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천국’ 대한민국 현주소 ③기업의 역습



“더 이상은 앉아서 당하지 않는다”

기업의 역습이 시작됐다. 온갖 공세에 항상 앉아서 당하기만 했던 기업들이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 적극적이고 대담한 행동을 보이고 있다. 이들의 무기는 법이다. 돌발 위기가 발생하면 지체 없이 원인 제공자를 찾아내 예외 없이 ‘법적 대응’이란 칼을 꺼낸다. 그 대상도 광범위하다. 타사는 물론 언론을 불문하고 공정위 등 정부기관도 막론한다. 막대한 피해를 입고도 고소·고발을 꺼려온 과거와 비교하면 확실히 다른 양상이다.

지난 5월 삼성그룹에 한 통의 협박 전화가 걸려왔다. “비밀 자료를 폭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홍모씨는 ‘삼성비자금’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후배를 사칭해 수십억원을 요구했지만 결국 회사 측 고발로 쇠고랑을 찼다. 당시 삼성그룹은 ‘삼성 특검’사태로 뒤숭숭한 시점이었지만 홍씨와 일체 거래(?)없이 바로 검찰에 고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7월, 농심에도 수상한 소비자 불만이 접수됐다. 허모씨는 농심 제품에서 애벌레가 나왔다며 무작정 돈을 요구했다. 무려 1억원이었다. 그는 만약 돈을 주지 않으면 언론사와 소비자단체 등에 알리겠다고 협박했다.
농심 측은 긴장했다. 잇단 이물질 파문 탓이었다. 그러나 농심은 자체 조사 결과 A씨가 제품에서 이물질이 나왔다고 주장하며 회사에 과도한 보상을 요구하는 ‘블랙 컨슈머(black consumer)’로 확인, 바로 검찰에 고발했다.
농심 측은 “실제로 제품에서 이물질이 나온 경우는 몰라도 일부러 이물질을 넣은 뒤 돈을 요구하는 사례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며 “옛날 같으면 이미지 타격을 우려해 어떡해서든 합의했지만 최근에는 샘플 조사 등 정확한 경로와 경위 조사를 통해 법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내외 공세에 대처하는 기업들의 자세가 달라졌다. 소극적 태도에서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서고 있는 것. 기업 및 브랜드 이미지 훼손 등을 우려해 ‘벙어리 냉가슴’앓던 과거와 달리 경·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등 적극 대응하고 있다.
대응 방법은 십중팔구 형사상 고소·고발 또는 민사상 손해배상청구 소송이다. 돌발 위기에 상시적으로 노출돼 있는 기업들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입을 모은다.

언론·정부기관 불문 외부 공세에 지체 없이 ‘법적대응’
“음해세력 추적”수사 의뢰 봇물… 수십억원 민소 뒤따라

한 대기업 관계자는 “경제 불안정 속에서 효과적인 위기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홍보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술하고 있다”며 “그중 가장 큰 변화는 부당한 입김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속으로만 끙끙 앓던 대외 대응을 강경하게 대처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기업들의 역습 타깃은 광범위하다. ‘끽해야’ 타사에 그쳤던 소송장 남발은 언론을 불문하고 심지어 공정위 등 정부기관도 막론한다. 한마디로 물불 가리지 않는다.
이중 눈에 띄는 것은 언론을 상대로 한 법적대응이다. 그동안 언론에 대해 수세적 태도를 보였던 기업들은 공세적 태도로 급선회하고 있는 양상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3월 한 인터넷 매체를 상대로 10억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자사에 악의적 보도를 했다는 이유에서다.
삼성전자는 이 언론사에 “정정보도문을 1개월 동안 게재할 것,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이행 완료일까지 매일 5백만원을 지급할 것, 이와 별도로 10억원의 손해배상금 및 소장 송부 다음날부터 지급일까지 연 20%의 이자를 지급할 것”등을 요구했다.
농협도 최근 한 주간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역시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허위사실을 유포, 자사의 명예와 신용을 훼손했다는 까닭이다. 농협은 신문사와 기자에게 각각 5억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재계 한 관계자는 “기업의 언론 소송, 특히 기하급수로 늘고 있는 인터넷 매체를 상대로 한 소송이 줄을 잇고 있다”며 “기업으로선 넋 놓고 있으면 순식간에 확대 해석되거나 지나친 유추를 통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점에서 충격이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법적 대응이란 최후의 카드를 주체 없이 꺼내드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재계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도 예외가 아니다. 공정위 제재에 불복하는 기업이 늘고 있는 것.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란 게 재계의 중론이지만 대부분 공정위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한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 삼성화재, 현대해상, LIG, 동부화재 등 10개 손보사들이 보험료 자율화가 시행된 2002년 4월부터 2006년까지 8개 일반손해보험상품의 보험료율 합의를 통해 공동 결정한 혐의(부당공동행위)를 적발해 총 5백억여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삼성화재와 메리츠화재는 이와 관련 “독자적 부가율을 결정했고, 할인·할증률도 다른 손보사와 현저히 다르게 적용했다”며 공정위 처분 취소 소송을 냈으나 패소했다. 대우건설과 삼성물산, GS건설, SK건설 등 4개 건설사도 공정위의 담합 처분에 항의, 시정명령 및 과징금 부과 처분 취소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공정위가 꼬리를 내린 기업도 있다. 바로 신세계다. 공정위는 2006년 11월 신세계의 월마트코리아 인수로 인천·부천, 안양·평촌, 포항, 대구 시지·경산 등 4개 지역에서 경쟁제한성이 있다고 판단해 점포매각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신세계는 이 처분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지난 9월 공정위 양도명령이 위법하다며 신세계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해 8월 화장품 업체들도 방문판매가 실질적으로 다단계판매라는 공정위의 시정조치처분을 받았으나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공정위의 처분이 불합리하다는 취소 처분을 받아낸 바 있다.
기업들은 특히 루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로 번지면서 유동성 관련 악성루머는 더더욱 그렇다.
악성루머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대림산업을 꼽을 수 있다. 증권가를 중심으로 유동성 위기설이 돌았다. 시중에 ‘대림산업이 산업은행의 차입금 만기 연장 거절로 새마을금고에 화의를 신청하면서 파산 절차를 밟을 것’이란 터무니없는 부도설이 퍼진 것.

대림산업의 사실 무근이란 적극적인 해명에도 헛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대림산업은 결국 보이지 않는 손을 색출하기 위해 최근 서울 종로경찰서 사이버 수사대에 수사를 의뢰했다. 
회사 관계자는 “특정한 의도로 음해성 루머와 괴담을 퍼트리는 세력을 끝까지 추적해 엄단할 것”이라며 진원지가 밝혀지는 즉시 법적인 책임을 물을 뜻을 밝혔다.
한국 맥도널드도 지난 6월 촛불정국 당시 “미국산 쇠고기 반대시위가 격화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 매출이 급격히 줄고 있다”는 루머에 시달리고 홈페이지가 해킹당하는 등 사이버 공격이 계속되자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 바 있다.
이처럼 기업이 고소·고발하는 사례와 반대로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 ‘소비자 권리 찾기’를 표방한 피해자들이 해당 기업에 보상을 요구하는 집단·단체소송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3월부터 시행된 집단분쟁조정제는 50명 이상의 소비자가 같은 제품이나 서비스로 피해를 입었을 때 구제를 신청하는 제도다.
지난 1월부터 시행된 단체소송제는 피해 소비자들을 대신해 소비자단체가 사업자를 대상으로 위법행위를 금지 또는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말한다. 이들 소송은 소액의 피해를 입은 소비자가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도입됐다.
개인정보 유출과 관련 진행되고 있는 소송이 같은 맥락의 사건이다. 지난달 박상돈(자유선진당) 의원이 국감에서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옥션이 중국인 해커에게 1천만명의 회원 정보를 해킹 당했고, 하나로텔레콤 6백만명, GS칼텍스 1천1백만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이들 3사를 상대로 소송중인 건만 47건으로, 17만여 명이 1천9백억원에 달하는 손해배상 청구를 요구하고 있다.
앞서 지난 9월 해상 유조선 충돌 사고로 기름 유출 피해를 본 충남 태안군 주민 6천8백64명은 15개월간 매달 20만원씩(총 2백5억원)의 생계비를 지급하라며 삼성중공업을 상대로 법원에 가처분신청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기업을 상대로 승소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게 현실이다. 대기업과 가장 많은 소송을 벌이고 있는 참여연대의 실적(?)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유관단체인 자유기업원의 ‘참여연대 소송 현황’보고서에 따르면 참여연대는 1994년 설립 이후 지난 5월말까지 총 2백37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이중 43.2%인 1백4건이 기업과 기업인이 대상이다.
절반이 넘는 53.8%(56건)가 회사 경영 및 지배구조 문제다. 유형별로는 형사 87건(36.7%), 민사 73건(30.8%), 행정 45건(19.0%), 헌법소원 32건(13.5%) 등으로 나타났다.
가장 많이 피소된 기업은 삼성그룹. 기업소송 1백4건 중 39건으로 34.5%가 삼성그룹 및 계열사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제기된 소송이다. 범현대가는 10.6%인 12건으로 뒤를 이었다. LG그룹, SK그룹, 신세계그룹 등도 참여연대와 악연을 갖고 있다.
자유기업원은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가 기업을 압박하기 위해 고소·고발을 남발하고 있다”며 “기업소송 행위는 기업의 부담을 가중시키며 기업 활동을 위축시켜 주주들의 이익을 침해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승소율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1백4건 중 종결된 사건을 기준으로 참여연대가 승소한 사건은 31건(29.8%)으로, 패소사건(46건·44.2%)보다 적었다. 기소·불기소 인원의 비율도 마찬가지다. 참여연대의 기소 비율은 10.3%에 불과하다. 불기소 인원은 89.7%에 이른다. 참고로 검찰의 전체사건 기소·불기소 인원 비율은 각각 52.5%, 47.5%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기업소송에서 승소율보다 패소율이 높은 것은 사법기관의 재벌 봐주기의 전형이자 단면으로 볼 수 있다”며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처벌은 대부분 집행유예로 끝나는 등 면죄부를 주는 온정적 판결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 최대 기업소송은?
정보유출 땐 ‘수만명에 수천억’
국내 최대 규모의 기업소송은 무엇일까.  바로 개인정보 유출과 관련한 소송이다. 고객정보 유출사고를 일으킨 옥션과 하나로텔레콤, GS칼텍스 등 3개사를 상대로 한 집단손해배상 소송은 모두 47건으로, 17만여명이 소송에 참여했다. 소송금액은 2천억원에 달한다.
지난 2월 중국인 해커에 의해 1천만명 이상의 회원 정보를 해킹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던 옥션의 경우 총 19건의 손해배상 소송이 접수된 상태. 소송 인원은 14만여명으로, 소송금액은 1천5백70억원이다. 옥션의 지난해 수수료 매출(1천7백억원)과 맞먹는 액수다.
지난 4월 고객 6백만명의 정보를 제휴 업체에 제공한 하나로텔레콤의 정보유출 사건은 총 18건의 소송이 접수됐다. 1만1천여명의 소송인원이 1백23억원을 청구했다.

옥션, 14만여 명에 1천5백70억원
하나로텔, 1만1천명에 1백23억원
GS칼텍스, 3만명에 2백억원 소송

최근 1천1백만여명의 개인정보가 샌 GS칼텍스 고객정보 유출 사건은 현재까지 10건의 소송이 접수됐다. 3만여명이 소송에 참여중이며 소송가액은 2백억원 정도다. 여기에 소송 준비 중인 인원도 1만명에 육박해 소송금액은 늘어날 전망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집단소송이 확산되면서 소송 제기 인원도 최소 수천명에서 수만명 단위로 확대되고 있다”며 “앞으로 추가 소송 가능성도 있고, 판결 결과에 따라 청구 금액을 올릴 가능성도 있어 소송가액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집단소송 확정판결 사례를 보면 ▲2005년 5월 회원 28만여명 명의가 도용된 엔씨소프트의 리니지 명의도용 사건은 49명의 소송인원에 1인당 10만원 ▲2006년 3월 3만여명의 고객 이름이 유출된 국민은행의 고객정보 유출 사건은 1천여명의 소송인원에 1인당 20만원 ▲2006년 9월 입사지원자 응시정보 일부가 유출된 LG전자 채용 사이트 해킹 사건은 30여 명의 소송인원에 1인당 70만원 등의 피해배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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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