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재보선 후폭풍에 정치권이 요동치고 있다. 이번 재보선에 걸려있던 5석의 의석 중 3석은 민주당이, 2석은 한나라당이 차지했다. 사실상 한나라당의 참패다. 한나라당이 의석을 차지한 곳 중 한곳은 한나라당의 강세지역이고 나머지 한곳에는 집권여당 대표를 맡았던 박희태 전 대표가 직접 출전했기 때문이다. 여야 지도부가 총출동해 치룬 ‘대리전’에서 여당이 야당의 기세를 막아내지 못한 것. 민주당은 여세를 몰아 세종시, 4대강 문제등 쟁점사안에서 여권을 압박해 나간다는 전략이다. 당 내부도 이번 재보선을 통해 안정을 이뤘다는 평이다. 반면 여당은 야당의 공세 뿐 아니라 간신히 정리했던 속앓이까지 다시 시작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또한 이번 재보선은 여야 대권주자들에게도 적잖은 온도차를 보이고 있다.
10월 재보선에 얽히고설킨 여야 거물들 정치 이해득실
수도권에 충청 얻은 야당 웃고, 요지 잃은 여당 울었다
지난달 28일 수원 장안과 안산 상록을, 강원 강릉과 경남 양산, 충북 증평·진천·괴산·음성 등 전국 5곳에서 여야의 희비가 엇갈렸다.
민주당은 수원 장안, 안산 상록을, 충북 증평·진천·괴산·음성에서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한나라당도 강원 강릉, 경남 양산에서 승리하고 “국민들이 한나라당에 격려와 채찍을 동시에 주셨다”고 “선전했다”고 평했다.
하지만 정치권의 평가는 냉정하다. 비록 수치상으로는 3:2지만 여당이 이번 재보선에서 최대 격전지로 꼽혔던 수도권 2곳을 야당에 내줌으로써 수치로 보이는 것보다 더 못한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정부여당이 주장하는 ‘친서민 중도실용’이 야당의 ‘MB정부 실정 규탄’ 주장을 넘지 못할 정도로 서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10월 재보선 승패
누군 웃고 누군 울고
여야 지도부의 운명도 엇갈리게 됐다. 민주당은 이번 재보선 결과를 기반으로 당 체제를 공고히 하게 됐다. 반면 한나라당은 4월 재보선에 이어 10월 재보선에서까지 여권이 패배하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당 쇄신과 조기전당대회 주장이 급부상하고 있다.
정세균 대표는 쾌청한 가을 하늘을 만끽하고 있다. 한달여간 재보선에 흘렸던 땀방울을 알알이 여문 금배지로 얻었기 때문이다.
정 대표에게 이번 승리는 값지다. 지난 4월 재보선에서 인천 부평을과 시흥 시장 선거에서 승리해 체면을 차리기는 했지만 정동영 의원과의 불화로 호남 참패라는 쓴 맛을 봤고 당 대표를 맡은 후 추진해오고 있는 ‘뉴민주당 플랜’은 표류해 왔다.
여기에 본인 스스로도 미디어법 강행처리로 의원직 사퇴서를 내고 원외로 나서면서 운신의 폭을 줄였다는 비판을 받던 차다.
이번 재보선 승리로 정 대표 체제는 공고해졌고 내년 지방선거까지 순항이 가능하게 됐다. 리더십에 대한 당 안팎의 문제제기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민주개혁진영의 통합의 주도권과 속도 조절이 그의 손에 놓였다.
당 개혁과 함께 민주진영의 통합을 추진하고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뉴민주당플랜’으로 당을 정비할 수 있다. 바닥을 치고 있는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지방선거에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번 것이다. 정 대표 스스로도 대권을 향해 나아갈 길을 조금씩 넓히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승리가 민주당의 자생력을 키워 이룬 것이라기보다는 ‘반MB 정서’에 기대고 있다는 점은 우려로 남는다.
천정배 의원은 “5년째 한나라당 절반 이하인 지지율보다 더 심각한 위기는 위기상황이 장기간 일상화·만성화하다 보니 민주당 전체가 위기 불감증에 걸려 있다는 점”이라며 “5년 넘게 앓아온 중병이 그 때 그 때 진통제만 먹는다고 나을 리 없다”고 지적했다.
당 내 관계자들도 “이번 재보선 결과가 민주당에게 진통제가 된다면 승리한만 못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며 “진정한 ‘대안야당’이 되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손학규 전 대표는 이번 재보선의 진정한 승자로 꼽힌다. 손 전 대표가 뛴 수원 장안은 이번 재보선에서 가장 어려웠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안산 상록을과 충북 증평·진천·괴산·음성은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이 많은 ‘강세 지역’으로 분류된다. 이곳에 나섰던 후보들도 나름의 인지도와 득표력을 갖춘 이들이었다.
재보선 진정한 승자
장막 뒤에서 웃는다
하지만 수원 장안은 후보 인지도가 한나라당에 비해 열세인 채로 시작해야 했다. 믿는 것은 손 전 대표가 경기도지사를 하며 다져놓은 표밭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부권에서 한 석이라도 차지하려는 한나라당도 올인하면서 수원 장안은 재보선 최대 격전지로 떠올랐다.
한나라당 후보의 지지율이 더 높은 상태에서 시작했으나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며 손 전 대표의 주가도 치솟고 있다. 패배하면 당의 전략공천을 거절, 10월 재보선 전략에 차질을 빚게 했다는 비판을 지고 야인으로 돌아갔어야 했지만 어렵고도 값진 승리를 일궈내면서 의리를 아는 승장이라는 평이 그를 따르고 있다.
또한 “지명도와 지지도가 높은 ‘거물’로 당장의 전투를 이기고자 하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전쟁을 이기는 길이 아니다. 이번 장안 선거에서 손학규가 이기면 ‘거물’이 당선되는 것이지만, 이찬열이 이기면 민주당이 승리하는 것”이라는 말에도 무게가 실리게 됐다.
야권 한 관계자는 “지난 4월 재보선에서 당과 마찰을 빚으며 직접 출마에 나섰던 정동영 의원과 비교되는 모습”이라며 “자신의 정치 복귀보다 민주당을 위했다는 점에서 당 안과 밖에서 모두 성과를 거뒀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손 전 대표의 정치 복귀 시기도 빨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춘천으로 돌아가겠다”고 공언했던 그인지라 당장 정치 일선에 나서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번에는 칩거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만큼 그의 존재감은 쉽사리 흐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평이다.
한 정치분석가는 “야권에 뚜렷한 차기 대권주자가 서지 않은 상태”라며 “정 대표가 당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로는 손 전 대표가 앞선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 이 같은 모습은 더 뚜렷해질 것”이라고 관측했다.
순풍에 돛단 정세균, 손학규 ‘선거의 남자’로 재탄생
정몽준, 땅 굳기도 전에 내린 소낙비에 낭패만 잔뜩
반면 정동영 의원은 ‘복당’에서 더 멀어졌다. 대신 민주개혁진영의 통합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의지를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는 만큼 지방선거전까지 분투가 기대된다.
한나라당엔 먹구름이 잔뜩 꼈다. 강원 강릉과 경남 양산에서 금배지를 따기는 했지만 강원 강릉엔 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못한 상황이었고 경남 양산엔 박희태 전 대표가 후보로 뛴 데다 당 중진 의원들이 대거 지원유세에 나섰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남 양산에서 나타난 표차는 4%에 불과하다.
이번 재보선으로 첫 시험대에 선 정몽준 대표는 “아직 당에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냉정한 평가도 (달게) 받겠다”며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당 내에서는 ‘쇄신론’과 ‘조기전당대회’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정 대표는 ‘승계직 대표’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고 이에 대해서는 이미 “승계를 받아서 하는 이런 체제가 너무 오래 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때문에 당 내에서 조기전당대회를 통해 지방선거 전에 당을 추슬러야 하지 않겠느냐는 목소리가 점차 커질 것으로 보인다. 정 대표도 “조기전당대회는 언제든 할 수 있다”고 밝혔던 만큼 조기전대의 성사 가능성은 높다. 당 쇄신에 대한 요구도 다시 시작되고 있다. 당 초선들의 모임인 ‘민본21’은 재보선 하루 뒤 긴급성명을 통해 “이대로 간다면 내년 지방선거에서도 우리는 다시 한번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국정 운영 변화와 당 쇄신을 촉구했다.
이들은 지난 4월 재보선 후 마련했던 당 쇄신안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당의 변화에 대해 조목조목 요구했다.
한나라당에 속해있지만 박근혜 전 대표의 표정은 밝다. 박 전 대표는 재보선에 거리를 두면서도 박희태 전 대표의 당선으로 당 내 우호 세력을 확장하게 됐다. 또한 세종시 문제로 당이 충청권에서 좋지 못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과는 달리 “세종시 원안 추진” 발언으로 우호적인 인식을 심어줬다.
그러나 세종시 발언은 양날의 칼이다. 박 전 대표 개인에 대한 호감은 끌어 올렸지만 당 내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요소도 가지고 있다. 세종시 문제가 재보선에 영향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박 전 대표가 야당에 힘을 실어준 모양새가 됐다는 것이다.
된서리 맞은 여당
“모진 겨울 어떻게 나나”
당장 장광근 사무총장은 “충북 증평·진천·괴산·음성은 원래 무소속 출마 없었으면 100% 이기는 곳이었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공성진 최고위원도 “세종시는 정운찬 총리가 문제를 제기했고 박 전 대표가 선거 와중에 말해서 충청 민심이 흔들렸던 것”이라며 박 전 대표의 발언이 재보선에 영향을 줬다는 점을 언급, ‘세종시 발언’논란이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10월 재보선은 내년 지방선거까지 여야의 전력을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는 점에서 후폭풍은 좀 더 오래도록 당을 뒤흔들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