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득·김양건 극비회동설’로 시작된 남북접촉설
북측 대남전문가 5일간 행적에 남북접촉 비밀 숨었다
남북 고위인사들의 비밀접촉설이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다. ‘이상득-김양건 극비회동설’을 시작으로 ‘싱가포르 접촉설’ 등 남한과 북한의 고위 관계자들이 만남을 가져왔다는 주장이 거듭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만남이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북측 인사와 만났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이들은 접촉 사실을 일체 부인하고 있지만 대북 소식통과 국방부 관계자 등을 중심으로 이러한 관측은 굳어져 가는 분위기다. 정치권은 남북접촉설의 진위 여부를 헤아리는데 집중하는 한편 이러한 내용이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 내막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남북정상회담은 물론 남북접촉 또한 상당히 낯설어진 것이 사실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비핵·개방·3000이라는 대북정책 추진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북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남북관계는 평행선을 달렸다.
특히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부터 개성공단 근로자 억류, 황강댐 방류에 이르기까지 악재가 계속되면서 경색국면을 면치 못했다. 각계에서 대북특사에 대한 주장이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공식적인 논의도, 파견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남북 고위 관계자들이 비밀리에 접촉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이러한 만남은 남북정상회담의 사전 정지작업을 위한 극비회동으로 관측되고 있다.
눈 마주친 남북
우연일까? 필연일까?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언급은 지난달 14일 미 국방부 관계자의 발언에서 시작됐다. 당시 월리스 그렉슨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이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하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브리핑했다.
청와대는 즉각 “미국과의 정보 공유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고 해명했다. 백악관도 일요일임에도 불구, ‘오해가 있었다’는 해명을 발표하면서 이는 외교적 해프닝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지난달 20일 MBC <뉴스데스크>가 이상득 의원과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과의 극비접촉설 보도했고 이틀 뒤인 22일 KBS <9시 뉴스>를 통해 김양건 부장과 국내 고위급 인사의 싱가포르 접촉설이 보도되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더 이상 해프닝으로 치부되지 않게 됐다.
‘이상득-김양건 극비접촉설’은 김 부장이 베이징을 비밀리에 방문, 이 의원과 만났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지난달 15일 중국을 방문했다가 20일 귀국하는 모습이 포착됐으나 5일간의 행적은 묘연하다. 대북 소식통들은 이 기간 동안 김 부장이 외유 중이었던 이 의원과 만났을 수 있다고 전했다.
이 의원은 “얼굴도,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만났다는 말이냐”며 김 부장과의 극비회동 가능성을 일축했다. 이어 지난달 17일까지 서울에, 18일부터 20일까지 인도네시아에 머물러 베이징에서의 회동이 힘들었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중국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회동장소가 베이징이 아닌 제3의 장소일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데다 5일간의 행적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가능성 여전히 남아 있다.
대북 전문가들까지 김 부장과 이 의원에 주목하는 것은 이들의 ‘급’ 때문이다.
김 부장은 북한의 대남관계와 대미관계를 책임지는 김정일 위원장의 최측근이다. 대남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통일전선부장이면서 남북간 민간 교류·경제 협력 등을 총괄하는 아태평화위원회의 위원장을 겸하고 있다. 게다가 남한의 정권교체 후 수많은 대남전문가들이 내쳐졌음에도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실세 중의 실세다.
남북 접촉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을 정도다. 김 부장은 지난 2007년 10월 2차 남북정상회담을 막후에서 이끌었다. 2007년 8월2일 평양 백화원 초대소에서 김만복 국정원장과 만나 극비리에 ‘8월 하순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 동의했던 이가 그다.
지난 8월에는 북한 사절단에 속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조문 차 방남했다. 당시 북한 사절단은 체류일정은 연장해가면서까지 청와대를 찾아 이 대통령과 30분간 면담한 바 있다.
다른 이도 아닌 김 부장이 움직였다는 것은 남북문제에 대한 논의 뿐 아니라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관측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다. 또한 김 부장의 이번 외유에 남북관계의 실무총책으로 꼽히는 원동연 아태위원회 실장이 동행, 남북관계와 관련된 일을 위한 것이라는 관측에 힘을 실었다.
이 의원도 김 부장 못지않다. 그간 정치권 안팎에서 대북특사로 거론된 이들은 여럿이었다. 하지만 “특사는 이 대통령의 생각을 가장 정확하게 대변할 수 있고, 향후 5년간 이 대통령과 일할 수 있는, 일할 사람이 가야 북측에서 신뢰할 것”이라는 김 전 대통령의 조언처럼 이 대통령의 의중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고 발언에 무게감이 있는 최측근 인사로는 이 의원이 첫손에 꼽혀왔다.
이 대통령의 친형인데다 국회부의장까지 지내며 쌓은 본인의 정치적 위치도 작지 않다. 이에 야권에서도 “(대북특사를) 제일 잘할 수 있는 분은 이 의원”이라고 꼽았을 정도다. 김 부장과 ‘급’을 맞추려 했으면 남측에서는 이 의원이 나서는 것이 적절했다는 것.
정치권 한 관계자는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 현 민주당 최고위원이 2006년 10월20일 ‘남한과 접촉하고 싶다는 북한의 진의를 확인해 보라’는 청와대의 재가를 받아 베이징에서 리호남 북한 참사를 만났으나 이 사실을 5개월 넘게 부인한 바 있다”며 “과거 비밀스럽게 추진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접촉을 비판했던 바 있기 때문에 설사 만났다 하더라고 순순히 수긍하지는 않을 것”으로 봤다.
일각에서는 이 의원이 아닌 ‘제3의 인물’이 김 부장과 만났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전 북과의 접촉에서 보였듯 한번 맺어진 ‘라인’은 쉽게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위상이 아닌 전문성과 지속성을 가진 이가 나섰을 수 있다는 것.
정가 일각에서 “비선라인이 움직였을 것이라고 관측하는데 이는 다 헛짚은 것”이라며 “적절한 공식라인이 움직였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연이어 터져 나온 ‘싱가포르 회동’ 보도는 남북 고위 당국자들이 싱가포르에서 비밀 접촉을 갖고 남북정상회담 개최 방안을 논의했다고 전한다. 이 보도에서도 북측 고위급 인물은 김 부장과 원동연 실장으로 알려졌으나 남측 인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다.
남측 인사로 이 의원 외 류우익 전 대통령실장, 김덕룡 민족화해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 이기택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김대식 민주평통 사무처장 등이 거론됐지만 이들은 관련 여부를 부인하고 있다.
‘급’ 맞는 핵심 실세
부인해도 모락모락
민주평통측 관계자는 “김 부장이 외유한 지난달 15일에서 20일 사이 이기택 부의장은 미국 시애틀과 캐나다 앵커리지 등을, 김대식 처장은 중남미 과테말라와 콜롬비아를 방문 중이었다”며 “일정과 동선으로 봐서 도저히 북한과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선을 그었다.
한 대북전문가는 “이 대통령의 인사스타일 상 정치인이나 원세훈 국정원장 등 핵심 인사가 아니더라도 대북정책을 오랫동안 다뤄온 전문가가 나섰을 수 있다”며 “북과의 접촉은 박정희 정권 때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전두환 정권 때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 노태우 정권 때 박철언 전 의원, 김대중 정권 때 박지원 장관 등 정권의 ‘핵심 실세’에게 주어졌지만 점차 ‘전문성’으로 옮겨가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설만 무성할 뿐 정확히 확인된 사실은 몇몇 조각에 불과함에도 남북접촉에 대한 관심은 뜨겁다. 남북정상회담이 가지는 의미 때문이다.
지금까지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것은 2000년과 2007년 두 차례 뿐이다. 그러나 이 전에도 밀사가 파견돼 정상회담을 추진해왔을 정도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정권의 관심은 컸다. 한반도의 긴장 강도에 따라 내·외부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적지 않은 특수한 상황에서 남북정상들이 만난다는 것은 남북의 화합 이상의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정치적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도 김 위원장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쳐왔다. 그러나 이번 남북접촉설에 청와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치권은 여러 가지 분석을 쏟아내고 있다. 그 중 많은 이들의 동조를 얻고 있는 가설은 남북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접촉을 시도해왔으며 관계 개선과 남북정상회담 등을 위한 대화를 이어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치권 인사 중 일부는 그 계기를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서 찾고 있다. 국제 제재를 벗어나고, 김 위원장의 후계자인 김정은 주도의 개혁·개방정책을 위해서라도 대일, 대미 분 아니라 대남관계의 회복을 원하는 북측과 경제 회복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남북경색을 벗어날 수 있는데다 대북문제와 관련한 외교전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한 남측의 이해관계자 ‘특사’ 조문단과 이 대통령의 만남에서 일치를 봤을 것이라는 것이다.
북한 소식에 정통한 한 인사는 “청와대가 ‘원칙 없는 만남, 만남을 위한 만남은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지만 만남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은데다 ‘투명한 공개 원칙도 필요한 상황이 오면 지킬 것’이라는 말도 여운을 남긴다”면서 “남북 비밀접촉이 언론에 노출되면서 논의가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겠지만 계속 남북접촉이 진행될 것이고 연내는 어렵더라도 내년 중, 하반기 정도 회담까지 이를 수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남북정상회담에 관한 논란은 남북 고위 관계자들이 만났느냐, 안 만났느냐, 만났다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느냐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소식이 너무 빠르게 터져 나오면서 의문을 낳고 있다.
남북간 접촉은 최대한 비밀리에 진행돼 왔다. 국민의 정부 시절 1차 남북정상회담은 철저한 보안 속에 전격 발표됐고 참여정부 시절 2차 남북정상회담도 개최 직전에야 언론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시작점부터 언론의 시선이 함께 움직이고 있는 모양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보안이 허술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북측이 의도적으로 김 부장의 베이징 방문을 노출, 시선 끌기에 나섰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출범 후 주장한 ‘비핵’에 대한 견해 차이를 좁히는 게 어렵다고 판단, 언론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의 분위기를 끌어가면서 남북간 회동에서 승기를 점하려 한다는 것이다.
너무 빨리 벗겨진 베일
꼬리 길었나, 위장술인가
남북관계 전문가들은 “계속되는 부인에 해프닝으로 끝나고 있지만 최근 남북의 상황은 뒷맛을 남기게 한다”며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듯 남북을 둔 일련의 상황들은 조만한 ‘일’이 일어날 징조와도 같다. 밀고 당기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이미 두차례의 정상회담이 있었다는 점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해도 좋지 않겠냐”고 말했다.