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친·여친에게 폭행당해 고통받는 이들 증가
신체적·정신적·성적 폭행 등으로 수치심
연인에게 각종 폭행을 행사하는 데이트 폭력이 위험수위에 달했다. 신체적 폭력뿐만 아니라 성폭력, 정신적 폭력, 언어폭력 등 종류도 다양하다. 특히 성폭력이나 성희롱 등 데이트 성폭력은 성 개방 풍조와 함께 증가하는 추세다. 연인 사이에 일어나는 강제적인 성관계를 범죄라고 인식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기도 한다. 사랑과 집착 사이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데이트 폭력의 실태를 취재했다.
직장인 A(25·여)씨는 남자친구의 잦은 폭행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A씨는 현재 교제 중인 남자친구 B(27)씨와 1년 전 이별했다 다시 연인사이가 됐다. 다시 데이트를 시작하면서 예전에 느꼈던 설렘을 찾았다는 A씨.
그러나 B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변했다. A씨에게 B씨와 다시 교제하기 전 잠시 만났던 남자의 휴대폰메시지가 온 것을 발견한 후 부터였다. 이때부터 B씨는 A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행선지를 묻는 문자메시지를 하루에도 수통씩 보냈고 1시간에 한 번은 전화를 해 현재 위치를 묻기도 했다.
“사랑해서 그런 거야”
또 데이트 중 낯선 번호로 전화라도 오면 누군지를 밝히라는 추궁이 지겹도록 이어졌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사랑하니까 하는 행동이라며 참았다는 A씨.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B씨는 A씨에게 손찌검을 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폭행은 전 남자친구로부터 연락이 온 것을 알아챘을 때 일어났다. A씨는 “그 사실을 알게 된 남자친구는 모텔로 끌고 가 폭행을 했다”며 “얼굴에 멍이 들어 출근도 못할 정도로 심하게 폭행했다”고 말했다.
남자친구의 집착이 도를 넘었다는 두려움이 생긴 A씨는 결국 이별을 통보했다. 그러나 남자친구는 언제 때렸냐는 듯 눈물을 흘리며 빌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A씨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고 결심하고 다시는 폭행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받았다.
그러나 남자친구의 행각은 그 후로도 더욱 심각해졌다. 폭행 후엔 어김없이 성폭력도 이어져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수치심도 느껴야 했다. 더는 견딜 수 없었던 A씨는 현재 이별을 통보하고 연락을 두절한 상태라고 한다. 그러나 A씨의 직장과 집, 친구의 연락처까지 모두 알고 있는 B씨가 어떤 방식으로 보복을 할지 두려워 잠도 잘 못 이룬다고 한다.
A씨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어떤 행동도 용서될 거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며 “조금이라도 폭행의 기미가 보인다면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직장인 C(28·여)씨는 남자친구의 잦은 성폭력으로 인해 고민 중이라고 한다. C씨는 “남자친구와 2년 동안 만나면서 데이트코스에서 모텔이 빠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연인의 의무라고 생각해 별다른 불만 없이 잠자리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강압적인 성관계가 빈번해졌다는 것. C씨가 피곤하거나 몸이 아파 성관계가 내키지 않을 때조차도 남자친구는 어떻게 해서든 욕구를 충족시켰다고 한다. 이때마다 C씨는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고 한다.
언어 성희롱도 날이 갈수록 수위가 높아진다고 한다. C씨는 “직장상사들에게나 당했던 성희롱을 남자친구에게 당하고 나면 수치심은 말할 수 없이 크다”며 “말로는 사랑한다면서 저질스런 성희롱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걸 보면 날 소중하게 여긴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이 같은 데이트 성폭력은 명백한 폭행행위다. 한쪽의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일방적인 강요에 의해 일어나는 성행위는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이든 범죄행위에 들어간다.
전문가들은 “육체적으로 무력하거나 강제로 성적 행동을 강요하거나 나중에 해를 입히겠다고 위협해서 성적 행동을 하거나, 약물이나 술 등을 이용해 성적인 행동에 대한 자기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든 후 성적 행동을 하는 것 등이 모두 데이트 성폭력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데이트 성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범죄라는 인식까지는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연인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성적 행위일 뿐 신체적 폭행과 같은 폭력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쉬워서다.
때문에 데이트 성폭력은 생각보다 많은 연인들 사이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것이 실정이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달 25일 ‘데이트 폭력 실태 조사 및 토론회’를 열어 국내 데이트 폭력의 현황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데이트 도중 일어나는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 스토킹 등의 빈도가 우려할 만한 수준이었다.
문채수연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장에 따르면 2007~2008년 이뤄진 총 954건의 성폭력 피해상담 가운데 가해자가 데이트 상대자인 경우가 275건(25.3%)으로 1위로 집계됐다. 10명 중 4명은 연인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결과다.
이 데이트 폭력은 젊은 층으로 갈수록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했다. 조사에 따르면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는 이들 중 49.1%가 20대였다. 30대는 18.5%, 40대는 6.5%의 순이었다.
20대의 데이트 폭력 실태는 한국여성의전화가 서울지역 11개 대학의 대학생 796명을 대상으로 벌인 ‘서울지역 대학생 데이트폭력 실태조사’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조사에 따르면 여성 77.8%, 남성 69.4%가 정서적 폭력을, 여성 61.4%, 남성 59.3%가 언어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신체적 폭력의 경우 여성 32.7%, 남성 41.5%가 경험했다고 답해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른 결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또 10명중 4명꼴로 음담패설, 원치 않는 신체적 접촉, 성관계 강요, 성폭행 등 성폭력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구체적인 예로는 ‘내 기분에 관계없이 키스한 적이 있다’(여 24.2%, 남 17.3%),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가슴과 성기를 만진 적이 있다’(여 15.6%, 남 6.2%), ‘성관계를 강요받았다’(여 12.1%, 남 6.6%) 등이 있다.
또 성폭력을 당한 후에도 관계를 유지한 이유에 대해 여성 응답자의 절반은 ‘항상 그러는 것은 아니어서’라고 대답한 반면 남성의 45.9%는 ‘사귀는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므로’라고 대답해 남녀 간 인식차를 드러냈다.
속으로만 ‘끙끙’
한국여성의전화 문채수연 성폭력상담소장은 “가정 폭력이나 데이트 폭력은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 그 심각성이 노출되지 않았다”며 “특히 데이트 성폭력의 경우 ‘성관계’로 여겨 방치하기 쉬우므로 자발적인 동의와 강제의 미묘한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