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삼국비사 (22) 대야성

  • 황천우 작가 shs@ilyosisa.co.kr
  • 등록 2017.02.27 11:01:28
  • 호수 11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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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만이 살길이다

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임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나, 신라의 사지였던 모척이다. 쥐새끼만도 못한 성주 놈의 패악으로 인해 사지인 검일과 여러 병사들이 행동을 같이하기로 했다. 지금 너희들이 보고 있는 두상은 성주 놈이 빼앗아간 검일의 처다. 계집에 환장해서, 부하의 처를 빼앗기 위해 부하를 죽이려했던 놈에게 빌붙어 있느니 차라리 백제 백성으로 새로이 살기로 작정했다.”

잠시 말을 멈춘 모척이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애꿎은 병사들에게 이야기하겠다. 보급품이 가득 찼던 창고는 지금쯤 잿더미로 변했을 것이다. 오래지 않아 식량이 떨어지면 굶주림에 직면하게 된다. 구원병이 오리라 생각하면 커다란 오산이다. 백제의 의자왕이 신라 국경 곳곳을 공격하여 여러 성이 이미 백제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러한 사실을 너희들도 훤히 알고 있을 터, 속히 성문을 열고 투항하기 바란다. 투항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일체의 책임을 묻지 않고 원하는 자에 대해서는 백제인으로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겠다. 그러니 빨리 성문을 열고 투항하기 바란다.”

잠시 대야성을 주시하던 검일과 모척이 천천히 일행을 거느리고 백제군의 본진으로 이동했다.

화염에 휩싸인 대야성을 바라보며 모든 정황을 가늠한 윤충과 흥수가 모척 일행을 지극하게 맞이했다.


“고생하셨소.”

간단한 상견례가 끝나자 윤충과 흥수가 검일과 모척 그리고 동행한 수하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었다.

아울러 함께한 가족들을 배불리 먹이고 사비성으로 가서 살 수 있도록 조처 취했다.

“그저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검일의 치사에 흥수가 손을 저었다.

“검일 장군과 모척 장군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어찌하다니요?”


“사비성으로 가겠습니까, 이곳에 남아있겠습니까?”

“소장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성주 놈의 씨를 깨끗이 말려버리겠다고!”

순간적으로 검일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모척 역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뜻이 정히 그러시다면 다른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하던 김품석이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이미 전령을 통해 신라의 여러 성이 의자왕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그로 인해 여하한 경우라도 지원군이 올 수 없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창고는 깨끗이 불타 남은 거라고는 재밖에 없으니 시간을 끌어도 방도는 없어보였다.

그날 밤 즉각 참모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이미 모척과 검일이 백제군에 투항한지라 죽죽과 용석 두 사지와 서천뿐이었다.

“자네들 볼 낯이 없네.”


회의에 앞서 품석이 길게 한숨을 내쉬자 죽죽과 용석이 고개를 돌렸다.

“이보게, 서천. 지금 상황은 어떠한가?”

무안한지 시선을 서천에게 주었다.

“성의 상황을 떠나 병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닙니다. 그 용맹한 검일과 모척이 병사들과 식솔들을 데리고 백제군에 투항했으니.”

서천이 말하다 말고 품석의 눈치를 살폈다.

“말해보게.”


“문제가 결국 한 여자 때문에 일어났다 하여.”

“원망들이 많겠지.”

힘없이 말을 이은 품석이 두 사지를 바라보았으나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자네들 의견도 들어보세.”

“무슨 의견이 필요합니까. 최후의 일인까지 싸워야지요.”

죽죽이 시선도 돌리지 않고 말을 잇자 용석 역시 침통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용석, 자네는 어떤가?”

“비록 상황이 이리 되었지만 신중하게 처신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신중하게라면?”

“전혀 승산 없는 싸움으로 피만 흘리느니 일단 항복하고 후일을 기약함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자네 무슨 말을 그리하는가? 지금 항복하자고 했는가?”

복수의 칼 간 검일과 모척
백기 투항 위해 길 나서다

죽죽이 고개 돌려 용석을 주시했다.

“꼭 항복이라기보다도 사태의 추이를 보아가며 대처하자는 의미일세.”

“사태의 추이라니!”

“저들의 의도를 알아야 할 일 아닌가?”

“무슨 의도란 말인가. 항복하면 저들 말대로 우리를 살려줄 것 같은가. 그리고 설령 살아남는다 치세. 살아서 그 수치를 어찌 감당하려는 겐가. 내 이름이 왜 죽죽인지 아는가? 내 아버지께서 나를 죽죽이라 이름 지은 사유는 추울 때도 시들지 않고 꺾일지언정 굽히지는 말라 함이었네. 그런 내가 어찌 죽음을 겁내 항복하겠는가!”

“이보게, 차근히 생각해보게. 버티는 일만 능사는 아니지 않는가.”

잠자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품석이 끼어들었다.

“지금 백제 진영에서 검일과 모척이 칼을 갈며 성주님을 베려고 안달할 터인데 어떻게 목숨건지기를 바라십니까!”

죽죽이 목소리를 높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휑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미 권위를 잃어버린 품석은 그를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보게, 서천.”

“말씀하시지요.”

“내일 날이 밝으면 자네가 백제 진영에 다녀오게.”

“무슨 일로?”

“방금 용석 사지가 말한 것처럼 일단 위기를 넘길 수 있는지, 즉 항복하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지 타진하게.”

순간 서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그러는가?”

“혹여 무슨 일이라도.”

“사자는 어떠한 경우라도 죽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그리고 자네는 전쟁을 하겠다는 사자가 아니라 항복을 타진하러 가는 자인데 무얼 그리 걱정하는가.”

“단지 그 사실만 확인하면 됩니까?”

죽어가던 표정이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검일과 모척 특히 검일이 그곳에 남아 있는지도 살펴보게.” 

다음날 날이 밝기 무섭게 서천이 백기를 든 병사를 앞세우고 백제 진영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백제 진영에서 백기를 들고 신라의 사자가 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은 흥수가 급히 검일과 모척을 찾았다.

“신라에서 항복을 타진하기 위해 사자가 오고 있소.”

“벌써요?”

모척이 의외라는 듯 검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말이오.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소.”

“결국 계집 밝히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쥐새끼로군!”

검일이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이다 침까지 뱉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두 분 장군과 수하 장병들은 이 자리에 꼼짝 말고 계시오.”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저들이 고분고분히 항복하게 만들자, 이 말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왜?”

검일이 의아스런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당연한 일 아닙니까. 저들이 행여나 두 장군이 이곳에 머물러 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앙갚음을 하고자 남았다고 판단할 거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저들은 항복하지 않을 테고 수고롭게도 전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면?”

“일단 저들이 마음 놓고 항복할 수 있도록 유도한 연후에 그때 가서 일처리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그리합시다. 우리는 이곳에서 숨도 쉬지 않고 있을 터이니 잘 처리해 주십시오.”

모척이 검일에게 눈짓하고 말을 잇자 흥수가 다시 주의 주고 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온 흥수가 병사에게 검일 일행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막사로 서천을 안내하라 일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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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