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세의 골프 인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캐디

캐디와 골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수백 년 전의 캐디는 클럽을 들고 다니는 단순한 헬퍼에 불과했지만, 오늘날 프로골퍼들에게 있어서 캐디는 없어서는 안 될 조언자 이상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역사상 유명한 캐디는 누구였을까?

그린 읽기

프로골프 초창기였던 20세기 초반 미국에서는 역사상 위대했던 선수들 대부분이 캐디 출신 이었다. 진 사라센과 월터 하겐이 캐디 출신이었으며 그 뒤를 이은 샘 스니드, 바이런 넬슨, 벤 호건, 등이 가난 때문에 캐디를 택했던 골퍼들이었다.

물론 아놀드 파머는 아버지가 골프장의 매니저였던 덕택에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도 캐디 시절을 지났다. 그들은 모두 역사상 위대한 골퍼의 반열에 올랐다. 가난을 탓하지 않고 캐디 일을 하면서 어깨 너머로 스윙을 배우고 익혀 훌륭한 골퍼가 된 것이다.

이들 위대한 백인 캐디 출신의 골퍼들은 예외로 한다면, 당시의 캐디들은 흑인 아동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목화밭이나 땅콩밭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것보다 캐디직을 얻는 것이 훨씬 더 행운이었고, 훨씬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선망의 직업으로 인식되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보수는 18홀의 경우 캐디피가 1달러에도 못 미치는 75센트, 한화로 1000원이 안 되는 수준이었지만, 어려웠던 시절에는 그만한 돈도 절실했으며 흑인 아동들이 앞다퉈 캐디를 원했다.


그렇다면 미국에도 여성 캐디는 존재했을까? 한국과 달리 미국 유명골프장의 캐디들은 대부분이 남자들이지만 한때 미국에도 여성 캐디들이 존재했던 기록이 있다.

1918년 프란츠 리카비라는 캐디 출신의 작가가 쓴 <여자캐디(THE GIRL AS CADDIE)>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남자들이 군대로 나가게 되자 캐디들의 공급이 모자랐다. 전쟁 와중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에 어린이들은 학교는 고사하고 단지 굶주림을 이기기 위해 캐디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캐디들은 오히려 선수들에게 도움은커녕 짐만 될 뿐이었다.

과거, 클럽 들고 다니는 단순한 헬퍼
현재, 없어선 안 될 불가분의 관계

1913년 미시건주의 샬러보어 골프장에서 캐디팀장을 맞고 있던 프란츠는 최고 150명에서 80명으로 줄어든 남자 캐디들의 부족분을 보충키 위해 10대 여자들을 대상으로 캐디를 모집했다. 모두 14명이 응모를 했고 몇 주에 걸친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남자들과 똑같이 페어웨이를 정리 하고 해저드에 들어간 볼을 찾아야 했으며 샌드샷이 끝나면 모래를 정리하고 그린도 보수했다. 

그들의 복장은 몸에 달라붙는 원피스에 허리벨트를 졸라매어 날씬하게 한 뒤 남자골퍼들을 따라 다니게 했다. 캐디 본연의 일은 물론 충실히 했지만 눈요기 감이라는 세간의 불평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여론에 못 이겨 훈련이 끝난 뒤 단 3명만 남았고, 이들은 미국 최초의 여성 캐디가 됐다.

그렇다면 훗날 회자되는 역사상 위대한 캐디는 존재했을까? 1913년 US오픈에서 주인공이 나타났다. 당시 이 대회는 아마추어 최고봉으로 미국의 우상인 프란시스 위멧과 영국이 낳은 위대한 골퍼 해리 바든이 연장 맞대결을 벌인 골프사에 기록되는 명승부였다. 


겨우 20세에 불과한 이름도 생소한 위멧이 노장 바든을 이기고 미국의 우상으로 떠오른 경기였다. 그의 우승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에디 라우어리라는 캐디였다. 하물며 에디는 위멧의 원래 캐디도 아니었고 시합 전날 급하게 구한 대역 캐디로 뚱뚱하고 작은 키에 무거운 골프백을 매고 낑낑대는, 주근깨 많고 볼품없는 초라한 모습의 10세 소년이었다. 

하지만 에디는 그린 읽기에서 만큼은 신통력을 발휘했다. 위멧은 어린 에디가 하라는 대로 퍼팅을 했고, 볼은 백발백중 홀컵으로 빨려 들어갔다. 에디 덕분에 위멧은 미국 골프의 우상이 된 것이다. 전설로 불리는 보비 존스가 등장하기 이전이었다.

훗날 에디는 억만장자의 사업가가 됐고, 아마추어 골퍼로 은퇴한 위멧은 에디의 신세를 지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남겼지만, 1913년 US오픈에서의 에디 라우어리는 미국 골프사에 영원한 캐디 영웅으로 남게 된다.

1559년 후 16세기 중엽 처음 등장
돈 필요한 흑인 아동이 직업으로

캐디라는 단어와 기원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프랑스에 머물던 1559년 이후의 16세기 중엽이 캐디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1547년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면서 스코틀랜드를 침공했고, 5세에 불과했던 어린 메리 여왕을 보호하기 위해 왕실은 메리를 프랑스로 극비리에 탈출시켰다.

당시 스코틀랜드와 프랑스는 잉글랜드에 대적하기 위해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상황이었다.

프랑스로 보내졌던 메리는 17세의 한창 나이에 프랑스의 왕세자인 프란시스 2세와 골프와 사랑을 나누면서 함께 자랐다. 그들 옆에는 경호 겸 골프클럽을 들어주던 현역 프랑스 육군사관생도들이 늘 함께 있었다. 프랑스어로 당시 이들을 카데트 CADET라고 불렀다. 생도, 혹은 집안의 막내아들을 의미하는 프랑스 단어다.

이 어원이 100여년 뒤인 17세기에는 스코틀랜드에서 부두하역을 하는 일꾼이라는 의미에서 CADY, CADDY등으로도 불렸다. ‘에딘버러 골프 클럽의 프로였던 앤드루 딕슨은 어린시절인 1681년 왕실 전용 골프장인 리스(LEITH) 코스에서 요크 백작의 클럽을 들고 다니는 캐디 생활을 했다’고 언급된 내용이 영국에서 캐디라는 단어에 관한 최초의 문헌으로 알려져 있다.

옥스포드 사전은 1857년에 캐디를 ‘골프 클럽을 들고 다니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19세기의 캐디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한 사람은 티 박스에서 골프채를 들고 볼의 방향을 봐주면서 골퍼들과 동행하는 현재의 캐디인 워킹 캐디(WALKING CADDY)이고, 또 한 명은 페어웨이에 있으면서 볼이 떨어진 지점과 해저드에 빠진 볼을 찾아서 원활한 진행을 도와주는 포어 캐디(FORE CADDY)였다.

값이 비싸고 귀한 페더리 볼을 사용하던 시절에는 페어웨이 캐디의 역할이 훨씬 중요했다. 포어란 비포어(BEFORE)가 축약된 단어로서 BE+ FORE 즉 ‘…앞에 있다, …전에 있다’라는 뜻이다. 

신통력


골프용어 중에서 뒤에서 따라가는 포섬이 친 볼이 앞 조에게 맞을 것 같으면 ‘포-어(FO-RE!)’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현대 골퍼들은 ‘볼’이라고 소리친다. 잘못 발음해서 그저 ‘뽀올’ (BALL)처럼 부르는데, 이는 틀린 표현이고 실제로는 ‘포-어’라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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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까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 초,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가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