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최근 정치자금법 위반과 청탁금지법 위반 등 혐의로 한학자 통일교 총재가 구속됐다. 그동안 자신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어왔던 한 총재가 교단 자금 로비 의혹으로 구속되면서 교단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한학자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통일교)의 2대 총재다. 통일교 창설자 문선명의 배우자이자 후계자인 그는, 남편 사망 이후 교단을 실질적으로 이끌어왔다.
모태 신앙
기독교 집안
한 총재는 1943년 2월10일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신의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통일교에 몸을 담게 된 건 가정환경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 홍순애는 장로교 신앙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다.
외동딸이었던 한 총재는 어머니의 영향 아래서 자연스럽게 신앙 생활에 젖어들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족은 피란길에 올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한 총재는 여러 차례 학교를 옮겨 다니다가 초등학교를 마친 뒤 성요셉 간호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10대 시절, 통일교와 직접적인 인연을 맺게 된다. 처음 문선명을 본 것은 만 14세 무렵이었다. 교단 내부 증언에 따르면, 당시 어린 소녀였던 한 총재는 교단 집회에서 문선명을 멀리서 바라보는 수준이었지만 이후 교단 내에서 차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문선명은 이미 ‘메시아’를 자처하며 교세 확장에 나서고 있었고, 이를 가까이에서 접한 한 총재의 모친 홍순애는 그의 가르침에 깊이 매료됐다.
이후 홍순애는 교단 내에서 ‘대모님’으로 불리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청평 수련원 등지에서 교인들의 영적·육적 치유를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신도들은 홍순애가 신령한 기운을 지녔다고 믿었다. 모친의 입지 덕분인지 한 총재도 함께 교단 내에서 눈도장을 찍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미 교단 핵심부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셈이다.
1960년 3월27일, 한 총재는 문선명과 약혼식을 올렸다. 당시 교단에서는 이 약혼식을 ‘가약식’이라 불렀고, 불과 보름여 뒤인 4월11일에 열린 결혼식을 ‘성혼식’으로 불렀다. 교단 내부에서는 이 두 의식을 혼인 절차가 아닌, 신학적인 의미가 담긴 중요한 단계로 해석했다.
가약식은 ‘하늘 앞에서의 약속’, 성혼식은 ‘인류 앞에서의 선언’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한 총재는 만 17세였으며, 문선명은 40세였다. 나이 차이가 23살에 달하는 결혼은 교단 안팎에서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교단은 이를 ‘참부모 성혼식’이라 부르며 통일교의 역사적인 순간으로 선포했다. 교인들은 성혼식을 통해 한 총재와 문선명이 인류의 영적 부모로 자리매김했다고 여겼다.
한 총재가 문선명의 배우자가 된 배경에는 여러 사정이 있었다. 문선명은 이미 1959년부터 계시에 따라 새로운 배우자를 맞이해야 한다고 밝히며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당시 교단 내에서는 한 총재 외에도 몇몇 신부 후보가 거론됐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명희, 윤정혜였다.
14세 무렵 문선명 처음 만나
말 많고 탈 많은 ‘7남 7녀’
김명희는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맡았으나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고, 윤정혜는 끝내 문선명에게 절대적 복종을 맹세하지 못하면서 자격을 상실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한 총재가 최종 배우자로 확정됐다.
문선명은 한 총재를 직접 만나기 전, 그가 신부로서 갖출 자질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긴 시간을 들였다. 1960년 2월26일, 첫 대면 자리에서 9시간 동안 질문을 던지며 신앙과 소명 의식을 검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한 총재는 교단 원로 최원복으로부터 한 달간 ‘신부 수업’을 받았다.

신부로서의 역할, 교단 지도자의 아내로서 지녀야 할 태도 등을 익히는 과정이었다.
결혼 직후 한 총재와 그의 모친 홍순애는 교단 내 신도들의 시기와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검소한 생활을 했다. 이들은 3년간 청빈한 삶을 유지하며 다른 신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조건에서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한 총재가 ‘교단의 어머니’로서 신뢰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결혼만으로 입지를 굳힐 수는 없었다. 교단 내부에서 문선명 부부가 ‘참부모’로서의 위치를 인정받고 확고히 자리 잡기까지는 7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 기간은 교단의 교리와 상징을 재정립하고, 신도들로부터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에 사용했다.
한 총재는 남편과 함께 교단 의례와 활동에 참여하면서 ‘참어머니’라는 호칭을 얻었고, 이후 교단의 핵심적 지도자로 자리 잡을 수 있는 토대를 다졌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7남7녀, 총 14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교단 내부에서는 이들이 ‘참가정’이라 불렸다. 한 총재가 많은 자녀를 둔 것에 비해 그중에 후계자로 낙점된 자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장남 문효진은 음악과 사업을 병행했다.
그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헤비메탈 밴드 활동을 했고, 10여장의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동시에 연예기획사를 설립해 연예계 진출을 시도했으나 마약 투약과 폭행 논란에 휘말리면서 교단 안팎으로 구설에 올랐다.
당시 전처 홍난숙이 미국에서 문선명 일가에 대해 폭로하는 책 <In the Shadow of the Moons>을 쓰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홍난숙은 참가정을 떠난 것을 ‘탈출’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후 문효진은 재혼하며 삶의 안정을 되찾는 듯했지만 2008년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차남 문흥진은 어린 시절부터 총재 부부가 각별히 아꼈던 아들이었다. 문선명이 ‘효자’라 칭할 정도였으나, 1984년 교통사고로 18세 나이에 요절했다. 교단은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사후 영혼 결혼식을 치렀다.
17세와 40세
영적 부모로
셋째 아들 문현진은 한때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됐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공부한 그는 통일교 국제재단과 글로벌피스재단 등을 이끌며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교단 재정 운영과 교리 해석을 두고 어머니 한 총재와 충돌하면서 결국 결별 수순을 밟았다.
여의도 파크원 개발 등 대규모 자산을 둘러싼 소송전으로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독자 노선을 걷게 됐다.
넷째 아들 문국진은 통일교 계열사의 경영을 맡으며 한동안 내부 실권을 쥐었으나, 형제들과의 갈등과 내부 불신으로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동생 문형진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평화통일성전(생츄어리 교회)’에 합류했다.

다섯째 아들 문권진은 비교적 조용히 지내며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고, 여섯째 아들 문영진은 1999년 미국 네바다주 리노의 한 호텔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경찰은 자살 가능성을 언급했으나 당시 교단 측은 사고사라는 입장을 내놨다. 당시 그는 20대 청년으로, 결혼 후 얻은 딸은 형 문국진 가정으로 입양됐다.
막내아들인 일곱째 문형진도 후계자로 지목된 바 있다. 하버드대에서 종교학을 전공하고 세계회장 자리에 올랐지만, 한 총재와 갈등 끝에 교단에서 축출됐다. 그는 이후 미국 펜실베이니아 분파인 ‘생츄어리 교회’를 세우고 총기 무장 교리를 내세우며 논란을 일으켰다.
신도들이 총기를 들고 합동결혼식을 진행하는 장면은 미국 언론에서도 보도할 정도로 파장이 컸다.
딸들도 마찬가지다. 장녀 문예진은 결혼과 이혼을 겪으며 네 자녀를 뒀는데 통일교에서 활동은 하지 않았다. 둘째 딸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세상을 떠났고, 셋째 딸 문인진은 미국 통일교 회장을 맡으며 활동에 나섰으나, 유부남과의 불륜 및 사생아 출산 사실이 드러나며 직위를 내려놓으며 결국 이혼 후 재혼했다.
넷째 딸 문은진은 승마 선수로 활동했으며 한때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하지만 가정사와 이혼 문제로 교단 내 입지가 약화됐다. 다섯째 딸 문선진은 2015년 7남 문형진이 물러난 뒤 세계회장직에 올라 교단을 대표했으나, 2019년 이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여섯째 딸 문연진은 미국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스스로를 “재벌 2세”라 소개하며 화제를 모았다. 다큐멘터리 감독을 희망한다고 밝혔으나 교단과는 거리를 두는 모습이었다. 막내딸 문정진은 통일교와 관계없는 일반인과 결혼하며 교단 활동과는 선을 그었다.
교단에서는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불린 후계 다툼이 벌어진 때가 있었는데, 3남 문현진은 교단 재정 투명성을 주장했으나 교권과 대립하며 배제됐고, 4남 문국진은 기업 운영을 맡았으나 내부 갈등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7남 문형진은 후계자로 지목됐지만, 한 총재와의 갈등 끝에 교단을 떠나 미국에서 분파를 창립했다.
‘왕자의 난’
후계 다툼
결국 자녀 가운데 누구도 후계자로 자리를 굳히지 못했다.
2012년 9월 문선명이 세상을 떠난 뒤 교단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창립자의 부재로 후계 구도가 불투명했기 때문었이다. 그러나 장례 기간 동안 한 총재가 교단을 대표해 외부 인사를 맞이하고 주요 행사를 주관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에게 시선이 쏠렸다.
교단 내부에서도 ‘참어머니’를 중심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빠르게 형성됐다.
이듬해 한 총재는 통일교 총재로 공식 취임했다. 취임 당시 그는 남편의 뜻을 이어 교단을 이끌어가겠다고 선언하며 조직 결속과 교세 유지를 강조했다. 이후 교단 산하 주요 조직의 업무를 맡으며 사실상 단일 지도 체제를 굳혔다.

선문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해 대학과 연구기관을 관리했고, 세계평화여성연합 총재로 활동하며 교단 여성 신도와 국제 활동을 아우르는 역할을 맡았다.
한 총재는 통일교의 주요 업무들을 차례로 장악하면서 교단 운영 전반은 한 총재 중심으로 재편됐다. 내부적으로는 ‘참어머니’라는 호칭을 내세워 권위를 강화했고, 대외적으로는 총재로 활동하며 입지를 공고히 했다. 그 결과 문선명 사후에 불거졌던 분열 가능성은 어느 정도 수습됐고, 주요 의사결정은 모두 한 총재의 손에서 이뤄지게 됐다.
통일교의 공식 명칭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다. 1954년 5월1일 서울 북학동에서 문선명에 의해 만들어졌다. 당시 이름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였으며, 기독교 교파의 분열을 극복하겠다는 취지로 출범했다. 이후 교세가 확장되면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라는 이름을 내걸게 된다.
문선명은 예수가 완수하지 못한 사명을 자신이 이어받아야 한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했고, 이를 바탕으로 ‘참된 가정을 세워야 인류가 구원받는다’는 신학을 만들었다. 통일교의 모든 교리는 이 믿음에서 출발한다.
교리의 핵심은 <원리강론>이라는 경전에 담겼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본래 완전했으나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질서가 무너졌다고 본다. 인류 역사는 이를 회복하기 위한 ‘복귀’의 과정이며, 예수가 완성하지 못한 사명을 문선명이 이어받았다는 게 교단의 주장이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끊고 하나님의 혈통을 되찾아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논리다. ‘참부모’라는 개념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신도들은 이 부부를 통해 인류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믿었다. 기존 기독교가 예수를 구세주로 바라보는 것과 달리, 통일교는 ‘참부모’의 출현이야말로 인류 구원의 열쇠라고 강조했다.
교단 자금 활용 정치권 로비 혐의 구속
대선 직전 ‘특별지시 프로젝트’ 추적
통일교 하면 떠오르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합동 결혼식이다. 교단은 이를 ‘축복식’이라 부른다. 수천쌍, 때로는 수만쌍의 신도들이 한날한시에 부부가 되는 의식이다. 교단은 이를 ‘축복식’이라 부르며, 신도 부부가 과거의 죄성을 끊고 하나님의 혈통을 잇는다고 설명한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이 합동 결혼식은 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국적과 인종을 초월한 결혼은 통일교가 내세우는 ‘세계 평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실제로 교단이 짝을 정해주는 경우가 많았고, 신도들은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이 같은 독특한 의례는 교세 확장의 동력이 됐다. 가족 단위의 신도들을 만들고, 국제결혼을 통해 국경을 넘어선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교단은 이를 “하나님의 세계적 가정”이라 불렀고, 신도들은 이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통일교는 선문학원과 선문대학교를 비롯한 학교와 연구기관을 설립해 자체 인재를 양성했다. 여성 신도를 결집하기 위해 세계평화여성연합을 조직했고, 청년 조직도 운영하며 차세대 신도들을 교육했다.
언론사와 출판사를 세워 교단 메시지를 널리 퍼뜨렸으며, 예술단과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며 문화 활동에도 투자했다. 경제 활동도 활발했다. 문선명은 해양 산업을 강조하며 수산업에 손을 댔고, 무역과 건설, 식품 사업에도 진출했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 미국 등 해외에서도 기업을 세우며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정치와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통일교는 출범 이후 줄곧 반공주의를 내세웠다. 냉전이 격화되던 시기, 공산주의를 ‘사탄의 사상’으로 규정하며 국제 반공 연합을 후원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일본, 한국 정치권과 다양한 접점을 만들었다.
미국에서는 닉슨 대통령 시절부터 교단의 로비 문제가 언급됐고, 일본에서는 자민당 정치인들과 교류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한국에서도 집권 세력과의 연관성이 여러 차례 문제로 불거졌다.
이런 행보와 교리로 인해 통일교에 대한 세간의 비판은 상당하다. 기독교계는 통일교의 ‘참부모’ 교리가 정통 교리와 양립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교단 운영 방식도 논란이었다. 신도들에게 고액의 헌금을 요구하거나, 영적 상품을 고가에 판매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일본에서는 피해자 가족 모임이 꾸려질 정도로 사회 문제가 됐다. 결국 일본 정부는 교단 법인 해산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 일부에서는 통일교를 컬트, 즉 사이비 집단으로 분류했다.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조직 구조, 그리고 정치적·경제적 영향력 행사 방식이 문제로 지목됐다.
한편, 한 총재의 구속으로 통일교의 후계 구도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교단은 공식적으로 “천애축승자를 중심으로 현 상황에 대비하겠다”고 밝혔다. 천애축승자는 장남 문효진의 아들 문신출·문신흥 형제를 말한다. 지난 4월13일 통일교가 ‘천원궁 천일성전 입궁식’을 열며 지명한 사실상의 후계자로 거론되는 인물들이다.
아들 대립
폭발 직전
현재 3남 문현진은 글로벌피스재단을 중심으로 독자 노선을 걷고 있고, 7남 문형진은 미국에서 생츄어리 교회를 운영하며 모친을 정면 비판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구속 이후 아들들의 추가 폭로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교단의 향후 권력 재편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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