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못 채우는 '낙하산 성지' 코레일 수장 잔혹사

누가 와도 끝은 같다

[일요시사 취재1팀] 차철우 기자 = 지난 2일, 손병석 한국철도공사(이하 코레일) 사장이 사임했다. 임기 3년 중 9개월을 마저 채우지 못한 것이다. 손 사장을 비롯한 역대 코레일 사장들이 공기업 전환 후 단 한 명도 제 임기를 채우지 못하면서 ‘중도 하차’한 사례가 또 추가됐다. 

코레일 사장들은 정치권의 ‘입김’과 사장들이 정권 교체기에 비전문가인 친정부 성향의 낙하산 인사 임명 의혹이 지속돼왔다. 이밖에도 코레일 자체의 사건 사고, 비리 문제로 인해 사장직을 내려놓고 퇴진하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끝까지 완주 
사장이 없다

손 사장이 사의를 밝힌 첫 번째 이유는 계속해서 누적되고 있는 적자 때문이다. 코레일은 손 사장 취임 첫 해인 지난 2019년 109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해에는 1조1600억원의 영업 손실이 발생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지하철 이용객 감소가 원인으로 꼽힌다. 적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는 지난해 12개 지역본부 개선, 조직문화 혁신 등을 통한 비용 절감을 시도했다.하지만 이 같은 노력에도 적자폭을 줄이기에는 부족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달 발표된 ‘2020년 공공기관 경영평가’ 결과도 손 사장의 사임에 주된 배경 중 하나로 꼽힌다. 코레일은 경영평가에서 보통에 해당하는 C 등급을 획득했으나 경영관리 부문에서 최하 등급인 E 등급을 받았다. 이로 인해 손 사장은 기관장 경고까지 받았다.


코레일은 손 사장이 취임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행된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도 D(미흡)를 받기도 했다. 코레일이 고객만족도 조사(PCSI)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직원 208명이 고객으로 위장한 뒤 설문조사에 참여해 결과를 조작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이하 국토부) 조사 결과 코레일 전국 12개 지역본부 가운데 8개 본부 소속 직원들이 경영실적 평가의 점수를 높게 받고, 성과급을 받기 위해 직원 신분으로 직접 설문조사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코레일 직원들이 참여한 설문조사 수는 전체 1400여건 가운데 222건이다.

코레일 서울본부 직원 200여명이 있던 대화방에는 고객만족도 조사원의 동선과 사진을 직원끼리 서로 공유했다. 조사원이 나타나면 주변에 있다가 조사를 받게끔 유도했다. 점수를 줄 때도 10점만 주지 않고 9점 혹은 8점의 점수를 매겼다.

이에 따라 국토부는 업무방해죄 등으로 직원 16명을 수사 의뢰하기도 했다. 다만 코레일 본사에서 실시한 자체조사에서 조작을 지시하거나 개입한 정황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 명도 임기 채우지 못하고 하차
사건사고, 비리 문제로 중도 퇴진

해당 고객만족도 조작 사건은 경영평가 결과가 낮게 나오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로 인해 코레일 직원들은 그동안 받아왔던 성과급을 받지 못하게 됐다. 손 사장은 해당 사건의 여파로 기관장 경고를 받았다. 

논란이 일자 코레일은 “고객만족도 조사를 왜곡한 점에 대해 사과드린다”며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그동안 코레일은 2013년 실시한 경영평가에서 파업 여파로 ‘E(아주 미흡)’ 등급을 받았던 것을 제외하면 성과급을 받지 못한 사례는 없었다. 파업과 안전사고에도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모두 ‘C(보통)’ 등급을 받으며 꾸준히 성과급을 받아오다가 E 등급을 받자 손 사장은 비판의 대상이 됐다.

게다가 적자 상황임에도 성과급 잔치를 벌였다는 감사 결과 지적도 나왔다. 지난 2019년 공공기관 성과급 지급 기준을 어기고 성과급을 700억원 이상 지급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감사원이 지난달 23일 공개한 코레일 정기검사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코레일이 2019년 경영 평가 성과급을 임직원에게 총 3362억원을 지급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성과급 지급기준인 월 기본급에는 정기상여금이 포함됐는데, 통상 수당과 정기상여금을 제외하도록 한 공기업, 준정부기관 예산편성 지침을 어겼던 것으로 밝혀졌다.

코레일은 근속연수에 따른 직무역할급과 관리보전수당 등의 통상적 수당 급여도 월 기본급에 포함시킨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당시 감사원은 총 성과급을 2626억원으로 추산했다. 조사 결과 코레일은 기준을 어겨가며 직원들에게 736억원을 더 지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출마 전…
보은 인사

또 코레일의 전신인 철도청으로부터 승계받은 철도회원 예약 보관금 412억원에 대한 반환 과정에서도 채무 소멸로 인한 70억원을 수익 처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철도청은 위약 수수료 담보로 철도회원 가입 시 2만원의 예약 보관금을 받았다. 

철도청은 2007년 1월 코레일 멤버십 제도를 도입하면서 철도회원에게 회원 탈퇴를 안내하고 예약 보관금 반환 신청을 받기는 했다. 국정감사에서 이를 두고 소극적 행정이라는 지적이 나오자 반환하지 않은 예약 보관금을 법원에 공탁하겠다고 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감사원은 코레일 사장에게 경영평가 성과급 과다 지급에 대한 주의를 주고, 기획재정부 장관에게는 경영평가 성과급 과다 지급 사실을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에 반영하도록 통보했다.

이밖에도 사원복 구매 계약에서 2016년 계약을 체결했던 사원복 견본품에 대한 원단검사를 실시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계약업체로부터 받은 시험성적서만으로 품질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 규격에 미달하는 사원복을 2018년 말까지 납품받았다.

또 계약업체의 대표이사가 2018년 사원복 전문위원에게 1억원을 공여하는 등 청렴계약을 위반한 사실을 인지하고도 계약을 유지한 사실도 이번 감사에서 드러났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코레일이 적자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성과급 등을 과다 지급해 경영보다는 ‘잇속 챙기기’에 바빴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코레일의 경영을 두고 철도개혁이 이뤄지지 못하는 원인으로 대표이사를 비롯한 상임·비상임이사 등의 임원진이 전문가가 아닌 현 정부의 낙하산 인사로 채워졌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비단 내부 직원뿐 아니라 사장도 낙하산 인사라는 뒷말도 무성하다. 코레일은 2005년 1월 철도청에서 공사로 전환한 뒤 16년 동안 9명의 사장들이 모두 임기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중도 사퇴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코레일은 정부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코레일 사장은 국토부 산하기관으로 국토부 장관이 신임 사장을 제청하면 대통령이 최종 임명하는 방식이다. 이 같은 구조 탓에 사장 임명에 청와대나 국토부의 입김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해석이 나온다. 

누적 적자
책임 느껴

손 사장의 경우 능력보다는 국토부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철도업계에선 지난 16년 동안 초대 신광순 사장과 6대 최연혜 사장, 7대 홍순만 사장을 제외하곤 모두 전문성 없는 낙하산 인사로 평가된다. 코레일 사장 자리가 정치 행보를 위해 거쳐가는 ‘요직’ 중 하나로도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초대 사장인 신광순 전 사장은 철도청장을 맡다가 코레일이 공기업화되면서 사장직을 이어서 수행했다. 신 전 사장은 코레일 내부 출신이고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아왔으나 유전 개발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5개월 만에 사임했다.

뒤를 이은 2대 사장 이철 전 사장은 3선 국회의원 출신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후보 시절 부산선거대책위원회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지난 2008년 1월 이명박정부로 정권이 교체되자 스스로 물러났다.

3대 사장인 강경호 전 사장도 비전문가 낙하산 인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 전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지난 2009년엔 다스(DAS) 사장직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강 전 사장은 이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직 당시 서울메트로 사장을 지낸 경력이 있지만 철도업계에선 철도 관련 전문지식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그는 강원랜드의 인사청탁 및 금품 수수 혐의로 구속된 이력도 있다. 

뒤이어 취임한 경찰청장 출신 허준영 전 사장은 33개월이라는 역대 최장 기간 동안 사장직을 맡았다. 당시 허 전 사장의 사임을 두고 총선 출마를 위해 코레일 사장직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5대 정창영 전 사장은 감사원 사무총장을 출신 사장이다. 이명박정부 말 사장으로 임명된 그는 코레일의 ‘철도 구조 상하통합’을 주장했으나 박근혜정부가 들어선 뒤 임기를 마쳤다. 

6대 최연혜 전 사장은 한국철도대학 교수, 철도청(코레일 전신) 차장을 거쳐 코레일 부사장까지 지냈던 만큼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차 사장 공모 당시 최종 후보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비전문 친정부 성향 수두룩
정치 행보 위해 필수 관문?

최 전 사장 임명 후 코레일 사장직은 결국 정치권의 낙하산이란 평가가 다수 존재했다. 임기 종료를 앞둔 시점에 총선 출마를 이유로 사퇴했기 때문이다. 관련 업계에선 그가 재임 기간 동안 현업에 집중하기보다 정치적 행보가 더 두드러졌다는 말도 나왔다. 

7대 홍순만 전 사장은 건설교통부 소속 고속철도과장과 철도국장 등을 지낸 전문가였다. 그러나 대표적인 친박(친 박근혜) 인사라는 비판을 받았고 철도 노조에선 ‘철도 적폐’ 12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했다. 

8대 사장 오영식 전 사장은 정치권의 낙하산 인사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직을 맡았고, 3선의 전직 국회의원 출신 인사다. 코레일 국정감사 때 그는 총선 출마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또 강릉 KTX 탈선 현장을 찾아 사고의 원인이 추위로 인한 선로 이상이라고 언급해 비전문가 낙하산 인사라는 점을 스스로 인정했다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코레일 사장은 정권 교체 시기에 맞춰 늘 교체돼왔다. 역대 사장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20개월 정도로 임기 3년 중 절반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이처럼 평균 재임 기간이 짧고, 정치 행보를 위해 잠깐 머물다 가는 곳이라 여기면서 일각에선 경영에 몰두하기보다 ‘경력 채우기’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 같은 과거 낙하산 인사를 철저히 배제하고 위기 극복을 위해 추후 사장 임명 시 보다 신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나같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중도 사퇴했다는 점에서 내부 직원들 역시 사장을 ‘금방 떠날 사람’ 정도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형성돼있는 모양새다. 

한 코레일 관계자는 “코레일 사장들이 교체되는 시기가 빨라 다른 공기업 기관장들보다 상대적으로 내부에 비판적 여론이 형성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연유로 각종 의혹이나 내부적인 문제, 안전사고가 발생해도 ‘사장만 교체되면 그만’이라는 볼멘 소리도 나온다. 

16년 동안 사장들에 대한 잡음과 비리, 성과급 등으로 코레일의 이미지는 추락할 대로 추락한 상태다. 이는 심각한 적자 기록은 물론,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여전히 하위권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배경으로 분석된다.

이미지는 
이미 추락

한 전문가는 “공기업의 낙하산 인사 문제는 정권 교체 시기에 항상 발생하는 문제”라며 “코레일 사장으로 임명된 인사들이 보여주기식에만 치중해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철도업계 관계자는 “정치인이 사장으로 오더라도 철도계 전문가와 대외적 소통이 가능한 사람이면 괜찮다”며 “지금까지는 낙하산 사장이 많았던 만큼 앞으로 사장을 신중하게 선임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ckcjfdo@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코레일 적자 이유는?

2016년 수서역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고속철도가 시작됐다. 코레일이 KTX를 운영하고 있는 도중, SR이라는 새로운 철도회사가 탄생한 것이다. 

정부는 경쟁을 이유로 SR를 만들었다. 현재 SR은 열차 22대를 코레일에서 빌려 쓰고 있는 중이다. 코레일은 이 열차를 새로 사서 SR에 빌려줬다.

열차를 구매한 가격만 7200억원이 투입됐다. 정부에 구입 비용 절반 정도를 지원받았지만, 매년 갚아야 할 채권 이자율은 3.6%다. 손해까지 보면서 SR에 열차를 빌려주고 있는 상황이다. 

그마저도 열차를 빌려주는 값을 국토교통부가 정해줬다. 설립 당시 경쟁 체제라더니, 정부가 코레일에는 손해를 떠넘기고, 반대로 SR에는 큰 특혜를 몰아 줬다는 의혹이 있다.

이를 두고 철도노조는 정부가 SR의 민영화를 위한 행위라며 의심하고 있다.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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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