿠탄 교도소에 수감된 이들은 지난해 11월 필리핀 나가시(市) 카마린스 수르 주 구치소로 이감됐다. 3명 모두 불법 고용과 인신매매 혐의 등으로 기소되면서다. 복수의 제보자에 따르면, 이들은 지난 1일에서 2일 새벽 사이 미리 준비한 오토바이와 차량을 이용해 탈옥했다. 필리핀 교정 당국은 지난 2일, 인원 점검 때 박씨 일당이 탈옥한 것을 뒤늦게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교도소에 CCTV가 설치돼있지 않아 탈옥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일부 훼손된 철조망을 찾아냈다고 한국 정부에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카마린스 수르 구치소에 대해 현지 제보자는 “담장이 낮고, 보초도 허술해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기에 탈옥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라며 “그들은 비쿠탄 교도소보다 허술하다는 점을 노리고 변호사를 통해 가짜 범죄를 만들어 이감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탈옥한 일당이 도피하는 동안에도 보이스피싱과 마약 유통을 결합한 신종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씨는 2012년부터 필리핀 현지에 콜센터를 차린 보이스피싱 1세대다. ‘김미영 팀장’이라고 소개하며 전화나 문자메시지로 금융기관을 사칭해 개인정보를 빼냈다. 박씨가 보이스피싱으로 가로챈 금액만 4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08년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서 근무하다가 수뢰 혐의로 해임된 경찰 출신으로 드러나면서 더욱 충격을 안겼다. 경찰 근무 당시 접했던 범죄 수법을 토대로 ‘김미영 팀장’ 사기 수법을 고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10년간 보이스피싱 조직을 운영해 온 박씨는 2021년 10월6일 마닐라 인근서 붙잡혔다. 당시 국정원은 수년간 파악한 정보를 종합해 필리핀 현지에 파견된 경찰에 ‘박씨가 마닐라서 400km 떨어진 시골 마을에 거주한다’는 정보를 넘겼다. 검거 당시 박씨의 경호원은 모두 17명으로 대부분 중무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가 위치한 곳까지 접근한 필리핀 이민국 수사관과 현지 경찰 특공대도 이들에 맞서 중무장했다. 붙잡힌 박씨는 “필리핀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국내 송환을 피하고 상대적으로 보안이 취약한 필리핀 교도소에 수감되기 위한 노림수였다. 비쿠탄 교도소 출신 제보자는 <일요시사>와 통화서 “(박씨는)비쿠탄 내에서 식사를 판매하는 아저씨로 통했다”며 “박씨가 송씨, 신씨와 어울리면서부터 교도소 내에 마트를 인수해 장사할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증언했다. 보이스피싱과 결합한 마약 유통 대포폰으로 텔레그램 마약방 개설 비쿠탄 교도소는 식사가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죄수들이 직접 돈을 벌거나 영치금을 통해 생계를 이어간다. 죄수들은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 조직을 꾸려 보이스피싱, 대포폰, 마약 유통 사업을 할 수밖에 없다. 최근 박씨와 함께 탈옥한 송씨, 신씨가 비쿠탄 교도소 내에서 동업을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박씨와 함께 탈옥한 송씨와 신씨에 대한 새로운 증언들도 쏟아졌다. 제보자에 따르면, 신씨는 타인 명의로 개통한 유심칩을 판매하는 역할을 맡았다. 신씨는 불법 유심칩 1개당 한국 돈 약 25만원을 받고 팔았다. 신씨에게 산 대포 유심칩으로 신분을 철저히 숨길 수 있게 된 송씨는 텔레그램으로 마약 전달책을 모집하고 유통하는 이른바 ‘마약방’을 개설했다. 평소 신씨가 재테크 사기, 주식 및 코인 리딩방 등을 운영해오면서 모은 수천명의 회원들은 송씨가 운영하는 마약방으로 초대됐다고 한다. 송씨는 채팅방서 ‘두목’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다. 또 박씨는 신씨의 도움을 받아 수억원가량을 비트코인으로 환전한 것으로 파악됐다. 비쿠탄 교도소 출신 제보자는 “마약과 거리가 멀었던 박씨가 송씨와 안면을 트면서 보이스피싱보다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마약 사업을 함께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송씨가 필리핀 파사이 등에 있는 마약 공급책을 통해 한 달에 5kg 정도의 필로폰 유통을 지시했다”며 “송씨는 비쿠탄서 만난 중국 마피아로부터 싸게 구입한 필로폰 등을 드라퍼(전달책)에게 전달해 한국으로 수출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송씨가 드라퍼에게 준 배달료는 한화 약 1000만원가량으로 전해진다. “한국 싫어” 가짜 범죄 다수의 전달책이 송씨의 필로폰 배달을 시도한 정황은 곳곳서 드러났다. 송씨가 고용한 운반책은 2022년 1월25일, 수원의 한 모텔서 필로폰을 소지하다가 붙잡힌 김모씨였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다. 당시 수원중부경찰서는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30대 남성 김씨를 긴급체포했다. 김씨는 이날 오전 8시7분께 장안구 영화동의 한 모텔서 필로폰을 소지했다. 앞서 ‘한 남성이 모텔서 마약을 소지하고 있다’는 신고를 접수받은 경찰은 현장으로 출동했다. 경찰은 모텔 안에서 필로폰이 포장된 비닐백 30개를 발견하고 이를 압수 조치했다. 또 김씨를 상대로 진행한 마약 간이 검사서 양성반응을 확인했다. 경찰조사에서 김씨는 투약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텔레그램으로 필로폰 거래를 지시한 ‘orjinal8282’가 상선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거짓으로 진술했다. 경찰에 따르면, orjinal8282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자가 김씨에게 “수원으로 가서 모텔을 잡고 기다려라”며 “사탕(엑스터시) 50, 어름(필로폰) 50 좀 있다가 드랍해서 갖고 있어”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송씨와 비쿠탄 교도소서 함께 지냈던 제보자는 “orjinal8282는 송씨의 아이디”라며 “김씨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던 마약방 회원들은 송씨가 김씨의 고용주(상선)이었다고 적었다”며 텔레그램 채팅방 사진을 전했다. 송씨가 넘긴 마약을 유통하려고 한 사람은 또 있었다. 지난해 1월23일, 충남 서산서 아내를 살해하고 저수지에 유기한 혐의를 받고 필리핀으로 도주한 강주천이다. 그는 한국 경찰의 공조 요청으로 필리핀서 검거됐으나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강주천은 지난해 6월 비쿠탄 수용소서 탈옥했다가 8일 만에 체포됐다. 탈옥 후 체포 당시 1kg의 필로폰을 소지하고 있었다. 강주천은 도피 자금을 벌기 위해 송씨의 지시를 받아 필로폰 배달을 시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밥 먹듯… 탈옥 시도 비쿠탄 관계자들은 이른바 ‘마약왕 전세계’ 박왕열이 큰돈을 벌자, 박씨와 송씨 일당도 마약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봤다. 지난해 중순 박왕열은 <일요시사>와 전화 통화서 “이젠 나보다 송씨가 마약왕에 가깝다”며 “한국으로 보내는 양이 내가 보낸 것보다 많다”고 말했다. 앞서 박왕열은 2016년 10월 필리핀 한 사탕수수밭서 한국인 3명을 총으로 쏴 살해한 사건의 범인이다. 이 사건은 드라마 <카지노>를 통해 유명해졌다. 그는 비쿠탄 이민국 수용소에 구금됐다가 2017년 3월 탈옥해 두 달 만에 잡혔다. 2019년 10월에는 재판을 받고 구치소로 돌아가던 중 재차 도주해 2020년 10월 다시 검거됐다. 박왕열은 이 기간에 마약왕 전세계로 거듭났다. 국내 마약 유통·판매 총책이었던 ‘바티칸 킹덤’ 이모씨에게 수억 원대의 마약을 공급했다. 이는 남양유업 창업주 외손녀 황하나 등에게 팔렸다. 박왕열의 옥중 마약 유통 의혹은 이미 경찰 수사를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 지난 4월12일, 경남경찰청 광역수사대는 A씨 등 3명을 국내 중간 판매책에게 마약류를 판매한 혐의로 구속했다고 밝혔다. 유통책 중 한 명은 2022년 12월 NBP서 박왕열을 만나 국내로 밀반입해 보관 중인 마약류를 판매키로 공모하고, 지난해 1월 메신저인 텔레그램을 이용해 특정한 장소에 마약을 놓고 사라지는 이른바 ‘던지기 수법’으로 엑스터시 100정, 필로폰 10g을 국내 중간 판매책들에게 600만원(도매가)을 받고 공급했다. 그동안 경찰은 박씨 일당 등 한국인 범죄자의 강제송환을 추진했으나 지지부진한 상태다. 박씨 일당은 필리핀서 죄를 짓고 형을 받으면 국내 송환이 지연된다는 점을 노렸기 때문이다. 경찰은 현재 박씨에게 적용된 혐의 중 인신매매는 허위로 만들어낸 범죄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수원 모텔서 잡힌 전달책 상선” 박왕열 “이젠 송씨가 마약왕” 박씨가 쓴 꼼수는 이미 필리핀 도피 사범들 사이에 만연하다. 현재 필리핀 도피 사범은 5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국내 송환을 거부하는 범죄자들은 필리핀 현지 변호사를 통해 ‘가짜 범죄’를 만든다. 비용은 한국 돈으로 많게는 3000만원서 적게는 100만원 정도가 든다. 제보자에 따르면 “가짜 케이스를 만드는 건 흔한 일”이라며 “강간, 사기, 폭행 정도의 가짜 범죄를 만들어 재판에 출석하면서 국내 송환을 계속 미루는 것”이라고 전했다. 박씨가 국내로 송환될 경우, 최소 징역 15년서 25년 이상 집행될 수 있다. 지난해 6월 재판부는 2012년 3월부터 2016년 6월까지 중국과 필리핀서 보이스피싱 총책으로 활동하며 피해자 435명에게 26억여원을 가로챈 B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송씨의 경우, 마약을 수출입·제조·매매하거나 매매를 알선 또는 그럴 목적으로 소지·소유한 것에 대한 처벌이 가해진다. 해당 혐의가 인정되면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며, 영리 목적 또는 상습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될 경우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까지 내려질 수 있다. 필리핀 당국과 한국 정부도 탈옥범들을 추적 중인 가운데, 현지 법 적용을 고려하면 다시 붙잡히더라도 국내 송환이 어려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필리핀서 저지른 다른 범죄의 조사와 재판이 끝나지 않아 한국으로 송환되려면 최소 6년이 걸린다. 특히, 탈옥 행위로 현지 법을 중대하게 위반한 만큼 현지서 징역형을 선고받을 가능성도 크다. 송씨와 박씨에 관한 국내 송환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다. 필리핀서 장기간 수용 생활을 하는 한국인을 국내로 이송하면 좋으나, 현재 수용자 이송 조약은 체결돼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법무부는 “송환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인물의 이송 요청을 지속하고 있다”며 “필리핀 이민국과 논의를 이어가는 중”이라고 밝혔다. 법무부의 이 같은 입장은 예전과 다르지 않다. 시간이 가는 동안 이송 조약조차 체결하지 못한 점은 한국 정부의 소극 행정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법무부가 보이스피싱 혐의가 아닌 마약 유통 혐의로 송환을 적극적으로 요청한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필리핀 정부가 ‘재량’을 근거로 거절할 가능성도 있으나 법무부는 이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으로 풀이된다. 머나먼 국내 송환 이상화 주필리핀대사는 지난 14일 오전과 오후에 각각 필리핀 외교부 차관과 법무부 차관을 만나 박씨에 대한 조속한 검거와 재발 방지 대책 등을 요구했다. 한편, 박씨 일당 외에 인질강도 혐의로 수배돼있던 한 남성도 최근 현지 교도소를 빠져나간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 필리핀 현지 경찰이 쫓고 있는 한국 국적의 수배범만 박씨 일당을 포함해 6명 이상인 것으로 파악됐다. 수배범들은 대부분 사기 혐의로 수배가 걸려 있었다. 이 중에는 10건 이상 수배가 걸린 수배범들도 있었다. 그만큼 교정시설 보안이 취약하다는 뜻이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