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당 내 권력지형에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친이명박계(이하 친이계)와 친박근혜계(이하 친박계)를 양대 산맥으로 하는 기본틀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친이계 내부적으로 권력을 잡은 이상득계와 소외된 이재오·정두언계 갈등 구조화 속에서 미묘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또한 친박계가 날로 세력을 넓혀가는 것도 친이계의 위기의식을 키우고 있다. 특히 초선그룹을 중심으로 ‘계파 이동’의 조짐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아직 판도가 뒤바뀔 것이라 단언하긴 이르지만 향후 당내 역학관계, 멀리는 차기 대권구도에도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와 귀추가 주목된다.
최근 정치권 일각에서는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의 거취 논란 파동을 이재오계 정두언계 세력 vs 이상득계 박근혜계의 힘겨루기로 풀이해 귀추가 주목된다.
지난달 16일 열린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이재오계 의원들의 홍준표 원내대표에 대한 분위기는 강경했다. 그러나 친박계 의원들은 이와 대조적으로 홍 원내대표를 적극 엄호하고 나섰다. 이와 관련 정치권 일각에서는 총선 이후 ‘주류 내 비주류’로 밀려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이재오 정두언계 의원들이 이번 추경안 사태를 맞아 홍준표 체제를 집중 공격했다. 이를 놓고 정치권에서는 이상득 의원에 대한 간접 공격, 즉 친이 그룹간의 내부 다툼이라고 보고 있다.
친이재오계 진수희 의원은 “홍 원내대표 외에 대안이 없다는 것은 패배주의적 발상이고, 원내대표가 잘못을 했으면 다시 선출하는 게 상처를 치유하는 일일 뿐더러 집권당으로서 국민을 안심시키는 일”이라고 거침없이 성토했다.
연이어 발언에 나선 김영우·정태근·권택기·김용태 의원 등도 홍준표 사퇴론을 주장했다.
친이계 3개 세력으로 분화
친박·이상득계 전략적 연대
홍 원내대표 사퇴론을 주장하는 친이재오계 의원 10여 명은 9월16일 저녁 모임을 갖고 “당내 새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홍 원내대표 퇴진에 의견을 모았다.
반대로 친박계는 홍 원내대표 엄호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인기·손범규·박종희·이정현 등 친박계 의원들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심기일전하자며 홍 원내대표를 엄호했다.
친박계인 이정현 의원은 “한나라당을 생각해 반대했다”며 “홍 원내대표 외에 대안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이 의원은 의총장에서 유임론을 주장했다. 이 의원은 “사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보다 홍 원대대표가 정권 창출에 더 기여했다”고 말했다. 사퇴론자들이 정권 창출을 이야기하면서 이 대통령의 개혁 입법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인 셈이다.
비주류인 친박계 의원들은 이번 의총에서 홍 원내대표를 적극 보호하고 나섬으로써 이상득 의원 쪽 손을 들어줬다. 이를 두고 일부에선 친박계와 이상득계의 전략적 연대로 풀이하고 있다.
당 안팎에서는 이번 사퇴론의 배후로 이재오계를 주목했다. 이재오계인 권택기 의원은 “이재오계가 뜻을 모은 것은 아니다”면서 “이 문제로 따로 만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권 의원은 “홍 원내대표 측이 이재오계가 홍 원내대표를 몰아내려 한다며 이 상황의 본말을 전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친박계나 이상득계 쪽에서는 이재오계에 여전히 의심의 눈길을 주었다. 한 친박계 의원은 “사퇴를 주장하는 의원들을 보면 뭔가 일사불란함이 느껴진다”면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반이상득(SD)계’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이상득 의원 불출마 촉구의 2탄이라는 것이다. 당시 불출마를 촉구한 55명의 공천자 명단에는 사퇴론을 주장하는 의원들의 대부분이 포함돼 있다. 이때 불출마 촉구에 나선 한 의원 측은 “어디에서인지 모르지만 사퇴에 동조하자는 동료 의원의 전화가 왔었다”고 말했다.
이번 사퇴론은 홍 원내대표를 둘러싸고 이상득계와 친박계가 단일 대오를 형성하고 반대편에 이재오·정두언계가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당 안팎에서는 이재오 전 의원의 복귀시기를 주목하고 있다. 홍 원내대표의 사퇴 주장이 사전에 이 전 의원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려는 것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홍 원내대표의 사퇴 문제가 사실상 끝난 것이 아니냐는 시각에 대해 정두언계에 속하는 조해진 의원은 “말 그대로 유보가 됐을 뿐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여권에서는 이번 홍 원내대표의 진퇴를 둘러싼 여권의 갈등이 봉합이 아니라 계파 간 힘겨루기의 전초전이라고 보고 있다. 권택기 의원은 “정권 출범 후 지금까지 참아왔다”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는 지금부터 한나라당내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될 것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한나라당내 친이계 그룹은 이상득계·이재오계·정두언계 그리고 비주류에 속하는 친박계 등의 계파 간 힘겨루기가 이뤄질 전망이다.
한나라당 1백70여명의 의원 가운데 1백10명에 달하는 친이계 그룹 중 최근 가장 눈에 띄는 그룹은 이재오계다. 또 초선들을 가장 많이 장악하고 있고, 당내 주요 당직을 접수하며 몸집을 키우고 있다. 더욱이 친이 그룹의 좌장 역할을 해온 이 전 의원이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도 측근을 통해 분명한 메시지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 의원과 가까운 일부 의원들은 지난 7월 15일 ‘함께 내일로’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심재철·공성진·진수희 의원 등 17대 국회에서 이 전 의원과 함께 ‘국가발전연구회’에서 활동한 멤버들이 주축이 됐다. 이 모임에는 권택기·현경병·이춘식·정미경 초선 의원 등 40명이 넘는 친이재오계 의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친이계 중 이재오계가 활발
계파 확장에 나선 친박계
친이재오계 의원들은 총선 직후 미국으로 떠난 이 전 의원이 언제쯤 귀국할지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 전 의원이 귀국할 경우 모임의 결속력과 규모가 더 커지면서 명실상부한 당의 구심체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다. 일각에선 “친이 계파 내부에서 이 전 의원의 귀국과 정치적 움직임을 감안한 사전 정치작업이 이미 시작됐다”는 말도 나온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으로 막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상득계는 ‘정두언 의원 파동’ 이후 물밑 행보를 거듭하고 있지만 영향력은 오히려 커졌다는 관측이다. 당내에서는 상대적으로 소수지만 영향력은 가장 크다는 것이 정설이다.
박영준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이 물러났지만 청와대 주요 비서관이 이 의원의 측근들로 채워져 있고 당내에서는 ‘상왕(上王) 정치’ ‘형님 정치’의 상징성으로 대적할 맞수가 없다는 평가다. 아울러 이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을 중심으로 박희태 대표 등 원로 그룹을 장악하고 있는 것도 당내 입지를 강화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현재 이상득 의원 주변에는 이병석 의원 등 주로 경북 출신 의원들이 포진해 있고, 친이상득계로 분류되고 있는 초선은 고승덕·이철우 의원 등이다.
정두언계는 친이재오계와 함께 ‘반 이상득 라인’을 형성하고 있지만 별도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정두언 의원 등 지난 대선 기간 안국포럼에 참여했던 멤버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모든 현안에서 한 발 비켜나 있으며 목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있다. 이 의원을 겨냥한 여러 차례의 공세를 주도했으나 이에 실패한 후 당내 입지가 좁아지면서 ‘자숙의 기간’을 갖고 있다. 이런 와중에 백성운?강승규?조해진?이춘식 의원 등 친이 직계 20여명이 ‘아레테(그리스어 ‘탁월함’이라는 의미)’라는 모임을 결성하고 ‘이명박식 개혁’을 국회에서 뒷받침하겠다며 본격적인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친이계와 치열하게 각을 세워온 박근혜계는 친박 복당 조치 이후 차기를 관망하며 서서히 계파확장에 나서고 있다. 대략 60여명 내외의 세력을 형성한다. 그 어떤 계파보다도 결속력이 높다는 게 당 안팎의 평가다. 최근 유정복 의원이 만든 정책연구모임인 ‘선진사회연구포럼(선사연)’은 친박 의원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다. 공부 모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친박계를 결집하는 친목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최근 복당한 친박계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여의도 포럼’이 있다. 김무성 의원이 주축이 된 이 모임에는 박대해·김세연·정해걸·홍장표 등 친박 초선의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친박계 초선의원들은 박근혜 경선 캠프 출신인사들의 모임인 ‘엔빅스’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여기에는 김선동·이정현·현기환·구상찬 의원 등의 초선의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친박계는 무소속 친박 인사들의 복당으로 당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고 초선들에 대한 흡인력도 강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친박계 초선 의원인 김선동 의원이 “당내에 박 전 대표를 따르고 싶어 하는 의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김 의원은 “이번 18대에서 정치권에 진입한 분들이 많은데 나 같은 경우에도 박 전대표의 비서실 부실장을 한 경력 때문에 밥이나 한 번 먹도록 주선을 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는다”며 박 전대표의 당내 위상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는 지난달 4일 나경원 의원이 “요즘 당내에서 박근혜 의원 쪽으로 옮기는 분들이 많다는 얘기가 들린다”고 발언한 바와 같이, 최근 당내 박근혜 쏠림 현상을 단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더욱이 최근 한나라당 내 권력지형에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친이계가 구심점 없이 원심력으로 움직이고 있는 반면 친박계는 특유의 응집력을 바탕으로 저변을 넓히고 있다는 분석이다. 무엇보다 친이계 내에서 ‘계파 색’을 지우려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친박계 의원들과 접촉을 늘려나가려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친이’에서 ‘친박’으로
권력지형 변화 움직임
특히 변화의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지역은 영남권이다. 박 전 대표가 영남권 장악력이 워낙 큰 데다 이 지역에서 지난 18대 총선 때 ‘박풍’(박근혜 바람)의 위력이 집약적으로 나타났던 영향이 크다. 그만큼 영남권 친이계 내지 중도성향 의원들의 친박계로의 ‘쏠림 현상’이 뚜렷하다.
박 전 대표는 최근 대구 경북 의원 모임에 적극 참여하는 등 ‘지역 챙기기’에 나서고 있다. 지난달 25일 지역구인 대구에서 사회복지 담당 공무원들과 간담회를 나눴다. 이미 오래전부터 박 전 대표의 ‘안방’격이었던 대구 경북도 ‘친박 일색’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평가다.
물론 앞서 23일에는 당내 여성 초선의원들과 만나는 등 당내 인사들과 스킨십을 강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대부분 상대가 먼저 만나기를 청하고 박 전 대표는 그에 응하는 형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최근 여의도 정가에는 “대구 경북뿐 아니라 부산 경남도 박근혜에게 넘어간 것 같다”라는 말이 나돈다. 지난달 12일 박 전 대표가 부산을 방문했을 때 12명의 국회의원이 행사에 참석했던 일이 오르내리고 있다. 부산 경남에서는 박근혜계의 좌장으로 불리는 김무성 의원이 중심이다. 김 의원과 쌍벽을 이루었던 권철현 전 의원이 국회에 진출하지 못하면서 부산의 정치 판도는 김 의원이 좌우하는 상황이 되었다. ‘박근혜 주가’가 오르면서 덩달아 김 의원을 만나려는 이들도 늘었다고 한다.
정치권 한 인사는 “대선 때 선진국민연대에 줄 섰던 인사들이 지금은 박 전 대표 쪽에 서려고 한다. 최근 만난 국회의원은 박 전 대표에게 어떻게 하면 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 고민하더라”라고 전했다. 청와대 한 관계자도 “흐름이 그런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표의 한 측근은 “국회의원들로부터 만나자는 요청이 오면 박 전 대표는 일정이 허락하는 한 거절하지 않고 만나고 있다”면서 “지역을 챙기는 것에 대해서는 대구 경북 지역이 특히 어려워 경제를 살리는 쪽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최근 정가에는 박 전 대표측이 이른바 ‘친박 인사’들을 점검했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정치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친박계’를 표방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박 전 대표와 뜻을 같이하는 것인지 파악했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얘기가 나도는 것 자체가 박 전 대표 측이 무언가 큰 틀을 새롭게 짜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관측을 뒷받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