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국회 문턱 넘은 3인의 헌법재판관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8.10.22 10:00:55
  • 호수 11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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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사법기관 드디어 정상화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사법부 최고 기관인 헌법재판소가 한 달 만에 정상화될 조짐이다. 김기영·이종석·이영진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자가 인준됐다. 그동안 정치권서 여야간 이견으로 국회 추천 몫이었던, 신임 재판관들에 대한 표결 합의가 늦어졌다. 
 

국회는 지난 17일, 본회의를 열어 국회 몫 재판관 후보자 3명의 선출안을 의결했다. 교섭단체 여야 3개 정당이 각각 추천한 김기영(더불어민주당), 이종석(자유한국당), 이영진(바른미래당) 재판관 후보자의 선출안은 연기식 무기명 투표 결과 모두 가결됐다.

김기영 재판관은 총 238표 가운데 찬성 125표, 반대 111표, 기권 2표를 얻어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이종석 재판관과 이영진 재판관에 대한 찬성표는 각각 201표, 210표였다. 이종석 후보자는 반대 33표, 기권 4표를, 이영진 후보자는 반대 23표, 기권 5표를 각각 얻었다.

재판 심리 올스톱 
한 달 만에 정상화

앞서 여야는 인사청문회를 끝내고 지난달 20일, 국회 본회의서 선출안을 표결에 부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여·야 간 이견으로 인준에 진통을 겪어왔다. 자유한국당이 김기영 재판관의 국제인권법연구회 활동을 문제 삼으며 인사청문회 보고서 채택을 거부하면서 사달이 났다. 

자유한국당은 “법원 내 학술단체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정치적 편향성을 갖는 단체라며 김기영 재판관에게 공정한 헌법재판을 기대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정치권 일각에선 더불어민주당과 김명수 대법원장이 재판관 후보자를 서로 교차 지명하기로 내부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나돌면서 자유한국당의 반대는 더욱 거세졌다. 더불어민주당이 김기영 재판관을 선출해주는 대신 김 대법원장이 대표적인 진보성향 법조인인 이석태 재판관을 지명하기로 사전에 약속했다는 의혹이다.

정치적 편향, 내부지명 의혹 제기
여야 진통 끝에 결국 선출안 가결

그러나 자유한국당이 김기영 재판관이 실제로 정치적 편향성을 가지고 있는지, 더불어민주당과 대법원장이 교차 지명에 사전교감 했는지 등 의혹을 뒷받침할 명확한 근거를 내놓지 못했다. 이 때문에 정치적 공세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결국 더불어민주당 홍영표·자유한국당 김성태·바른미래당 김관영 원내대표가 지난 16일 오후 헌법재판소 정상화를 위해 선출안 표결을 하기로 합의하면서 사태 해결의 물꼬가 터졌다.

한 달 가까이 이어져온 재판관 ‘6인 비상체제’가 해소됐다. 헌법재판소는 지난달 19일부터 유남석 헌법재판소 소장과 서기석·조용호·이선애·이은애·이석태 재판관 등 ‘6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9명 가운데 7명이 출석해야 회의를 열 수 있다. 그런데 사건 심리에 필요한 재판관 수인 7명을 못 채운 채 한 달간 이어져온 것이다. 그동안 심리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당연히 위헌 여부에 대한 결론도 내릴 수 없다.

낙태, 위안부…
산적한 숙제들


헌법재판소의 중요 사안을 의결하는 재판관회의 구성도 불가능했다. 헌법재판소법은 재판관 회의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7명의 재판관이 출석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와 관련된 내부규칙은 물론 새로 접수된 사건을 누구에게 배당할지에 대한 결정도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는 헌법재판 사건들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낙태죄 처벌 위헌 여부 사건과 최저임금제 위헌 여부 사건 등 사회 구성원 간 갈등이 깊은 사건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또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와 개성공단 전면중단 조치, 사드(THAAD) 배치 승인,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 등 박근혜정부서 시행된 각종 행정조치의 위헌 여부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엄격한 김기영

김기영 재판관은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판사로 평가받는다. 충남 홍성 출신인 김기영 재판관은 1990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육군 법무관으로 복무한 뒤 1996년 인천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법관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특허법원 판사와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거쳐 지난 2월 서울동부지법 수석부장판사를 맡았다. 지식재산권 관련 재판을 오랫동안 맡아 특허분야에 전문적 지식을 갖춘 판사로 평가받는다.

국가권력 남용에 대해서는 엄격한 태도를 취하는 판결을 자주 내렸다. 2015년 9월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시절에는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서 “긴급조치는 대통령의 헌법수호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며 기존 대법원 판례를 깨고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2014년 여중생 성폭행 사건을 맡아 이른바 ‘그루밍 성범죄’(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자행하는 성범죄)에 대한 판단 기준을 처음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법원 안팎서 김명수 대법원장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2015년 법원 내 진보적 성향 판사 모임이라는 평가를 받는 ‘국제인권법연구회’간사를 지냈다. 김 대법원장이 이 단체의 회장을 지낸 바 있다.

2009년 광주지법 부장판사 시절엔 당시 서울중앙지법원장인 신영철 전 대법관의 이른바 ‘촛불재판 개입 의혹’을 폭로한 인물로도 알려졌다. 이 같은 이력이 알려지면서 인사청문회 과정서 자유한국당 등 야당이 ‘정치적 편향성’이 의심된다며 헌법재판관 임명을 반대하고 나섰다.

김기영 재판관은 청문회서 세 차례의 위장전입 전력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두 자녀의 사립 초등학교 추첨을 위한 것으로, 아내가 했던 일이지만 제가 잘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다”고 사과했다. 

부동산 투기 의혹, 아내의 위장 취업 의혹에 대해서도 “아내가 혼자 재산 관리도 하고 교육 문제도 해결했다”고 답변했다. 김기영 재판관 가족은 총 세 차례 위장전입을 했다. 충남 논산에 거주하던 2001년 12월과 대전에 살던 2005년 12월 각각 아들과 딸의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 종로구와 양천구로 위장전입했다. 


2006년 1월의 경우엔 부동산 투기 의혹도 함께 제기됐다. 당시 다른 가족은 경북 구미에 있는 김기영 재판관 처가 거주했는데, 아내만 1년 넘게 일산 신도시에 전입해 있었다. 문재인정부의 ‘고위 공직 배제 7대 원칙’ 중 위장전입은 2005년 7월 이후를 기준으로 한다. 

김 후보자는 이 기준을 두 차례 위반한 셈이다. 그는 “기준에 부합하지 못해 송구하다”고 했다.

야당은 김기영 재판관의 아내가 2013년부터 약 5년간 어머니 회사서 급여 명목으로 총 3억8000만원을 받은 것에 대해 위장취업 의혹을 제기했다. 야당은 “상근도 아닌데 이사로 등재해 월급만 받았던 것 아니냐”고 추궁했다. 김기영 재판관은 “국민적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 유념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도덕교사 이종석

이종석 재판관은 법원 내에서 ‘도덕교사’로 불릴 정도로 원칙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경북 칠곡 출신인 이 내정자는 대구 경북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83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89년 인천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법원행정처 사법정책담당관, 대구지법 부장판사, 대전·서울고법 부장판사, 수원지법원장 등을 지냈다.


법관으로 재직하면서 원칙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워 판결을 내렸다. 이런 성품 덕분에 헌법재판서도 소신에 따른 결정을 내리지 않겠냐는 평을 듣는다. 원칙론자로 꼽히면서도 다양한 재판업무 경험을 토대로 현대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적절히 대변하고 조화시켜 사회통합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2012년 서울중앙지법 파산수석부장판사로 근무하면서 동양그룹, 웅진그룹, STX그룹 등 굵직한 기업 회생사건을 맡아 다양하고 복합적인 채권자들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해 회생절차를 효과적으로 이끌었다.

당시 기업회생절차를 간소화하고 채권단 의견을 반영해 단기간 내에 회생절차 졸업을 유도하는 '패스트트랙 절차'를 처음으로 도입해 기업회생 절차를 효율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서울고법 부장판사 시절인 2014년 MBC가 사측에 비판적인 직원들을 대상으로 낸 전보발령의 효력을 정지시켜달라는 가처분신청을 기각하면서 논란이 됐다. 이듬해 10월에는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가 MBC를 상대로 낸 ‘전보발령효력정지 가처분’ 항고심서 기각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종석 재판관은 인사청문회서 “이후 본안재판서 다른 판결이 확정됐기 때문에 기각 판단은 잘못됐다고 판단된다”며 유감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이종석 재판관은 청문회 과정서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거래 의혹을 받는 키코(KIKO)에 관여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서울고법 부장판사였던 2011년 5월 중장비 제조수출업체인 수산중공업이 “부당한 키코계약으로 입은 손해를 물어내라”며 우리은행과 한국씨티은행을 상대로 낸 소송 항소심서 불공정 계약이 아니라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이는 키코분쟁에 대한 항소심 첫 판단이었다. 

최근에 키코 사건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에 정부 운영 협력 사례로 언급돼 재판거래 의혹에 휩싸였다. 

당시 행정처는 ‘상고법원을 위한 BH설득방안’으로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왔음”이라며 특정 판결들을 기재했다. 이 중 키코 사건은 이 후보자가 한 판결을 그대로 확정한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사례가 적혀 있다. 

이종석 재판관은 “(판결 당시) 재판거래 의혹이 전혀 없는 시점이고 사건 처리와 관련해 어느 누구로부터 지시를 받거나 한 적 없다”며 “순수하게 민사사건 원칙과 법리에 따라 사건을 처리했고 결론을 도출하는 데 다른 고려는 없었다”고 강조했다. 

이 외에도 이종석 재판관은 1982∼1996년까지 위장 전입을 5차례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헌법통 이영진

이영진 재판관은 법원 내에서 ‘자타공인’으로 국민 기본권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충남 홍성 출신인 이영진 재판관은 서울 남강고와 성균관대 법대를 졸업한 후 1990년 제32회 사법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청주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법원행정처 사법정책담당관과 전주지법·수원지법 부장판사 등을 지냈다. 2009년 법원을 떠나 2년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11년 판사로 재임용된 뒤에는 사법연수원 교수와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부산고법 부장판사,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을 지냈다.

헌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해 법원 내에서는 ‘헌법통’으로 불린다. ‘헌법상 의회의 대정부견제권’과 ‘헌법상 영토·통일조항의 개정논의와 남북특수관계론’ 등 다수의 헌법 관련 논문을 저술했다. 

2015년 부산고법 부장판사 시절에는 경남지방변호사회가 선정하는 우수법관으로 뽑혔고, 법원 내 ‘솔로몬 문학회’ 회장도 맡아 문학에도 조예가 깊다.

그는 각종 시국사건서 헌법상 보장된 국민 기본권을 국가권력보다 우선시하는 다수의 판결을 내려 기본권보장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불어 각종 재판 심리 때나 판결문 작성 시 헌법적 가치와 기본권보장을 중시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지난 8월에는 ‘긴급조치 9호’ 혐의로 징역형을 살았던 김부겸 행정안전부장관의 재심서 40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같은 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인정돼 1975년 징역 12년의 판결이 확정된 김승효씨의 재심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김씨는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의 삶을 그린 영화 <자백>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영진 재판관을 헌법재판관으로 추천한 바른미래당은 “헌법의 이론과 실무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25년간 법조인으로서 헌법을 수호하고 국민의 기본권 보호에 앞장서왔다”고 추천 사유를 밝히기도 했다.

인사 청문회서 이영진 재판관의 ‘편법인사 의혹’이 제기됐다. 2009년 법관직을 그만두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임명된 후 2011년 법관으로 재임용됐다. 이에 대해 이영진 재판관은 “2009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서 법사위 전문위원을 외부직으로 뽑는다며 제게 의향을 물었고, 전문위원 임기를 마친 후 다시 채용하는 절차를 거쳐 법관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의견 교감을 받고 국회로 갔다”고 밝혔다.

6인 체제 끝내고 9인 완성 
‘마비’ 헌법재판소 재가동

이를 두고 법조계 일각에선 이영진 재판관이 현직 법관 신분을 유지한 채로 전문위원으로 임용될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우회적인 방법을 썼다는 점을 사실상 시인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 재판관은 2009년 수원지법 부장판사 시절 법관직을 그만두고 국회 법사위 전문위원으로 임명된 후 2011년 임기를 마치고 곧바로 법관으로 재임용돼 사법연수원 교수로 근무했다.

이영진 재판관은 상대적으로 다른 후보자들에 비해서는 도덕성과 관련된 의혹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른 정당서도 이영진 재판관을 반대하자는 의견은 없었다. 당시 바른미래당은 이영진 재판관 한 명이라도 청문회를 통과시키자고 제안했지만, 민주당과 한국당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cmp@ilyosisa.co.kr>

 

[김기영]

▲충남 홍성 ▲홍성고-서울대 법대 ▲인천지법 판사 ▲서울지법 북부지원 판사 ▲특허법원 판사 ▲광주지법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서울동부지법 수석부장판사

[이종석]

▲경북 칠곡 ▲대구 경북고-서울대 법대 ▲인천지법 판사 ▲법원행정처 사법정책담당관 ▲대구지법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대전고법 부장판사 ▲수원지법 수석부장판사 ▲서울고법 부장판사 ▲수원지법원장 ▲서울고법 수석부장판사

[이영진]

▲충남 홍성 ▲남강고-성균관대 법대 ▲청주지법 판사 ▲법원행정처 사법제도연구담당 판사·사법정책담당관 ▲서울고법 판사 ▲전주지법 부장판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 ▲부산고법 창원재판부 부장판사 ▲서울고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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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