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TV> ‘시작은 미비했으나…’ 반도체 신화 이끈 이건희 회장

[기사 전문]

지난 25일 새벽 3시59분, 병상에 누워있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향년 78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이 회장은 1987년, 삼성그룹 회장직에 오른 이후 삼성을 세계적인 그룹으로 발전시켰는데요.

그런데 삼성그룹이 작은 상회에서 시작했다는 걸 아시나요?

이번 시간에는 삼성의 시작과 고인의 지휘 아래 삼성이 어떻게 세계적인 그룹으로 발전했는지 살펴봤습니다.

고인의 부친이었던 고 이병철 회장은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창업합니다.


이후 운수업에도 진출하면서 사업의 규모가 커지자 2년 뒤인 1938년 대구 서문시장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한 후 번창하는데요.

그러던 중 1942년 1월9일 3남5녀 중 8번째 막내 아기가 태어나는데 바로 이건희 회장이었습니다.

태어난 후 3세까지는 부모님과 떨어져 할머니 댁에서 성장했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소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사이 이병철 회장의 삼성상회는 중국과 일본에 청과류와 어물 등을 수출하면서 번창했고, 경성(서울)에 삼성물산공사를 세우면서 무역업까지 진행하면서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으나 6·25전쟁이 발발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맙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부산으로 피난 온 이병철 회장은 그동안 사업으로 벌어들인 자본과 삼성상회의 남은 종잣돈을 모아 1951년 부산에서 다시 재기를 노리는데요.

이때 설립한 회사가 삼성물산으로 현재의 삼성그룹의 초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성물산은 이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그룹의 외형을 갖추기 시작했는데요.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정부의 모직물 수입 금지 등의 수혜를 입으면서 국내 제1의 재벌기업으로 도약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한국으로 돌아온 이건희 회장은 서울사대부고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의 동창이었던 홍사덕 전 의원에 따르면 공장을 지어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게 애국이며 국가안보를 튼튼하게 하는 것에 대해 주로 말했다”며 “1950년대 고등학생이 생각하기에는 매우 독특한 사고를 했다"고 전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고 이병철 회장이 삼성의 임직원 한 명을 해고했는데 당시 고등학생인 이건희 회장이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하자 두 말하지 않고 그 임원을 복직 시켰다고 하는 일화도 유명한데요.

아마도 당시 이병철 회장은 이건희 회장의 사람 보는 안목을 높이 사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이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가 일본의 와세다대학 경영학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러는 사이 삼성에는 몇 번의 위기가 찾아오는데요.

이병철 회장은 정부와 공동사업으로 국내 최대규모의 비료 공장 설립을 준비했지만 1960년 4·19혁명으로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게다가 부정축재와 탈세 혐의로 연행되고 벌금 50억원을 내기도 했는데요.

10여년 곡절 끝에 비료공장이 완성됐지만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게 되면서 이병철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2년 뒤 복귀하게 됩니다.

유학 후 돌아온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가 설립한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의 이사로 부임해 높은 성과를 냈고 1978년 삼성물산의 부회장으로 임명됩니다.

그리고 삼성의 전설은 1982년 삼성반도체 통신을 설립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반도체 개발에 있어 세계 최초 타이틀을 갱신하며 오늘날 글로벌 그룹으로 발전하기까지는 1987년 취임한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여겨지는데요.

초기 삼성 휴대폰의 불량률이 10%에 달하자 이건희 회장은 전량회수해 직원들 앞에서 모두 불태우는 ‘충격요법’을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생산물에서도 불량품이 나오자 그 유명한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어록을 남기며 불량이 나오면 원인을 찾을 때까지 라인 스톱제를 도입하는 등 변화와 혁신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며 세계 정상을 목표로 삼았던 이건희 회장은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게 됩니다.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되어 심폐소생술을 통해 심장은 다시 뛰었지만, 상태는 좋지 못했고 6년5개월 동안의 투병 끝에 지난 10월25일 사망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에는 밝은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노조 경영을 고집하거나 반도체 노동자들의 사망 사건 조세포탈 등의 논란도 있었는데요.

하지만 지금의 삼성이 세계적인 그룹으로 성장하며 국가의 위상을 높인 데 있어서 이건희 회장의 공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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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까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 초,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가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