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조세피난처' 통한 한국기업 역외탈세 실태

  • 김민석 ideaed@ilyosisa.co.kr
  • 등록 2012.08.02 14:3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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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 목적 '검은돈' 890조원 해외에 은닉돼 있다!

[일요시사=김민석 기자] 탈세를 위해 해외에 은닉한 한국기업들의 '검은돈'이 890여조원에 달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충격이 가시질 않고 있다. 이는 2012년 대한민국 1년 예산인 325조원의 두 배를 웃도는 액수로 우리나라 총가계부채(1000여조원)과 비슷한 수준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천문학적인 세수가 새고 있어 탈세기업은 살찌지만 나라곳간은 비지 않을 수 없다. 이 주장은 영국의 '조세정의 네트워크'의 최근보고서에서 제기된 것으로 우리나라 기업이 조세피난처로 몰래 빼돌린 돈이 중국과 러시아에 이어 3위로 발표됐다. 한국기업들의 역외탈세(조세피난처를 이용해 탈세하는 행위) 실태를 살펴봤다.

해외 조세피난처에 숨겨진 한국의 비자금이 무려 7천7백90억 달러(한화 890여조원)에 달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그 여파가 오랫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조세피난처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는 영국의 시민단체인 '조세정의 네트워크'는 지난 22일 보고서를 통해 40여 년 간 전 세계 갑부들이 조세피난처(스위스, 룩셈부르크, 케이맨제도 등)로 빼돌린 돈이 21조달러(약 2경4000조원)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미국과 일본의 한 해 국내총생산(GDP)을 합친 것과 맞먹는 엄청난 규모로 전 세계 총생산의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 그중 한국은 1970년대부터 2010년까지 해외 조세피난처로 빼돌린 자산이 총 7790억달러(약 888조4500억원)로 중국(1억1890억달러), 러시아(7980억달러)에 이어 3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재정 위기 불러온
'조세포탈' 잡아라

조세피난처에서 이루어지는 역외탈세는 국내 법인이나 개인이 조세피난처 국가에 유령회사를 만든 뒤 그 회사가 수출입 거래를 하거나 수익을 이룬 것처럼 조작해 세금을 내지 않거나 축소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해외에서의 소득은 노출되기 어렵다는 점을 악용한 것으로 그 과정이 은밀한데다 수법도 첨단ㆍ지능화되고 있다.

한편 보고서를 작성한 제임스 헨리는 국제통화기금 IMF, 월드뱅크 WB, 국제결제은행 BIS 등의 자료를 참고했다고 밝혔다. 이어 조세포탈 적발분야의 최고권위자로 꼽히는 유펜 와튼스쿨의 사이먼 박 교수(한국명 박중석)의 연구성과를 기초로 했다고 설명했다. 사이먼 박 교수는 미국 국세청이 이전가격 조세포탈프로그램 개발을 맡길 정도의 뛰어난 전문가로 수년 전 조세의 이전가격 문제를 한국에서도 제기했다.

지난 2008년 세계적인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주요 국가들은 늘어나는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해외 모처로 빠져나간 갑부들의 검은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세계 1위 경제국가인 미국은 한해 국내총생산(GDP)이 약 15조달러인데, 그 2배가 조세피난처에 은닉된 것으로 추정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에 2008년 재정위기를 기점으로 하여 각 주요 국가들은 역외탈세 차단에 나서기 시작했다.


다음해 2009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에서는 조세피난처에 대한 제재조치를 위해 국제공조를 강화하는 선언문이 채택됐다. 이후 각국은 활발한 조세외교를 통해 조세조약 체결 및 정보교환 협정을 맺고 조세피난처에게 국제적 기준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각국의 압박에 대표적 조세피난처이자 자금세탁처로 알려진 독일의 리히텐슈타인과 이탈리아의 산마리노가 무너지며 난공불락처럼 여겨졌던 '금융비밀주의'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방은 스위스에서 터졌다. 스위스는 16세기부터 프랑스 왕가를 포함한 주요 귀족들을 상대로 은행업을 시작한 이래 은행 고객의 신분과 계좌정보는 철저하게 비밀을 지킨다는 원칙, 금융비밀주의를 고수하며 무려 500여 년을 철칙으로 삼아왔다. 그 결과 전 세계의 갑부들뿐 아니라 개발도상국의 독재자에서 마피아집단까지 스위스은행을 찾아, 말 그대로 '검은돈의 성역'이 되었다.

국내자금 '보물섬'으로 빼돌려 세금 피하고
장사가 될 만한 기업에 투자하여 이윤 얻고
이윤 발생하면 다시 보물섬으로 빼돌리고…

미국이 스위스은행을 상대로 칼을 뽑아 든 것은 지난 2009년, 미 재무부가 스위스 최대 은행 UBS가 미국 재산가들의 탈세를 도왔다는 정황을 잡고 고강도 세무조사를 진행, UBS에 7억8000만 달러라는 엄청난 벌금을 부과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미국 내 UBS 지점들을 모두 폐쇄하고 자산을 압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UBS를 압박했다. 결국 UBS는 굴복하여 미국인 갑부 수천 명의 계좌정보를 미국에 제공했다. 이어 스위스 정부는 자국 은행법을 OECD 기준에 맞추기로 하면서 금융비밀주의와 작별을 고했다. 500여 년간 지켜온 철칙이 무너진 것이다.

현재에 이르러 OECD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조세피난처 국가 또는 지역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조세피난처가 사라졌을 뿐, 여전히 탈법적 조세피난처는 존재하고 있으며 아직도 금융비밀주의라는 빗장을 굳건하게 걸고 있다. 현대판 보물섬이나 다름없는 조세피난처에 세계 각국의 갑부들이 어느 정도의 검은돈을 숨겨두고 있는지 명확한 통계가 없는 실정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99%를 쥐어짜기보다 1%의 보물섬부터 없애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조세피난처를 통해 이루어지는 역외탈세만 잡아내도 각국에서 벌어지는 재정위기는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카리브해 동부에 위치한 브리티시 버진아일랜드(영국령)는 인구 2만5000명가량에 불과한 작은 섬나라이다. 하지만 버진아일랜드에는 수십만 개의 기업이 등록되어 있다. 바로 역외탈세 목적으로 의심되는 세계 주요국 대기업들의 자회사들로 버진아일랜드에는 이들 기업들의 자회사(페이퍼컴퍼니)를 관리해 주는 회사들로 넘쳐난다.

이곳 버진아일랜드에 우리나라 기업들도 다수 자회사를 세워 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국세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업들이 주로 이용하고 있는 조세피난처로는 버진아일랜드를 포함해 케이만제도(미국령), 홍콩 및 싱가포르 등인 것으로 밝혀졌다.


현대판 보물섬
'검은돈' 넘치는 62개국

우리나라 국세청과 관세청은 경제거래가 활발한 국가 중 조세피난처 역할을 하는 62개국을 우범국으로 지정해 관리해 오고 있다. 하지만 해당 국가 및 지역과의 정보교환협정이 맺어져 있지 않거나 정보교환협정이 체결됐음에도 정식 발효가 미뤄지고 있어 유용한 정보를 캐내기가 불가능해 사실상 방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지난 25일 대기업 전문 분석사이트 '재벌닷컴'에 따르면 국내 30대 재벌그룹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국제 핫머니의 조세피난처로 지목한 국가나 지역에 설립한 해외법인이 47개사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어 재벌닷컴은 자산순위 30대 그룹의 해외법인(공기업 및 민영화 공기업 제외)을 조사한 결과 작년 말 기준으로 2224개로 집계됐다고 발표했다.

이 중 롯데, 삼성,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LG 등 15개 그룹은 OECD가 국제 핫머니의 조세피난처로 지목하고 있는 44개 국가 혹은 지역에 47개 해외법인의 주소를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룹별로는 롯데가 178개 해외법인 가운데 13개사를 조세피난처 지역에 두고 있어 30대 그룹 중 가장 많았다. 롯데는 버진아일랜드에 9개사, 케이만제도에 3개사, 모리셔스에 1개사 등의 해외법인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 해외법인은 모두 비금융 지주회사로 조사됐다. 이를 두고 롯데는 "롯데마트가 중국에 진출하면서 인수한 타임스와 롯데홈쇼핑이 중국사업을 위해 인수한 럭키파이,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했고 또다시 타이탄 등을 인수하여 기존 법인을 버진제도에 설립한 것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현대차는 케이만제도에 투자전문회사 4개사와 버진아일랜드에 부동산개발회사 1개사를 소유하고 있고, 현대중공업은 마셜제도, 버뮤다, 모리셔스, 파나마, 케이만제도 등에 1개사씩을 두고 있다. LG는 파나마에 컨설팅회사 등 3개사와 마셜제도에 자원개발회사 1개사를 설립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현대는 파나마와 버진아일랜드에 해운업 관련 법인 3개사와 1개사를 각각 두고 있다.

삼성은 케이만제도에 음원유통업체 1개사, 버뮤다에 보험회사 1개사, 파나마에 해운업체 1개사 등 3개사를 갖고 있고, 한화도 케이만제도에 태양광 관련 지주회사 2개사와 버진아일랜드에 태양광투자회사 1개사 등 3개사가 있다.

국내 재벌기업
해외에 유령법인 없으면 바보?

미래에셋은 중남미지역에 위치한 바베이도스에 특수목적회사(SPC) 1개사와 케이만제도에 투자전문회사 1개사 등 2개사를, 동양은 파나마에 원유 및 천연가스채굴회사 1개사와 케이만제도에 제조업체 1개사를 갖고 있다.

이밖에 GS가 파나마에 임대업체 1개사, 한진이 키프로스에 판매대리업체 1개사, CJ가 버진아일랜드에 비금융 지주회사 1개사, 효성이 케이만제도에 변압기 제조업체 1개사, 동국제강이 파나마에 운송서비스업체 1개사, 한진중공업이 키프로스에 투자업체 1개사를 각각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같이 조사대상 그룹이 조세피난처 지역에 보유하고 있는 47개 법인 가운데 비금융 지주업이나 자원개발업, 부동산개발 등 투자 관련 회사가 60%가 넘는 30개를 차지했으며, 제조업 관련 회사는 3개사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지난 24일 금융당국과 한국수출입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1968년부터 지난 3월까지 우리나라 대기업 및 갑부가 조세피난처 35곳에 투자한 것으로 '확인된' 금액만 약 24조7800억원으로 조사됐다. 또 조세피난처에 설립된 국내기업의 페이퍼컴퍼니는 사상 최대인 약 5000개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주요 투자 대상지는 싱가포르가 약 4조6600억원으로 가장 많고 말레이시아와 케이만제도가 각각 3조3700억원, 버뮤다 약 2조9000억원, 필리핀 약 2조8000억원 등이다. 이 기간 우리나라 국외투자 총액이 1966억달러(약 225조여원)인 점을 고려하면 전체 대외 투자액의 10% 이상이 조세피난처로 향한 것이다.


이어 관세청의 집계에 따르면 홍콩과 영국, 캐나다, 네덜란드, 케이만제도 등 대표적인 10개 조세피난처에 투자된 금액이 2007년 약 8조3000억원에서 2012년 약 14조5300억원으로 4년 새 약 6조 2000억원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 세계 총생산 3분의 1, 우리나라 총가계부채와 근접한 액수
돈 주체 못하는 1%, 가난에 허덕이는 99% '부익부빈익빈' 가속

아울러 관세청이 적발한 국외 재산도피 및 자금세탁 사례도 증가했다. 적발된 재산도피는 2007년 13건 166억원에서 2010년 22건 1528억원으로 금액으로만 보면 10배가량 급증했고, 자금세탁은 6건 83억원에서 43건 924억원으로 11배나 늘었다.

이와 같은 조세회피 의혹에 대해 모든 그룹들은 일제히 반기를 들고 일어날 조짐이다. 특히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서 '경제민주화' '재벌개혁'과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에 나온 조사결과라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어 그룹이미지에 큰 타격이 오지 않을까 염려하는 눈치다.

일부 조세경제전문가들은 현재 확인된 숫자보다 더 많은 해외법인 존재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조세피난 국가에 진출한 30대 그룹의 '숨은 계열사'는 추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근 국세청도 역외탈세 조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6월 중순 국세청이 SK와 삼성물산, 금호석유화학의 역외탈세 실태조사를 위해 대표적 조세피난처 중 하나인 홍콩에 직원 6명을 극비리에 급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세청은 이들 대기업이 홍콩 법인 등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는 등 역외탈세 혐의가 있을 것으로 보고 사전 조사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스위스와 협의를 통해 개정한 한-스위스 조세 조약상 정보교환조항이 지난 25일부터 효력을 발휘했다. 이는 2010년 12월 정보교환조항이 담긴 개정 조세조약에 양국이 서명한 지 1년7개월 만이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국세청은 스위스 은행에 예치된 한국인들의 계좌정보를 이름, 주소 등 인적사항 없이 계좌번호만 가지고도 정보제공 요청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를 통해 국세청 역외탈세 세무조사에 획기적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 재산가들에게 스위스는 더 이상 '세금천국'이 아니게 된 것이다.

국세청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는 미국과 중국·일본·영국 등 77개국과 조세조약을 체결했다. 현재까지 조세정보교환협정이 체결된 조세피난처는 버뮤다, 사모아, 쿡 등 15개 국가 및 지역이지만 이 중에 쿡을 제외한 14개 국가 및 지역과 체결한 조세정보교환협정은 효력이 발효되지 않고 있다. 이에 정부는 이들 국가 및 지역과 맺은 협정의 효력이 하루라도 빨리 발효되도록 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사태 심각성 절감한 국세청

해외 세무조사단 파견

그밖에 우리나라는 싱가포르와 벨기에,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호주, 말레이시아, 오스트리아 등 8개 국가와 금융거래정보제공을 골자로 한 정보교환조항을 개정했다. 역외탈세 조사를 차일피일 미루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급하게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보잉사와 씨티그룹사 등의 조세회피를 다룬 책인 <보물섬>의 저자 니콜라스 색슨은 "세법상 구멍은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가장 큰 이유는 국내에서 벌어지는 탈루행위는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으나 역외탈세는 국가공조, 정보수집이 어렵고 해외투자로 탈바꿈하는 등 교묘히 위장하는 경우가 많아 조사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큰 파문을 불러온 '조세정의 네트워크'의 조세피난보고서. 이를 두고 당분간 뜨거운 진실공방이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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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검찰의 문제는 지금까지 권력자가 검찰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때문에 검찰도 못된 버릇이 들어 이렇게 됐다. 개혁보다 “검찰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진짜 문제다. 검찰을 3개로 찢어놓는다고 해서, 검찰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란 확신은 못하겠다. -이 대통령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씨를 주중대사로 임명했다. 노 대사가 어떤 역할을 할 것 같은가? ▲노 전 대통령은 한중 수교를 이끌었다. 노 대사는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으로서 한중 문화 교류와 관련된 많은 역할을 했다. 이 대통령이 이를 참작해 중국 대사로 임명하는 신선한 인사를 한 것 같다. 이 대통령도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했으니 노 대사를 임명했을 것이다. -최근 민주당의 내부 구도를 놓고 ‘김어준 상왕설’이 불거지고 있다. 이 주장은 정국을 강경하게 이끄는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대응과 맞물리고 있는데… ▲김어준씨가 유튜브를 시청하는 일정 부류엔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런데 대중에게 크게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보진 않는다. 대통령이 엄연히 있기 때문이다. ‘상왕설’은 너무 과장된 얘기라고 생각한다. -최근 특검 수사 기간 연장과 관련해 정 대표와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가 충돌했다. ▲내부 의견 충돌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내가 보기엔 김 원내대표가 독단적으로 합의한 것 같진 않다. 합의 후 강성 지지층이 반발해서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합의를 파기하려다 보니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그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 대통령과 정 대표는 과거에 갈등이 많았고, 최근 민주당에 대해선 “친명과 구 친문이 갈등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그건 다 괜히 하는 소리다. 대통령이 엄연히 있는데, 당 대표가 대통령을 상대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기가 쉽진 않다. -민주당 일각에선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에 합당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혁신당 조국 비대위원장은 목표가 정해진 사람이다. 합당이 그 목표 실현에 유리할지 많이 생각할 것이다. 아울러 조 비대위원장으로선 혁신당만으로 전국 단위 선거를 치를 수 있을지 고민할 텐데, 상황에 직면하면 합당 여부를 정하지 않겠나? 합당은 민주당 내부에서도 받아들일 의사가 있어야 진행될 수 있다. 자신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서 합의점에 도달하면 합당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대통령 있는데 당대표가 어떻게 의사 관철?” “장동혁은 대권 욕심 갖고 계속 변화할 것”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이끌던 국민의당과 혁신당은 총선을 치르면서 호남에서 선전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호남 민심이 어떤 선택을 할 거라고 보나? ▲두고 봐야 안다. 호남 민심은 제19대 대선에선 안 의원이 아니라 문재인 전 대통령을 선택했다. 호남 유권자들은 상당히 전략적으로 투표한다. 그들은 정권 재창출이 가능한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다. 그러니 선거를 치러봐야 알 수 있다. 지금은 뭐라고 얘기하기 어렵다. -장 대표가 취임하자, 강경 보수 유튜버들은 “군소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국민의힘과 강경 보수 유튜버들이 너무 밀착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국민의힘이 계속 지금과 같은 자세를 유지하면, 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국민의힘은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사태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이후 우리 정치 지형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냉철하게 분석해야 한다. 변화가 있어야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강경 보수로 회귀하면, 희망이 있다고 보이진 않는다. -장 대표는 강경 보수와의 밀착과 중도층 공략 사이에서 계속 의견이 바뀐다. ▲장 대표에게도 정치적 목표가 있을 텐데 그는 목표 달성을 위해 많은 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강경 보수의 지원을 받아 당 대표가 됐지만, 자신의 정치적 지향점을 어떻게 결정할지 잘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지나치게 강경 보수와 밀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그들과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선을 긋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에게는 크게 정치적 기대를 하기 힘들다고 본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가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어차피 당 대표가 됐으니, 대권 욕심을 가질 것이다. 정치인은 언제나 시대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장 대표 스스로 “변화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계속 많이 변할 것이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장 대표가 당선되면서 위상이 많이 훼손됐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 전 대표의 행보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국민의힘 당원들은 상당한 분노에 차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강경해졌다. 세월이 흘러 당원들이 당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면, 또 변할 수도 있다. 지금 상황만으로 판단하기엔 굉장히 이르다. 한 전 대표가 당시 여당 대표로서 비상계엄 선포 직후 반대 의견을 밝히면서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에 찬성한 것은 굉장히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앞으로 어떻게 정치적으로 발전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국민의힘에선 가장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 본다. -장 대표가 한 전 대표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장 대표로선 당연히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쫓아낼 수 있겠는가? 어떻게 쫓아내겠나? 오늘의 장 대표는 한 전 대표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대표는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 오세훈 서울시장 등과 지방선거에서 연대할 가능성을 내비친다. ▲뻔한 사람들끼리 하는 거라서 큰 효과가 있을 것 같진 않다. 모두 국민의힘 사람이거나 국민의힘 출신인데 특별한 효과가 있겠는가? -진영 간 대결 구도가 성별·세대 갈등 구도로 번졌다. 정치권 원로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시대·사회·경제 구조가 변하고, 새 기술이 도입되면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국민 사이에 형성되는 ‘그룹’을 조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이 필요하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 “이준석·안철수·오세훈? 뻔한 사람들” “국힘, 강경 보수로? 희망 보이지 않아” -일부 정치인은 갈등을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후원금을 벌고 있다.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갈등을 전체적으로 포괄한 후 최대공약수를 찾아 정치해야 한다. -과거 정치와 현재 정치의 가장 큰 변화와 차이점은? ▲못 살던 시절엔 먹고사는 게 가장 중요해서 경제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지금은 국민의 의식 구조가 과거와 다르다. 이 시대의 젊은 세대는 우리 국민 중 성숙도가 가장 높다.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도 가장 좋다. 이들은 공정하지 못하고, 불평등하며, 민주적이지 않은 것에 크게 저항한다. 세대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극우화됐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4050 남성이 2030 남성에게 가장 불만을 품는 부분은 “너희는 왜 국민의힘을 지지하면서 보수화되느냐”는 것이다. ▲2030 남성은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게 아니다. 최근 국민의힘은 장외 집회를 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너무 소란을 피우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흔히들 “장 자크 루소가 얘기하는 계몽주의가 프랑스 대혁명을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계몽주의가 뭔가? 성숙지 못한 국민을 성숙하게 만들어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의 성숙도는 매우 높아졌다. 이 때문에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도 실패했다.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 정치가 이를 따라가야 하는데, 접근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정계의 킹메이커로 알려졌다.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대통령은 정직해야 한다. 시대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대통령들이 모두 실패한 원인은 너무 탐욕스러웠고, 시대 변화를 제대로 못 따라갔다는 것이었다. -최근 한국 정치·사회에서 작게나마 희망을 봤거나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 반대가 된 일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제일 시급한 과제는 아주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다. 이를 완화하지 않으면, 한국 정치는 국민통합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초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고, 출산율은 매우 낮다. 경제의 역동성이 거의 없어지고 있다. 정치인이 말로만 소통·통합을 외친들 아무 소용이 없다. -추석 연휴를 앞둔 <일요시사> 독자에게 남길 덕담 한마디가 있다면? ▲대통령을 선출하는 기준이 여론조사에 휩쓸리는 식으로 정해지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윤 전 대통령도 그렇게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랫동안 검사였던 사람이 지도자가 된 사례가 세계적으로 별로 없다. 이들은 남의 부정적인 측면만 따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창의적·긍정적 역할을 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제가 그를 호의적으로 봤던 것도 큰 잘못이었다. 당시 국민의힘엔 대통령감이 없었다. 그래서 저는 윤 전 대통령의 여론조사 지지율이 높은 것을 일컬어 “별의 순간을 잡았다”고 말했다. 결국 윤 전 대통령은 제가 우려했던 행동을 했다. 저는 이승만 전 대통령 외엔 모든 대통령을 만나봤다. 직접 자문도 했고,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적도 있다. 이 경험을 토대로 <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라는 책도 출간했다. 이들이 실패한 원인은 초심을 관철하지 못했단 것이었다. 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된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이미 우리나라에선 오래전에 보수·진보가 사라졌다. 지난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됐던 제15대 대선도 보수·진보의 싸움이 아니었다. 모두 보수였다. 19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은 정치권에 진출한 후 스스로 대단한 진보를 자처했다. 그런데 이들은 진보의 뜻도 모른다. 이들은 정권을 네 번 잡을 동안 양극화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무슨 진보 정권인가? 국민이 정치 상황을 냉철하게 관찰하시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자세를 갖추셔야 한다. 대통령·국회의원도 결국 국민이 선출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란다. <ctzxp@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