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아직도 잘못 모르는 박근혜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7.04.03 09:37:56
  • 호수 11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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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평 독방행’ 칠순도 감옥서 지낼라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됐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인용되면서 그간의 ‘정치 인생’이 막을 내리게 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뇌물 혐의로 구속되면서 ‘인생’까지 막을 내릴 위기에 처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범죄자 신세로 전락했다. 파란만장한 박 전 대통령의 인생사를 돌아봤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영렬)가 삼성으로부터 433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청구한 박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이 지난달 31일 법원서 발부됐다. 서울중앙지법 강부영 영장전담판사는 지난달 30일 박 전 대통령의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한 뒤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다음 날 오전 3시3분에 발부했다. 강 판사는 “주요 혐의가 소명되고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어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이 인정된다”며 구속사유를 설명했다.

주요 혐의 소명
증거인멸 우려

전직 대통령이 구속된 것은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세 번째다. 검찰은 최장 20일 동안 박 전 대통령을 구속 수사할 수 있지만, 대선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공식 선거일이 시작되는 오는 달 17일 전에는 수사를 마무리하고 재판에 넘길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통령 구속은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파면된 지 21일 만이다. 대통령에서 범죄자로 전락하기까지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인생사였다. 박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월2일 경북 대구시 삼덕동(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서 당시 육군본부 작전차장 박정희 대령과 중학교 교사 출신 육영수 여사의 1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나 두 살 때부터 서울서 자랐다.

아홉 살이 되던 해인 1961년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박정희 소장이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2년 뒤인 1963년 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큰 영애’로 불리며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시기부터 각종 외교행사에 참석했다. 1966년 존슨 미국대통령 방한 당시 ‘한국의 밤’ 행사에 등장했고, 1968년 9월에는 대통령 부부의 호주 방문에 동행했다. 1969년에는 일본 요코하마서 열린 당시 세계 최대 유조선인 ‘유니버스 코리아호’의 진수식에서 샴페인을 터트리기도 했다.

성심여중에 입학한 박 전 대통령은 성심여고 졸업까지 재학하는 동안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고 1974년 서강대 이공학부(전자공학 전공)를 4년 평균 학점 4점 만점에 3.82로 수석 졸업했다.

탄핵으로 사실상 ‘정치인생’ 막 내려
뇌물혐의 구속…‘인생’도 막 내릴 위기

대학 졸업 후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그해 8월15일, 어머니 육 여사가 광복절 기념식장서 문세광의 총격을 받아 숨졌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9년 10월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서거하면서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생활도 마무리됐다.

박 전 대통령은 10·26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가량 지나 서울 신당동 자택으로 들어가 18년간 칩거 생활을 했다. 당시 27세의 박 전 대통령은 두 동생들과 청와대를 나와 육영재단 운영 외 특별한 직업이나 대외활동 없이 18년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최태민 목사와 그의 딸 최순실씨, 최씨의 남편 정윤회씨 등 일부 측근들에 의지한 것으로 알려진다. 일각에선 칩거 기간 동안 박 전 대통령이 한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믿는 가치관이 형성됐다고 주장한다.

세상으로 다시 걸어 나온 건 1997년이었다. 그해 대선을 불과 여드레 앞두고 한나라당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 총재에 대한 지지선언으로 정치행보를 시작했다. 앞서 박 전 대통령은 정치권의 영입 제안을 여러 번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이 후보는 대선서 패배했고 박 전 대통령은 대구 달성 재보선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며 본격적인 정치를 시작했다.


박 전 대통령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천부적 재질을 타고난 듯했다. 사람들은 그의 정치 감각을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 했다. 한나라당 부총재 시절인 2002년 이 총재가 자신이 주장한 당개혁안(총재직 폐지, 당권.대권 분리)을 수용하지 않자 탈당하는 강수를 둬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가혹한 운명
역사에 오점

한나라당은 이후 이 총재의 대선패배와 이후 차떼기사건 수사,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 등으로 사면초가에 내몰렸다. 박 전 대통령은 당을 살릴 구원투수로 화려하게 등판했다. 2004년 천막당사서 보여준 원칙과 개혁의 리더십은 명실상부 차기 대권주자로 각인되기에 충분했다.

2006년 5월20일. 서울시장 선거 유세지원 현장서 괴한에게 커터칼 피습을 당해 오른쪽 뺨 11㎝가 찢겨 대수술을 받았음에도 깨어나자마자 선거 격전지인 대전 지역의 판세를 걱정하는 "대전은요?"라는 첫 마디로 단숨에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면모를 보였다.
 

2007년 당 경선에선 이명박 후보에게 밀렸으나 또다시 위기에 빠진 당의 구원투수로 전면에 나서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개혁에 착수, 2012년 4월 총선서 야권연대로 맞선 민주통합당을 누르고 과반 의석(152석) 확보에 성공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2012년 압도적 지지로 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으며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개정했다. 이후 2012년 12월 치러진 대선에서 득표율 51.7%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꺾고 승리하며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2월25일 경제부흥과 국민행복, 문화융성, 평화통일 기반 구축을 4대 국정기조로 제시하며 5년 임기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국민이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고 희망의 새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대내외 악재에 크게 흔들렸고 이를 수습하느라 국정운영에 큰 차질을 빚었다.

취임 첫 해부터 박 전 대통령은 인사난맥으로 위기를 맞았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김용준 국무총리 후보자 낙마를 시작으로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장관 후보자, 김병관 국방부장관 후보자, 한만수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 황철주 중소기업청장 내정자, 김학의 법무부 차관 내정자 등이 박 전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13년 3월 줄줄이 낙마했다.

특히 미국 순방 도중 벌어진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문 사태가 국제적 큰 화젯거리로 부상하며 박 전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장관 사퇴와 안대희·문창극 총리 후보자 낙마가 이어져 인사 실패 논란은 계속됐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 박 전 대통령은 인사수석실을 신설하는 등 청와대의 인사검증시스템을 개선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인사 문제가 계속 지적돼 인사에 골머리를 앓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인사 실패와 더불어 국가정보원의 정치개입 논란도 구설수에 올랐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 2014년 국정원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해킹 프로그램 구입과 민간인 사찰 의혹 등으로 박 전 대통령은 국론분열과 민심악화를 겪은 것이다. 이는 국정운영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집권 2년차인 2014년 박 전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와 비선 실세 문건 파동 등으로 또 한 번 국정운영에 위기를 맞았다. 박 전 대통령은 집권 2년차를 맞아 2014년 2월25일 취임 1주년 대국민담화를 통해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제시하며 경제살리기 성과 창출에 대한 의지를 내세웠다.

그러나 그해 4월16일 세월호 침몰사고로 국정운영이 사실상 올스톱 상태에 빠졌다.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사고 현장을 방문하는 등 수색과정을 챙겼지만 ‘세월호 7시간 의혹’만이 남았다. 특히 수습과정서 드러난 정부의 무능한 대처와 부조리,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청와대의 태도 등은 국민의 공분을 샀고 결국 박 전 대통령의 국정운영에도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 박 전 대통령은 참사 한 달여 만에 대국민담화를 통해 해양경찰청 해체를 선언하고 국가안전시스템에 대한 대대적인 개선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두 명의 총리 후보자가 낙마하면서 사고 책임 차원에서 사퇴 의사를 밝혔던 정홍원 전 총리를 유임시키는 등 진통이 계속 이어졌다.

최씨의 전 남편 정씨의 국정개입 의혹이 제기되면서 박 전 대통령은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박 전 대통령은 비선 실세 의혹을 ‘지라시’ 수준으로 규정하며 청와대 문건 유출 의혹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당부했다. 하지만 문건 유출과 관련해 조사를 받던 최모 경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이 발생하며 파장이 확대됐다.

선거의 여왕
어쩌다 이 지경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 등 이른바 ‘문고리 3인방’과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의 갈등이 드러나며 청와대 내부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받으며 국정운영이 순탄치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집권 3년차를 공공·노동·금융·교육 등 4대 구조개혁의 원년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한국 경제 재도약을 위해서는 사회 각 부문의 강력한 개혁이 필수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전국단위 선거가 없는 2015년이 구조개혁의 적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파문에 측근들이 연루되는 등 국정 동력을 상실했다.

2015년 4월 자살한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금품 리스트’ 메모가 정권에 악재로 작용했다. 메모에 이완구 전 총리와 전현직 대통령비서실장 등의 이름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의 지지율도 20%대로 곤두박질쳤다.

당시 일각에선 ‘조기 레임덕’을 우려했다. 파문은 현직 총리에 대한 검찰 수사로 연결됐고 이 전 총리는 결국 낙마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새누리당의 4·29 재보선 압승으로 국정동력을 회복하는 듯했다.
 

집권 4년차에 들어선 지난해 박 전 대통령은 20대 총선서 새누리당이 참패하면서 레임덕에 빠지게 됐다. 지난 16대 총선 이후 16년 만에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되면서 박 전 대통령의 국정 동력도 크게 떨어진 것.

이에 박 전 대통령은 여소야대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협치(힘을 합쳐 잘 다스려 나간다는 의미)’를 내세웠다. 하지만 사드 배치를 둘러싼 야당과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청문회 개최 요건을 완화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취임 후 두 번째 거부권을 행사하며 국회와의 협치도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질곡의 65년 인생사 
굴곡의 18년 정치사

일각에선 지난해 7월 처가의 부동산 매매로부터 시작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둘러싼 각종 의혹이 박 전 대통령을 몰락으로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박 전 대통령은 우 전 수석의 자진사퇴를 주장하던 야당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우 전 수석을 품고 놓지 않은 점이 큰 요인이다.

박 전 대통령이 우 전 수석을 감싸는 동안 최씨가 현 정부의 비선 실세라는 의혹이 점차 불거졌다. 그러면서 박 전 대통령의 지지율도 하락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24일 국면 회복을 위해 ‘개헌’ 카드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개헌 카드를 제시한 당일 최 씨의 태블릿PC와 관련한 JTBC의 보도가 나오면서 모든 것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JTBC는 2015년 10월 최씨에게 대통령 연설문과 각종 정부 문건들이 유출됐다는 보도를 시작으로 최씨의 딸 정유라의 이화여대 입시·학사부정, K스포츠·미르재단 설립지원 등을 보도했다. 이는 ‘최순실 게이트’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박 전 대통령은 JTBC 보도 다음날 대국민사과에 나서는 등 총 세 차례 대국민담화를 했다. 새 국무총리 후보자에게 전권을 맡기고 자신은 2선으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으며 여야가 자신의 진퇴 문제를 합의하면 그에 따르겠다고도 약속했다.

4년 집권 내내
조용한 날 없어

하지만 성난 민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2016년 12월9일 국회의 탄핵소추 가결로 박 전 대통령은 직무정지상태를 맞았다. 그로부터 91일 만인 지난달 10일 헌재 탄핵심판으로 박 전 대통령은 헌정 사상 처음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으로 물러난 ‘최초의 탄핵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cmp@ilyosisa.co.kr>

 

[최순실 게이트 일지]

<2016년>
▲10월24일 = 최순실 국정운영 개입 의혹 보도.
▲10월31일 = 최순실 피의자 소환조사. 긴급체포
▲11월4일 = 박 전 대통령 두 번째 대국민 담화. ‘검찰 조사·특검 수용’입장 발표
▲11월20일 = 최순실·안종범·정호성 구속기소
▲11월27일 = 차은택·송성각 전 원장 구속기소
▲11월29일 = 박 전 대통령, 세 번째 대국민 담화. “진퇴 문제 국회 결정에 맡기겠다”입장 표명
▲12월08일 = 장시호 구속기소
▲12월28일 = 문형표 조사 중 피의자 입건·긴급체포

<2017년>
▲1월22일 = 최순실 체포영장 청구. 최순실 체포영장 발부
▲1월29일 = 남궁곤 이대 전 입학처장 구속기소
▲2월07일 = 김기춘·조윤선 구속기소
▲2월15일 = 최경희 전 이대 총장 구속
▲2월17일 = 이재용 부회장 구속
▲2월22일 = 우병우 구속영장 기각. 박채윤 구속기소
▲3월10일 =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파면 결정.
▲3월21일 = 박 전 대통령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 조사
▲3월31일 = 박 전 대통령 구속영장 발부. 서울구치소 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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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