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유비' 유상철의 끝나지 않은 축구 이야기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1.06.14 15:47:04
  • 호수 1327호
  • 댓글 0개

한국 축구사에 큰 족적 남기다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2002년 한일월드컵 영웅이었던 유상철 인천유나이티드 명예감독. 그는 쉰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선수 시절 그라운드에서 묵묵하게 투혼을 보여줬던 유 감독은 췌장암 병마와 싸우다 “건강하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이제 하늘나라에서 하고 싶은 축구 원 없이 해라.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마음 편하게 지내길 바란다.” 최용수 전 FC서울 감독이 먼저 하늘나라로 간 유상철 전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에게 보낸 편지 마지막 문구다. 

국내외
추모 물결

유 감독이 지난 7일, 향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019년 11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1년7개월간을 투병했다. 췌장암은 초기 증상이 거의 없어 ‘침묵의 살인자’라고도 불린다. 한참 진행된 이후에야 복통과 함께 황달이나 소화불량, 식욕부진, 피로감 등 증상이 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히딩크, 손흥민, 이동국 등 축구계는 물론 정치권, 연예계에서도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큰 감동을 줬던 그였기에 많은 사람이 슬퍼했다. 서울아산병원에 차려진 빈소에도 온종일 선후배 축구인과 팬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이날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함께 쓴 홍명보 울산 현대 감독, 김병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황선홍 전 대전 시티즌 감독, 최용수 전 FC서울 감독, 김남일 성남FC 감독, 이천수 대한축구협회 사회공헌위원장, 안정환, 이민성 대전시티즌 감독, 현영민 JTBC 해설위원 등이 빈소를 찾았다.


해외 축구계도 유 감독을 애도했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지난 7일 오후 월드컵 공식 계정에 유 감독의 선수 시절 국가대표 경기 출전 사진과 함께 “한 번 월드컵 영웅은 언제나 월드컵 영웅”이라며 추모 메시지를 올렸다.

유 감독이 현역 시절 활약했던 일본 J리그 요코하마 마리노스도 트위터를 통해 “지난해 홈 개막전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안타깝다”며 슬픔을 함께했다. 

2019년 가을. 축구계 내에서 ‘유상철 감독이 많이 아프다’는 소문이 돌았다. 10월경 유 감독은 가까운 기자들에게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달했다. 이후 유 감독은 ”괜찮아진다“는 말을 하며 기자들을 오히려 안심시켰다. “건강하다”는 기사를 내달라고 유 감독은 기자들에게 당부했다. 

유 감독의 몸 상태가 팬들에게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2019년 10월19일 성남FC전이었다. 황달 증상으로 병원에 입원했던 그는 성남전서 너무도 수척한 얼굴로 나타났다.

결국 성남전이 끝나고 나서 인천 구단에서 유 감독이 췌장암 4기라고 발표했다. 그의 병세가 알려지고 나서 바로 만난 상대는 수원 삼성. 당시 수원의 사령탑은 유 감독의 1971년생 동갑내기 이임생 감독이었다. 두 사람은 연령대별 대표팀부터 국가 대표팀까지 함께 한 절친한 친구였다.

2019년부터 췌장암 말기 투병
항암치료 하며 복귀 의지 보여

성남전이 끝나고 병원에 입원했던 유 감독은 수원전 사전 기자회견에서 “꼭 돌아오겠다고 선수들에게 약속했다. 다행히 약속을 지켰다”고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의연한 친우를 본 이임생 감독은 “사실 상철이에게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냥 안아주기만 했다. 그래도 경기에서는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당시 이임생 감독은 유 감독이 힘든 상태로 벤치를 지키는 만큼 수원 선수들에게 골을 넣어도 세리머니를 자제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실제로 타가트가 선제골을 기록한 이후 세리머니를 하며 들뜬 모습을 보이려 하자 도움을 기록한 전세진이 다가가 이임생 감독의 당부를 전하기도 했다.

0대 1로 끌려가던 인천은 후반 추가 시간에 명준재의 극적인 골로 무승부를 거뒀다. 이날 거둔 승점 덕에 인천은 승강 플레이오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리그 잔류를 확정할 수 있었다. 승부가 끝나자 이 감독과 유 감독의 감정이 표출됐다. 평소 생김새와 달리 잔정이 많다는 소리를 듣는 이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유 감독을 언급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던 유 감독도 친구의 마음에는 애틋한 감정을 표했다. 그는 “(이 감독과는)오랜 친구다. 덩치는 큰데 마음이 너무 여리고 눈물도 많은 친구”라며 “임생이가 내 걱정을 하는 것 같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유 감독은 시즌이 끝난 후 1월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직을 사임하고 명예감독으로 남으며 투병에 전념해왔다. 회복에 강한 의지를 보였던 그는 힘겨운 항암치료를 견디면서도 건강이 많이 호전된 모습을 보였다.

방송과 유튜브 등에 출연해 축구인, 팬들과의 소통을 이어가기도 했다. 지난 시즌 인천이 또다시 강등 위기에 놓이자 감독직 복귀에 의지를 보이는 등 인천과 축구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유 감독의 투병 소식이 알려진 이후 많은 이들이 보여준 반응은 ‘인간 유상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수많은 축구 팬들과 축구계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유 감독이 J리그 시절에 활약했던 요코하마 팬들까지 ‘할 수 있다. 상철이형’이라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일관계가 경색돼 민감할 때, 그것도 팀을 떠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선수의 투병 소식에 일본 팬들이 보여준 아름다운 매너는 축구에는 국경도 편견도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며 깊은 감동을 남겼다.

A매치 124경기
멀티플레이어

국가대표 경기를 뜻하는 A 매치를 100경기 이상을 뛰면 대단한 선수라고 인정받는다. 무려 124경기를 출장했던 유 감독은 한국 국가대표 역대 출전수에 차범근(136), 홍명보, 이운재(133)에 이어 5위에 랭크됐다. 124경기 금자탑을 쌓은 투혼의 멀티플레이어 유상철은 데뷔 때부터 화려했다. 

유 감독은 서울 은평구 응암초등학교에서 처음 축구를 시작했다. 이후 경신중학교와 경신고등학교를 거쳐 건국대학교를 졸업해 신인드래프트 1순위로 1994년 현대 호랑이에 입단했다. 유 감독은 어느 포지션에서나 활약할 수 있는 선수였다.

대학교 1학년때까지만 해도 공격수로 뛰었으나 1993버펄로유니버시아드대회 이후 수비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일찍부터 프로구단의 스카우트 표적이 돼왔다.

키 183cm의 탄탄한 체구에서 나오는 뛰어난 체력 덕분에 그는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위치에서 뛸 수 있는 선수로 유명했다. 스트라이커,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등 소화가 불가능한 포지션이 없는 선수였다.


K리그에서는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 부문에서 모두 베스트 11에 선정된 2명의 선수 중 한 명이 유 감독이다. 그를 사람들이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멀티플레이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수비수로 있으면서도 순식간에 상대 그라운드 깊숙하게 침투하는 것이 장기인 유 감독은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때 일본과의 경기에서 동점골을 넣었다. 1996년 홍콩에서 열린 칼스버그컵 대회 때 비쇼베츠 감독의 선택을 받아 올림픽팀 멤버로도 활약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1위로 월드컵에 진출한 한국은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조별리그 1차전에서 멕시코에 1대 3으로 역전패당한 한국은 2차전에서 네덜란드에 0대 5로 대패했다. 이 경기 이후 차범근 감독이 대회 도중 경질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벨기에전 전반 7분 만에 뤼크 닐리스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며 밀리기 시작했다. 감독도 없이 치르는 경기에서 4년을 기다린 월드컵이 허무하게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또다시 4년을 기약해야 했다. 월드컵에서 단 1승도 거둔 적 없는 한국으로서는 한 골이 간절했다. 후반 25분 분위기를 반전할 수 있는 골이 터졌다.

왼쪽 측면에서 얻은 프리킥 기회에서 하석주가 올려준 공을 유 감독이 슬라이딩 오른발 슈팅으로 연결해 벨기에 골문을 열었다. 유 감독은 득점 후 포효했다. 한국은 이후 추가 득점을 거두지 못하며 월드컵 첫승 기회를 4년 뒤로 미뤄야 했지만 포기하지 않는 정신으로 국민들에게 감동을 줬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했다. 2001 컨페더레이션스컵 상대가 멕시코전. 첫 번째 경기였던 프랑스전에서 0대 5 대패를 당한 뒤 최악의 분위기에서 상대하기에 멕시코는 버거운 팀이었다. 이날 선발로 나선 유 감독은 전반 경기 중 상대 선수와 경합하다가 얼굴에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유 감독은 의료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한국은 후반 11분 황선홍의 선제골로 좋은 분위기를 이어갔지만 후반 36분 멕시코에 동점골을 내주면서 흔들렸다. 후반 44분 투혼의 결승골이 터졌다.

박지성의 코너킥을 유 감독이 완벽한 스파이크 헤더로 연결한 것이다. 

더 놀라운 건 당시 유 감독은 전반전부터 이미 코뼈가 골절된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후에 거스 히딩크 감독은 “유상철은 가장 말을 듣지 않는 선수였다”며 “나를 벤치로 몰아내지 말라며 내 말을 끝까지 어기고선 후반전에 중요한 골을 넣었다”고 언급했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건 2002년 폴란드 전 추가골이다. 황선홍이 선취골을 넣은 뒤 1대 0으로 앞서갔지만 불안한 한국팀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후반 8분, 유 감독은 강한 중거리 슈팅으로 폴란드 골키퍼 두덱의 방어를 피해 골네트를 갈랐다.

월드컵 첫 승
쐐기골 주인공

한국의 월드컵 첫 승에 가까워진 쐐기골이었고 결국 한국은 1승을 먼저 챙겼다. 

당시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휘젓던 유 감독의 세리머니는 아직도 국민들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사상 첫 월드컵 승리를 이끌었고 숙원이었던 16강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유 감독은 황선홍, 홍명보, 이운재, 안정환, 김남일, 설기현, 송종국, 이영표, 박지성 등과 함께 4강 신화를 쓰며 한국 축구사에 족적을 남겼다. 당시 히딩크는 유 감독을 김남일과 함께 중앙 미드필더로 기용했지만 상황에 따라서 공격수나 수비수로 활용했다. 

특히 큰 활약을 펼쳤던 것은 16강 이탈리아전. 당시 한국은 0대 1로 이탈리아에 뒤지고 있던 상황. 히딩크 감독은 후반전에 수비수 3명을 빼고 황선홍, 이천수, 차두리 3명의 공격수 투입했다. 공격수 5명을 필드에 두는 전술을 쓸 수 있었던 데는 유 감독과 박지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유 감독은 선발 때는 미드필더로 뛰다가 선수교체가 이뤄지면 백3의 좌측 스토퍼로, 홍명보가 빠지면 다시 중앙 수비수로 들어가 안정적인 수비수를 보였다.

결국 이날 유 감독의 활약에 힘입어 한국은 이탈리아에 2대1 역전승을 거둔다. 2004년엔 아테네올림픽에 와일드카드로 출전해 8강 진출을 돕기도 했다. 2005년까지 대표팀을 뛴 그는 성인 국가대표로만 총 124경기에 출전하는 기록을 세웠다.

유 감독은 은퇴 후 3년 뒤인 2009년 춘천기계공고에서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2011년에는 대전 시티즌(현 대전 하나시티즌)을 맡으면서 프로 감독으로 데뷔한다.

유 감독은 최용수 FC서울 전 감독에게 화가 났던 일화를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털어놨다. 유 감독은 팀 사정상 즉시 전력감이 될 수 있는 선수가 필요했다.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최 전 감독에게 FC서울에서 뛰지 못하는 선수를 추천받았다.

최 전 감독은 팀에서 출전을 잘하지 못하는 A 선수를 대전 시티즌으로 이적시켰는데 알고 보니 해당 선수는 디스크 부상이 있었던 것. 유 감독은 최 전 감독에게 부상선수라고 하자 최 전 감독은 자신도 몰랐다고 했다.

한일 월드컵 4강 ‘2002 스타’
“함께한 영광 기억하겠습니다”

훗날 유 감독은 “감독이 모르는 게 말이 되느냐”며 억울해했다. 2014년부터는 울산대학교 감독으로 경험을 쌓은 뒤 2018년 전남 드래곤즈로 프로 무대에 복귀했으나 8개월 만에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듬해인 2019년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직을 맡는다. 

유 감독은 인천 감독 선임 직전 “실패한 감독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게 두렵다”면서 인천에서 재기를 노렸다. 시즌 중반부터 팀을 맡았기에 초반엔 다소 부침이 있었지만 세 경기 만에 제주 원정에서 2-1 승리를 거두면서 인천 감독으로서 첫 승리를 거뒀다. 

여름 이적 시장 동안 당시 인천의 전력강화실장이었던 이천수 실장과 함께 김호남, 장윤호, 마하지, 케힌데 등 여러 선수를 보강하면서 K리그1 생존을 위해 애썼다.

시즌은 어느 덧 종반으로 향했고 파이널 라운드가 시작됐다. 유상철호의 인천은 성남 원정에서 무고사가 프리킥으로 결승골을 넣으며 1대 0으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이날 경기가 끝나자 선수들을 비롯해 이천수 실장까지 오열하는 모습이 중계화면을 통해 팬들에게 전달됐다.

귀중한 승점 3점을 챙긴 팀의 모습치곤 묘한 분위기가 인천을 감쌌다. 이날 결승골을 넣었던 무고사도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경기장을 빠져나갔고 김호남도 “나중에 알게 되지 않을까”라며 자리를 피했다.

이후 유 감독은 병원에 입원하면서 잠시 훈련장을 떠났지만 본인의 강력한 의지로 다시 인천 훈련장을 찾았다. 췌장암 4기 판정 소식이 구단 공식 SNS를 통해 전해졌지만 유 감독은 자신의 말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듯 여전히 인천 벤치를 지켰다. 

유 감독은 2019시즌 최종전 경남FC와의 경기에서 0대 0으로 비기면서 K리그1 생존을 확정했다. 유 감독은 팬들과의 약속을 지킨 사람이 됐다. 생존이 확정된 뒤 인천 팬들은 “남은 약속 하나도 꼭 지켜줘”라는 피켓을 들었다.

인천유나이티드는 유 감독이 건강상 이유로 감독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신임 감독 선임을 서두르지 않았다. 함께했던 코치진에 대한 신뢰를 보내며, 지난 1차 태국 전지훈련도 기존 코치진으로 치러냈다. 

기존 선수단과 코칭스태프와 함께 소통하고 화합할 수 있는 지도자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잡고 접근한 끝에 임완섭 신임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낙점했다.

이 과정에서 유 감독의 추천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천유나이티드 수뇌부는 새로운 감독을 찾으며 유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임 감독은 임 감독은 88학번이고 유 전 감독은 90학번으로 특별한 인연이 있다.

인천 팬들과 
약속 지켰다

과거 19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에도 같이 선발됐을 정도로 잘 아는 사이며 서로 안부를 묻는 친한 선후배 사이였다. 또 임 감독을 코치로 데뷔시킨 사람이 바로 유 전 감독이다. 임 감독은 “유상철 감독이 건강하게 돌아오면 언제든 자리를 내어줄 마음이 돼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감독은 지난해 6월, 7연패를 책임지며 지휘봉을 내려놨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회 문턱을 넘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이 사법부를 강타했다. 검찰은 1999년 특별검사제 도입 이후 권한을 조금씩 잃다가 올해 해체가 결정됐다. 검찰이 26년 전 느끼다가 현실이 된 불안을 이젠 사법부가 느낄 차례일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범여권이 지난 24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내란 사건만 맡는 전담재판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취지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다. 특별재판부 영장전담 법관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논평을 통해 ‘24일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날 법안 처리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박 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기자 간담회에서도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예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원래 처리하려던 법안은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법’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됐다면, 12·3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맡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고, 영장 심사를 맡을 특별영장 전담 법관이 따로 배정됐을 것이다. 이들은 국회·판사회의·대한변호사협회가 3명씩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규모의 추천위원회의 2배수 추천과 대법원장의 임명을 거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상고심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대법관은 모두 제척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에 대해선 각계에서 위헌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지난 16일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명칭도 특별재판부에서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 전담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장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 외부 인사를 제외한 후 법관으로만 구성될 예정이다. 추천위원회에 들어갈 법관 중엔 각급 판사회의·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포함된다. 전담재판부에 소속될 법관은 추천위원회·대법관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등 12·3 비상계엄 주요 연루자들은 이미 형사재판 제1심을 받고 있다. 전담재판부는 항소심부터 맡을 예정이다. 대법원은 민주당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대법관 행정회의를 열어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 및 심리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기로 했다. 여기엔 “형법상 내란·외환죄와 군형법상 반란죄 사건을 전담해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대법원이 규정하는 전담재판부는 무작위 배당을 거쳐 사건을 배당받을 재판부가 지정되는 방식이다. 전담재판부로 지정된 재판부가 원래 맡던 재판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된다. 예규엔 “해당 재판부는 이후 내란·외환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는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박 대변인은 “사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늦게 했느냐”며 “왜 그동안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의 입법권을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란 전담재판부 신설이 갖는 ‘진짜 함의’ 대법원 예규 제정…반격 혹은 타협안 제시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 중 “대법원이 헐레벌떡 자체 안이라고 내놨다”며 “더 일찍 해야 하지 않았느냐. ‘조희대 사법부’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국내 헌정사에서 특별재판부는 단 2회만 설치됐다. 제헌헌법 부칙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했다. 반민특위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 등 9명으로 구성됐고,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인 6명 ▲사회 저명 인사 5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국회가 선출했다. 두 번째 특별재판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개정된 제4차 개정 헌법을 근거로 설치됐다. 당시 개정 헌법엔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 관련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취지의 부칙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부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을 거쳐 설치됐다. 민주당조차 ‘특별재판부’를 ‘전담재판부’로 수위를 낮춰 처리했다는 이유로 내란 특별재판부에 대해 불거진 위헌 시비를 거론한다. 법원은 ‘무작위 전산 재판 배당’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재판부에 특정 재판을 배당한다”는 취지의 특별재판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위헌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관련 합헌·위헌 여부를 가린 적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 배당의 무작위성은 재판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영향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해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위헌 시비가 불거진 핵심 이유였다. 그래서 과거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기 전에 개헌 과정 중 헌법 부칙에 그 근거를 규정했다. 헌법 부칙은 헌법 본문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헌 시비가 불거질 일은 없었다. 피해 가는 위헌 시비 하지만 위헌 시비를 피하려고 제시한 ‘내란 전담재판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기존 재판부 배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사법부는 이미 무작위 배당의 예외를 운용하고 있다. ▲특허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역별 가정법원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원이 따로 설치돼있는 것도 무작위 배당의 예외다. 또 각급 법원은 이미 지식 재산·환경·의료 등 특정 전문 분야를 전담할 재판부를 분류한다. 법원장 재량에 따라,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특정 사건은 ‘적시 처리 필요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특정 재판부에 배당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추진한다. 기소된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재판과 사실 관계·쟁점·피고인이 같으면,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에 배당한다. 물론 민주당이 거둘 수 있는 실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민주당이 ‘특별’을 ‘전담’으로 바꿔가면서도 서둘러 개정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재판부는 내란·외환 사건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침대 축구하듯 질질 끌었다”며 “조 대법원장은 경고·조치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보다 못한 입법부가 나서기 전에 사법부가 진작 내란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면, 지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이 분통 터지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주장 중 핵심 단어는 ‘조희대’와 ‘지귀연’이다.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할 당시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지난 9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 부장판사를 지칭해 “재판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인사들을 전보·징계한다면, 굳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위한 입법 조치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 도중 “조희대 사법부는 특검 수사 훼방꾼이 됐다”며 “조 대법원장이 지휘하는 대법원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에 동조한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일부를 사실상 박탈하고, 지 부장판사를 내란 관련 재판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상당한 실익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판부 배당에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힘 실어준 진짜 이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인 지난 2018년 4월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설치됐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이를 일컬어 “지나치게 민주당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설치 직후 첫 의장으로 선출됐던 최기상 당시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지난 9월 민주당이 주장한 의제 ‘대법관 증원론’을 포함한 상고심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사법부는 대법관 증원안을 경청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공개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일컬어 “민주당에 힘을 설어주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한 게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제기됐다. 대법원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지난 9월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조 대법원장 사퇴 권고 등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예규 제정은 반격”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는 “내란 전담재판부를 줄곧 반대하다가 갑자기 예규 제정을 밝힌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외에도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꿀 만한 사법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대해선 “민주당의 공세를 적절한 선에서 수용해 더 큰 공세에 대비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가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사법개혁안 통과 시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으로선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꾸려는 민주당의 시도를 보면서 검찰이 해체되는 과정을 되새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법개혁안 자체가 사실상 ‘기존 법원 해체’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금씩 권한 잃다 해체 결정 검 종착역은 헌재 최고법원 등극? 민주당 등 범여권이 검찰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분리해 완수했던 검찰 해체에 대해선 “헌법은 검찰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검찰총장의 존재를 규정했다”면서 위헌 논란을 제기하는 반대 측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범여권은 이를 강행했다. 큰 틀에서 보면, 검찰은 ▲특별검사제도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분리 등 과정을 거쳐 해체됐다. 최초의 특별검사(이하 특검)는 지난 1999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과 한국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진행됐던 최병모 특검이었다. 특검이 성립됐던 배경은 “검찰이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회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한나라당은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흐름을 타고 강하게 밀어붙여 특검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별 특검법은 총 16개가 통과됐고, 상설 특검은 6회 추진됐다. 검찰로서는 1999년 최병모 특검 설치가 수사권·기소권 독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특검이 성립됐다는 것은 검찰에 대한 각계의 불신을 상징하는 중요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검찰을 노리는 다음 단계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최초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지난 2011년 진행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법경찰관이 검사의 수사 지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지휘 건의 제도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안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해 의결했다. 지난 2016년엔 ▲진경준 게이트 ▲정운호 게이트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연이어 발생해 검찰의 신뢰도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장기간 논의된 검경 수사권 논의로 연결된다. 공수처도 설치됐다. 민주당 집권 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강하게 기억하는 지지자들의 비원을 외면하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검찰은 서서히 권한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지난 9월에 이르러 검찰은 내년부터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갈라질 운명에 처했다. 특히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로 옮겨진다. 서서히 권한을 빼앗기다가 끝내 해체를 앞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안을 시도하고 있다. 범여권이 사법개혁안을 모두 통과시킨다면, 사법부로서는 “검찰에 이어 사법부도 한순간에 와해된다”고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순간에 와해된다 법원행정처가 없어지면 대법원장의 권한이 줄어든다. 법 왜곡죄가 도입되면, 판사의 재판도 법적 처벌 범위 안에 포함될 위험에 노출된다. 대법관이 늘어나 대법관의 권위·희소 가치가 줄어든 후 재판은 헌법소원 제기 범위 안에 포함된다. 최종 종착지는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을 제친 후 최상위 사법기관으로 규정될 순간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 24일은 사법부가 느낄 법한 공포가 처음 피부에 와닿은 날이었을 수도 있다. 새해엔 민주당과 사법부의 전쟁이 더욱 거칠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