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 폭행…그 유구한(?) 역사

‘돈’과 비례하는 ‘파이터 본능’“넌 한 대에 얼마냐?”

1979년 한국시티즌공업주식회사 이사, 여 호스티스 맥주병 위협 담배빵
현대 노조원 폭행은 전통?… 1988년 건설·1989 중공업 노조원 폭행


11월 마지막 주, 대한민국은 정신 나간 재벌 2세의 ‘맷값 폭행’ 파문으로 들끓었다.

SK家 2세인 최철원 M&M 전 대표가 고용승계를 요구하는 50대 탱크로리 운전기사를 야구방망이로 폭행하고 2000만원을 건네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

결국 최 전 대표는 구속, 수감된 상태로 추가 조사를 받고 있다. 대한민국 재벌2세의 이 같은 무개념 행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최근에 이르기까지 재벌들의 반사회적 행동은 계속돼 왔다. 재벌가 폭행, 그 유구한(?) 역사를 되짚어봤다.

최철원(41) M&M 전 대표의 ‘맷값 폭행’은 ‘돈’이라는 상징적 물질을 눈앞에 드러내놓고 일반인을 폭행했다는 점에서 상대의 수치심을 더했다. 폭행이후 합의과정에서 합의금이 오가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매질을 할 때부터 ‘너에게 돈을 줬으니 내가 널 때리는 것은 정당하다’는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주고 폭행을 시작한 것.

SK그룹 창업주의 조카이자 최태원 회장의 사촌동생인 최 전 대표는 지난 10월18일 서울 용산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탱크로리 운전기사 유모(52)씨를 야구방망이로 폭행했다. 당시 최 전 대표는 M&M의 동서상운 인수합병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게 된 유씨가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등 돌발행동을 멈추지 않자 유씨의 탱크로리 차량을 구입하겠다며 유씨를 불러들였다.

이날 오후 1시40분께 M&M 본사에 도착한 유씨는 몸수색까지 받아가며 최 전 대표와 만날 시간을 기다렸다. 최 전 대표와 면담을 한다던 사무실에 들어서자 M&M 측 직원들이 사무실 한가운데 유씨를 꿇어 앉혔고, 곧바로 임직원 7~8명이 들이닥쳐 유씨를 에워쌌다.

‘조폭 재벌’ 최철원
사상 최악의 ‘맷값 폭행’

이때 최 전 대표가 들어와 다짜고짜 유씨에게 발길질을 했고, 쓰러진 유씨를 향해 “1대에 100만원씩 20대를 맞아라”고 하면서 구타를 시작했다. 야구방망이로 엉덩이 10대를 맞은 유씨가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이제부터는 1대에 300만원씩”이라며 강도를 한층 높여 3차례 더 때렸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최 전 대표는 유씨를 자리에서 일으킨 다음 유씨의 입을 손가락으로 잡고 벌린 후 두루마리 화장지 한 뭉치를 입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오른쪽 주먹으로 유씨의 얼굴을 내리쳤다. 입 안쪽 살점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아픔이 컸다.


최 전 대표는 이 같은 폭행에 익숙한 듯 유씨의 입안에 있던 화장지를 꺼내 피를 닦아냈다.
40여분 간 지옥 같은 폭행이 끝나고 최 전 대표는 5000만원과 2000만원이라는 액수가 쓰인 두 장의 서류를 유씨 앞에 들이밀고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이어 그는 “2000만원은 맷값”이라며 1000만원짜리 수표 두 장을 유씨에게 던졌고, 사측은 사건 당일 유씨의 통장으로 탱크로리 차량값 5000만원을 입금했다.

이번 사건을 접한 네티즌들은 분노에 떨었다. 돈 많은 재벌은 한 사람의 인권을 무시하고 돈만 주면 사람을 때려도 되느냐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일각에서는 국민성금을 모금해 최 전 대표에게 던져주고 그만큼 폭행하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결국 유씨는 MBC <시사매거진 2580> 방송출연에 이어 최 전 대표를 경찰에 정식 고소했고, 최 전 대표는 경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고 현재 구속 수감된 상태다. 여기서 더욱 놀라운 점은 최 전 대표의 폭행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MBC의 후속보도에 따르면 최 전 대표는 이전에도 자사 직원들을 몽둥이로 다스렸고, 여직원들의 경우 사냥개로 협박하기도 했다.

1979년 한국시티즌공업주식회사 이사, 여 호스티스 맥주병 위협 담배빵
현대 노조원 폭행은 전통?… 1988년 건설·1989 중공업 노조원 폭행
한화 김 회장 2007년 보복 폭행 이어 3남 올 9월 주점 종업원 폭행


이와 관련 경찰은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다”며 최 전 대표를 구속하고 추가 혐의를 조사하고 있다. 사건 발생 이후 공식해명 한 번 한 적 없는 M&M의 태도는 네티즌은 물론 국민들의 화를 더욱 불러일으켰다.

<일요시사> 역시 M&M 측에 전화 취재를 요청했지만 M&M 기획팀 이모 팀장은 “듣도 보도 못한 신문사”라며 “전화통화만으로 기자인지 사기꾼인지 어떻게 아느냐. 공문을 보내라”고 말했다. 이에 M&M 측의 요구에 공문을 보내고 이틀간 연락을 기다렸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고, 다시 전화를 걸자 또 다른 직원은 “공문은 받았지만 할 말이 없다”고 짧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과거 재벌들의 폭행 사건을 조사하다보니 1979년 경악할만한 사건이 발생한 적 있어 눈길을 끌었다. 한 탈선 재벌 2세가 자신의 청혼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이트클럽 호스티스를 담뱃불로 지졌다는 게 사건의 주요 골자다. 1979년 7월2일 용산경찰서는 재벌 2세인 한국시티즌공업주식회사 하모(당시 25세) 이사를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 법률위반혐의로 구속했다.

하 이사는 같은 해 5월20일 저녁 8시께 서울 용산구 보광동 모 호텔 209호실에서 평소 단골로 사귀던 H호텔 나이트클럽 호스티스 김모(당시 24세·여)씨를 깨진 맥주병으로 위협했다. 그리고는 “너를 영원한 애인으로 만들겠다”면서 김양의 하복부에 담뱃불로 자신의 성인 ‘하’자를 지져 새겨 넣어 전치 3주의 상처를 입혔다.


이날 하씨는 김씨에게 결혼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김씨가 이를 거절하자 김씨의 옷을 모두 벗긴 후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김씨는 고통에 못 이겨 2시간 동안 실신했다가 겨우 깨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가 하면 현대그룹의 노조원 폭행은 ‘전통’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이명박 대통령이 현대건설 사장 시절이던 1988년 현대건설 간부 2명은 조폭을 동원해 서모(당시 37세) 노조설립추진위원장을 납치 폭행했다. 1988년 5월6일 서 위원장은 현대건설 최모(당시 45세) 관리이사 등 간부 6명과 함께 술을 마시던 서울 강남구 역삼동 모 룸살롱에서 아내에게 “곧 들어가겠다”고 전화한 뒤 소식이 끊겼다.

1979년 재벌2세
호스티스 복부에 담배빵

당시 최 이사는 서씨가 신원불상의 청년 4~5명에게 납치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진술, 현대건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펄쩍 뛰었고 이후 경찰에 붙잡힌 납치범들 역시 서 위원장의 자작극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사건 27일 만에 사측 간부의 지시에 의한 계획적인 청부납치였음이 밝혀졌다.

납치 당시 함께 술을 마셨던 현대건설 최 이사와 강모(당시 42세) 총무부장이 납치를 진두지휘한 사실이 밝혀진 것. 이 사건으로 최 이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강 부장은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나머지 납치에 개입된 조폭들도 적게는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많게는 징역 1년까지 선고받고 철창생활을 해야 했다. 또 당시 현대건설 회장이었던 이 대통령과 법인체 현대건설은 각각 벌금 500만원에 약식기소 됐다.
현대건설의 노조위원장 폭행이 발생한지 1년 뒤인 1989년에는 현대중공업에서 현대그룹 노조원에 대한 집단 폭행이 있었다.

1989년 1월8일 김모(당시 40세)씨를 비롯한 현대중공업근로자 33명은 노조단합대회 현장을 덮쳐 노조위원 19명을 각목 등으로 20여분 동안 무차별 폭행했다. 이날 검거된 김씨 일당은 “노조원들의 정상조업 방해로 임금협상이 타결되지 않아 장기간 파업이 계속됨으로써 근로자들만 피해를 보고 있어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후 이번 사건 역시 현대그룹 고위간부가 상당히 개입된 그룹차원의 조직테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건 발생 이틀 전 정몽준 현대중공업회장이 울산에 직접 내려와 비상대책회의 등을 열고 조업정상화를 독려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

‘건방지게 프라이드’
대로변서 집단폭행

사건은 결국 경찰조사로 번졌고, 사건발생 3년만인 1992년이 돼서야 근로자 2명의 기자회견을 통해 당시 노조 테러는 정세영 그룹회장과 정몽준 회장이 총지휘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에도 현대중공업은 노조와 조율점을 찾지 못하고 잦은 무력충돌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1994년 1월에는 재벌가 2세를 포함한 강남 상류층 자제 4명이 집단폭행으로 구속돼 충격을 안겨줬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1994년 1월24일 롯데그룹 신준호 부회장의 외아들 신모(당시 26세)씨와 모 의류회사 사장 아들 김모(당시 20세)씨,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손자 이모(당시 20세)씨를 비롯해 양모(당시 20세)씨 등 4명을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 법률위반혐의로 구속하고, 한모(당시 24세)씨를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

이들은 같은 달 17일 새벽 1시45분께 그랜저 승용차를 몰고 강남구 신사동을 지나가다 옆차선에서 프라이드 승용차가 끼어들자, “건방지게 프라이드가 끼어들어 흘겨본다”고 시비를 걸었다.
이들의 시비에 프라이드 운전자 정모(당시 26세)씨와 함께 타고 있던 강모(당시 25세)씨는 차량 밖으로 나왔고, 몸싸움을 벌이던 중 부유층 자제들은 벽돌과 화분 등으로 두 사람을 폭행해 각각 전치 8주와 4주의 중상을 입혔다.


집단폭행을 당한 강씨는 뇌출혈을 일으켜 서울 남서울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서울대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정씨 역시 손가락 등의 골절상을 입고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경찰조사 결과 신씨 등은 강남구 청담동 모 나이트클럽에서 밤 12시까지 양주를 나눠 마신 뒤 야식을 먹기 위해 강남구 신사동의 포장마차로 향하던 길이었다.

경찰 조사를 받은 이들은 검찰에 송치, 법정에 서게 되지만 집행유예 선고로 풀려난다. 당시 재판부는 “신씨 등 피고인들이 전과가 없는데다 술을 마신 뒤 우발적으로 폭행한 점 등을 감안해 집행유예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이후 한참 잠잠했던 재벌가 폭행사건은 2000년대 다시 고개를 들었다. 2007년 에스콰이어 창업주 2세 이모(49)씨가 조폭을 동원해 동업자를 폭행하고, 물고문까지 가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난 것.

벤처기업을 운영하던 이씨는 동업자 박모(44)씨와 함께 신제품 개발을 계약하고 20억원을 투자했지만 박씨가 제품을 완성했을 때 이미 외국 제품이 시판되고 있어 기대 수익을 올릴 수 없게 되자 투자금 환원을 요구했다. 하지만 박씨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에 앙심을 품은 이씨는 박씨를 산으로 유인, 감금·폭행한 혐의로 구속됐다. 한편, 한화그룹은 김승연 회장이 둘째아들 보복 폭행사건으로 처벌 받은 지 3년 만인 올 9월 막내아들까지 폭행사건에 연루돼 눈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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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