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풍운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파란만장 인생사

2019.12.16 10:00:33 호수 1249호

“땅덩어리 좁은 우리는 밖에서 기회 찾아야”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별세했다. 재계 2위 그룹의 총수서 IMF 이후 역대 최대 규모의 부도로 대한민국이 휘청이게 했다. 해외도피 생활과 구속, 수십조의 추징금.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9일 오후 11시50분경 수원 아주대병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김 전 회장은 2018년 하반기까지도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글로벌 인재양성 활동을 해오다 지난해 11월 귀국해 12월 말까지 아주대병원서 치료를 받았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그러다 올해 하반기에 건강이 악화돼 입원 치료를 받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회장은 알츠하이머를 앓았다. 그는 2017년 3월 서울서 열린 ‘대우창업 50주년’ 기념행사를 통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후 행보는 공개된 적이 없었다.

김 전 회장은 임종 직전 별도의 유언은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장병주 회장은 빈소서 기자들과 만나 “지난주 토요일(7일)부터 급격히 건강이 나빠지셔서 특별히 남긴 마지막 말씀은 없었다”며 “평소에 우리가 마지막 숙원사업으로 진행하던 해외 청년사업가 양성 사업을 잘 유지·발전시키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알츠하이머 증세가 있긴 했지만, 주변 사람들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고 장 회장은 전했다. 투병 중에도 주변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곤 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9일 숙환으로 별세한 김 전 회장의 빈소에 각계 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경기도 수원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옛 대우그룹 관계자들과 정·재계 인사들의 발길이 종일 끊이지 않았다. ‘소박하고 조촐한 장례’를 원한다는 고인의 뜻에 따라 유족은 부조금과 조화를 받지 않을 예정이었으나 애도의 뜻을 존중해 조화는 받았다. 

재계에선 신세계그룹 이명희 회장, 정용진 부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장남 김동관 한화큐셀 부사장 등이 차례로 다녀갔다. 삼성전자 윤부근 부회장, 롯데 황각규 부회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 등도 빈소를 찾았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이날 기자들의 질문에 “안타깝다”고 말한 뒤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대우맨’으로 일했던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은 이날 조문 직후 기자들과 만나 “젊었을 때 일할 기회를 준 사람”이라며 “사업을 하는 데 있어 나의 평생 보스”라고 고인을 회상했다.

‘대우 신화’ 1세대 기업인 별세
각계 조문객 발길 끊이지 않아

빈소에는 이 밖에도 이재정 경기도교육감, 홍사덕 전 국회의원,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원희룡 제주도지사,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전 원내대표,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의원 등이 조문했다. 홍 전 원내대표는 대우자동차 노조위원장 출신이다. 연예계서도 배우 이병헌, 송승헌 등이 빈소를 찾아 늦은 시간까지 머물렀다. 이병헌은 생전 고인과 부자처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김태구 전 대우자동차 회장, 장병주 전 ㈜대우 사장, 장영수·홍성부 전 대우건설 회장, 강병호·김석환 전 대우자동차 사장 등 여러 대우맨들이 종일 빈소를 지켰다. 조문은 오후 9시30분께 마무리됐으며 이날 총 3000명의 조문객이 빈소를 찾았다. 

김 전 회장의 삶은 대한민국의 고도성장 과정을 집약한 것이나 다름없다. 한 쪽에서는 샐러리맨 신화, 세계경영 전도사라는 ‘빛’이 있다면 다른 한 쪽에는 분식회계, 정경유착 등의 ‘어둠’이 있다. 그의 일대기는 재벌 회장의 개인사로 그치지 않는다. 대우그룹의 부도는 한국 경제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김 전 회장은 1936년 대구서 6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6·25 전쟁으로 아버지가 납북되자 15세에 홀어머니 아래서 소년 가장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도맡았다. 휴전 후 상경해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하고 1956년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해 학창 생활을 보냈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 친척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서 바이어로 근무하다가 1967년 독립해 당시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을 차렸다. 창업 초기에는 과거 자신이 바이어 일을 하던 동남아시아의 의류 원단 및 자재 공급 관련 사업을 주로 하는 중소기업이었지만,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춘 그는 제2금융권으로부터 돈을 빌린 뒤부터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대우실업은 1968년 수출 성과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급성장 가도를 달렸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호주 시드니)를 세웠다. 


‘세계 경영’ 
수출 주도

1975년 한국의 종합상사 시대를 연 이후 김 전 회장이 이끈 대우는 국내 중소기업의 수출 창구가 됐다.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이어 1976년에는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고, 1974년 인수한 대우전자와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대우전자를 그룹의 주축으로 성장시켰다.

대우그룹은 또 에콰도르(1976년)에 이어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통해 해외사업의 터를 닦았다.

김 전 회장의 거침없는 확장 경영의 결과 창업 10년 만에 쟁쟁한 기업들을 제치고 현대그룹, 삼성그룹, 럭키그룹에 이은 4대 재벌의 반열에 올랐다. 창업 후 수출만으로 회사를 초고속으로 성장시켜 ‘대우신화’라는 신조어와 함께 샐러리맨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해외영업서 남다른 수완을 발휘한 김 전 회장은 박정희정권서 가장 두드러진 기업인으로 주목받았다. 박 전 대통령이 김 전 회장의 부친이 대구사범 은사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절친한 사이가 된 것으로 재계에선 전해진다. 하지만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1973년 육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경기고등학교 동기생 이종찬이 중앙정보부에 근무한 덕에 큰 화를 면했다. 

바둑 3급 공인의 기력을 보유한 김 전 회장은 1983년 한국기원 2대 총재로 취임하기도 했다. 1987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축구협회 회장직도 맡았다. 1989년에 자서전인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썼다. 이 책은 펴내 6개월 만에 100만부를 돌파하며 최단기 밀리언셀러 기네스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특히 1990년대 동유럽의 몰락을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 경영을 본격화했다. 이에 따라 대우그룹은 부도 전까지 396개 현지법인을 포함해 해외 네트워크가 모두 589곳에 달했다. 해외고용 인력은 15만2000명을 기록하기도 했는데 당시 고인은 연간 해외 체류기간이 280일을 넘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선 출마설이 돌았지만 “새한국당이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영입교섭이 들어와도 응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1993년 대우그룹은 세계 경영을 선포했다. 1996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곤혹을 치렀지만, 1998년 대우그룹을 재계 2위로 성장시켰다.

31세 창업
97년 해체


대우그룹은 해체 직전까지 41개 계열사와 600여개의 해외법인·지사망을 갖고 있었다. 임직원 수는 국내 10만명, 해외 25만명에 달했다. 자산 총액은 76조7000억원, 매출은 91조원(1998년)이었다. 그야말로 ‘대우 제국’에 가까웠다.

그러나 1997년 11월 닥친 외환위기(IMF)는 세계 경영 신화의 몰락을 불러왔다. 김대중정부 경제관료들과의 갈등과 마찰을 빚으면서 붕괴가 빨라졌다. 특히 1998년 3월 전경련 회장을 맡은 김 전 회장은 수출론을 집중 부각했지만, 관료들과 갈등은 여전했고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맞았다.

1997년 IMF로 한국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다. 그로 인한 여파로 부채비율이 400% 이상이었던 대우그룹은 쌍용을 인수하는 등 확장정책을 이어나갔다. 1998년 당시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핵심사안으로 꼽혔던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렸고,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한도 제한 조치에 이어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일본계 증권사의 ‘대우그룹의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가 나온 것을 계기로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그룹은 끝내 해체됐다.

대우의 차입금은 1997년말 29조원서 1998년말 44조원으로 15조원이 늘었다. IMF 외환위기 직후 고금리 상황서 차입금 증가는 치명적이었다. 1998년에 대우가 내는 이자비용은 6조원에 달했다. 여기에 분식회계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대우그룹이 무너진 것이다. 대우로 인한 전체 손실액은 31조원에 이르렀고, 이를 메우기 위해 사실상 세금인 21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재계 2위 대기업서 IMF 원흉으로
장기 해외도피…추징금 23조 남아

김 전 회장의 오랜 해외생활이 시작된 것도 그 때부터다. 그는 1999년 10월 중국 산둥성의 옌타이 자동차부품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뒤 국내로 돌아오지 않았다. 2005년 국내로 돌아온 뒤,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 6개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000원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2010년 이후 김 전 회장은 해외서 후진 양성에 주력했다.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사업(Global Young Business Manager·GYBM)이 그것이다. 이 사업은 한국 대학 졸업생을 선발해 동남아 현지서 무료로 취업 교육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베트남·미얀마·인도네시아·태국 등 동남아시아 4개국서 1000여명의 청년사업가를 배출했다. 김 전 회장은 “청년들이 밖에 나가서 기회를 찾아야 한다”며 “운명적으로 땅이 좁은 우리나라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GYBM 사업을 시작한 이유를 설명했다. 

김 전 회장이 별세하면서 추징금 환수는 사실상 어려워졌다. 다만 법원이 지난 2005년 당시 대우그룹 임원들에 대해 추징금 23조원을 연대 부과하면서 미납금 자체가 소멸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집행된 금액은 약 892억원에 불과하며, 집행률 0.498% 수준이다. 김 전 회장의 추징금이 환수되지 못한 이유는 본인 명의 재산이 없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가족의 재산이라도 본인 명의가 아닌 이상 추징이 불가능하다.

앞서 대법원은 김 전 회장이 해외도피 중이던 2005년 5월 강병호 대우 전 사장 등 임원 7명에게 추징금 23조358억원을 선고했다. 김 전 회장은 이들과 공범으로 묶여있어 추징금을 연대해 부담하도록 돼있다.

한편 김 전 회장은 지방세 35억1000만원, 양도소득세 등 국세 368억7300만원도 체납한 바 있다. 자신의 차명주식 공매대금을 세금 납부에 먼저 써야 한다며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를 상대로 소송을 내기도 했다. 추징금과 달리 세금에는 연체료가 붙는다는 이유였으나 대법원은 2017년 캠코에 승소 판결을 내렸다.

슬픈 대우맨
“평생 보스”

분식회계로 발행한 수천억원대 회사채에 대한 지급보증으로 보증회사에 손해를 끼친 혐의를 받는 김 전 회장이 배상해야 할 손해배상액 260억원도 갚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법원은 지난 7월 서울보증보험 주식회사(SGI서울보증)가 김 전 회장 등 계열사 대표·임원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서 “피고들은 원고에게 260억여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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