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위원장, DJ를 ‘노인네’라 불렀다”

2009.12.29 09:20:00 호수 0호

한광옥 전 청와대 비서실장 자서전 미리보기



한광옥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자서전을 탈고했다. 한 전 실장은 <한광옥의 선택-포용과 결단의 리더십>에서 자신의 삶을 반추했다. 가치관을 형성하게 된 어린 시절 아련한 기억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고 그를 떠나보내며 눈물 지은 이야기까지 그의 한평생이 담겨 있다. 12월 중순 집필을 마무리하고 출판을 준비하고 있는 한 전 실장의 자서전을 한 발 앞서 살폈다.

“인생은 고해라는 말이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은 고통 그 자체이니, 목에 숨이 붙어 있는 한 고통은 끝이 없다는 뜻이다. 돌아보니 과연 희로애락을 한꺼번에 겪는 등 나 또한 고통과 굴곡 많은 삶을 살았다.”



한광옥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한광옥의 선택-포용과 결단의 리더십>은 이 같은 머리글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굴곡 많은 삶은 여러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을 남겼다.

한 전 실장은 1999년 11월22일부터 2001년 9월까지 1년 10개월 동안 국민의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그는 비서실장에 임명돼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보람있는 일로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6·15공동선언’에 합의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수행한 일을 꼽는다.

조율없이 나선 남북정상회담

한 전 실장은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을 수행하며 보니 김정일 위원장은 예상보다 표정이 밝고 성격도 소탈했다”면서도 “매순간 긴장했다”고 회상했다. 국가 간 정상회담은 사전에 실무진들이 의제를 설정하고 합의의 틀을 만드는 조율 과정이 있게 마련이지만 남북정상회담은 사전에 의제 설정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쪽에서 의제 설정을 사전에 하자고 할 때마다 북측은 “그냥 오셔서 얘기하면 된다”라고만 답했다. 결국 김 전 대통령은 사전에 조율된 아무 시나리오 없이 평양에 갔다. 심지어 정상회담 장소와 시간도 사전에 조율되지 않아서 김 국방위원장이 마중을 나오는지 여부도 착륙 2~3분 전에야 연락을 받았다.


공항에서 공식적인 영접행사를 갖고 차량으로 이동할 때는 김 전 대통령 옆자리에 김 위원장이 떡하니 탔다. 그렇게 나올 줄 사전에 몰랐기 때문에 다들 놀라야 했다.

2박 3일 동안 평양에 머물면서 정상회담 일정과 장소를 따로 조율하지도 않았다. 김 위원장이 “노인네가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내일 여기로 오죠”하면 즉석에서 정상회담 장소가 결정되는 식이었다.

남북정상회담의 이면에 ‘문제’가 없지 않았다. 북측이 김일성 전 주석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에 김 전 대통령이 참배해야 한다는 요구를 한 것. 그 문제는 김 전 대통령이 평양에 갈 때까지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이에 한 전 실장은 “이건 안 된다. 한 국가의 대통령 입장에서 어떻게 참배를 하느냐. 그것이 걸림돌이 돼서 남북정상회담이 깨지면 안 되니까 대통령 대신 비서실장인 내가 금수산에 가면 되지 않겠냐. 만약에 내가 금수산에 참배한 일이 정치적인 문제나 실정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면 남한에 가서 내가 책임지겠다고 북한 측에 전해 달라”고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에게 말했다. 비서실장이라는 것을 이해 못하던 북측은 금수산 참배얘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한 전 실장은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곁을 지켰다. 때문에 ‘서울시장’을 두고 잠시 관계가 소원해졌었다는 비사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한 전 실장이 제1기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으로 노사정 대타협을 이뤘을 때다. 이에 대한 보고가 끝나자 김 전 대통령은 “한 동지는 이제 뭘 하고 싶소”라고 물었다. 그가 “대통령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자 “서울시장에 나가는 것이 좋겠소”라고 했다. 다른 이가 서울시장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이번에 한 동지가 서울시장 출마하시오”라고 권했다.

사실 당시 한 전 실장은 장광직을 맡으며 조용히 행정 경력을 쌓고 싶었다. 하지만 “알겠다”고 답하고 물러나왔다.

그러나 얼마 후 그를 청와대로 부른 김 전 대통령은 “한 부총재가 서울시장 출마하면 여론이 안 좋다는 보고를 받았소”라고 말했다.

한 전 실장은 “민주주의 투사가 대통령이 되어 있는 ‘국민의 정부’에서도 정보기관이 정치공작을 하나. 정보기관의 여론조사를 믿지 못하겠다. 여론조사를 다시 해달라. 과거에 야당을 탄압하며 정치 공작을 하던 기관이 아닌 다른 기관에서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여론조사를 더 하기로 그 자리에서 약속했다. 그런데 그가 청와대를 나서자마다 방송국들이 ‘한광옥이 시울시장 출마를 포기했다’라는 내용의 보도를 했다.


한 전 실장은 청와대에서 김 전 대통령과 그가 만나기도 전에 정보기관이 미리 보도자료를 각 방송사에 전달했다고 여겼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청와대를 나서는 그 시각에 그 같은 내용의 방송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얼마 후 김 전 대통령이 그를 다시 찾았지만 청와대에 가면 서울시장을 포기하라고 설득할 것 같아 가지 않았다. 청와대의 연락을 받고 집을 나서기는 했으나 그 길로 아내와 서울을 떠났다. 가평으로 드라이브도 하고, 모처럼 아내와 나란히 꽃구경도 했다. 서울을 떠나 그렇게 며칠 머리를 식히고 집에 돌아온 뒤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서울시장 두고 마음고생

당시에 대해 한 전 실장은 “처음에 나에게 서울시장에 출마하라고 권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출마를 포기하라고 권하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하고 서운했다”고 속내를 밝혔다.

한 전 실장은 고민 끝에 끝까지 대통령 뜻을 거부할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 3일 만에 김 전 대통령을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김 전 대통령은 “마음고생이 심했다”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서울시장을 포기하는 대신 다른 제안을 여러 가지 했다.

한 전 실장은 김 전 대통령이 제안한 여러 제안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서울시장 출마를 포기한다”고 말했다. 더 무슨 말도 안 하고 청와대에서 나왔다.

이후 시작된 서울시장 선거에서 그는 종로에서 고건 후보를 위한 찬조연설을 하며 당 후보가 당선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아직 열리지 않은 ‘한자꾸’

한광옥 전 실장의 별명은 다양하다. 한 전 실장은 자서전에서 ‘두목’ ‘한통뼈’ ‘돈키호테’ ‘민주주의의 입’ ‘한자꾸’라 불렸던 일화를 소개했다.

‘두목’은 고등학교에서 학생 대대장을 할 때 친구들이 붙인 별명이다. 1982년 10월7일 대정부 질문에서 ‘김대중 선생을 석방하고, 광주 사태를 진상조사하라’고 발언한 후 두 개의 별명이 더 생겼다. ‘한통뼈’와 ‘돈키호테’다.


‘한통뼈’는 통뼈가 아니고서는 군부독재 정권에게 감히 그런 발언을 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정치부 기자가 붙인 것이다. 반면 여당 측 국회의원들은 그를 ‘돈키호테’라고 비웃었다.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대변인을 하다 투옥됐을 때는 재야 동지들로부터 ‘민주주의의 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97년에 DJP연합을 성사시킨 뒤 협상 과정에서 상대방과 나눈 어떤 대화도 누설하지 않아 정치부 기자들로부터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한자꾸’라는 별명이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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