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회복의 기미가 조금씩 보이긴 하지만 샐러리맨들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돈 들어갈 곳 많은 연말이 다가올수록 ‘이번 겨울이라도 나야지’란 마음가짐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이들도 많다.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경기회복 여부와 상관없이 직장인들의 숨통을 조이는 탓이다.
때문에 직장인들의 생존방식은 나날이 진화한다. 특히 이 방식은 남녀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애교로 무장해 상사들에게 눈도장을 찍는 여직원들이 있는가하면 눈에 보이는 아첨을 떨어 좋은 인상을 남기려는 남직원들도 있다.
고용불안 지속되면서 직장인들 생존방식 진화 거듭
라인관리 등 원만한 인간관계 위한 전략 남녀별 차이
직장생활 5년차인 이모(31·여)씨는 직장 내에서 소위 말하는 ‘여우’로 통한다. 똑 부러지게 일 잘하는 직원이란 평판과 원만한 인간관계 유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며 두루두루 인정받고 있다. 이씨가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에는 남모르는 노력이 숨어있다. 5년이란 직장생활 기간 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며 스스로 터득한 노하우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그녀를 만든 것이다.
“인간관계도 능력”
전략적인 인맥관리
이씨라고 해서 신입시절부터 인정받은 직원은 아니었다. 그녀 역시 상사들의 질책 속에서 눈물콧물 쏟으며 ‘때려치울까’란 생각을 수 백 번도 더 곱씹었다. 그럴 때마다 이를 악물고 일에 전념했다. 그러나 직장생활은 학창시절과는 달랐다. 노력한 만큼 그 결과가 나왔던 학교공부와는 달리 직장에서는 업무능력 외의 또 다른 능력이 필요했다.
이씨는 “열심히 일해 성과물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장 안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인맥관리나 라인 만들기 등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고 말했다. 이를 깨달은 이씨는 사무실에서의 태도를 조금씩 바꿨다고 한다. 특히 업무상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여성으로써 가진 매력을 십분 발휘했다고 한다. 그녀의 직장에는 특히 남자동료들이 많아 이 방법은 직장생활을 원활하게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이씨는 “업무 특성상 다른 부서의 직원들에게 협조를 부탁할 일이 많은데 그럴 때 애교있는 말투로 부탁하거나 외모나 패션에 관련된 칭찬을 섞어서 하면 협조가 보다 수월하게 이뤄졌다”고 전했다. 회의가 있거나 회식이 있는 날엔 옷차림과 화장 등 외모에도 여성스러움을 한층 더 부각시켰다고 한다. 이는 인맥을 넓히는 데도 도움을 줬다. 특히 친해지기 어려운 간부급 상사들에게 얼굴을 알리고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씨는 같은 직장에 있는 상사뿐만 아니라 외부사람들과의 인맥을 쌓는 데도 여성성을 활용했다. 직업상 회사 대표 등 고위관계자를 만날 일이 많은 그녀는 이들과 첫 만남을 가지는 날이면 보다 신경 써서 외모를 꾸몄다. 여성스러운 면이 부각되는 옷을 입거나 헤어스타일과 화장법에 변화를 주는 방식이다. 만나려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수집하고 숙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고 한다.
상대방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을수록 공통관심사를 끄집어내기 수월해 매끄러운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실제로 이는 효과가 있어 짧은 시간 안에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고. 그렇다고 해서 이씨가 모든 이들에게 같은 전략으로 다가가지는 않는다. 까다롭거나 매사에 진지한 상사에게는 여성스러움을 강조하기보다는 프로다운 면모를 보이려고 애쓴다고 한다.
어려운 상사일수록 일 잘하고 똑 부러지는 직원이란 인상을 심어주고 도움을 청하지 않는 일도 일부러 도와주면 다른 상사보다 더 빠르게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기도 하단다. 이씨는 “워낙 꼼꼼하고 철저해 따르는 후배 하나 없을 만큼 무서운 선배가 있었는데 몇 달간 공을 들인 후엔 누구보다 날 이해해주고 도움을 주는 상사가 됐다”고 말했다.
여자 상사에게 대하는 태도는 또 다르다. 성격 좋고 털털한 보이시한 매력을 보이면 여자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미묘한 신경전을 피할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원만한 인간관계 유지를 위한 이씨의 노력은 실제로 직장생활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한다. 먼저 같은 경력의 동료들에 비해 빠르게 진급했다. 직장동료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직원에 비해 월등히 차이가 나다보니 실력이 비슷한 경쟁자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렇다고 해서 질투심으로 인해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는 동료들은 없었다. 무엇보다 업무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씨는 “만약 일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이사람, 저 사람의 비위나 맞추고 여우 짓을 했다면 욕을 먹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업무에 충실한 것이 선행됐기 때문에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고 자신했다.
직장생활 3년차인 유모(28·여)씨도 여성적인 면을 이용해 직장생활을 해 나가는 케이스다. 싹싹하고 잘 웃는 여직원으로 특히 남자 상사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유씨. 문제는 그에 따르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거나 신체접촉을 하는 등 성희롱을 시도하는 직원들이 있다는 것. 회식이라도 하는 날엔 ‘좋아한다’는 고백을 장난삼아 하는 동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유씨는 “늘 웃고 친절하게 대해주니까 쉽게 보이는 경향도 없지 않은 것 같다”고 털어놨다. 최근에는 황당한 경험도 했다고 한다. 어느 주말 저녁, 한 남자선배가 유씨가 사는 동네에 찾아와 “사귀자”는 고백을 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 선배가 아이까지 있는 유부남이라는 것. 기가 막히고 화가 치밀어 단칼에 거절했다는 유씨.
그런데 선배의 반응이 더욱 가관이었단다. 오히려 화를 내면서 “네가 먼저 날 유혹했으면서 이제 와서 왜 딴 소리냐”라고 퍼부었던 것. 유씨는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욕심이 지나쳐 선배와의 관계가 되돌릴 수 없이 악화됐다”며 “오해를 부를 만한 친절은 베풀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토로했다. 최모(29·여)씨 역시 여성성을 이용해 원만한 직장생활을 하려다 남자동료들의 오해와 여자동료들의 미움만 샀다고 하소연했다.
애교 넘치는 성격으로 업무상 어려운 부분을 해결하곤 했던 최씨. 문제는 몇몇 남자동료들이 술자리에서 최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벌어졌다. 때로 최씨는 퇴근 후 남자동료와 단둘이 술자리를 가졌는데 공교롭게도 이날 술자리에 모인 멤버들이 최씨와 술을 마셨던 이들이었던 것. 결국 최씨는 ‘헤픈 여자’로 낙인 찍혔고 악의적인 소문의 주인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심지어 ‘몸으로 일 한다’는 굴욕적인 소문도 들었다고 한다.
“나 좋아하잖아”
쓸데없는 오해 불러
최씨는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술을 사기도 하고 밥을 같이 먹기도 한 것뿐인데 연애감정을 가져서 한 행동이라고 여긴 것이 어처구니 없었다”며 “그 후로는 남자동료와 절대 사적인 자리에서 일대일로 만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이처럼 일부 직장여성들은 여성으로서 가진 매력을 직장생활에서 활용해 이득을 보기도 하고 고충을 겪기도 한다.
이는 설문조사로도 나타난다.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20~30대 미혼 여성 직장인 37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9.9%(224명)가 직장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여성성’을 활용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여성적인 면을 의도적으로 드러낸 적이 있다는 응답자 중 29.1%는 외부 인사와 회의할 때 원만한 의사소통을 위해 여성성을 강조했다고 답했다.
이밖에도 ‘컴퓨터·사무기기를 다룰 때’(26.0%), ‘사내 인간관계를 넓혀야 할 때’(15.3%)가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은 직장생활에 도움을 주는 여성성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애교’(44.3%)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섹스 어필’(23.3%)과 ‘연약한 척하기’(15.9%)가 뒤를 이었다.
이처럼 여자 직장인들이 여성성을 활용한 생존방식을 택했다면 남자 직장인들이 택한 생존전략은 ‘아부’다. 취업포털 커리어가 직장인 126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58.8%가 직장에서 아부를 해 본 경험이 있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응답자 중 20.2%는 ‘불황 전보다 아부의 빈도가 늘었다’고 답했다.
여자직장인 여성스러움 활용 ‘여우 짓’으로 승부걸기도
남자직장인 불황 이후 노골적으로 아부하며 눈에 들기도
아부를 하는 이유(복수응답)로는 ‘상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가 71.9%로 가장 많았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48.2%) ‘상사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27.0%) ‘감원 등 구조조정을 피하기 위해서’(15.3%) ‘승진을 하거나 연봉을 올리기 위해’(13.6%) 등이 뒤를 이었다. 직장인 김모(33)씨도 상사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할 땐 마음에 없는 칭찬 등을 하며 아부를 한다고 털어놨다.
특히 몇 달 전 인턴들이 사무실에 들어오면서 아부의 강도는 더욱 세졌다고 한다. 상사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심할 수밖에 없는 인턴들이 정 직원들을 위협할 정도로 충성을 다하면서 아부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단다. 처음엔 민망하고 낯간지러워 할 수 없었던 아부성 멘트도 이젠 곧잘 하게 됐다고.
김씨는 “회의시간에 무조건 상사의 말에 맞장구를 치거나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등의 과도한 행동을 하는 일은 습관이 됐다”며 “눈에 훤히 보이는 아첨을 해도 나쁜 결과로 돌아온 적은 없었다”라고 전했다.
직장인 서모(30)씨 역시 날이 갈수록 ‘아부의 달인’이 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고 말했다. 남자 상사보다 여자 상사가 더 많은 그는 주로 외모에 대한 칭찬을 하거나 작은 변화에도 크게 반응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서씨는 “바뀐 헤어스타일이나 옷차림, 새로 산 소품 등에 대해 놓치지 않고 칭찬하면 겉으론 덤덤한 반응을 보여도 자신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는 후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눈에 보이는 아부성 멘트
불황 이후 더욱 노골적
굳이 보고할 필요가 없는 일도 일일이 브리핑해 한 번이라도 더 눈도장을 찍는 방법 역시 서씨가 터득한 비법이다. 다른 직원보다 성실하다는 인상과 함께 친밀감 형성에도 도움을 준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상사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남발하는 것이 실제로 직장생활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장모(40)씨는 “솔직히 부하직원들이 아부경쟁을 벌이는 모습을 볼 때면 귀엽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지만 그때뿐”이라며 “능력도 없고 성실하지도 않으면서 아첨으로 상사들 눈에 들길 바라는 직원을 누가 예뻐하겠느냐”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