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바보 노무현’으로 불릴 만큼 깨끗한 정치인의 길을 걷고자 했던 그는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도덕성에 흠집이 난 것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사저 뒷산에서 생을 마감했다. 노 전 대통령은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부산상고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 판사까지 역임하는 등 나름의 인생 성공 스토리를 써내려 갔다. 하지만 그는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 민주화운동을 시작, 인권변호사 활동에 나섰다. 1988년에는 지역주의를 허물겠다는 의지로 제13대 총선에서 부산지역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계에 입문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의 시작이었다. 정계에 입성한 그가 세상에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청문회 스타’라는 수식어가 붙으면서다. 그는 그만의 소신을 바탕으로 정계의 판도를 바꾸려는 움직임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결국 이러한 노력은 2002년 ‘노풍’을 일으키며 제16대 대통령 당선이라는 승전보를 울렸다. 하지만 그의 대통령 당선만으로 세상이 바뀔 리 만무했다. 갖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던 노무현 정부는 &lsqu
원칙·신뢰 소신으로 정경유착 단절 정상회담 등 남북관계 개선 최대업적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 정부의 이름답게 참여하는 민주주의 정치를 이루어냈다. 노 전 대통령은 출범 당시 ‘개혁과 통합’이라는 국정목표를 제시, 참여정부 시대의 막을 올렸다. ‘원칙과 신뢰’ ‘공정과 투명’을 중시한 노 전 대통령은 임기 기간 동안 정경유착 단절을 목표로 불법 선거자금의 고리를 끊었고, 과거 정부들이 무시했던 ‘평등’의 문제와 ‘청산’의 문제를 제도권 정치 속으로 밀어 넣었다. 여성부의 등장으로 양성평등에 관한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만들어냈고, 친일파 명단 공개, 과거사 위원회 등의 활동을 통해 민주화 이후 덮어 두기 급급했던 과거문제를 청산하기에 애썼다. 또 노무현 정권은 IMF에서 완전히 벗어나 안정적인 경제 관리로 재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에 힘을 쏟았다. 국내 외환보유액을 286억 달러 상승시켰고, 성장우선주의 정책으로 연간 4∼5%의 성장을 이루는 업적을 달성했다. 더불어 북한과의 우호적 관계 유지를 통해 한국이 분
노무현 전 대통령은 탈권위과 수평적 리더십으로 국민과의 의사소통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의 ‘개혁’을 선창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원칙’과 ‘소신’이 그의 무기였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뚜렷하고 과감한 자신만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 평생 과업도 못다 피우게 됐다. 그가 이루지 못한 세 가지 ‘꿈’을 조명해봤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특권과 반칙 없는 ‘깨끗한 이미지’를 표방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선 초기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서도,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도 부정부패를 없애야 한다”며 “부패 사례가 걸리면 패가망신시키겠다”고 부정부패 척결을 강조했다. 그는 집권 5년 동안 내내 도덕적 우월성을 자랑스러워했고, 퇴임 후에도 ‘도덕성’이 참여정부의 핵심 기반이었다고 누차 강조했었다. 하지만 그의 주변은 늘 잡음이 끊이지 않았고, 노 전 대통령도 ‘박연차 게이트&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5월23일 사망함으로써 검찰 수사 중 자살하거나 수사 직후 숨진 저명인사로 기록되게 됐다. 현재까지 검찰 수사 중 자살한 대표적 사례로 거론된 인물은 고 정몽헌 회장이다. 정 회장은 비자금 사건으로 대검 중수부에서 조사를 받았던 지난 2003년 8월4일 집무실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이어 2004년에는 안상영 전 부산시장, 남상국 전 대우건설 회장 등 다섯 명의 피의자가 잇따라 자살했다. 2004년 2월3일 운수업체로부터 수천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던 부산국세청 공무원 J씨도 승용차에서 분신해 숨졌고 다음 날 같은 운수업체로부터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안 전 시장이 구치소에서 목을 매 사망했다. 2004년 3월11일 노 전 대통령의 형 건평씨에게 인사청탁 대가로 3000만원을 제공한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를 받았던 남 전 사장이 한강에 투신해 숨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이어 같은 해 4월29일 건강보험공단 재직 시절 납품비리 등 의혹을 받아 서울남부지검에서 조사를 받았던 박태영 전남지사가 역시 한강에 몸을 던져 사망했다. 또 같은 해 6월4일에는 전문대 설립 과정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
‘박연차 게이트’의 핵심 당사자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노 전 대통령과 관련된 검찰수사가 사실상 종결될 것으로 보인다. 김경한 법무부장관은 지난 5월23일 성명을 통해 “현재 진행 중인 노 전 대통령에 관한 수사는 종료될 것이다”라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검찰은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된 다른 인사들에 대한 수사는 계속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김경한 법무부장관 “노 전 대통령에 관한 수사 종료될 것” 불법자금 수수의혹·세무조사 무마로비 의혹 수사는 계속 “무리한 수사가 노 전 대통령 자살로 내몰았다”는 지적도 검찰 조직 신뢰 떨어지고 전체 큰 위기 닥쳐올 수도 있어 지난 4월30일 노 전 대통령을 소환했던 검찰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건넨 돈의 용처를 밝히는 조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권양숙 여사를 재소환한 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사법처리 방향을 결정하겠다는 게 애초 수사 일정이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딸 정연씨가 박 전 회장으로부터 40만 달러를 받아 미국 뉴저지주 주택 마련을 위한 계약금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이 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괴롭힌 사건은 이번 ‘박연차 게이트’사건뿐만 아니다. 그동안 노 전 대통령을 겨냥한 각종 의혹과 추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깨끗한 정치를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취임 직후부터 구설수에 올랐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 3개월 만인 2003년 5월 자신이 소유했던 생수회사 ‘장수천’의 위장 매각 의혹으로 곤욕을 치렀다. 이어 ▲대선 자금 수사 ▲불법 정치자금 모금 의혹 ▲나라종금 뇌물수수 사건 ▲SK·썬앤문 불법자금 의혹 ▲대우건설 인사청탁 사건 ▲바다이야기 사건 ▲JU그룹 로비 사건 등에 친인척과 최측근들이 연루되면서 해명에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또 각종 ‘게이트’와 ‘리스트’가 터질 때마다 노 전 대통령이 연루됐을 것이란 의혹이 나오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유서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문재인 전 비서실장은 지난 23일 “가족들 앞으로 짧은 유서를 남겼다”고 말했다. 유서엔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 많은 이들을 힘들게 했다… 원망하지 마라… 삶과 죽음은 하나… 화장해달라… 동네에 작은 비석 하나 세워달라”등의 내용이 담겨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유서가 일부만 공개되면서 나머지 부분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경찰은 노 전 대통령이 남긴 유서가 10여 줄이라고 밝혔으나 실제론 더 많은 분량이 있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이 극히 평범한 유서를 남겼다고 보는 시각이 적다. 직설적인 화법과 과감한 성격상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냐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빙빙 돌리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내뱉고 보는 스타일로, 말솜씨가 좋은 달변가로 유명했다. 또 핵심이 명확하고 과격한 글로도 정평이 나 있다.
대한민국이 충격에 휩싸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다. 그야말로 ‘충격’이란 말로밖에 표현되지 않는다. 국민들은 참담하고 비통한 심정을 금치 못하고 있다. 무엇이 노 전 대통령을 돌이킬 수 없는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 것일까. 자살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를 옭아맨 사슬을 하나하나 풀어봤다. 비서관 한눈파는 사이 바위 아래로 투신 의식 없는 상태로 이송…‘머리손상’ 사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지난 23일. 노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5시45분께 비서관 1명과 함께 사저를 나와 마을 뒷산인 봉화산을 올랐다. 노 전 대통령은 오전 6시40분께 봉화산 중턱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동행했던 비서관이 한눈을 파는 사이 바위 아래로 뛰어내렸다. 대한민국 공황 상태 온 국민 참담·비통 경찰은 “사저에서 직선거리로 200m가량 떨어진 ‘부엉이 바위’에서 노 전 대통령이 뛰어내렸다”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은 비서진과 경호원 등에 의해 승용차편으로 오전 7시께 인근 김해 세영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7전 8기’ 정신으로 굴곡 많은 정치인생 버텨 민주화투쟁 앞장선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 지난 23일 토요일 오전, 편안한 마음으로 휴일 아침을 보내던 국민들에게 충격적인 비보가 전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나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로서 영예를 누렸던 그가 이제 곧 한 줌의 재가 되어 세상을 떠난다. 노무현, 그는 누구인가.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시련과 성장과정 등 그의 일대기를 짚어봤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46년 경남 김해의 빈농 집안에서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진영읍내에서 초·중학교를 나온 이후 부산상고를 졸업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굴곡이 심하고 비탈진 인생길을 걸어왔다. 머리가 좋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장난꾸러기 소년이자 명랑하고 책읽기를 좋아하던 소년이었다. 그래서인지 동네에선 ‘노천재’로도 통했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사고뭉치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어머니의 충고를 자주 들어야 했다. 입학금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뻔하기도 했고 한때는 막노동판에서 날품을 팔아 끼니를 때울 때
가난한 농민이었던 노 전 대통령의 아버지 노판석씨는 지난 76년, 어머니 이순례씨는 98년 고인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은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자매로는 큰형 영현씨와 작은형 건평씨, 누나 명자씨, 여동생 영옥씨가 있다. 큰형 영현씨와 누나 명자씨의 남편인 매형 양봉현씨는 고인이 됐으며, 여동생 영옥씨도 남편 전용진씨와 사별했다. 작은형 건평씨는 농업에 종사하다 세종캐피탈 대표 홍기옥씨로부터 청탁을 목적으로 한 29억6300만원을 받은 혐의로 현재 구속 수감 중이다. 처가쪽으로는 처형인 권창좌씨는 남편과 사별한 평범한 주부이고 처제인 진애씨도 자영업자인 이승남씨를 남편으로 둔 주부이다. 처남인 권기문씨는 현재 우리금융지주 상무로 있다. 노 전 대통령은 1973년 1월 고향에서 부인 권양숙씨와 결혼해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아들 건호씨는 연세대 법대 졸업 후 LG전자에서 근무 중이며, 2002년 12월 노 전 대통령의 대선 승리 직후 대학 재학시절부터 사귀어온 부인 배정민씨와 결혼했다. 정민씨의 아버지이자 노 전 대통령의 사돈인 배병렬씨는 전 NH-CA자산운용(구 농협CA투자신탁운용) 상임 감사위원장 출신이다. 딸 정연씨는 2003년 2
여러 작가들의 개성있는 그림과 함께 신화와 전설,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인물, 오늘날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을 통해 세계 문화사의 흐름을 짚어보는 인물백과사전 <누구일까요?>는 바이킹, 차르, 화랑 등 다양한 인물 정보를 전해주며 외계인, 인어공주, 스파이더맨 등 상상 속의 인물들도 다루고 있다. 또한 파라오, 기사, 인디언 등 역사 속 인물을 보면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세계 역사를 알 수 있으며, 스파이나 모험가, 스타 환경보호주의자란 어떤 사람들인지 배우면서 오늘날에 새로운 문화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의 인물들을 다루고 있는데 도깨비, 집현전 학자, 동학 농민 등의 내용을 실어서, 아이들이 세계문화사와 함께 우리나라의 문화와 역사도 살펴볼 수 있게 하였으며 재미있는 그림과 함께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세계문화사에 흥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로르 캉브르냑 저/ 니콜라 우베쉬,조윤이 그림/ 다섯수레 펴냄/ 1만3000원
여권 인사 검찰 수사 ‘노무현 후폭풍’에 위태위태 MB정부 핵심 정책, 야권 반기에 국정드라이브 주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각계가 충격에 빠진 가운데 청와대가 후폭풍의 영향권 아래 들어갔다.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이 현 정권의 무리한 수사 때문이라는 비판 여론이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 정권에 대한 사정수사로 강력한 국정 드라이브의 동력을 확보한 이명박 정부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한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그러나 30%대의 국정 지지율 등 아직 탄탄한 국정운영이 어려운 상황에서 지난해 촛불사태의 파괴력을 능가하는 거대한 ‘노무현 후폭풍’이 청와대에 몰아닥칠 경우 자칫 국정 마비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관측마저 제기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정치권에 비상이 걸렸다. ‘태풍의 핵’이라 불릴 정도로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한 정치적 파장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 민주당 등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급보를 접한 직후 긴급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폭탄 맞은 여야 정치권 긴급회의 갖고 대책 부심 청와대는 정정길 대통령실장 주재로 긴급회
노 전 대통령 투신자살로 슬픔과 분노에 빠진 국민들 “촛불집회 열자” 목소리 높여…현정권에 대한 불만 터질듯 무리한 수사 벌인 검찰에 자살 책임 돌리는 목소리 높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토요일 아침의 갑작스런 비보에 국민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전직 대통령의 불명예스런 검찰조사에 가뜩이나 어깨가 처져있던 국민들은 이번 소식에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당혹감에 빠졌다. 문제는 앞으로 다가올 후폭풍이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무자비한 수사에 불만을 품고 있던 노사모 등 국민들이 그의 죽음을 계기로 분노를 표출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 유명인의 자살이 발생할 때마다 나타났던 베르테르 효과가 또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도 커지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서거가 가져올 각종 파장을 전망했다. 뇌물수수 혐의에 휘말려 검찰조사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비극적인 서거를 맞았다. 퇴임 이후 꾸려나가던 사업체의 이름으로 정할 만큼 사랑했던 봉하마을 사저 뒷산에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다. 전국에 애도의 물결 촛불집회 움직임도 사상초유의 전직 대통령 자살에 국민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지난 23일 오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자신의 홈페이지에 “노 대통령이 사과의 의미로 자살해야 한다”고 했던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에 비난이 잇따르고 있다. 김 교수는 지난달 15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먹었으면 먹었다고 말을 해야죠’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노무현씨가 국민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자살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는 것. 당시 김 교수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진실인데 진실이 없으면 사람이 사람구실 못하게 마련”이라며 “그런 자가 공직의 높은 자리에 앉으면 많은 백성이 고생을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또 “그가 5년 동안 저지른 일들은 다음의 정권들이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인 과오는 바로잡을 길이 없으니 국민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자살을 하거나 아니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서 복역하는 수밖에 없겠다”는 등의 강도 높은 글을 써서 논란이 되었다. 이에 네티즌들은 김 교수에게 비난을 퍼부어 한때 김 교수의 홈페이지가 마비되기도 했다.
국가적으로 큰 위기를 맞을 때마다 가장 먼저 우려되는 것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다. 이번 노 전 대통령 서거도 예외는 아니다. 전 대통령의 자살소식에 많은 국민들이 동요하고 슬퍼하는 만큼 경제활동을 하는 데도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가뜩이나 침체되어 있는 경제에 회생가능성을 앗아갈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어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재계도 바짝 긴장한 상태다. 주요 경제단체들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충격을 감추지 못하며 국내 경제에 끼칠 영향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경제단체들은 지난 23일 저마다 한 목소리로 애도를 표하며 경기침체에 대해 조심스런 입장을 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대한상의 이현석 전무는 “충격적이고 안타깝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들에게도 애도의 뜻을 표한다”며 “이번 일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힘을 쏟고 있는 데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도록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국경제인연합회도 이번 사건이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라고 밝혔다. 전경련 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전직 대통령들의 수난사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전 대통령부터 노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정점에 섰던 9명의 전직 대통령들이 대부분 하야와 시해, 검찰 수사를 겪는 등 끝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 속 모진 풍파에 휘말렸던 전직 대통령들의 뒤안길을 좇아가 봤다. ‘대통령’은 권력의 정점으로 꼽힌다. 그러나 대통령직이 생긴 이후 권력의 달콤함을 맛봤던 이들의 말로는 씁쓸했다. 전직 대통령의 수난사는 초대부터 3대 대통령으로 1948 ~1960년 재임한 이승만 전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됐다. 이 전 대통령은 반공에 기초해서 당시 강대국들의 정치적 각축전 아래서 나름대로의 외교력과 국가관으로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정부를 수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원치 않아도 쫓겨가고 그러나 끝은 좋지 못했다. 건국 초기에 필요한 국민통합과 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키지 못하고 초법적·권위주의적·폭력적 정치형태로 12년간의 장기집권을 시도한 과욕이 화를 부른 것. 3선 개헌과 3·15 부정선거로 이어진 이 대통령의 권력욕은 1960년 4&m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